예수 하버드에 오다 - 1세기 랍비의 지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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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버드대학교 강의실에 예수가 들어왔을 때, 그는 십자가도, 후광도 달고 오지 않았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먼지를 털고 들어온 한 명의 랍비였다. 하비 콕스가20년간 진행한 이 강의는 예수를 신학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윤리의 현장으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예수는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되묻는다. 1980년대 하버드가 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배경은 아이러니하다.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사실과 논리를 배웠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사회로 나가 부정과 비리에 가담했다. 지식은 풍부했지만 판단력은 부재했고, 논리는 정교했지만 양심은 무뎌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하버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교육 시스템 전체가 '무엇을 아는가'에 집중한 나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방치해온 결과다. 콕스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예수라는 독특한 교사를 소환한다. 그런데 그가 소환한 예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익숙한 구원자가 아니다. 유대인 학생들은 그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전통을 잇는 예언자로 보았고, 불교도들은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로 인식했으며, 무슬림들은 꾸란에 등장하는 선지자로 받아들였다. 예수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윤리 교사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콕스는 강의에서 추상적 윤리 원칙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을 강의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가 했던 방식대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탕자의 귀환, 잔치에 늦게 온 손님 등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장치다. 현대 사회는 명확성과 효율성을 숭배한다. 매뉴얼이 있고, 가이드라인이 있으며, 정답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윤 리적 선택의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A와 B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때로는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옳거나 어느 정도 그른 상황에 직면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원칙을 암송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예수의 비유들이 지닌 힘은 바로 이것이다. 그 것들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안을 거부하고 슬픔에 빠져 돌아갔을까? 왜 형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 못했을까? 왜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일꾼에게도 같은 임금을 주었을까? 이 이야기 늘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며,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 콕스는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유대교의 미드라시 전통이나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처럼,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속 인물이 되어보라고 한다. 그때 비로소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의 윤리적 딜레마와 공명하기 시작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다루는 장면이다. 많은 학생들이 이 구절에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신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콕스의 해석은 신학적이기보다 실존적이다. 신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위기의 순간마다 개입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느낀 버림받음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경험이다. 우리 모두가 살면서 겪는 고독, 무력감, 절망의 순간을 예수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종종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외롭다. 정답이 보이지 않고,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으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이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존재의 명확한 지시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고뇌했던 이들의 선례와 연대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은 신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 취약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윤리적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는 정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질문 앞에서 떨었던 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자였다.

산상수훈에 대한 콕스의 해석 역시 생각해 볼만하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학생들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권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콕스는 온유함을 나약함과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온유함은 인내이고 신뢰이며,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더 도발적인 것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버전이다. 거기서 예수는 가난한 자를 축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유한 자를 저주한다. 이는 하버드 학생들, 즉 미래의 엘리트들에게 불편한 메시지였다. 그들은 성공을 꿈꾸고 있었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가치 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콕스는 이것을 금욕주의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가 만들어내는 권력 구조와 불평등이다. 부는 사람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고, 특권을 정당화하며, 타자에 대한 무감각을 낳는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런 구조에서 한 발 물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절실한 질문이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 더 많이 소유하는 것,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성공이라 배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가? 누구를 밟고 올라섰는가? 어떤 관계를 희생했는가? 예수는 이런 질문들을 회피하지 말 라고, 불편해도 직면하라고 말한다.

하비 콕스의 강의가 2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가 여전히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갈릴리에서 던졌던 질문들이 21세기 하버드 강의실에서도 여전히 큰 화두를 전달한다. 권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부와 성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책은 기독교 신학서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성찰을 위한 초대장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그가 던진 질문 앞에서는 동등하다. 우리는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하며, 그 선택의 결과를 짊어져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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