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보는 변호사 - 전직 검사가 법전 대신 만세력부터 펼친 이유
안종오 지음 / 노들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우리는 지금 전례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세계 안에 살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수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찰나의 순간에 답을 내놓는다. 판례를 검색하고, 계약서를 분석하며, 논증의 허점까지 짚어낸다. 법조의 영역에서도 AI는 이미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역설이 하나 있다. AI가 정밀해질수록, 인간은 오히려 더 오래된 것을 찾는다. 명리학 상담 시장은 커지고 있고, '사주'를 검색하는 이들의 연령대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 현상을 단 순히 불안한 현대인의 미신적 퇴행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안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검사로 시작하여 변호사로 수천 건의 사건을 다뤄온 안종오 작가는 그 갈증을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해소한다. 법정의 언어와 명리의 언어를 나란히 세우고, 그 사이에서 인간을 읽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개인적 취향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는, 그의 여정이 곧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직면한 어떤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AI는 "무엇이 사실인가"에 탁월하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패턴을 인식하며, 확률적으로 가장 정확한 답을 도출해 낸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가장 무겁고 결정적인 질문들은 대개 사실의 영역이 아닌 곳에 있다. "나는 지금 나아가야 하는가, 멈춰야 하는가?""이 선택이 나에게 맞는 선택인가?" "왜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이 물음들은 데이터로 풀리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판례를 학습한 시도, 수백만 건의 상담 기록을 분석한 알고리즘도, "당신의 지금 이 순간"에 대 해서는 말을 아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의 문제이고, 맥락은 언제나 개별적인 인간의 서사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안종오 변호사가 명리학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이 맥락을 읽는 언어였다. 그는 수많은 의뢰인을 만나며 깨달았다. 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져도 고통을 최소화하는 경우가 있고, 법리가 불리한 쪽이 삶 전체로는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논리와 증거라는 두 개의 축만으로는 인간의 선택과 결과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 그것이 그를 사주라는 고전적 지혜 앞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이성의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의 확장이다. 냉철한 논리로 훈련된 법조인이 명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주라는 도구에 담긴 인식론적 가능성을 방증한다. 그는 사주를 미래를 결정하는 신탁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가진 타고난 기질의 구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 타나는 에너지의 패턴을 읽어내는 분석의 틀로 바라본다.


생성형 AI의 시대에 가장 뜨겁게 부상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자기이해'다. 코칭, 심리검사, MBTI, 에니어그램, 강점 진단... 현대인은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를 동원한다. 그런데 이 모든 도구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것이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그 물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주 명리가 현대적으로 재조명받는 맥락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출생 시점의 천문적 배치를 통해 한 사람의 기질과 삶의 리듬을 해석하려는 수천 년의 집단적 관찰 체계다. 물론 그 정확성이나 과학적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논쟁과는 별개로, 명리학이 제공하는 틀은 인간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구조적으로 살피고, 현재 처한 시절의 흐름을 객관화하는 데 유용한 언어 체계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사주를 일종의 에너지 예산안으로 본다. 고정된 감옥이 아니라, 내가 이번 생에 어떤 자원을 가지고 출발했는지를 알려주는 초기 설계도. 중요한 것은 그 설계도를 읽는 법을 알고, 주어진 자 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주권자로서의 선택을 하는 일이다. 컨설팅 회사가 기업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여 전략을 수립하듯, 사주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가장 정직하게 컨설팅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결정론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질이 이러하다"는 인식은 맹목적으로 상황에 휩쓸리는 대신, 자신의 고유한 결을 이해한 채로 선택의 자리에 서게 한다. 신강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대화의 주도권을 본능적으로 잡는다는 관찰, 신약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말의 끝을 흐린다는 통찰은 단순한 점술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관찰에서 비롯된 기질의 언어 이며, 자기 인식의 거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스스로의 삶을 회고하며 말했다.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섰으며, 마흔에 흔들리지 않았고, 쉰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그 마지막 도달 지점이 천명의 인식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지혜가 궁극적 으로 향하는 곳은 자신의 때와 하늘의 때와 세상의 때가 일치하는 지점을 알아보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AI 시대는 역설적으로 이 오래된 물음을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알고리즘은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 데이터 의 평균에서 도출된 확률이다. 그러나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언제나 평균을 벗어난 지점에서 일어난다. 파도가 일어나야 할 때 나아가지 못하거나, 멈춰서 힘을 길러야 할 때 무모하게 돌진하는 것, 이 진퇴의 실패가 개인의 삶을 얼마나 흔들어 놓는지는 수천 건의 법정 사건이 증명한다. 저자가 주목한 명리학의 핵심은 바로 이 시절의 감각이다. 나의 대운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알고, 그에 맞게 공세와 수세를 조율하는 지혜.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오래된 경구는 영원한 상승이 없다는 경고인 동시에, 지금의 내리막이 영원하지 않다는 위로이기도 하다. 이 흐름의 감각을 내면화한 사람은 호운에 교만하지 않고 흥운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주를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다. 특히 법률적 분쟁의 세계에서 이 시절 감각은 더욱 중요하다. 같은 사건도 어느 시기에 제기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는 안종오 변호사의 통찰, 2년간 팔리지 않던 부동산이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자 3일 만에 매매된 사례는 인간의 심리와 시장의 흐름, 그리고 개인이 가진 에너지의 파동이 서로 맞물리는 접점이 존재한다는 현실적인 관찰이다.


생성형 AI는 앞으로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고, 더 빠르게 추론하며, 더 그럴듯한 언어로 답할 것이다. 그러나 AI는 결코 당신의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AI는 선택을 앞두고 밤새 뒤척이는 불안을 함께 앓지 않는다. 나의 목소리가 떨리는 순간 그 결을 읽어내지 못하고, 말의 끝자리가 흐려지는 이유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지 못한다. 사주 보는 변호사의 진정한 가치는 법의 언어로 현실을 정리하면서도, 명리의 언어로 인간의 내면과 시절의 흐름을 읽어내는 복합적 시선에 있다. 그것은 AI가 대체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다. 오히려 Al 시대일수록 더욱 희소해지고 더욱 소중해지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인간은 데이터가 아니다. 인간은 상처이고 욕망이며, 후회이자 기대다. 그리고 그 모든 복잡성을 하나의 삶의 서사로 이어가는 존재다. 사주가 그 서사를 더 잘 이해하는 언어가 된다면, 그리고 법이 그 서사가 현실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울타리가 된다면, 두 언어가 만나는 자리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인간적인 나침반이 될 수 있다.

​

지금 나아가야 할 때인가, 멈춰야 할 때인가. 이 질문은 수천 년 전 공자도, 수백 년 전 사주를 연구한 명리학자도, 그리고 법정에서 인간의 갈림길을 목격해온 안종오 변호사도 끊임없이 마주한 물음이다. AI는 이 질문에 확률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파도를 뚫고 나아가는 결단, 혹은 항구에 닻을 내리는 용기는 결국 인간 스스로의 몫이다. 그 결단을 내리기 전에 자신의 기질을 알고, 시절의 흐름을 읽으며,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워나가는 과정. 그것이 AI 시대에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메시지다. 가장 좋은 나침반은 외부에 있지 않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자가 세상을 가장 잘 항해한다. 그리고 그 이해의 도구로서, 오래된 지혜와 현대적 이성이 손을 맞잡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AI가 줄 수 없는 것을 스스로에게 줄 수 있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하루 10분 걷듯이 달렸을 뿐인데
다나카 히로아키 지음, 나지윤 옮김 / 향기책방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나는 오랫동안 달리기를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 달려야 한다 '는 생각 자체를 회피해 왔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운동이라면 으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무릎이 욱신거리고, 다음 날 온몸이 굳어버리는 그 불쾌한 기억과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의 오래달리기는 고문에 가까웠고, 헬스 러닝머신 위에서 몇 분을 버티다 내려온 기억은 부끄러 움과 함께 남아 있다. 그래서 달리기는 언제나 '나와는 거리가 먼 것’ 이었다. 그런 내가 슬로조깅(Slow Jogging)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반신반의했다. 천천히 달리면 무슨 운동이 되겠어. 그것은 그저 걷는 것을 달리 기처럼 포장한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의심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슬로조깅의 핵심 개념은 단순하다. '니코니코 페이스', 즉 웃으면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것이다. 숨이 차지 않는 속도, 힘들지 않은 속도. 이것이 스로조깅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제창한 사람은 후쿠오카대학교 스포츠과학부의 다나카 히로아키 교수다. 그는 스스로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스로조깅의 효과를 증명해 왔다. 37세에 처음 풀 마라톤에 출전해 4시간 11분을 기록했던 그는, 9년 후 '니코니코 페이스'만으로 훈련해 3시간 30분으로 단축했다. 더 나아가 식이요절과 하루 5~7km의 슬로조깅을 병행해 3개월 만에 10kg을 감량하고, 마침내 50세에 2시간 38분이라는 놀라운 자기 최고 기록을 세웠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력이다. 그는 대학 시절 심장에 구멍이 있다는 오진을 받고 격렬한 운동을 포기해야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시절 그가 만난 것이 '가벼운 강도의 훈련'이라는 개념이었고, 그것이 평생의 연구 과제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포기에서 출발한 연구가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에게 달리는 기쁨을 선물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운동은 '힘들수록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땀을 흘리고, 근육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견뎌야만 비로소 몸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로조깅은 그 상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빠른 달리기나 격렬한 무산소 운동은 속근을 주로 사용한다. 속근은 순발력은 뛰어나지만 피로해지기 쉽고, 젖산을 생성해 근육을 산성으로 만들며 몸을 탈진 상태로 몰아간다. 반면, 스로조깅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은 지근이다. 지근은 천천히, 오래 수축할 수 있는 근육 섬유로, 젖산이 쌓이지 않아 피로감이 훨씬 적다. 그래서 슬로조깅을 시작한 사람들이 매일 달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몸이 지치지 않으니 달리는 것이 괴롭지 않고, 괴롭지 않으니 계속하게 된다. 실제 참가자들의 체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 3주간의 슬로조깅 체험 이후 체중이 3~4kg 감소했고, 공복혈당이 151mg/dl에서 109mg/이로 내려간 사례가 있었다. 유방암과 당뇨를 동시에 앓던 한 참가자는 당화혈색소가 7%에서 6.3%로 떨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수치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격이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슬로조싱 꾸준히 실천하면 3개월에 약 3kg 감량이 가능하고, 식이 조절을 병행하면 5~6kg 이상도 어렵지 않다. 특히 현대인의 만병 근원이라 불리는 내장지방 감소에 탁월하다는 점은, 40대 이후의 건강 관리에 특히 주목할 만한 효과다.


무릎이 아파서 달리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로조깅은 충격이 적고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관절에 무리가 훨씬 덜하다. 실제로 3km만 달려도 무릎을 부여잡던 한 참가자가, 스로조깅3개월 후에 는 한 달에 200km 이상을 달리게 되었다는 사례는 과학적 원리의 결과다. 처음부터 계속 달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걷뛰뛰 방식도 있다. 1분 스로조깅 후 30초 빠른 걷기를 반복하며 시작해, 점차 달리는 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이라면 노인도, 운동 초보자도 충분히 달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팔을 억지로 크게 흔들지 않는 것이다. 팔을 세게 흔들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빨라지고, 그러면 니코니코 페이스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면의 반발력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 팔은 그저 흔들리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 스로조깅은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존중하는 달리기다. 다나카 교수는 말했다. "인간은 달리도록 진화해 왔다." 수렵 시대의 인류는 먹이를 쫓아 긴 거리를 자연스럽게 달렸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삶의 방식이었다. 현대인은 달리기를 '힘든 것', ‘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어쩌면 그 인식 자체가 왜곡된 것일지도 모른다. 스로조깅은 달리기를 원래의 자리, 즉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행위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웃으면서, 대화하면서, 억지로가 아니라 즐겁게. 메타볼릭 증후군을 진단받고 지팡이에 의지하던 50대 여성이 60대에 호놀룰루 마라톤을 완주하고, 70대가 된 지금도 달리며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느리게 달리는 것이 삶의 속도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다.


슬로조깅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달리기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속 가능한 속도' 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었다. 빠르게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 한 번의 격렬한 노력보다, 매일의 작은 움직임이 몸과 삶을 바꾼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달리기를 넘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웃으면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슬로조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모든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었다 - 90세 과학자의 가슴 뛰는 자연 관찰기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진짜 숲으로, 진짜 강으로, 진짜 바람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차이나 반도체 라이징 - 중국 첨단 지능화의 허와 실, 그리고 한국의 대응 전략
권석준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2023년 화웨이가 출시한 메이트 60 프로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이 되었다. 자국 팹리스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자국 파운드리 SMIC가 생산한 7나노급 기린 9000s 칩을 탑재한 이 스마트폰은 미국의 강력한 기술 제재 속에서도 중국이 첨단 반도체 영역에 도달했음을 전 세계에 선언한 것이었다. 한편, 같은 해 딥시크(DeepSeek)는 저비용 고효율 AI 모델로 오픈AI와 구글이 주도하던 인공지능 생태계에 균열을 냈다. 화웨이 캠퍼스에서 수천 명의 박사급 연구원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중국 명문대 이공계 석박사생들이 앞다투어 반도체·AI 기업 취업을 꿈꾸는 지금의 모습은, 불과 10여 년 전 중국을 저급 칩의 위탁 생산 기지로 바라보던 시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양 이면에는 구조적 취약성이 공존한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은 10년 넘게 쏟아부은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 자금 위에 세워진 것이다. 회계의 불투명성, 중복 투자, 수익성 부재, 인민해방군과의 복잡한 연계, 그리고 미국의 기술 제재가 만들어 내는 단절의 위협이 그 취약성의 면면을 이룬다. 책은 중국 반도체 굴기의 실체를 투자 구조, 기술적 현실, 지정학적 맥락이라는 세 축에서 냉정하게 짚어보고, 그것이 한국에 던지는 함의를 모색한다.


중국 반도체 투자의 핵심 엔진은 국가 대기금, 일명 '빅 펀드(Big Fund)'다. 2014년 1기로 출발한 빅 펀드는 2024년 현재 3기에 접어들었으며, 3기 규모만 3,440억 위안(약 74조 원)에 이른다. 여기에 중국 제조 2025 계획 자금, 지방정부 펀드를 합산하면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 투입한 직간접적 지원 총액은 3,500억 달러(약 515조 원)에 육박한다는 추산이 나온다. 미국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ct)의 연간 투자액에 맞먹는 규모를 중국은 매년 집행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투자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첫째, 중복 투자 문제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 CXMT는 중앙 빅 펀드와 허페이 시 지방정부 펀드를 동시에 수혜하고 있으며, 공정 장비 업체 사이캐리어 역시 선전 시, 빅 펀드, 화웨이 클러스터 펀드에서 중복으로 자금을 받는다. 이런 구조에서는 지식재산권 분쟁, 부채 정리, 과잉 생산에 따른 수익성 저하 문제가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둘째, 기술 내실화의 지체다. CXMT는 글로벌 4위 DRAM 업체로 부상했지만, 양산 수율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보다 25~30%포인트 낮은 수준에 머문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도 3세대 HBM2 양산과 4세대 시험 생산 수준에 그치는 반면, 글로벌 상위 3사는 이미 6~7세대 HBM 양산을 준비 중이다. 장비 분야의 사이캐리어 역시 동세대 ASML 장비 대비 노광 성능이 40% 이하에 불과하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기술 격차는 여전히 크다. 셋째, 빅 펀드의 기수별 오버랩 문제다. 1기·2기·3기가 각각 10년씩 투자-회수-연장을 거치며 겹치는 구조는, 이전 기수의 부실이 다음 기수로 이월되는 '좀비 투자'의 온상이 될 수 있다. 2기 빅 펀드 책임자가 부패 혐의로 낙마한 사건은 수익성 악화의 책임을 특정 인물에게 전가하는 공산당식 문제 해결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구조적 불투명성이 지속되는 한, 빅 펀드의 장기 지속 가능성은 2044년 최종 만기까지 불안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중국 반도체·AI 굴기의 아이러니는 그 토대를 미국이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애플은 20년간 중국에서 사실상 IT 제조 생태계를 육성했다. 폭스콘에서 럭스쉐어로, 삼성·LG디스플레이 기술이 BOE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제조 노하우가 이전되었고, 애플 i클라우드 서버의 운영권이 중국 국유 기업(GCBD)에 넘어가며 데이터 주권까지 양도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아시아(MSRA)는 중국 최고의 IT 인재 산실로 기능했고, 그 졸업생들은 화웨이·바이두·바이트댄스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 자본의 역설도 심각하다.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주요 벤처캐피털(VC) 16곳이 중국 공산당 연계 기업, 나아가 인민해방군과 협력하는 반도체·AI 기업에 최소 31억~45억 달러를 투자했다. 월든 인터내셔널은 SMIC 이사회에 20년 가까이 참여하며 기술·경영 멘토링을 제공했고, IBM은 2007년 SMIC에 45나노 공정 라이선스를 이전하여 중국 파운드리 기술의 도약에 기여했다. 오픈소스 AI 프레임워크인 텐서플로와 파이토치는 중국이 미국과의 AI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발판이 되었다. 미국은 의도치 않게, 그러나 상당 기간 체계적으로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키웠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심화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외생 변수다. 현재 가장 현실적으로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하나는 AI 반도체·생태계 중심 리디렉션 시나리오로, 중국이 반도체 자급화의 한계를 인식하고 AI 응용 생태계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다. 화웨이, 텐센트, 알리바바 같은 대기업이 산업 플랫폼을 주도하는 이 경로는 중국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소버린 AI' 생태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품는다. 다만 글로벌 생태계와의 호환성 부재라는 '갈라파고스' 위험도 함께 안는다. 다른 하나는 디커플링 시나리오다. 미중 무역 전쟁이 전면적으로 심화되면, 중국은 강제적 내재화에 박차를 가하고 글로벌 공급망은 미국 클러스터와 중국 클러스터로 분리된다. 이 경우 공급망 분기에 따른 기술 표준 분열, 비용 중복 발생, 수급 혼란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강타한다. 한국·일본·대만·네덜란드는 미국 주도 클러스터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지만, 대중 수출 채널의 상당 부분이 차단되고 중국 내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도 생산 차질을 피할 수 없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주목할 점은 인공지능 산업 자체의 수익성 문제다. MIT 난다 이니셔티브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AI에 투자한 기업의 95%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거대한 투자가 집중되고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수익 기반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 과제다.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이 불안한 상태에서 AI 산업의 수익 구조마저 불확실하다면, 중국은 '반도체+AI'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는 과소평가할 수도, 과대평가할 수도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국가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금력을 등에 업고 분명히 실력을 키워 왔지만, 그 성장의 토대가 얼마나 견고한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일본이 1980~90년대 정부 주도 반도체 산업 육성에서 결국 구조 조정의 쓴맛을 본 것처럼, 중국의 빅 펀드도 회계 투명성과 수익성 검증이라는 시험을 결국 피할 수 없다. 한국에게 이 상황은 위기이자 기회다. 중국은 한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지켜온 반도체·AI 분야에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중국이 취약한 영역, 즉 첨단 패키징, HBM 같은 맞춤형 메모리 파운드리, 극자외선 이후 패터닝 기술 탐색,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기업 거버넌스는 한국이 차별화를 추구할 공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모래성이 무너지기 전에, 한국은 더 깊은 기술적 해자를 파두어야 한다. 복합 특이점의 시대, 경쟁의 프레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GDP를 대체할 국내 총지능(GDI)의 시대에 한국은 규모로 싸우기보다 정밀도로 승부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의 신뢰 가능성, 반세기에 걸쳐 축적된 제조업 경험,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핵심 위치를 지렛대 삼아, 아직 누구도 걷지 않은 기술의 미개척 지대로 과감하게 발을 내딛는 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 전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사대문 안 인구 30만 프로젝트 - 건축가 황두진이 그리는 지속 가능한 도시적 삶
황두진 지음 / 해냄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심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의 실험실이다. 그 실험실을 다시 사람으로 채우는 일, 이제 시작할 때가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