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 마키아벨리의 문장들 - 권력은 어떻게 태어나고, 무엇으로 무너지는가 ㅣ 철학자의 시선 1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민유하 편역 / 리프레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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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오백 년을 건너온 마키아벨리의 차가운 문장들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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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마키아벨리의 문장들 - 권력은 어떻게 태어나고, 무엇으로 무너지는가 ㅣ 철학자의 시선 1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민유하 편역 / 리프레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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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릴 때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진심은 언젠가 통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하다. 그 말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배신을 당하고, 진심이 오해받고, 선의가 무기처럼 사용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것은 배신감이 아니라 당혹감이었다. 세상이 내가 배운 것과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 그 진실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을까. <군주론>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오백 년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마땅히 어때야 하는가를 쓰지 않았다.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썼다. 그것이 불편한 이유는,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이 다. 진실은 종종 따뜻한 위로보다 훨씬 더 오래 남는 상처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관계를 이야기할 때 늘 사랑과 신뢰를 먼저 꺼낸다. 팀을 이야기할 때는 소통과 공감을 말하고, 조직을 이야기할 때는 비전과 열정을 강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기 시작한다. 마키아벨리가 사랑보다 두려움을 말했을 때, 그것은 잔인함을 권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의 본질에 관한 가장 냉정한 통찰이었다. 사랑은 상대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상대가 오늘 기분이 좋으면 유지되고, 더 매력적인 누 군가가 나타나면 흔들리며, 내가 실망을 주면 금세 식어버린다. 그러나 선을 넘으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일관된 구조, 그 예측 가능성은 감정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장 오래 신뢰해온 것들은 대부분 예측 가능한 것들이 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약속 시간은 지키는 사람, 이익이 충돌해도 원칙만큼은 굽히지 않는 사람, 기분에 따라 규칙이 달 라지지 않는 조직. 그 일관성이 신뢰를 만든다. 사랑은 신뢰를 시작하게 하지만, 신뢰를 유지시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일관된 구조다. 마키아벨리는 그것을 두려움이라는 단어로 불렀지만,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규칙'이다.

우리는 갈등을 두려워하도록 훈련받았다. 회의에서 의견 충돌이 생기면 불편해하고, 공동체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 빨리 봉합하려 하고, 조용하고 원만한 분위기를 건강함의 증거로 여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로마를 보면서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로마의 위대함은 원로원과 평민이 조화로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그 긴장이 어느 한쪽의 독주를 막았고, 그 과정에서 더 정교한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갈등 이 파괴가 아닌 제도로 흐를 수 있는 구조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갈등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라 갈등이 보이지 않는 조직이다. 다른 의견을 말했을 때 눈치를 봐야 하는 곳, 문제를 꺼내면 문제를 꺼낸 사람이 문제가 되는 곳, 표면은 조용하지만 그 아래에 불만이 층층이 쌓이는 곳. 그런 조직에서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건강함이 아니라 억압이다. 그리고 억눌린 갈등은 어느 순간 제도가 감당할 수 없는 폭발로 터져 나온다. 갈등을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갈등이 말로 나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진짜 건강한 공동체의 조건이다.

우리는 종종 평화로울 때 준비를 멈준다. 일이 잘 풀릴 때 긴장을 늦추고, 관계가 안정될 때 마음을 닫으며, 조직이 순항할 때 변화를 미룬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인간은 위기가 없을 때 위기를 상상하기 어렵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러나 마키 아벨리는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을 보았다. 전쟁을 잊은 군주는 이미 자기 영토를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썼다. 이것은 군사적 의미만이 아니다. 경쟁이 없을 때도 실력을 갈고, 위기가 없을 때도 구조를 점검하며, 아무 일 도 없어 보이는 시간에도 다음 흔들림에 대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그 차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평화는 쉬는 시간이 아니다. 준비하는 시간이다. 아직 위기가 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 위기를 맞을 자신을 만들어야 한 다. 마키아벨리가 이 말을 남긴 것은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평화를 지키는 힘은 평화로울 때 길러진다는 것 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문장은 따뜻하지 않다. 그의 언어는 위로하지 않는다. 인간의 선함을 믿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진심은 반드시 닿을 것이라고 격려하지 않으며, 좋은 일을 하면 결국 좋은 결과가 온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감정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차가운 문장들에서 이상한 위안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문장들이 말하는 것은 순진했기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라거나, 세상이 나쁘기 때문에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착각을 걷어내면, 그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착각 없이 서 있는 사람이, 착각 속에 서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버틸 수 있다. 마키아벨리를 읽는다는 것은 냉소를 배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배우는 일이다. 사람이 언제나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충성이 이익 앞에서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뢰를 설계하는 것, 사랑만으로는 권력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나은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착각을 걷어낸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는 군주에게 말을 걸었지만, 결국 인간 전체를 해부했다. 그 말이 이 책의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마키아벨리가 진짜 쓰고 싶었던 것은 권력자를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가장 정직한 기록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군주다. 책은 오백 년을 건너온 마키아벨리의 차가운 문장들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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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분쟁을 막는 상속·증여와 기막힌 절세 비밀
김용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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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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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의 무게가 달라지는 때가 찾아온다. 30대까지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들이, 40대에 접어들면서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흰머리, 자녀의 훌쩍 자란 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재산의 이전'이라는 묵직한 현실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속이나 증여를 일부 자산가들만의 이야기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지금, 평범한 가정의 아파트 한 채가 수억 원을 훌쩍 넘 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상속세와 증여세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산층 가정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진지하게 고 민해야 할 생활 속의 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공부를 시작하려 하면, 낯선 세법 용어와 수시로 바뀌는 제도 앞에서 손을 놓고 싶어진다. 책은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세금과 법률의 세계를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풀어내고, 무엇 보다 가족의 화목을 지키는 것이 목적임을 분명히 하는 책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나침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애들은 다 착해서 절대 싸우지 않을 거야." 많은 부모들이 이렇게 믿는다. 그리고 많은 자녀들도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막상 재산 분배 앞에 서면 평생 함께해온 형제자매가 낯선 얼굴이 되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그것이 돈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십 년간 가슴속에 쌓여온 서운함, 불공평함에 대한 기억, 그리고 서로 다른 기대치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상속 분쟁이 무서운 이유는 재산을 잃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법적 다툼으로 번진 가족 갈등은 좀처럼 봉합되지 않는다. 소송 과정에서 드러나는 말 한마디, 문서 하나가 평생의 상처로 남기도 한다. 유류분 소송, 상속회복 청구, 기여분 다툼,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미처 대비하지 못했을 때 현실로 튀어나오는 법적 칼날들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그 위험성은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치매에 걸린 부모를 홀로 십년 넘게 돌봐온 자녀가 정작 상속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타지에 사는 형제가 뒤늦게 나타나 자신의 법정 몫을 요구하는 경우, 혹은 재혼 가정에서 이복형제 간의 상속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 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분쟁을 예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미리 아는 것이다. 유언장의 종류와 법적 효력, 유류분 제도의 의미, 상속포기가 자녀 세대에까지 미치는 영향, 그리고 상속재산 분할 협의의 절차, 이 개념들을 사전에 이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족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다. 나아가 부모 생전에 자녀들과 함께 재산 분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두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법적 장치보다 강력한 분쟁 예방책이 된다.


분쟁 방지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주제가 바로 절세다. 같은 재산을 물려줘도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납부해야 할 세금의 규모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달라진다. 이는 불법적인 탈세가 아니라, 세법 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합법적인 전략의 문제다. 상속세와 증여세의 세계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다양한 공제 항목과 특례 제도들이 숨어 있다. 배우자 공제만 해도 최대 30억 원까지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한 부모로부터 일정 금액 이하를 무이자로 차용할 경우 증여세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혼인 시 특별 증여 공제를 활용하면 신혼부부가 합법적으로 상당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특히 부동산과 관련된 절세 전략은 더욱 정교한 이해를 요구한다. 배우자 증여 공제를 활용한 양도세 절감 방법, 상속 후 일정 기간 내에 매도했을 때 적용되는 세제 혜택, 자경 농지나 가업 상속에 붙는 대규모 공제 제도 등은 그 내용을 모르고 지나치면 수억 원을 그냥 국가에 납부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절세 전략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요건과 기한이 따른다. 세법은 허점을 막기 위한 다양한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으며, 이를 간과한 채 섣불리 움직였다가 오히려 더 큰 세금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증여 후 일정 기간 이내 매도 시 적 용되는 이월과세 규정이 대표적인 예다. 결국 절세란, 세금을 줄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세법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 하고 그 안에서 최적의 선택을 하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상속과 증여를 단순히 세금 문제로만 바라보면, 그 본질적인 의미를 놓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의 출발점은 결국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일군 것을 온전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이 가족 간의 상처와 법적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또한 부모의 유산이 형제자매 사이를 갈라놓는 쐐기가 되기를 바라는 자녀 도 없다. 그러나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준비 없는 사랑은 때로 예상치 못한 갈등의 씨앗이 된다. 부모님 사망 후 한 달 이내, 세 달 이내, 여섯 달 이내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행정적 절차들을 모르고 기한을 놓치는 순간, 가산세라는 뜻하지 않은 부담이 더해진다. 감정적으로도 가장 힘든 시기에 법적•행정적 절차까지 혼란스러워지면, 가족 모두가 소진 되고 만다. 반대로, 미리 충분히 준비한 가족은 다르다. 유언장을 올바른 방식으로 작성해두고, 자녀들과 재산 분배에 대 한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나눠두고, 세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단계적으로 증여를 진행해온 가족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 자체가 가족 간의 신뢰를 두텁게 하는 계기가 된다.


상속과 증여에 관한 지식은, 결코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미뤄도 좋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준비는 여유가 있을 때 해야 빛을 발한다. 막상 현실이 닥쳤을 때 허둥대며 찾은 정보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준비도 함께 갖춰야 한다. 세금을 아끼는 것은 더 많은 것을 가족에게 남겨주는 일이고, 분쟁을 예방하는 것은 가족의 관계를 지키는 일이다. 오늘 단 한 페이지의 공부가, 훗날 가족 모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 미리 알면 가족의 화목은 깊어지고, 세금은 줄어들며, 남겨진 사람들은 덜 아프다. 그것이 상속과 증여를 공부해야 하는 가장 솔직하고 강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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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
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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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한때 케이팝을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 숨겨두었던 감정의 서랍을 열고,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한 것들을 비트와 멜로디에 실어 내보내는 행위. 그래서 케이팝을 좋아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내미는 일과 같다. 복길의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머문 문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평범한 문장이었다. ’노래는 죄가 없잖아요. 그냥 해요.‘ 이 짧은 말 안에 케이팝을 둘러싼 모든 윤리적 딜레마와 감정적 피로가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케이팝을 사랑하면서도 케이팝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폭력, 착취적 계약, 팬덤의 집단 광기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그 사랑에 공모의 혐의를 씌우며. 그러나 ' 노래는 죄가 없다 '는 말은, 음악을 면죄부로 삼자는 도피가 아니라, 감정을 죄로 만들지 말자는 선언에 가깝다. 사랑 자체를 심문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상처받은 사람을 두 번 무너뜨리는 일이다. 케이팝은 언제나 과잉이다. 감정도, 서사도, 비주얼도. 그 과잉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적당함이 허용하지 않는 감정들을 마음껏 꺼내놓을 수 있다. 슬퍼도 너무 슬프고, 기뻐도 너무 기쁘고, 분노도 너무 격렬한 케이팝의 세계는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포장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일종의 해방구가 된다. 나는 케이팝 앞에서 무장해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허상 안에서만 진짜가 될 수 있 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복길이 말하는 '비장미'는 미학적 취향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형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동방신기의 〈Rising Sun(순수)> 앞에서 느끼는 압도감은, 그 노래가 얼마나 완성도 있는 음악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노래가 얼마나 과감하게 불완전한 감정을 무대 위에 올려놓았는가의 문제다. 기도하고, 저주하고, 중얼거리다, 절규하는 노래. 논리적 서사 없이 감정의 연쇄만으로 이루어진 그 노래는, 오히려 그 비논리성 덕분에 삶의 어떤 진실에 닿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도 사실 그렇게 생겼다. 슬픔이 분노로 변하고, 분노가 허탈함으로 가라앉고, 허탈함이 다시 어떤 결의로 굳어지는. 논리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다. 케이팝이 그 엉망진창의 감정 지도를 음악이라는 형식 안에 담아낼 때, 듣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세상에 이름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나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비장함은 또한 연대의 언어이기도 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응원봉의 불빛이 아름다운 것은, 그 빛들이 각자의 절망과 슬픔을 숨기면서도 함께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복길의 표현처럼, 빛이 어떤 절망 을 감추고 있는지 말하지 않고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장함은 그 절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형식이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워질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비장해지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경건해진다.

케이팝 산업이 만들어낸 폭력의 목록은 너무 길다. 불공정한 계약, 통제되지 않는 팬덤의 집단적 광기, 아이돌을 향한 테러와 살의, 조직적 성범죄 게이트. 그 목록 안에는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지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그 어디에도 완벽히 위치하지 못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다. 케이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케이팝의 구조가 만들어낸 폭력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된 사람들. 우리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방조자이기도 하며 때로는 가해의 분위기를 묵인한 공범 이기도 하다. 복길이 베이비복스 이야기를 꺼낼 때, 나는 한동안 멈추었다. '꺼져라'라는 연호를 들으며 공연했던 그들. 죽은 동물의 사체를 담은 택배를 받았던 그들. 그 폭력이 가능했던 것은 특정한 몇 명의 악인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제거해도 좋다’ 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었고, 그 분위기를 만든 것은 침묵하거나 외면한 수많은 우리들이었다. 살의는 극단적인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라는 복길의 통찰은 케이팝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 역시 케이팝이다. 씨스타의 〈Give It to Me〉가 통속적인 삶의 고뇌를 홀가분하게 날려버리는 방식으로, 아웃사이더의 <외톨이>가 무거운 소외감을 무대 위에 올려 해방감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케이팝은 상처를 주는 동시에 그 상처를 언어화하고 형식화하고 함께 노래하게 만든다. 케이팝을 사랑하여 상처 받고, 그 상처를 또다시 케이팝으로 어루만지는 이 순환이 어쩌면 케이팝이 가진 가장 인간적인 속성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음악으로 시대를 감각하는 내면의 연표가 있다는 복길의 말처럼, 나 역시 특정 노래를 들으면 특정한 시간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음악은 시간을 저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다. 멜로디 하나가 수십 년 전의 냄새와 온도와 감정을 고스란히 불러낸다. 그래서 어떤 케이팝은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 된다. 복길 이20년 만에 처음으로 <Rising Sun(순수)>을 들으며 그 공백을 채웠듯,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비워두었던 연표의 칸들을 언젠가 마주하게 된다. 거부감으로, 두려움으로, 혹은 그냥 게으름으로 외면해두었던 음악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선명 하게 들려오는 순간. 그 순간은 단지 음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시간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케이팝을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산업이냐 예술이냐, 윤리적 소비가 가능한가, 팬덤은 문화인가 병리인가. 그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복길이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이것일 테다. 우리의 사랑을 모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케이팝을 듣는다. 제대로 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노래 속에서, 나처럼 제대로 살고 싶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을 듣는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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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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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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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받는 것이 이름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명을 붙여주고, 출생 후에는 오래 살기를, 건강하기를, 훌륭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이름을 짓는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부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이 세상에 당도했음을 인정하는 최초의 행위이자, 그를 사랑의 언어로 호명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받지 못한 존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이름 없는 자는 과연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문학과 영화, 시와 음악이 오래도록 씨름해온 물음이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어느 순간 불현듯 솟아오르는 질문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층위에 닿아 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크리처는 자신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 이 한 마디가 독자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이름의 부재가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빅터는 크리처를 창조했으나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생명을 부여했으나 이름을 주지 않았고,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나 세상 안에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름은 단지 글자가 아니다. 이름은 "너는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선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향해 "나는 네가 여기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처에게 이름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감정을 느꼈지만, 이름 없이는 인간 세계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였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관계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름은 타인이 나를 향해 뻗어오는 언어적 손길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비로소 세계와 연결된다. 크리처가 오두막집 가족들을 몰래 관찰하며 가장 먼저 배운 것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아버지, 아들, 딸.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는 그 작은 행위 안에서 사랑과 연대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훔쳐보며 자신에게는 그 어떤 이름도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갔을 것이다.


이름을 처음부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가진 이름을 빼앗기거나 왜곡당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송곳니 속 세 남매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폐쇄된 세계 안에서 자랐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부를 때 큰애, 작은애, 아들 정도로만 지칭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한다. 이름의 부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크리스티나뿐이다. 이름은 경계를 표시한다. 이름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경계, 세계 안에 속한 자와 세계 바깥에 놓인 자 사이의 경계. 큰딸이 비밀리에 외부 세계의 비디오를 보면서 깨닫는 것도 바로 그 경계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 단순한 발견이 큰딸의 내면에 균열을 만든다. 큰딸은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 부르스. 이소룡의 영어 이름에서 따온 세 글자. 동생에게 "날 부르스라고 불러줘, 그러면 내가 돌아볼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서러운 순간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소리에 반응해 돌아본다는 것. 그 작은 순환 안에서 한 존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부르스라는 이름이 생긴 순간부터 큰딸의 얼굴에 비로소 살아 있는 표정이 깃든다.


그러나 이름이란 늘 붙들어야 할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아리아 스타크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에 극도로 집착하는 소녀다. 원수들의 이름을 매일 밤 기도처럼 중얼거리고, 자신이 아리아 스타크임을 잊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자신을 다독인다. 그녀의 스승 자켄은 이름 없는 자들의 세계에서 온 암살자다. 그는 아리아에게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역설이 흥미롭다. 이름 없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아리아는 수련 과정에서 수없이 맞으면서 "넌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자신의 이름과 역사와 원한을 말할 때마다 채찍이 날아온다. 결국 그녀는 다른 얼굴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나는 아리아 스타크야"라고 외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리아가 된다. 이름에 집착하지 않을 때 이름이 살아난다는 이 역설은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름에 사로잡혀 살 때 우리는 종종 이름이 가리키는 본래의 자기를 잃는다. 아리아가 "나는 아리아 스타크다"고 외쳐야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녀는 아리아가 아니었다. 이름은 불려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려놓아야 할 집착이기도 하다.


김소월의 시 '초혼'은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이는 전통 의식에서 출발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시인은 이름을 부른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른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 간절히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다. 죽음이 가른 경계 너머로 손을 뻗는 행위다. 이름을 부르는 한, 그 이름의 주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남아 있다. 소월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쓴다. 돌이 되어도 부르겠다는 이 선언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이름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노래 「플라워스」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름의 문제를 건드린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는 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은 이를 향해 그녀는 말한다. "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살 수 있어. 내 이름은 내가 혼자 모래에 쓸 수 있어. 나는 네가 해준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나를 사랑할 수 있어." 타인의 호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상실 이후를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를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여기 있다고, 나는 이 이름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은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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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는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로, 혹은 이름 불리지 못한 채로 지나간 시간들이 있다. 이름을 받지 못해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 했던 이들, 이름을 빼앗기고 번호로 불렸던 이들. 그 이름의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크리처는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졌지만, 그 이름 없는 존재가 던진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라는 절규는 200년이 넘는 시간을 가로질러 지금도 우리 귓전을 울린다. 이름 없는 자의 외침이 이름 있는 모든 자들의 가슴을 찌른다. 영화 <송곳니>의 부르스는 아마 그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불러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세계를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의 계약이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나를 알아보고, 나는 그 앎으로 살아간다. 이 계약이 깨질 때, 이름의 빈자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상처가 된다. 그러나 그 상처에서 자라나는 것도 있다. 이름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살아가는 힘. 부르스가 쇠망치로 자신의 송곳니를 스스로 부수며 웃었던 것처럼, 그 피투성이 얼굴의 미소 속에는 어떤 자유가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를 이 세계에 붙잡아둔다. 기억한다는 것, 호명한다는 것은 그래서 작은 윤리적 행위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가진 자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부르는 일이 곧 살아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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