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식사 혁명 - 먹어서 병을 예방하는 아주 작은 식습관의 힘
하마야 리쿠타 지음, 오시연 옮김, 김민지 감수, 김혜민 감수도움 / 부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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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나는 잠시 멈칫한다. 어제 사다 놓은 두부, 방치된 채로 시들어가는 대파, 그리고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요거트. 나는 분명히 '건강하게 먹으려고' 산 것들인데, 왜 이렇게 자주 버리게 되는 걸까. 그 질문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나는 늘 같은 결론으로 도망쳤다.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내가 '식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하루 식사를 솔직하게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장면들이 많다. 아침은 거르거나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은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 저녁은 퇴근 후 반쯤 지쳐 배달 앱을 뒤적이다 마라탕이나 치킨을 시키는 날이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가끔 채소를 잔뜩 넣은 샐러드를 먹거나 현미밥으로 바꿔보려 했다. 이런 노력이 꽤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내 시도가 왜 번번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용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해줬다.

책에서 가장 먼저 흔들린 것은 나의 이분법이었다. 나는 음식을 늘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눠서 생각해왔다. 현미는 좋고, 흰쌀밥은 나쁘다. 채소는 좋고, 햄버거는 나쁘다. 술은 나쁘지만, 레드와인은 조금 좋다. 이런 식의 이분법은 건강 정보를 소비하는 나의 기본 언어였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가 대부분 흐릿하다는 것, 심지어 어디서 들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직면했다. 예를 들어 나는 달걀을 하루에 하나 이상 먹으면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콜레스테롤 때문이라는 이유도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책에 따르면 이 믿음에는 실제로 확립된 과학적 근거가 없다. 더 흥미로운 것은, 어떤 식재료가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를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모든 음식에는 여러 성분이 복잡하게 섞여 있고, 그것이 몸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단 하나의 영양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커피에 발암물질이 들어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커피는 암 예방 효과가 있다는 연구도 많다. 나는 그동안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 나만의 '건강 교리'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대신 무엇을 먹는가"라는 시각의 중요성.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덜 먹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채소 주스를 마시면서 건강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만약 그 주스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무엇을 마셨을까. 아마 달콤한 아이스 음료나 탄산음료를 집어들었을 것이다. 그 맥락에서는 채소 주스가 나쁜 선택이 아니다. 반대로, 평소에 충분히 채소를 잘 먹는 사람이 채소 주스를 마신다면 그건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음식의 가치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무엇을 대신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발상은 내 머릿속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그 다음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환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은 식습관이 개인의 의지보다 환경에 훨씬 더 크게 좌우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말이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음식을 선택해왔다. 회의가 길어져 점심 시간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편의점으로 향했다. 야근 후에는 배달 앱 외에 다른 선택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 저녁에는 단 것이 당겼다. 이것들이 과연 순수한 '선택'이었을까. 책에서 말하는 '시스템화'라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만드는 것. 예를 들어 냉장고에 건강한 음식을 먼저 눈에 띄는 곳에 두거나, 사 놓는 식재료의 종류 자체를 바꾸는 일 같은 것들이다. 의지력을 높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의지력이 필요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 이 발상은 나에게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집에 과자가 있으면 반드시 먹고, 없으면 굳이 사러 나가지 않는다. 환경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면서, 왜 항상 의지 탓만 했을까.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내가 '식사 패턴'이 아닌 '식재료'에 집착해왔다는 사실이다. 오늘 뭘 먹었는지, 그 음식이 좋은 음식인지 나쁜 음식인지에 집중하면서, 정작 한 달 동안 내 식사 전체가 어떤 모양인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은 하루 단위가 아니라 일주일, 혹은 한 달을 단위로 식습관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어느 날 햄버거를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쁜 식습관이 되는 게 아니다. 그 햄버거 안에 채소가 들어있다면, 그날따라 채소 섭취량이 평소보다 늘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매일 샐러드를 먹더라도, 부족한 열량을 단 빵으로 채운다면 전체적인 균형은 무너진다. 이 관점에서 나의 식사를 다시 보면, 나는 생각보다 형편없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개선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채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나트륨은 과하며, 과일은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가끔 먹는 마라탕에 들어있는 다양한 채소들, 편의점 도시락 옆에 끼워 먹는 삶은 계란 하나, 저녁에 무심코 마신 두유 한 팩. 이것들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한 식사가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전체적인 흐름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가이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냉장고를 다시 열어봤다. 시들어가는 대파가 여전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나 자괴감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걸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가벼운 궁금증이 생겼다. 냉장고 앞자리에 두거나, 사는 양을 줄이거나, 아예 냉동 채소로 대체하거나.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변화. 아마도 그게 지속 가능한 첫걸음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식사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알게 됐다. 완벽한 식사를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조금 덜 나쁜 선택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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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지키는 것이다 - 농부와 소설가가 심은 한 알의 진심
이동현.김탁환 지음 / 해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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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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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지키는 것이다 - 농부와 소설가가 심은 한 알의 진심
이동현.김탁환 지음 / 해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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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늘 어딘가를 지나친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이름 모를 마을들, 고속도로 표지판에 잠깐 눈길을 주다 이내 잊어버리는 지명들. 곡성도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남원과 구례 사이, 어느 쪽으로도 확실하게 기울지 않는 그 어정쩡한 자리. 지도 위에서조차 존재감이 희미한 고장. 누군가 거기 뭐 있어요?"라고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머뭇거려야 하는 이름.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곡성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느리게 살아가는 것들이었는지도.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계절의 속도를 따라 숨 쉬는 삶이었는지도. 섬진강은 말없이 흐른다. 굽이굽이 돌아 구례로, 하동으로, 광양으로 내려가는 그 강물은 곡성을 가로지르면서도 요란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흐른다. 그냥 거기 있다. 어쩌면 그것이 곡성을 닮았다. 어쩌면 그것이 미실란을 닮았다.

옛 초등학교 교정을 상상해본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 칠판 먼지가 내려앉던 교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리던 복도. 그 자리에 이제는 논이 생겼다. 교실 대신 발아현미 연구실이 들어섰고, 운동장이었을 자리엔 텃밭이 쌀 미 자 모양으로 일궈졌다. 아이들 대신 벼가 자라고, 수업 종소리 대신 개구리 울음소리가 절기를 알린다. 처음엔 낯설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던 박사가 흙냄새 나는 시골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 일. 논문과 데이터로 가득한 세계를 뒤로하고, 손에 흙을 묻히는 농부의 삶을 선택하는 일. 사람들은 물었을 것이다. "박사 양반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하지만 과학자가 된 농부는 알았을 것이다. 볍씨 한 알 안에 담긴 것이 어떤 논문보다 깊다는 사실을. 흙과 물과 햇볕이 빚어내는 화학반응은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씨앗이 땅 속에서 발아하는 순간, 그 생명의 떨림은 어떤 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측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630종의 벼를 한 논에 심는다는 것은 농사 실험만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 이다. 하나의 품종만을 대량으로 키워 효율을 극대화하는 시대에, 다양성을 지키겠다는 완고하고 아름다운 고집. 소멸해 가는 품종들을 붙잡아두려는 조용한 저항. 씨앗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긴 호흡의 의지다.

현대 도시의 삶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빠르게, 더 빠르게. 효율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우리는 목적지만 바라보며 걷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사치로 여기며 산다. 걷다가 길 위에 눕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퐁퐁 다리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드러눕는 두 중년 남자의 이미지가 그토록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등을 통해 올라오는 강물 소리. 온몸을 감싸는 물의 진동. 하늘과 땅 사이에 그냥 존재하는 것.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것이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는 비밀이다. 미실란의 시간은 절기를 따라 흐른다. 소한과 대한의 고요 속에서 한 해를 준비하고, 입춘과 우수의 기운을 따라 땅을 깨운다. 종의 분주함 속에서 씨앗을 심고, 백로의 이슬이 벼 이삭을 여물게 한다. 인간이 만든 시계가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리듬 위에 삶을 얹는 것이다. 그 삶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자동화된 농기계 대신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제초제 대신 직접 김을 매고, 데이터 대신 하늘의 구름을 읽는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비효율은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계절을 잃어버리고, 흙을 잊어버리고, 밥 한 그릇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비효율인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는 조급하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고, 변화를 당장 확인하고 싶다. 심은 씨앗이 그날 안에 싹트기를 원하고, 뿌린 노력이 이번 달 안에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하지만 농사는 다르다. 농사는 계절을 앞서갈 수 없다. 절기를 건너뛸 수 없다.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그 이치 앞에서 인간은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미실란이 2006년에 시 작해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은 그래서 의미 깊다. 유기농 쌀 시장이 외면받던 시절에도, 농촌이 소멸해간다는 뉴스가 쏟아지던 때에도, 미실란은 볍씨를 뿌렸다. 음악회를 열었다. 책방을 만들었다. 글쓰기를 가르쳤다. 아이들을 논에 데려와 흙을 만지게 했다. 천년 숲도 오늘 심은 묘목 한 그루에서 시작된다. 지금 당장 울창한 숲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묘목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자신이 심은 나무의 그늘 아래 자신이 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를 향한 행동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이 슬프지 않은 이유는, 흙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 땅을 사랑했다는 것을. 미실란은 그 기억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들녘에서, 계절의 리듬을 따라 숨쉬며, 흙과 씨앗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 그곳에서 나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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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예술학 - 큐레이터와 예비 전공자를 위한 예술의 길잡이
홍보라매 지음 / 씨마스21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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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예술을 앞에 두고 우리는 으레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인다.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이게 뭔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그런데 여기, 그 둘 다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느끼는 것도, 철학적으로 사변하는 것도 부족하다고 여긴 이들이 묻기 시작했다. "예술이라는 현상을, 과학처럼 연구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예술학이 시작된 자리다.

예술을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사람 앞에는 세 갈래 길이 놓인다. 첫 번째는 예술철학의 길이다. 플라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예술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미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질문이 크고 장엄한 만큼 답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두 번째는 비평철학의 길이다. 20세기 분석철학의 영향 아래, 이 길을 택한 사람들은 오히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의심했다. 철학자 모리스 웨이츠는 예술은 애초에 정의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질문을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철학적 엄밀함을 얻으려 한 것이다. 세 번째가 예술학의 길이다. 이 길은 앞의 두 길과 달리 경험과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술 작품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람들은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예술은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 길은 철학자의 서재가 아니라 실험실과 현장에서 시작된다.

예술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 시기는 헤겔 철학이 기울고 자연과학이 부상하던 때였다. 다윈의 진화론, 헬름홀츠의 생리학, 분트의 실험심리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형이상학적 사변보다 측정하고 관찰하고 검증하는 태도가 지식의 표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물었다. "왜 예술만 사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하는가?" 추상적인 '미의 본질'을 논하는 대신, 실제 예술 현상을 경험적으로 탐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 나선 인물이 구스타프 테오도르 페히너다. 페히너는 기존 미학을 '위로부터의 미학'이라고 불렀다. 미의 본질이라는 추상적 원리에서 출발해 개별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것을 뒤집어 '아래로부터의 미학'을 제창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를 먼저 관찰하고, 거기서 일반 법칙을 끌어내자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직사각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어느 것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물었다. 결과는 가로세로 비율이 황금비에 가까운 형태가 가장 선호된다는 것이었다. 소박해 보이는 이 실험은 미적 판단을 측정하고 수량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어젖혔다. 물론 페히너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 방법만으로 예술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위로부터의 미학과 아래로부터의 미학이 서로 보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통합적 관점이 훗날 예술학의 토대가 된다.

예술학이 독립 학문임을 주장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인식이 하나 있었다. 미와 예술은 서로 다른 범주라는 것이다. 전통 미학은 예술의 목적이 미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예술의 문제는 곧 미의 문제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전제에는 두 가지 균열이 있다. 하나는, 미는 예술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석양도 아름답고, 수학 공식도 아름다울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반드시 미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극은 고통을 다루고, 풍자는 추함을 이용하며, 현대 예술은 종종 의도적으로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이 두 균열 앞에서 '예술을 다루는 학문은 미학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른스트 그로세는 민족학적 방법으로 원시 민족의 예술을 연구하면서, 예술을 철학적으로 사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예술 현상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이 자연을 연구하듯 예술도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세의 이 주장은 예술학이 독립 학문으로 성립 가능하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중요한 시도였다.

예술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은 실패한 학문의 역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립 학문으로 정착하지 못했고, 야심찬 프로그램은 절반만 실현되었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예술학은 하나의 물음을 남겼다. 예술을 느끼는 것만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사변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예술을 앞에 두고 우리가 단지 감동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그런 감동이 일어나는지, 그 작품이 어떤 구조와 원리로 작동하는지, 그것이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기 시작할 때 — 우리는 이미 예술학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이다. 예술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고, 역사적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며,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를 배제하는 것은 예술의 풍요로움을 스스로 축소하는 일이다. 예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예술 앞에서 우리는 더 많은 방식으로 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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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에는 잃어야 얻는다 - 흔들리는 영혼을 위한 카를 융의 말
칼 구스타프 융 지음, 변지영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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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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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한가운데, 태양은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정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쌓아온 빛의 방향을 반전시키며 내려가기 시작한다. 융은 이 순간을 단순한 하강이 아니라, 삶의 문법이 바뀌는 전환점으로 읽었다. 아침의 언어로는 더 이상 오후를 말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인생의 정오에서 발견한 핵심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쌓아가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더 높이, 더 넓게, 더 많이. 그러나 융은 묻는다. 오르는 것만이 성장인가? 내려가는 일, 덜어내는 일, 포기하는 일에도 고유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오후의 태양이 빛을 거두어들이듯, 인간도 외부를 향해 뻗치던 에너지를 자기 내면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 후반부의 과제다.


삼십대와 사십대를 지나며 우리는 이른바 '자신만의 방식'을 구축한다. 직함, 인간관계, 세계관, 삶의 원칙들. 이것들은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방패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를 가리는 가면이 된다. 융은 이를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쓴 가면이 너무 오래되면, 우리는 그것이 곧 자신의 얼굴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문제는 페르소나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억압하고, 외면하고, 창고 깊숙이 밀어넣은 자신의 다른 면들이 있다는 것이다. 눈물, 두려움, 어린 시절의 꿈, 충족되지 못한 갈망들. 그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재 속에서 여전히 이글거리는 불씨처럼, 언젠가 연기로 피어오를 때를 기다린다. 그 불씨를 무시하는 한, 중년의 우울과 공허함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극단으로 달려간 것은 언젠가 반드시 그 반대로 흐른다. 융은 이 원리를 심리학의 언어로 다시 꺼냈다. 한쪽 방향으로만 달려온 삶은 결국 그 반대편 힘에 의해 뒤흔들린다. 너무 오래 이성만을 추구해온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비합리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고, 너무 오래 타인을 위해서만 살아온 사람은 어느 순간 공허함에 무너진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법칙이다. 인생의 오후가 불편한 것은 우리가 그동안 억눌러온 것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을 병으로 여기고 억누르려 할수록, 반전의 힘은 더 강해진다. 오히려 그 흔들림을 받아들이고, 자신 안에 있는 '타자'와 마주 앉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통합이 시작된다. 아침의 나는 '원했다'. 오후의 나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산다. 그러나 더 깊이 나아간 사람은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 원함도 의무도 아닌, 그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융이 말하는 인생 후반부의 진짜 탐색이다.


인생의 오후를 제대로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잃어야 하는가. 첫째,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다. 지금까지 유효했던 진리가 이제는 낡은 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둘째, 외부의 인정에 대한 집착이다. 성취와 평판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확인하는 방식을 내려놓는 것. 셋째, 젊음의 방식을 붙들려는 관성이다. 더 이상 상승이 미덕이 아닌 시기에, 상승만을 추구하면 분열이 생긴다. 이 상실들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공간이 생긴다.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안으로 돌아오고, 거울에 비추던 나 대신 진짜 나를 마주하게 된다. 융은 이 과정을 개성화(individuation)라 불렀다. 집단이 씌워준 가면을 벗고,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여정. 이것은 노년의 쓸쓸한 수습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깊은 성장의 형태다.


융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젊은이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를 충분히 살아낸 사람, 삶의 정오를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자연의 목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식하고, 생존하고, 확장하는 것은 자연의 목적이다. 그것을 넘어서서 의미를 묻고,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지혜를 전하는 것이 문화다. 인생의 오후는 쇠락의 시간이 아니다. 도리어 아침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지는 시간이다. 고통을 충분히 겪은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만이 타인을 진심으로 볼 수 있다. 상실이 쌓이면 공감이 생기고, 공감이 깊어지면 지혜가 된다. 그것이 오후의 선물이다. 우리는 아침의 방식으로 오후를 살려 한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증명하고, 더 빠르게 움직이면서. 그러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 그 빛은 동쪽의 것과 다르다. 기울어진 빛이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주름, 그림자, 사물의 결.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인생의 오후를 낭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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