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기쁨 - 개정판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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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군가는 위대한 삶을 증명하기 위해 거대한 무언가를 세운다. 기념비를 올리고, 이름을 새기고, 흔적을 각인하려 한다. 그러나 타샤 튜더는 달랐다. 그는 헛간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에 멈춰 섰고, 연못 위에 흔들리는 나무 실루엣 앞에서 붓을 들었다. 금방 곁을 스쳐 간 작은 새 한 마리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 찰나들이 쌓여 백여 권의 그림책이 되었다. 기쁨은 특별한 날에만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다. 타샤의 삶을 들여다보면, 기쁨이란 원래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너무 빠르게 걸어서, 너무 큰 소리로 말해서, 듣지 못했을 뿐이다. 타샤는 평생 그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연습했다. 그리고 그 귀 기울임의 결과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묘한 감각이 찾아온다. 배경은 여백으로 비워두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화면 위에 올려놓는 방식. 그것은 기법이기 이전에 철학이었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조용히 비워두는 태도. 화려함 대신 본질을 선택하는 용기. 타샤의 그림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감각들이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홉 살에 부모의 이혼으로 낯선 집에 맡겨진 아이, 열다섯에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살기 시작한 소녀, 이혼 후 네 아이를 홀로 키우며 붓을 놓지 않은 여자. 타샤튜더의 이력은 어찌 보면 결핍의 연대기처럼 읽힌다. 그러나 그는 그 결핍을 결핍으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틈새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피워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다워지는 길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타샤는 그 길을 누군가에게 묻지 않았다. 스스로 걸어가며 발견했다. 19세기 방식의 삶을 고집하고, 골동품 옷을 입고, 손수 정원을 일구고, 인형을 만들고, 코기와 앵무새를 곁에 두며 그는 누구의 기대에도 맞추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삶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 작은 것들을 좋아해도 되는 걸까, 타샤의 삶은 그 물음에 대한 가장 조용하고 단호한 대답이다.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어떤 것 안에도 없다. 결국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온다. 타샤가 그린 따뜻한 풍경들은 타샤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면, 먼저 자기 안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먼저다. 56세에야 비로소 버몬트 산골에 자기 땅을 마련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꿈은 반드시 빠르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사람. 늦게 얻은 정원은 그래서 더 깊이 사랑받았고, 더 오래 가꾸어졌 으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 중 하나가 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누구에게나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모습이 있다고, 마치 달처럼. 타샤 역시 그 어둠을 몰랐을리 없다. 이혼의 상처,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지난한 세월, 낯선 집에 맡겨졌던 어린 시절의 고독. 그러나 타샤는 그 어두운 면을 지우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달이 뒷면을 감추고도 아름답게 빛나듯, 타샤는 자신의 그늘을 안고서도 기쁨을 그려냈다. 이것이 타샤의 그림이 위로가 되는 진짜 이유다. 그의 그림 속 풍경은 지나치게 완벽하지 않다. 아이들이 뛰노는 풀밭은 조금 어수선하고, 헛간은 낡았으며, 겨울 정원은 앙상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살아있는 것들의 따스함이 있다.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진짜인 것들. 타샤는 삶이 완벽해야 기쁨이 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쁨은 완벽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일상의 진정한 가치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말처럼, 타샤가 남긴 기쁨의 조각들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느껴지는 것이다. 비 온 뒤 뜬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처럼, 달빛이 호수에 내려앉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처럼. 그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이 실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라는 것을 타샤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평생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92세의 여름, 타샤는 평생을 사랑한 정원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백여 권의 그림책과,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와, 세계 최고의 1830년대 의상 컬렉션이 남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 있다. 기쁨이 무엇인지 묻는 태도. 작은 것들 앞에서 멈추는 용기.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다. 꿈은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기준이라는 말처럼, 타샤가 꾼 꿈은 거창하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가꾼 정원, 따뜻한 난로 앞의 동물들, 손주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담아낸 그림 한 정. 그것이 타샤의 꿈이었고, 타샤의 삶이었다. 좋은 것을 더 좋게, 더 좋은 것을 최고로 좋게 만들 때까지 쉬지 않는다는 정신이 그의 삶 전체에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경쟁이나 성취의 언어가 아니었다. 오늘보다 조금 더 아름다운 하루를 만들겠다는, 소박하고도 단단한 다짐이었다.

타샤 튜더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는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 그의 그림 속 햇살은 아직도 헛간 틈새를 비추고 있고, 그의 정원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계절을 바꾸며 피어나고 있다. 우리가 일상의 작은 기쁨 앞에서 잠깐 멈출 때마다, 타샤는 조용히 우리 곁에 앉아 함께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말없이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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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부자들의 지혜 - 6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재테크 불변의 법칙 ㅣ 굿라이프 클래식 시리즈
조지 S. 클레이슨 지음, 김잔디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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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돈의 역사는 더욱 집요하게 반복된다.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세워진 바빌론은 고대 도시만의 의미가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국제도시이자, 인구 20만 명을 품었던 이 거대한 문명은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질문에 이미 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부를 쌓고, 지키고, 키울 수 있는가?" 스마트폰으로 주식을 매매하고, 인공지능이 포트폴리오를 추천해 주는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월급날 통장을 바라보며 막막함을 느낀다. 이자율과 환율을 논하면서도 정작 지갑은 늘 비어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원칙의 부재일지도 모른다. 바빌론 부자들의 이야기가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읽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것은 금이 아니라, 황금보다 단단한 사유의 틀이었다.

바빌론의 현자 아르카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열 닢을 손에 쥐거든, 아홉 닢만 써라. 나머지 한 닢은 너의 것이다. 단순하다. 너무 나 단순해서 오히려 우리는 무시한다. 하지만 이 단순함 속에 현대 재무학이 말하는 '선저축 후지출(Pay Yourself First)' 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대인의 소비 구조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고, 쓰고, 남으면 저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남는 돈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소비는 수입을 언제나 앞질러 달려가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생활수준 인플레이션 (Lifestyle Inflation)'이라고 부른다. 월급이 오르면 씀씀이도 함께 오르는 현상이다. 바빌론의 현자들은 이 함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으면 저축'이 아닌 '먼저 저축, 그리고 나머지로 생활' 을 원칙으로 삼았다. 현대의 투자로 번역하자면, 이것은 급 여일 당일 자동이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수입의 10%는 손대지 않는 장기 투자 계좌로, 5~10%는 시장이 흔들릴 때를 대비한 현금성 예비 자산으로 분리해 놓는다. 그리고 나머지로 생활한다. 이 구조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어떤 훌륭한 투자 전략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심리적 전환이 필요하다. 저축과 투자를 '희생' 이 아닌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 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오늘의 소비를 줄이는 것이 현재의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드는 행위라는 인식의 전환 없이 는, 원칙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바빌론 사람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금융 기법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인식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이다. 자본이 형성되고 나면, 그 다음 질문이 찾아온다. 이 돈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 바빌론의 부자들은 돈을 단순히 모으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돈이 잠들어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낮에는 상단을 꾸려 교역에 나서고, 밤에는 대부업자로서 이자를 받으며 자본을 쉬지 않고 일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 복리(Compound Interest) 의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불렀다는 복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원금보다 이자가 이자를 낳는 구조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만들어낸다. 젊은 시절부터 소박하게라도 꾸준히 투자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종잣돈의 크기보다 시간의 길이가 복리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투자 환경에서 이 원칙을 가장 충실히 구현하는 도구는 인덱스 ETF와 배당 재투자(DRIP) 시스템이다. S&P 500이나 전 세계 시장을 추종하는 저비용 인덱스 펀드에 매월 일정 금액을 자동으로 투자하고, 발생한 배당금을 인출하지 않고 자동으로 재투자하는 방식은, 바빌론의 상인이 이익을 다시 교역에 투입하던 방식의 현대적 버전이다. 특별한 재능이나 시장 예측 능력 없이도, 시간과 일관성이라는 두 가지 무기만으로 자본은 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빌론이 경고한 함정이 있다. '변덕스 러운 운명의 여신', 즉 갑작스러운 행운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 노력없이 얻은 돈, 검증되지 않은 투기로 얻은 단기 수익은, 그것을 관 리하는 지혜와 그릇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더 정확히는, 원래보다 더 나쁜 자리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다. 벼락부자가 된 로또 당첨자의 비극적인 말로는 이 교훈의 현대적 증거다. 부는 시스템과 원칙 위에서만 지속 가능하며, 요행 위에 세운 자산은 모래 위의 성과 같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규칙 기반의 매도 원칙은, 시장이 공포로 가득 찼을 때 황금을 지켜주는 성벽이 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르겠지'라는 심리적 함정은, 작은 손실을 재앙으로 키우는 가장 흔한 경로다. 바빌론의 대부업자가 담보를 꼼꼼히 확인했듯이, 현대의 투자자는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미리 구축해야 한다. 바빌론의 지혜가 수천 년을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 조급함, 두려움, 나태함. 이것들은 기원전의 바빌론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도 똑같이 안고 있는 내면의 적이다. 복잡한 금융 공학과 화려한 투자 전략들이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원칙의 단순함이 빛을 발한다. 벌어라.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남겨라. 남긴 것은 쉬지 않게 하라. 쉬지 않는 자본을 잃지 않도록 성벽을 쌓아라. 그리고 배워라. 끊임없이, 겸손하게, 바빌론의 낙타 상인이 빚더미에서 일어서며 깨달았듯이, 결심이 서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 오늘의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종목 추천이나 비밀스러운 매매 기법이 아니다. 단순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원칙 하나를, 오늘 당장, 그리고 내일도, 실천하는 용기다. 황금은 그 용기에 응답한다. 3,000년 전에도, 지 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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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제인 오스틴 - 제인의 사람과 사랑, 문학에 대한 가장 내밀한 생각을 나눈 편지들
제인 오스틴 지음, 유혜인 옮김 / 이일상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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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제인 오스틴의 편지를 읽었던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오스틴을 소설가로만 알았고, 그 편지들도 소설의 연장선처럼 느꼈다. 언니 커샌드라에게 쏟아내는 무도회 이야기, 이웃의 사소한 험담,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그 모든 것이 경쾌하고 매력적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먼 시대의 재기 넘치는 여성이 남긴 기록 정도로 읽었다. 흥미로운 문학적 자료. 그게 전부였다. 그 책을 다시 집어 든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저녁이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펼쳤다. 그리고 첫 페이지부터 뭔가 달랐다. 분명히 같은 문장들인데, 다르게 읽혔다.

직장이라는 공간은 이상하다.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말 한마디를 뱉기 전에 이것이 적절한가를 따지고, 표정 하나를 지을 때도 상황에 맞는가를 계산한다. 처음에는 그 계산이 낯설고 피곤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당연해졌다.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조금씩 잊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오스틴의 편지 속 한 대목이 유독 눈에 걸렸다. 그녀는 언니에게 이렇게 썼다. 아일랜드 친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전하기가 두렵다고, 언니의 잔소리가 너무 심하니 둘이 함께 춤추고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최대한 방탕하고 충격적으로 상상하라고.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는 잔소리를 피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유머로 뒤집어버린다. 언니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 시선에 주눅 들지 않는다. 자신이 즐거웠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고수하면서, 동시에 언니와의 관계도 지켜낸다. 나는 그런 균형을 잃은 지 꽤 됐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오스틴은 또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언니가 어떤 집에서 '가구 중 하나 취급'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이 언니를 직접 설치한 적은 없지 않냐고. 신랄하고 유쾌한 문장이지만, 읽는 내내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가구. 그곳에 늘 있어서 아무도 존재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것.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체로 여겨지지도 않는 것. 직장에서 나는 가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 가구가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찰을 줄이고, 튀지 않고, 부드럽게 녹아들기 위해. 그것이 능숙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다운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놓친 것이 있었다. 오스틴이 언니에게 상기시켜 주듯, 가구는 설치되는 존재다. 누군가의 편의에 맞게 배치되는 것. 나는 그 배치에 너무 순순히 응하면서, 내가 어디에 서고 싶은지를 점점 묻지 않게 되었다.

오스틴은 편지에서 자신이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오로지 명성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이 문장을 대학 시절에 읽었을 때는 귀엽고 솔직한 자기 고백처럼 느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그 안에 다른 무게가 실려 있다. 명성이란 결국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이 인정받고 기억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 욕망을 그녀는 숨기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잘하고 싶다는 것, 인정받고 싶다는 것, 내가 한 일이 의미 있다고 여겨지기를 바란다는 것. 이런 욕망은 자칫 이기적이거나 유치한 것처럼 취급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고, 대신 팀을 위해서라거나 조직을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한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오스틴은 당당하다. 나는 명성을 위해 쓴다고. 그 솔직함이 지금의 나에게는 일종의 용기처럼 읽힌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그녀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오스틴의 편지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강요된 관용을 베풀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직접 그 생각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조카에게 자신의 물건을 주겠다고 결심하지 않겠다고. 얼핏 보면 인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다시 읽으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다. 마지못해 하는 친절은 친절이 아니라는 것. 진짜 다정함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강요된 관용'의 순간들이 온다.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동의하는 척해야 하는 회의, 별로 반갑지 않지만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자리, 억지로 짜낸 칭찬과 형식적인 응원. 그 모든 것이 조직을 매끄럽게 굴리기 위해 필요한 윤활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윤활유에 지쳐가고 있었다. 오스틴의 말은 그 피로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강요된 관용. 내가 지쳐 있던 것은 관계가 아니라, 자발성 없는 관계였다는 것.

오스틴은 조카에게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담은 편지를 여러 통 보냈다. 날카롭지만 따뜻하고, 정확하지만 격려를 잊지 않는 편지들. 그 편지들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단순히 재능 있는 소설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녀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언니에게, 조카에게, 세상에 솔직했다. 그리고 그 솔직함이 그녀의 문장을 200년이 넘도록 살아있게 했다. 다시 읽은 제인 오스틴의 편지는 문학적 자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과 나다움 사이에서 매일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보내온, 200년 전의 답장 같았다. 당신이 진짜로 즐거웠던 것을 기억하라고. 강요된 친절 말고 자발적인 다정함을 선택하라고. 검은 눈동자 같은 것에 솔직하게 끌려도 된다고. 그 목소리가 놀랍도록 선명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나다운 방식으로 누군가의 편지를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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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예술학 - 큐레이터와 예비 전공자를 위한 예술의 길잡이
홍보라매 지음 / 씨마스21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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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고, 역사적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며,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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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
박솔미 지음 / 북스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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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영문학 개론 수업 교수님이 칠판에 한 문장을 썼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소크라테스의 말이었다. 교수님은 분필을 내려놓으며 잠시 침묵했고, 강의실 안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노트에 그 문장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옆에 조심스럽게 번역을 달았다.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다 쓰고 나서 밑줄을 그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밑줄 하나 긋고, 노트를 덮었다.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문장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문장이 내 삶과 무슨 상관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토익 점수를 올려야 했고, 자기소개서를 다듬어야 했으며, 졸업 후의 진로를 걱정하느라 바빴다. 영어는 그렇게 점점 성찰의 언어가 아니라 스펙의 언어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그 이동을 눈치채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나는 영어 문장을 읽어도 '읽지' 않았다. 이메일을 해독하고, 계약서를 번역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다듬었다. 영어가 필요했고, 영어를 썼고, 영어로 일했다. 하지만 어느 문장 앞에서 멈춰 선 적이 없었다. 단어 하나를 두고 '이게 왜 이 단어여야 했을까' 하고 오래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 영어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로 사유의 공간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책을 읽으며, 한 문장을 만났다.

"True integrity comes when we stop seeking approval."

출처도 불분명했고, 누가 보내준 것도 아니었다. SNS 피드를 스크롤하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멈췄다. 'integrity'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말로 뭐라고 옮겨야 하는지, 사전적 정의는 알지만 이 문장 안에서 정확히 무슨 무게를 지고 있는지,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문장 앞에서 멈췄다.

'integrity'를 번역하려고 한참을 씨름했다. '정직함'이라 하기엔 도덕적 울림이 너무 표면적이고, '성실함'이라 하기엔 무언가 핵심을 비껴가는 느낌이었다. '온전함'은 근접했지만 조금 아쉬웠고, '완전함'은 결과의 뉘앙스가 너무 강했다. 무엇보다 이 단어에는 외부의 시선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어떤 고요하고 단단한 인상이 담겨 있었다. 그게 한 단어로 딱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 시절의 나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어림잡아 '성실함' 정도로 처리하고 다음 줄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애매함이 좋았다. 한 단어가 담고 있는 무게가 어느 언어의 그릇에도 완전히 옮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기보다는 경이로웠다. 그건 어쩌면, 내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감각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이 빠르게 처리된다. 감정도, 관계도, 생각도. 느리게 앉아서 한 문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는 일을 언제부턴가 사치처럼 여기게 되었다. 빠른 결론이 능력처럼 느껴지고, 긴 침묵은 비효율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장은 달랐다. 문장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틀린 번역이 있고 나쁜 번역이 있을 수는 있어도, 느린 번역이 나쁜 번역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 들여다볼수록 문장은 다른 층위를 드러냈다. 'integrity'가 단순히 '정직한 사람'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자기 내면의 나침반을 흔들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그 문장이 나에게 하는 말을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나의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영어 문장이 던진 질문이 이렇게 깊이 들어온 건 오랜만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아주 거창하게 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예전엔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을 문장에서 손가락이 멈추는 횟수가 늘었다. "Stay grounded." 요가 선생님이 즐겨 쓰던 표현인데, 어느 날 다시 읽었더니 삶 전체에 대한 조언처럼 들렸다. 흔들리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중심축이 어디인지 모를 때가 두렵다.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The way we talk to our children becomes their inner voice." 이 문장은 더 오래 앉아 있게 만들었다. 아이에게 하는 말이 결국 그 아이의 내면을 짓는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들도, 나의 내면을 계속 짓고 있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향해 내뱉는 말들을 돌아보게 됐다. 그 말들이 나를 자라게 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쪼그라들게 하는지. 번역을 하려다가 나 자신을 읽게 됐다.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셰익스피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말. 나의 언어로 너를 붙들어두겠다는 다짐. 그 오래된 문장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떤 문장을 붙들고 살아가고 싶은가. 어떤 말을 내 내면의 목소리로 삼고 싶은가. 대학 시절, 밑줄 하나 긋고 덮었던 노트를 이제야 다시 펼치는 기분이다.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문장은 기다려준다. 언제 돌아와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다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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