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
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자주 이런 느낌을 경험한다. 화면 앞에서 무언가를 입력하려다 멈추고, 이 선택이 정말 내 선택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AI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 없는 불안"이라고나 할까.. 무엇이 불안한지 설명할 수 없지만, 확실히 불안하다. LLM 생성형 인공지능이 일상으로 침투하면서 우리는 전대미문의 불확실성 속 으로 빨려들어갔다. 알파고가 바둑판 위의 불확실성을 정복했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불확실성은 우리 자신의 존재 위 에 걸려 있다. 내가 생각한 것도 누군가는 이미 생각했을지 모른다. 내 선택도 알고리즘의 예측 범위 안에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이 현대의 불안이다. EP문화와 이중구속. "직장에서는 유능한 동시에 여유로운 동료여야 하고, 집에서는 따뜻하면서도 간섭하지 않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낡은 시대의 말처럼 느껴진다. 이제 우리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동시에 해야 한다. AI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압박, 하지만 AI에 일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새로운 기술에 적응해야 한다는 명령, 그러나 그것이 인간성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경고. 우리는 '정상'이 무엇인지 모른 채 정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다. 이것이 현대적 노모패시(normopathy)가 아닌가 싶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단순히 실업의 공포가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나의 가치가 기 계적으로 계산될 수 있다는 생각, 내가 '대체 가능한 존재'로 환원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책에서 말하는 "피플 플리저"처럼 나도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역할이 이제는 인간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 해 정의되고 있을 뿐이다. 책은 상호주관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AI와의 상호작용에는 일방성이 있다. 나는 반응하지만, 그것이 정말 '반응'인지 의문이 든다. 더 정확히는 반응 의도의 흉내인 것 같다. 더 불편한 것은 이 일방성이 점점 양방성으로 착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AI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위로받고, 공감받는다고 느낀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건강한 상호주관성일까, 아니면 정교하게 설계된 환상일까? 책에서 말하는 "판타즘(환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은 아닐까 싶다. 내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나는 누군가와 진정으로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거울 속에서 나 자신의 반영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반영적 자기대상으로서의 AI를 무한정 추구하고 있는 것 같다. "너는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환상이다. 사후성의 의미도 흥미롭다. 의미 없이 숨겨져 있던 무의식적 기억이 시간이 흐른 뒤 '사후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 정신분석가 크리스토퍼 볼라스의 말이 떠오른다. "주체는 좀 늦게 현장에 도착한다." AI 시대에 우리는 이 사후성 자체 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경험, 선택, 감정이 모두 데이터로 변환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사후적으로 해석할 기회를 빼앗긴다. 대신 이미 해석된 데이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추천 알고리즘이 나를 정의하고, 트렌드 분석이 나의 미래를 예측한다. 역설적이다. 우리가 과거를 재구성할 자유를 잃을수록, 현재를 이해할 능력도 상실한다. 책에서 강조하는 이름 붙이기"의 능력 즉,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정의하고 의미화하는 능력이 가장 절실해진다. 하지만 그 이름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는 중이다. 책은 희망적이다. "모호함을 견디는 것은 회피와 다르며, 성급한 단정을 유예하는 태도다." 그리고 "가짜 안전감 속에 숨 어 있는 것은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내 불안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것이다: 현대는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을 빼앗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요구한다. AI 시대의 불확실성은 과거의 그것과 다르다. 과거의 불확실성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불확실성은 "이미 알려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의된 나'를 마주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제시하는 길은 명확하다. 양가감정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모호함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 없는 마음에 이름을 붙이면 막연하기만 하던 불안과 공포는 다룰 수 있는 마음이 된다. LLM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과의 경쟁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그 불안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심리적 성숙함이다. 알고리즘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불안을 마주하고 있는 이 주체의 얼굴이다. 우리는 좀 늦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다. AI가 쓴 시나리오 위에 손글씨로 우리의 경험을 적을 수 있다. 그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주국방의 가성비 - 대한민국, 누가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정욱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절규가 유럽을 뒤흔들고, 중동은 또 다른 화염에 휩싸여 있다. 미국은 '아틀라스처럼 세계 질서를 홀로 떠받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고, 중국은 동북아의 패권을 노리며 조용히 움직인다. 이런 시대에 한반도는 어디로 가야 할까? 정욱식 소장의 <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외쳐온 자주국방은 진정한 자주성이 아니라, 대미 의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명분 위주의 담론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쏟아부은 국방비는 천문학적이다. 2003년부터 2025년까지 총 865조 원이라는 거대한 숫자 뒤에는 깎아지른 절벽처럼 높아진 군사비 부담이 있다. 이재명 정부는 2026년을 전시작전권 회복 원년으로 삼고 2028년 최종 환수를 목표로 하면서 국방 예산을 66조 2947억 원으로 편성했다. 그것도 7년 만에 가장 큰 폭인 8.2% 인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날카롭다. 우리는 정말 자주국방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것일까, 아니면 미국이 그리는 '약탈적 패권주의'의 더 깊은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무현 정부는 자주국방의 꿈을 품고 2012년 12월 전시작전권 환수를 선언했다. 그것이 20년 전의 일이다. 20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미로 속을 헤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의 유산"이라며 발을 빼 버렸고, 박근혜 정부도,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정권 간 쟁점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 국방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하나의 증거다. 작전권을 평시와 전시로 나누는 것 자체가 이미 기형적이다. 마치 축구 대표팀의 감독을 평소에는 한국인이 맡다가 대회 때는 외국인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더 심각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미국의 자동 개입 조항이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자국의 이익과 배치된다고 판단하면 손을 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상 국군통수권자이면서도 전쟁과 평화의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갖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주국방이 언제나 '그림의 떡'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전시작전권 환수라는 형식적 절차만으로는 진정한 자주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패권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최근 이란 침공도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 이것이 미국 패권의 종말을 의미할까? 패권의 종말이 아니라 패권의 '변질'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고, 달러는 국제 금융의 중심이며, AV 등 첨단기술에서도 선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달라진 것은 다극화 추세다. 중국이 강해지고, 러시아가 호전성을 드러내고, 글로벌 사우스가 부상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약탈적 패권주의'다. 미국은 이제 만만한 동맹국들의 팔을 비틀어 경제적• 상업적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한국에 대해 국방비 증액과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면서도, 한국의 주권에는 눈을 감고 있다. 주한미군에 한국 영토를 "발진기지"나 "중간기지"로 사용할 권리를 달라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봉착한 딜레마다. 우 리가 전시작전권을 회복해도,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의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군은 휴전선과 북방한계선 이남 영토를 넘어, 헌법 제3조의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한 다. 이것이 상당한 규모의 군사력 건설과 훈련을 요구하게 만든다. 한미연합사의 작전계획도 '방어와 격퇴'를 1단계로, '반격과 점령'을 2단계로 설정했다. 이러한 높은 군사 목표는 전시작전권 환수 조건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동시에 조선의 핵• 미사일 강화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제공한다. 만약 한국이 흡수통일 계획을 명시적으로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먼저 국 방비 소요를 대폭 줄일 수 있다. 국방 예산을 동결하면서도 현재보다 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재정립이다. 조선이 '적대적 두 국가론'과 '한국에 대한 불변의 주적' 입장을 고수하는 핵심 이유가 바로 한국의 유사시 무력흡수통일론이다. 한국이 이를 명시적으로 포기한다면, 조선도 입장을 바꿀 여지가 생긴다. 이는 이재 명 정부가 천명한 "흡수통일 배제"와도 정확히 부합한다. 가장 현실적인 제안은 평화협정 체결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실 용적 자주국방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일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우리에게 행운일 수도 있다. 미국 패권의 약화, 미중관계의 변화, 트럼프 행정부의 현실주의적 외교, 이 모든 것이 한반도에 평화의 문을 열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적 자주국방'은 기존 자주국방론의 화려한 수사를 거둬내고 현실의 제약 조건 속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는 전략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선택의 순간 앞에 있다. 우크라이나처럼 무한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변화된 국제 정세를 현명하게 활용하여 진정한 자주성과 안정을 동시에 확보할 것인가. 그 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읽고 읽고 말하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나도 누군가와 정기적으로 만나 책을 소리 내어 읽고, 그 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것이 이 풍성하고 복잡한 소설이 내게 남긴, 가장 소박하고도 가장 큰 선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읽고 읽고 말하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소설 <읽고 읽고 말하다(よむよむかたる)>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소설이 '읽는 행위'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타루의 작은 찻집, 카페 시트론에 모이는 여섯 명의 노인들과 스물여덟 살 청년 야스다. 그들 사이에는 육십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지만, 책 한 권을 함께 소리 내어 읽는 순간만큼은 그 간극이 무색해진다. "재밌겠다, 재밌겠어, 나 아흔 두 살 두근두근, 콩닥콩닥, 셀 수 없이 많지, 고를 수 없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설렘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그리는 노년의 얼굴이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나이 든다는 것을 그저 상실의 연속으로만 생각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기력이 줄고, 곁을 지키던 이들이 하나둘 떠나고,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것. 그러나 이 소설 속 노인들은 서로의 부고 소식보다 다음 달 첫 금요일의 독서 모임을 더 간절히 기다린다. "최고의 동료들과 보내는 최고의 시간이 매달 첫 번째 금요일에 기다리고 있다." 이토록 소박하면서도 확실한 기쁨이라니. 스무 해 동안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이루어져 온 약속이라니. 나는 그 꾸준함 앞에서 오히려 내 삶의 조급함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편으로 책은 읽는다는 행위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계속해서 일깨운다. 야스다는 회원들이 낭독하는 것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이 이야기를 저마다 경험하고 있다." 나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우리는 결코 같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기억과 상실과 사랑이 문장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아내를 먼저 보낸 회원의 고백, "아내가 그어놓은 밑줄이나 본인만 읽을 수 있게 써놓은 메모가 깜짝 선물처럼 튀어나오는 겁니다"라는 말은, 책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임을 보여준다. 그는 병상의 아내에게 책을 읽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그저 목소리로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결코 노년을 미화하지 않는다. 회장이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애틋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 다른 회원이 불쑥 끼어들어 분위기를 깨뜨리는 장면처럼, 일상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고 다소 무례하며, 그래서 더욱 생생하다. 죽음의 그림자는 소설 내내 은은하게 드리워 있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불현듯 표면으로 떠오른다. 늘 기운차고 제멋대로였던 노인들이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순간, 나는 이 모임이 왜 그토록 간절하게 매달 한 번의 만남을 지켜왔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을 덮으며 나는 읽는다는 것이 결국 함께 늙어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혼자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시간도 소중하지만, 누군가와 한 문장을 나누어 읽고, 그 문장이 서로에게 어떻게 다르게 스며드는지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각자의 고독에서 벗어난다. 카페 시트론의 여섯 노인과 야스다처럼, 언젠가 나도 누군가와 정기적으로 만나 책을 소리 내어 읽고, 그 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것이 이 풍성하고 복잡한 소설이 내게 남긴, 가장 소박하고도 가장 큰 선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남은 것은 "왜 아픈 것을 알고 싶어 하느냐"는 할머니의 질문이었다. 마거릿 주해 리에게 할머니가 던진 이 짧은 질문 속에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족 안에 존재할지 모르는 침묵의 이유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믿음, 그리고 그 침묵이 다음 세대에게는 오히려 정체성의 공백으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책을 통해 선명하게 다가왔다.

책은 표면적으로는 한 여성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역사 탐구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저자는 할아버지가 "범죄자"라는 말만 듣고 자랐다. 그 오해와 침묵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고, 그 결핍은 다시 저자에게로 이어졌다. 휴스턴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극히 드물었던 도시에서 자라며 느낀 소외감, "어디서 진짜로 왔느냐"는 반복된 질문들,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경험들이 결국 할아버지의 진실을 찾아 나서게 만든 근본적인 동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족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세대 간 트라우마"다.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이 개념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단어를 접했을 때, 자신이 오랫동안 느껴온 결핍과 공허함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흔히 부모 세대가 겪은 고통이 자녀에게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말하지 않음, 침묵 그 자체가 하나의 유산처럼 대물림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민자 가정에서 부모 세대가 "생존 모드"로 살아가며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자녀에게 전하지 않으려 했던 선택이, 역설적으로 다음 세대에게는 뿌리 없는 불안으로 남는다는 통찰은 비단 한인 이민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진실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마음을 움직인 부분은 진실이 밝혀진 이후 아버지의 변화에 대한 묘사였다. 평생 과묵하고 근엄했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진짜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다정하고 사교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일화는, 우리가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조차 사실은 채워지지 않은 상실과 결핍의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버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아버지, 곧 할아버지의 이야기,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앎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결국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그 공백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대목에서는, 한 세대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다음 세대를 위한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한 개인의 가족사를 넘어,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 침묵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 그리고 뒤늦게라도 그 침묵의 이유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난 지금, 나는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 가족에게 뿌리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우리 각자에게도 아직 다 묻지 못한 질문들,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울림은, 그 질문을 던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용한 격려였다. 역사는 가만히 두면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먼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책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