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은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 - 복종 본능에서 깨어나 주체성을 회복하는 행동과학
수니타 사 지음, 이윤정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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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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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는 수없이 들었다. 말 잘 들어야 착한 아이지." "어른 말씀에 토달지 마라." "분위기 파악해라." 이 말들은 훈육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순응이 미덕이고, 저항은 결례라는 세계관. 그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먼저 배우고,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은 나중으로 미루거나 영영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분명히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주변의 시선과 분위기와 기대가 나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순간. 그 순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궤적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된다. 저항이란 단지 반항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행위다.


우리가 '저항'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거칠고, 시끄럽고, 공격적인 무언가다. 주먹을 쥐고 고함치는 모습, 혹은 권위에 맞서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 그러나 이것은 저항의 본질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진정한 저항이란 외부의 압력이 존재할 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큰 소리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저항은 조용하고 단단하다. 외과 의사가 동료의 실수를 목격했을 때 "잠깐만요, 다시 확인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 회의실에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라고 손을 드는 것, 혹은 불합리한 지시 앞에서 "이건 제 양심에 반합니다"라고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모든 것이 저항이다. 중요한 것은 저항이 타인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정직함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관을 억누르고 순응할 때, 가장 먼저 배신당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저항은 그 배신을 거부하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저항은 폭력이 아니라 자기 보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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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사회는 어느 정도의 순응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신호등 앞에서 멈추고, 줄을 서고, 공공 규칙을 따르는 것은 문명의 기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순응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순응해서는 안될 순간에도 순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 상사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 의료 현장에서 동료가 실수를 저지를 때, 가족 안에서 불합리한 일이 반복될 때,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선택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상 관리'에 대한 불안이다. 내가 이의를 제기하면, 상대방은 내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을까? 관계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이 불안이 우리를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반복되는 침묵은 우리 내면에 조용히 쌓인다. 처음에는 작은 불편함이지만, 그것이 누적되면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한다. '나는 왜 그때 아무 말도 못 했을까'라는 자책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가치관이 무엇인지조차 흐릿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순응의 비용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치러지고 있으며, 그 정 구서는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날아온다.


우리는 종종 역사 속 위대한 저항을 마치 운명처럼 이야기한다.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 한 청소년이 권력자의 부당한 행위를 카메라에 담은 것, 이런 행동들을 '타고난 용기'나 '운명적 순간'으로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로자 파크스는 그 순간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준비하고 훈련해 온 사람이었다. 저항은 즉흥이 아니라 축적의 결과물이었다. 저항은 천성이 아니라 연습이다. 마치 근육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지고 꾸준히 단련하면 강해진다. 작은 일상 속에서의 연습이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낸다. 원하지 않는 약속을 정중하게 거절해 보는 것,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라고 말해 보는 것, 불편한 상황에서 즉각 동의하지 않고 "생각해 볼 시간을 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것. 이런 소소한 저항의 연 습들이 뇌의 회로를 바꾼다. 또한 중요한 것은 자기 내면의 신호를 감지하는 훈련이다. 위기의 순간, 많은 사람들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속이 불편하거나 목이 마르거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신체 반응이 먼저 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호를 무시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별거 아니겠지", "다들 괜찮다고 하니까"라며 자신의 직관을 억누른다. 저항을 훈련한다는 것은 그 내면의 신호를 억누르지 않고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저항이 삶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안으로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밖으로의 영향이다. 내면의 변화.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저항을 경험한 사람은 공통적으로 비슷한 감정을 묘사한다. 두려웠지만 살아 있는 느낌, 어색했지만 진실했던 경험, 결과가 두렵지만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확신. 그것은 '나는 내 삶의 주체'라는 감각의 회복이다. 오랫동안 타인의 기대와 사회의 압력에 맞춰 살아온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순간, 그 경험은 삶 전체를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어떤 관계가 진정한 관계인지,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이 비로소 의미있게 다가온다. 다음으로 외부로의 영향. 저항은 혼자만의 변화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저항은 반드시 주변에 파문을 일으킨다. 한 어머니가 위협적인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는 모습은 그 자리에 있던 자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직장에서 혼자 이의를 제기한 동료의 용기는 침묵하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 "나도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씨앗을 심는다. 이것이 저항의 도미노 효과다. 역사적인 변화는 언제나 한 사람의 작은 저항에 서 시작되었다. 그 저항이 누군가를 깨우고, 그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깨우는 연쇄 반응 속에서 세상은 조 금씩 달라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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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삶의 모든 불편함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저항에는 반드시 비용이 따른다. 관계의 균열, 직업적 불이익, 때로는 물리적 위험까지. 따라서 저항은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핵심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이 상황에서 저항하는 것이 충분히 안전한가? 완전히 안전한 저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위험이 감당 가능한 수준인지를 가늠해야 한다. 둘째, 이 저항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의 저항은 때로 희생만을 남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너무 쉽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합리화 뒤에 숨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이 실제적인 위험인가, 아니면 단지 불편함인가? 또한 저항은 반드시 극적인 행동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제가 동의하지 않지만, 이 부분을 더 논의해 볼 수 있을까요?"라는 한 문장이 충분한 저항이 된다. 저항의 크기와 형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관을 완전히 묻어버리지 않는 것, 내면의 목소리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저항이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저항은 삶을 자신에게 돌려준다. 우리는 오랫동안 타인의 기대, 사회의 규범, 권위의 명령에 맞추어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을 조금씩 빌려주어 왔다. 저항은 그 빌려준 것들을 되찾아 오는 행위다. 그것은 화려한 선언이 아니어도 좋다. "이번엔 아니요"라는 조용한 한 마디로 시작될 수 있다. 저항은 개인을 변화시키고, 개인의 변화는 관계를 변화시키고, 관계의 변화는 조직을 변화시키고, 조직의 변화는 사회를 변화시킨다. 이 연쇄가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한 사람이 자신의 내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로 결심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는 완전히 순응하는 삶도, 완전히 저항하는 삶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삶을 원한다면, 적어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만큼은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용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작은 선택들 속에서 하나씩 키워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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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제인 오스틴 - 제인의 사람과 사랑, 문학에 대한 가장 내밀한 생각을 나눈 편지들
제인 오스틴 지음, 유혜인 옮김 / 이일상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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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다운 방식으로 누군가의 편지를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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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책을 읽다 보니 작가가 되었다
박상호 지음 / 미래북(MiraeBook)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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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삶을 바꾼다는 말을, 한동안 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믿어버리면 읽지 않는 나 자신을 변명할 수 없게 되니까. 그런데 한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사람이 경험한 것들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향을 잃고, 흘러가는 대로 살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감각은 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 막막함. 그건 꽤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안고 살아가는 감각이다.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변화의 속도였다. 독서를 시작했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뒤집히지는 않는다. 그 사람도 그랬다. 하루 5분, 때로는 한 페이지, 완독하지 못한 책들이 쌓여가는 동안 겉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 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람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던 사람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불평하던 사람이 방법을 찾기 시작했으며, 두려움 앞에 멈춰 서 있던 사람이 작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변화를 너무 극적인 것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고, 결심이 서고, 모든 것이 달라지는 그런 순간. 그러나 실제 변화는 그런 식으로 오지 않는다. 변화는 어느 날 돌아보았을 때, 내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반드시 긴 시간의 축적 뒤에 찾아온다. 독서가 바로 그 축적의 방식이라는 것. 그게 이 책이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책에서 내가 오래 생각한 부분은 결핍에 관한 시선이었다. 우리는 보통 결핍을 빨리 채워야 할 무언가로 본다. 부족하면 불안하고, 불안하면 채우려 하고, 채우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결핍의 자리를 달리 바라본다. 부족한 곳이야말로 더 나은 내가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라고. 빈 곳이 있어야 무언가가 채워질 수 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위로의 수사처럼 들렸다. 그러나 천천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결핍을 결함으로 보느냐, 가능성의 여백으로 보느냐, 그 시선의 차이는 실제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결핍을 결함으로 보는 사람은 끊임없이 방어적이 된다. 숨기고, 채우는 척하고,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산다. 반면 결핍을 여백으로 보는 사람은 부족함 앞에서 조금 더 열려 있을 수 있다. 배울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다. 독서가 그 시선을 바꿔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책 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고, 때로는 그 결핍이 그들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다 보면, 나의 부족함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니까.

한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감정에도 통로가 있어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해서 자꾸 담아두고 억제하면 긍정적인 감정까지 나오지 못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성숙함이라고 배운다. 화내 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힘들어도 티내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나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쌓이고 굳어져서, 나중에는 긍정적인 감정조차 흘러나오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독서는 그 통로를 열어주는 방식 중 하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책 속의 누군가가 나 대신 아파하고, 화내고, 두려워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 면, 억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것은 카타르시스이기도 하고, 일종의 연습이기도 하다. 감정이 흘러갈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연습이다. 그 연습이 쌓이면, 외로움과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책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라도 괜찮아졌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극복이 아닌 공존. 그것이 훨씬 더 현실적인 마음의 방식이라는 것을 독서는 가르쳐준다.

책은 완벽하게 쓸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말한다. 완성도보다 완주가 중요하다고. 그 말은 글쓰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삶의 많은 순간에 우리는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느라 시작을 미룬다. 충분히 알게 되면, 충분히 강해지면, 충분히 준비되면 그러나 그 충분함은 대개 영원히 오지 않는다. 불완전하게라도 시작한 것들이 결국 사람을 만든다. 그 사람이 책을 통해 배운 것도,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내가 다시 떠올리게 된 것도 결국 그것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더 잘 읽는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습관이 바뀌거나, 삶이 드라마틱하 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달라진 것 같다. 책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책이 나를 나 자신과 연결해주는 시간이라는 생각이다.

책의 저자가 말했듯 독서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생각하는 근육을 키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근육이 생기면, 삶이 흔들릴 때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서도 걸을 수 있게 된다. 답을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방향만 보여줘도 충분하다. 그리고 오늘, 조용히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 그것이 이미 방향을 향한 한 걸음이라는 것을 이 책은, 그리고 이 사람의 이야기는 말해주고 있었다. "인생의 길을 잃었을 때 책은 방향을 제시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 때 책은 속도를 늦추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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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작은 미술관 - 골목길에서 만나는 예술가들의 삶
김정화 지음 / 쌤앤파커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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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름 휴가를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책을 펼쳤다. <파리의 작은 미술관>. 제목부터가 이미 어딘가로 데려가는 느낌이었다. 루브르나 오르세 같은 이름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름들을 한 발짝 비켜선 자리에서 시작했다. 크고 화려한 것들 뒤에 숨어 있는, 조용하고 밀도 높은 공간들 이야기였다. 읽다 보니 어느새 나는 파리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아직 비행기표도 사지 않았는데. 책 속에서 들라크루아는 60이 다 된 나이에 이사를 했다. 오래 사귄 친구들과 익숙한 동네를 뒤로하고, 센강 좌안의 좁은 집으로 향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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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다 되도록 끝내지 못한 생쉴피스 성당의 벽화. 집 골목을 나와 대로를 건너면 바로 성당이 보이는 자리. 그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 작업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시 배치했다. 잠시 멈췄다. 왜일까. 아마도 그 결심이 너무나 예술가답지 않은 방식으로 예술가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뭔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그냥 성당 가까운 데로 이사를 했다는 것. 그 평범함 속에 깊은 집념이 있었다. 그가 수첩에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을 읽었을 때는 더 오래 멈췄다. 회화의 첫 번째 장점은 눈에 축제가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가, 끝에 가서는 많은 눈이 가짜이고 생기가 없다고 했다. 죽기 두 달 전의 문장이다. 축제와 허무가 한 문장 안에 공존하는 그 글에서, 나는 오래 그 림을 사랑해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체념과 갈망의 뒤섞임을 느꼈다. 진정으로 보는 눈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들라크루아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눈을 갖고자 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미술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 앞에 서서 뭔가를 느끼긴 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언어화하기가 어렵다. 설명을 읽으면 고개는 끄덕이지만 내 것이 된 느낌은 아니다. 그러다가 어떤 그림 앞에서 갑자기 이유도 모르게 오래 서 있게 되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아, 이게 미술이구나, 싶어진다. 책이 흥미로웠던 건 그 '이유도 모르게 오래 서 있게 만드는' 감각을 언어로 풀어주기 때문이었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의 수련 연작 앞에서 저자가 쓴 대목. 크고 굵은 붓질이 화면을 쓸고 지나간 듯 하다고, 전체가 붉은색으로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이게 모네 그림이라고?' 놀라며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그 전시실 안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네가, 사실은 훨 씬 더 격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폴 마르모탕이 인상주의를 가리켜 "이게 회화라고, 아니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고 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한 시대의 혁신은 항상 누군가에게 모욕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모욕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 세기를 건너 남는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 발언을 남긴 마르모탕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에서, 지금 그토록 혹독하게 비난했던 인상주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의 어떤 유머처럼 느껴졌다. 로댕 미술관의 이야기는 또 달랐다. 손만 모아놓은 전시실이 있다는 것. 사람의 손이 그렇게 많은 표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외로움의 비탄, 고통의 절규, 창조주의 힘, 은밀한 비밀. 조각이라는 건 결국 형태로 감정을 번역하는 일인데, 로댕은 그걸 신체의 일부만으로도 해냈다는 것이다. 두 개의 오른손이 맞닿아 기도와 사 랑을 표현한 <대성당>. 나는 이 작품을 아직 실물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미 그 손이 어떤 감촉인지 알 것 같 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귀스타브 모로의 이름은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신고전주의도, 낭만주의도, 사실주의 도, 인상주의도 아닌, 어떤 화풍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화가. 그 설명을 읽으며 나는 그가 궁금해졌다. 살로메를 에로티시즘과 신비함이 뒤섞인 팜파탈로 그렸다는 것, <환영>에서 허공에 빛을 발하며 등장하는 잘린 요한의 머리가 그 신비함을 더한다는 것. 미술사의 주류에서 비켜서 있으면서도, 아무도 흥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3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의 곡선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고, 그러고 나서 야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묘사. 공간 자체가 감상의 일부가 된다는 이야기가 내 상상 속에 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몽마르트르 미술관의 장에서는 로트레크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귀족 혈통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장애를 갖게 된 후 몽마르트르의 밤 속으로 걸어들어간 화가. 그를 편안히 받아준 건 술집과 유곽의 여인들이었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일상을 기록하듯 그림을 그렸다. 향락에 취해 있으면서도 어딘지 외 로움이 배어 있는 실루엣들. 그것이 그가 남긴 몽마르트르의 얼굴이라는 문장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유흥과 고독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들이 그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수잔 발라동은 또 얼마나 강렬한가. 몽마르트르 골목의 천덕꾸러기 소녀가, 화가들의 모델로 청춘을 보내다가, 독학으로 붓을 잡아 중년에 당당한 화가가 되었다. 몽마르트르였기에 가능했던 인생이라는 표현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그 언덕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그 시대를 몸으로 통과한 사람들의 숨결로 이루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사랑하는 여자가 바뀌면 화풍도 바뀌었다는 문장이 강하게 남았다. 심장이 뛰는 대로 사랑하고, 숨 쉬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는 표현. 예술과 삶이 그토록 밀착되어 있다면,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삶 자체를 목격하는 경험일 것이다. 자코메티 미술관 이야기의 끝에서는 한동안 책을 덮어야 했다.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날, 동생 디에고는 부랴부랴 작업실로 달려가 형이 작업하던 조각에 젖은 천을 덮었다. 마르지 않도록. 부인 아네트는 벽체의 드로잉까지 떼어 보존했고 낡은 의자 하나, 화병 하나, 먼지조차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의 자코메티 미술관 이 되었다는 것. 사랑이 미술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파리 여행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찾아 인파를 헤치는 것도 물론 파리다. 하지만 그 번잡함을 한 발짝만 비켜서면, 한 인간의 생애 전체가 농밀하게 응축된 공간들이 골목마다 숨어 있다는 것. 그 공간들은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술가가 살았던 시간 그 자체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여름, 나는 그 골목들을 걷고 싶다. 들라크루아가 생피스 성당까지 걸었을 좁은 길을, 자코메티가 비 오는 날 건너갔을 알레지아가를, 로트레크가 밤마다 드나들었을 몽마르트르의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를, 그리고 어떤 그림 앞에서 이유도 모르게 오래 서 있게 되는 그 순간을, 올여름 파리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보들레르가 들라크루아를 두고 했다는 표현이 자꾸 떠오른다. 꽃다발 같은 겉 모습에 예술적으로 감춰진 화산 분화구. 어쩌면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그런 곳이 아닐까. 겉으로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이지만, 그 골목 깊숙이에는 한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뜨거운 잔 열이 남아 있는 도시. 그 열기를 느끼러, 이번 여름 나는 파리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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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시작 - 편안하게 마음을 여는
아가와 사와코 지음, 박재영 옮김 / 밀리언서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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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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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마주 앉아, 커피잔을 감싸 쥔 두 손이 어색하게 떨리는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 말들이 뒤엉켜 있는데, 막상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침묵이 공기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고, 그 무게가 가슴을 짓누른 다. 결국 참다못해 꺼낸 한마디는 “날씨가 참 좋네요" 같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말이다. 이상하다. 친한 친구와 있을 때는 끝도없이 이야기가 쏟아지는데, 왜 낯선 사람 앞에서는 그토록 말이 막히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안고 산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원인을 자신의 말솜씨 부족에서 찾는다. 나는 말재주가 없다고, 원래 조용한 사람이라고, 타고난 성격 탓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말솜씨의 부재가 아니라, 말을 시작하는 방식의 문제다. 화려한 언변이나 재치 있는 농담이 없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다. 상대가 편안하게 느끼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 순간이 찾아오면, 말은 저절로 흐른다.


우리는 흔히 대화를 '정보의 교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상대가 그것을 받아 대답하는 구조. 하지만 실제 대화의 본질은 그보다 훨씬 감각적인 데 있다. 대화는 사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율하는 행위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무의식중에 상대와의 거리를 측정한다. 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다가가도 될까. 어느 정도의 농담이 허용될까. 이 주제는 불편하지 않을까. 그 미묘한 감각들이 대화의 온도를 결정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측정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데 있다. 잘못 다가갔다가 경계를 침범할까봐, 말이 어긋나 분위기를 망칠까봐, 그래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침묵은 그렇게 선택된다. 실수하지 않기 위한 가장 안전한 도피처다. 그러나 침묵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의 메시지다. 관심이 없다는 신호로 읽힐 수도 있고, 차갑다는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오히려 어설프게 꺼낸 한마디가, 계산된 침묵보다 훨씬 따뜻하게 전달될 때가 많다. 말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단순히 소리를 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다.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당신과 연결되고 싶다는 작은 용기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어떤 첫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열고, 대화의 물꼬를 자연스럽게 트는 걸까. 첫 번째 조건은 '나'보 다 '상대'를 먼저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다. '무슨 말을 해야 잘 보일까', '어떻게 하면 재미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향해 있다. 그래서 긴장한다. 그래서 말이 막힌다. 반면 편안하게 말문을 여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의 시선은 상대를 향해 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 이 자리가 편안해 보이는가, 어색해 보이는가.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그 작은 관찰이 말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상대에게서 찾아낸 한 가지 단서가, 어떤 공들여 준비한 멘트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대화의 시작이 된다. 두 번째 조건은 완벽한 말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침묵에 갇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완벽한 말을 찾기 때문이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완벽한 의견, 모두를 웃게 만들 완벽한 농담, 상황에 딱 맞는 완벽한 한마디. 그런 것을 찾느라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말을 검열하다 보면, 그 사이에 대화의 물결은 이미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린다. 편안한 대화는 완벽함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의 불완전함, 살짝의 어색함이 대화를 인간적으로 만든다.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 상대의 말에 작게 반응하고,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얹고, 그렇게 천천히 대화의 강물에 발을 담그면 된다. 세 번째 조건은 불행도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화의 소재로 밝고 긍정적인 것만 꺼내려 한다. 그래야 상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종종 작은 실패담이나 소소한 불행이다. 오늘 길을 잃었다는 이야기, 아침에 커피를 쏟았다는 이야기, 어제 이상한 꿈을 꿨다는 이야기. 이런 사소한 고백들이 '나도 그래'라는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 공감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다. 혼자 감당하던 일도 말로 꺼내는 순간 이야기가 되고, 때로는 웃음이 된다. 대화는 그렇게 치유의 기능도 갖는다. 완벽하고 빛나는 이야기만이 대화의 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허술함과 솔직한 감정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대화의 씨앗이다.


말의 온도, 표현의 방식, 어떤 주제를 선택하느냐, 이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때로는 다가서는 것만큼 물러서는 것도 중요하다. 관계가 삐걱거릴 때, 억지로 말을 이어가려 할수록 상황은 더 꼬이기 마련이다. 그럴 때 잠시 침묵을 선택하는 것, 거리를 두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를 지키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마주했을 때, 갈등의 원인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상대의 좋은 면만 남아있는 경험을 해본 사람 이라면 알 것이다. 반대로, 낯선 환경에서 말을 먼저 건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자리에서 나만 이방인일 때, 먼저 미소를 짓고 간단한 인사를 건네는 것. 그 작은 한 발짝이 종종 예상치 못한 연결을 만들어낸다. 이미 위계가 정해진 자리에서는, 가장 조용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대화 전체의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화학반응처럼, 한 사람에게 건넨 관심이 자리 전체를 살아있게 만든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말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있으면, 말하는 사람은 불안해진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걸까, 관심이 없는 걸까. 그 불안이 쌓이면 대화는 멈춘다. 반면 작은 추임새 하나, 가벼운 고개 끄덕임 하나가 상대에게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말이 없어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눈빛, 표정, 몸의 방향, 상대를 향한 집중. 이것들이 모여 대화의 분위기를 만든다. 결국 편안한 대화의 시작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된다. 상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마음, 내 이야기보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 완벽하지 않 아도 괜찮다는 여유.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말은 자연스럽게 흐른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기를 원한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받고, 함께 웃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능 중 하나다. 그 욕구가 있음에도 말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상대가 냉담하게 반응하면 어떡하지, 말이 어긋나면 어떡하지 걱정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말을 건넸다가 실패한 경험보다, 말을 건네지 못해 아쉬웠던 경험이 훨씬 많지 않은가. 그 자리에서 한마디만 했더라면 이어졌을 인연, 조금 더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깊어졌을 관계, 용기 내어 먼저 다가갔더라면 달라졌을 순간들이다. 유창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다. 재치 있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편안하게 말문을 여는 것은,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오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는 것,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안부 문자 하나를 보내는 것,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자리에서 작은 실수담 하나를 꺼내는 것이다. 말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진심을 담아 상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그 한마디, 그것이면 충분하다. 대화는 언제나 그 작은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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