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작은 미술관 - 골목길에서 만나는 예술가들의 삶
김정화 지음 / 쌤앤파커스 / 202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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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름 휴가를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책을 펼쳤다. <파리의 작은 미술관>. 제목부터가 이미 어딘가로 데려가는 느낌이었다. 루브르나 오르세 같은 이름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름들을 한 발짝 비켜선 자리에서 시작했다. 크고 화려한 것들 뒤에 숨어 있는, 조용하고 밀도 높은 공간들 이야기였다. 읽다 보니 어느새 나는 파리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아직 비행기표도 사지 않았는데. 책 속에서 들라크루아는 60이 다 된 나이에 이사를 했다. 오래 사귄 친구들과 익숙한 동네를 뒤로하고, 센강 좌안의 좁은 집으로 향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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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다 되도록 끝내지 못한 생쉴피스 성당의 벽화. 집 골목을 나와 대로를 건너면 바로 성당이 보이는 자리. 그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 작업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시 배치했다. 잠시 멈췄다. 왜일까. 아마도 그 결심이 너무나 예술가답지 않은 방식으로 예술가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뭔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그냥 성당 가까운 데로 이사를 했다는 것. 그 평범함 속에 깊은 집념이 있었다. 그가 수첩에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을 읽었을 때는 더 오래 멈췄다. 회화의 첫 번째 장점은 눈에 축제가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가, 끝에 가서는 많은 눈이 가짜이고 생기가 없다고 했다. 죽기 두 달 전의 문장이다. 축제와 허무가 한 문장 안에 공존하는 그 글에서, 나는 오래 그 림을 사랑해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체념과 갈망의 뒤섞임을 느꼈다. 진정으로 보는 눈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들라크루아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눈을 갖고자 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미술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 앞에 서서 뭔가를 느끼긴 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언어화하기가 어렵다. 설명을 읽으면 고개는 끄덕이지만 내 것이 된 느낌은 아니다. 그러다가 어떤 그림 앞에서 갑자기 이유도 모르게 오래 서 있게 되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아, 이게 미술이구나, 싶어진다. 책이 흥미로웠던 건 그 '이유도 모르게 오래 서 있게 만드는' 감각을 언어로 풀어주기 때문이었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의 수련 연작 앞에서 저자가 쓴 대목. 크고 굵은 붓질이 화면을 쓸고 지나간 듯 하다고, 전체가 붉은색으로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이게 모네 그림이라고?' 놀라며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그 전시실 안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네가, 사실은 훨 씬 더 격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폴 마르모탕이 인상주의를 가리켜 "이게 회화라고, 아니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고 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한 시대의 혁신은 항상 누군가에게 모욕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모욕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 세기를 건너 남는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 발언을 남긴 마르모탕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에서, 지금 그토록 혹독하게 비난했던 인상주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의 어떤 유머처럼 느껴졌다. 로댕 미술관의 이야기는 또 달랐다. 손만 모아놓은 전시실이 있다는 것. 사람의 손이 그렇게 많은 표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외로움의 비탄, 고통의 절규, 창조주의 힘, 은밀한 비밀. 조각이라는 건 결국 형태로 감정을 번역하는 일인데, 로댕은 그걸 신체의 일부만으로도 해냈다는 것이다. 두 개의 오른손이 맞닿아 기도와 사 랑을 표현한 <대성당>. 나는 이 작품을 아직 실물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미 그 손이 어떤 감촉인지 알 것 같 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귀스타브 모로의 이름은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신고전주의도, 낭만주의도, 사실주의 도, 인상주의도 아닌, 어떤 화풍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화가. 그 설명을 읽으며 나는 그가 궁금해졌다. 살로메를 에로티시즘과 신비함이 뒤섞인 팜파탈로 그렸다는 것, <환영>에서 허공에 빛을 발하며 등장하는 잘린 요한의 머리가 그 신비함을 더한다는 것. 미술사의 주류에서 비켜서 있으면서도, 아무도 흥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3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의 곡선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고, 그러고 나서 야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묘사. 공간 자체가 감상의 일부가 된다는 이야기가 내 상상 속에 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몽마르트르 미술관의 장에서는 로트레크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귀족 혈통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장애를 갖게 된 후 몽마르트르의 밤 속으로 걸어들어간 화가. 그를 편안히 받아준 건 술집과 유곽의 여인들이었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일상을 기록하듯 그림을 그렸다. 향락에 취해 있으면서도 어딘지 외 로움이 배어 있는 실루엣들. 그것이 그가 남긴 몽마르트르의 얼굴이라는 문장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유흥과 고독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들이 그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수잔 발라동은 또 얼마나 강렬한가. 몽마르트르 골목의 천덕꾸러기 소녀가, 화가들의 모델로 청춘을 보내다가, 독학으로 붓을 잡아 중년에 당당한 화가가 되었다. 몽마르트르였기에 가능했던 인생이라는 표현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그 언덕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그 시대를 몸으로 통과한 사람들의 숨결로 이루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사랑하는 여자가 바뀌면 화풍도 바뀌었다는 문장이 강하게 남았다. 심장이 뛰는 대로 사랑하고, 숨 쉬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는 표현. 예술과 삶이 그토록 밀착되어 있다면,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삶 자체를 목격하는 경험일 것이다. 자코메티 미술관 이야기의 끝에서는 한동안 책을 덮어야 했다.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날, 동생 디에고는 부랴부랴 작업실로 달려가 형이 작업하던 조각에 젖은 천을 덮었다. 마르지 않도록. 부인 아네트는 벽체의 드로잉까지 떼어 보존했고 낡은 의자 하나, 화병 하나, 먼지조차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의 자코메티 미술관 이 되었다는 것. 사랑이 미술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파리 여행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찾아 인파를 헤치는 것도 물론 파리다. 하지만 그 번잡함을 한 발짝만 비켜서면, 한 인간의 생애 전체가 농밀하게 응축된 공간들이 골목마다 숨어 있다는 것. 그 공간들은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술가가 살았던 시간 그 자체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여름, 나는 그 골목들을 걷고 싶다. 들라크루아가 생피스 성당까지 걸었을 좁은 길을, 자코메티가 비 오는 날 건너갔을 알레지아가를, 로트레크가 밤마다 드나들었을 몽마르트르의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를, 그리고 어떤 그림 앞에서 이유도 모르게 오래 서 있게 되는 그 순간을, 올여름 파리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보들레르가 들라크루아를 두고 했다는 표현이 자꾸 떠오른다. 꽃다발 같은 겉 모습에 예술적으로 감춰진 화산 분화구. 어쩌면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그런 곳이 아닐까. 겉으로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이지만, 그 골목 깊숙이에는 한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뜨거운 잔 열이 남아 있는 도시. 그 열기를 느끼러, 이번 여름 나는 파리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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