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 안 인구 30만 프로젝트 - 건축가 황두진이 그리는 지속 가능한 도시적 삶
황두진 지음 / 해냄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주말 아침, 서울 한복판을 걷다 보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 종로 일대, 청계천 변이 텅 비어 있다. 카페 몇 곳에 불빛이 켜져 있을 뿐, 이 나라 최고의 업무 지구가 마치 유령 도시처럼 고요하다. 평일 낮이라면 사람이 넘쳐날 거리가, 유동 인구가 사라진 시간대에는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이 잘못 설계된 도시라는 증거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오래도록 잘못된 방향으로 정책이 운용되어온 결과다.

​

<사대문 안 인구 30만 프로젝트>는 그 잘못된 흐름을 되돌리자는 제안이다. 현재 사대문 안 상주인구는 약 10만 명. 조선 후기 수준에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1980년대 정점을 찍은 이후 40여 년간 꾸준히 줄어들었다. 서울 인구 전체는 팽창했지만 그 무게 중심은 강남, 수도권 외곽으로 옮겨갔고, 도심은 비어갔다. 30만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인구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진짜 도시답게 기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직주 근접(職住近接).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가까운 것. 당연한 이치처럼 들리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대다수 직장인에게 이것은 사치에 가깝다. 광화문에서 일하면서 일산에서 자고, 판교에 출근하면서 수원에서 아침을 먹는다. 왕복 두세 시간의 통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사대문 안은 원래 직주 근접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시장은 종로변에, 관청은 궁궐 앞에, 주거는 그 사이사이에 얽혀 있었다. 걸어서 삶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도시였다. 내사산이 만들어낸 분지 안, 약 16.5제곱킬로미터의 공간은 지형적으로도 걷기에 이상적이다. 청계천 상류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의 평균 경사가 0.3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 공간이 얼마나 보행 친화적인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점을 스스로 지워버렸다. 1970년대부터 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키고, 주거 기능을 도심에서 밀어냈다. 기업과 관공서는 남았지만 사람이 떠났다. 낮에는 붐비고 밤에는 텅 비는 비정상적 구조가 수십 년에 걸쳐 고착되었다. 편의점 하나 찾기 어려운 도심,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 마포 공덕동까지 가야 하는 서촌의 현실은 그 결과다. 상주인구가 줄면 생활 인프라가 사라지고, 인프라가 사라지면 상주인구가 더 줄어드는 악순환. 이것이 사대문 안이 지금 걸린 병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도시 문명 자체를 흔들 것처럼 보였다. 재택근무가 일반화되고, 교외로의 이주가 유행처럼 번졌다. 도시는 끝났다는 선언이 쏟아졌다. 그러나 3년여 만에 그 '뉴 노멀' 담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밀도를 혐오하던 사람들도 결국 도시의 편의와 자극 앞에 돌아왔다. 오히려 팬데믹은 도시에 대한 성찰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파리의 '15분 도시' 개념이 주목받은 것도 이 시기였다. 핵심은 단순하다. 도보나 자전거로 15분 안에 직장, 학교, 병원, 시장, 공원을 모두 닿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다. 기능별로 지역을 분리하는 근대적 조닝(zoning)의 실패를 인정하고, 복합 도시로 돌아가자는 선언이다. 이것은 실은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조선의 한양이 그랬고,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빌리지가 그랬다. 밀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거부감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쟁과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한국인은 과밀의 고통을 몸으로 겪었다. 한 반에 60명, 2부제 수업, 출퇴근 지하철의 지옥도. 그 기억이 밀도 혐오를 낳았고, 도시 정책은 낮은 용적률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러나 역설이 있다. 용적률을 낮추면 도시는 수평으로 팽창하고, 팽창할수록 이동 거리는 늘어나며, 체감 밀도는 오히려 높아진다. 강남역 사거리의 법정 용적률 800퍼센트 이하라는 숫자가 세계적 대도시 기준으로 얼마나 낮은지를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도시를 만들어왔는지 가늠된다.


그렇다면 사대문 안에 어떤 건축을 담아야 할까. 이 글은 단지형 아파트를 명확히 거부한다. 단지형 아파트는 도로를 막고, 담을 치고, 도시를 조각냈다. 용적률은 높아 보이지만 건폐율이 낮아 실제 밀도 효과는 제한적이다. 경희궁자이가 들어선 뒤 오히려 주변 인구가 줄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사대문 안에는 그런 대규모 부지 자체가 없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무지개떡 건축'이다. 저층부엔 상점과 카페, 중층부엔 사무실과 학원, 상층부엔 주거와 옥상 마당. 상업, 업무, 주거가 한 필지에 수직으로 중첩된 이 방식은 1960~70년대 한국의 상가 아파트에서 이미 실험된 바 있다. 낙원상가, 세운상가, 서소문아파트.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와 법적 규제의 부재로 문제도 많았지만, 그 개념 자체는 탁월했다. 도시의 밀도와 복합성을 동시에 실현하는 방식이었으니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전통 한옥의 원리와도 닿아 있다는 점이다. 한옥은 비정형 자연석 기단, 직선 목구조, 3차원 곡면 지붕이라는 전혀 다른 세 가지 기하학을 하나의 건축 안에 중첩시킨다. 무지개떡 건축도 마찬가지다. 층마다 다른 기하학적 질서, 다른 재료, 다른 공간 경험. 이것이 도시를 살아있게 만드는 다양성이다. 뉴욕 소호의 건물들이 개별적으로 보면 단조롭지만 거리 풍경이 생동감 있는 이유도 저층부의 상점들, 그 위의 주거, 그리고 각각의 층이 만드는 도시적 접촉성 때문이다.


직주 근접은 편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탄소 배출의 문제이기도 하다. 운정에서 서울역까지 GTX로 출퇴근한다면 편도 탄소 배출량만 약 1,545그램이다. 여기에 역까지 이동하는 탄소까지 더하면 수치는 더 올라간다. 대구시 온실가스 배출의 41퍼센트가 도로 교통에서 나온다는 통계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게 한다. 반면 걷거나 자전거로 사대문 안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의 탄소 배출량은 0이다. 기존 건물의 리모델링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해 사용하는 것은 같은 규모를 새로 짓는 것보다 에너지를 평균 55퍼센트 이상 절약한다. 아무리 친환경 자재로 신축해도 철거와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지역사회의 맥락 단절이라는 비용을 상쇄하기 어렵다. 도시의 지속 가능성은 새로운 건물을 얼마나 잘 짓느냐가 아니라, 이미 있는 도시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 있다. ESG가 평가의 무게 중심을 거기로 옮겨야 하는 이유다.


사대문 안을 다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만들자는 이 제안은, 낭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넓게 퍼진 도시 구조를 유지하는 비용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수도권 광역 인프라를 계속 확장하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이미 있는 자원, 이미 잘 갖춰진 공간을 더 잘 쓰는 것이 지속 가능한 방향이다. 사대문 안은 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많은 일터, 역사적 투자가 축적된 인프라,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 걷기 좋은 평탄한 지형, 그리고 600년이 넘는 이야기. 이 공간이 밤이면 텅 빈 채로 방치되는 것은 낭비이자 실패다. 여기에 사람이 다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서울이 진짜 세계적인 도시로 성숙해지는 길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맨해튼을 '인류가 만든 가장 친환경적인 도시'라 불렀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직주 근접이 실현된 고밀도 도시야말로 가장 적은 탄소로 가장 많은 삶을 담는다는 뜻이다. 사대문 안 인구 30만 명 프로젝트는 그 역설을 서울에서 실현하려는 시도다. 새로운 건축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동기 부여, 오래된 지혜의 현대적 재해석. 도심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의 실험실이다. 그 실험실을 다시 사람으로 채우는 일, 이제 시작할 때가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모든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었다 - 90세 과학자의 가슴 뛰는 자연 관찰기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종종 숲에서 길을 잃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도 앱이 없어서도 아니고, 방향 감각이 무뎌서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 면, 내가 바라는 것은 목적지 없이 걷는 상태 즉, 다음 발걸음보다 지금 이 발밑의 낙엽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 그런 상태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너무 많은 것을 미리 알고 시작한다.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나오는 정보들, 화면 속 다 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완벽하게 편집된 자연. 우리는 자연을 알기도 전에 이미 '안다고 느끼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베 른트 하인리히(Bernd Heinrich)의 에세이집 A Naturalist at Large를 처음 펼쳤을 때, 나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 은 마치 오래된 흙 냄새 같았다. 아스팔트 아래 깊이 눌려 있다가 비가 온 뒤에야 비로소 올라오는 그 냄새. 설명하기 어렵 지만, 분명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무언가 있다. 하인리히는 나에게 길을 잃는 법을 다시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보통 자연을 마주했을 때 이름을 찾는다. 저 새는 무슨 새일까. 저 꽃은 무슨 꽃일까. 이름을 알면 아는 것 같은 기 분이 든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에세이를 읽으면 이름이 지식의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깨닫게 된다. 꿀벌은 왜 같은 종류의 꽃을 반복해서 찾아가는가. 왜 새의 알은 종마다 색깔이 다른가. 까마귀는 무리 안에서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 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수십만 년의 진화, 환경과 생명체 사이의 끊임없는 협 상, 그리고 생존이라는 치열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하인리히는 결코 현학적이지 않다. 그는 독자에게 복잡한 학술 언어로 말을 걸지 않는다. 대신 그는 숲 속 통나무 위에 앉아 몇 시간이고 까마귀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조용하고 집요하게 이야 기를 건넨다. 그의 문장들은 실험실 노트가 아니라 오랜 시간 자연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일기처럼 읽힌다. 그 일기를 따 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창문 밖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에게 시선이 머문다. 저 새는 왜 저기 앉아 있을까. 왜 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까. 이름 하나 아는 것과, 그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는가.

책에서 내가 가장 깊이 울린 것은 어떤 특정 에세이가 아니라, 책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태도였다. 그것은 겸손함이다. 하 인리히는 생물학자다. 유전자와 진화를 이야기하고, 생리 생태학의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 자연은 결코'분석의 대상으로 납작하게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끊임없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쓴다. 숲 속 오두막에서 자고, 영하의 날씨에 혼자 서서 새를 기다리고, 손으로 흙을 만지고, 직접 몸으로 그 계절을 겪는다. 이 점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자연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적게 '있었는가? 책을 읽으며 나는 어린 시절의 어느 오후를 떠올렸다. 시골 할머니 댁 뒷산에서 혼자 돌멩이를 뒤집으며 그 아래 사는 것들을 들여다보던 오후.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것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앉아 있던 시간. 이름도 몰랐고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분명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인리히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연결의 감각을 다시 불러오는 일이다. 뉴스와 화면과 소음으로 채워진 일상 속에서, 세상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답게 작동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켜 주는 일이다.

언젠가 읽었던 문장이 있다. 과학은 경이에서 시작되고, 경이는 직접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인리히의 에세이들은 그 명제를 살아있는 언어로 증명한다. 그가 꽃과 벌의 관계를 서술할 때, 수백만 년에 걸쳐 서로를 조각해 온 두 존재의 이야 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꽃은 벌을 훈련시키고, 벌은 꽃을 선택한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실 안에 얼마나 깊은 시간이 담겨 있는지, 얼마나 정교한 협력의 역사가 있는지를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다음번에 길가 에서 벌 한 마리를 만났을 때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워진다. 저 작은 몸 안에 어떤 기억이 있는가. 저 날갯짓 하나에 얼마나 많은 세대의 시간이 녹아 있는가. 이것이 하인리히가 내게 준 선물이다. 자연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자연을 다시 보게 하 는 눈. 이미 보던 것을 처음 보듯이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는 용기.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풍경이, 오늘은 조금 달리 보였다. 저 나뭇잎이 저렇게 흔들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저 흔들림 속에 살고 있는 곤충들 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인리히가 말하는 자연주의자(naturalist)란 단지 자연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 반복해서 같은 장소를 걷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익숙한 새소리 하나에 도 그날의 온도와 빛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감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느끼는 것.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 하인리히의 에세이는 과학서이면서 동시에 초대장 이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진짜 숲으로, 진짜 강으로, 진짜 바람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다. 경이는 잃어버릴 수 없다. 잠시 잊을 뿐이다. 그리고 베른트 하인리히의 글은, 나에게 그것을 다시 찾는 길을 알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AI 비즈니스 TEST 1급 공식 가이드 - 생성형 AI 비즈니스 활용 능력 검증 ㅣ AI 비즈니스 TEST 공식 가이드
최병일 외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야말로 인공지능의 시대다. 처음에는 이 흐름을 그냥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AI 도구 몇 가지를 써보고, 유용 하다 싶으면 업무에 적용하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도구를 '쓰 는' 것과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떤 기준도 없이 스스로의 AI 활용 수준을 가늠하 기가 어려웠다. 그즈음 AIBT(AI Business Test)라는 자격시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격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솔직히 반감부터 드는 편이다. 숫자로 환산된 시험 점수가 실무 역량과 얼마나 연결되는지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AIBT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험이 묻는 것이 '기술 지식'이 아니라 '비즈니스 역량'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알고리즘의 원리를 외우 거나 코드를 짤 줄 알아야 합격하는 시험이 아니라, 실제 업무 상황에서 AI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평가 한다는 것이었다. PM이라는 직업의 본질과 꽤 잘 맞아 떨어졌다. 기획서를 AI로 초안을 잡고, 데이터를 분석해 방향을 제 시하고, 클라이언트와 더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것-이것이 바로 내가 업무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이었다. 또 한 가지, 최근 채용 공고에서 AIBT 자격을 우대 조건으로 명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커리어의 방향을 고민하는 시점에서, 체계적으로 역량을 정리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나는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고,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출간한 <AI 비즈니스 TEST 1급 공식 가이드>를 선택했다.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솔직한 느낌은 '두껍다'였다. 하지만 목차를 훑어보면서 그 두께가 납득이 되었다. 책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뉜다. 제1편은 생성형 AI의 이해를, 제2편은 경제·경영 분석을 다룬다. AI 자격 시험이라는 이름 아래 경영 전략, 마케팅, 재무회계, 거시경제까지 포함된 구성은 처음에는 의외였지만, 이내 납득이 갔다. AI는 결국 비즈니스의 문 제를 풀기 위한 도구이고, 그 도구를 제대로 쓰려면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1편에서 는 인공지능의 역사부터 시작해 생성형 AI의 원리,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전략, 그리고 AI 윤리까지를 순서대로 다룬다. 개 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챕터였다. 지금까지 ChatGPT나 Claude 같은 도구를 사용하면 서 나름대로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이 챕터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즉흥적으로 도구를 사용해왔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프롬프트 설계에도 원칙이 있고, 맥락을 구조화하는 방식에 따라 결과물의 질이 현격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준 셈이었다.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문제, 즉 AI가 그럴듯하지만 잘못된 정보를 생성하는 현상에 대한 부 분도 실무자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다. 클라이언트에게 제출하는 문서에 AI 생성 오류가 그대로 담긴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가 된다. 이를 어떻게 검증하고 방지하는지에 대한 전략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실무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제2편은 처음에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PEST 분석, SWOT 분석, BCG 매트릭스, 마이클 포터 의 5 Forces 모델 등 경영학 교재에서 본 적 있는 프레임워크들이 AI 도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이 편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경쟁사 벤치마킹을 설계할 때 AI를 어떻게 활용하면 효율적인지, 재무상태표 데이터를 분석하는 프롬프트는 어떻 게 구성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각 개념에 실무용 프롬프트 예시가 함께 제시되어 있어 학습과 동시에 실전 연습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느꼈다.

책 한 권을 어떻게 공부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세 단계로 접근하기로 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론의 정독이 다. 각 챕터에서 소개하는 AI 도구를 실제로 열고 직접 입력해보는 방식으로 진행한 다. 읽으면서 '이런 방식이 있구나'로 넘어가는 것과, 직접 손을 움직여 결과를 확인하는 것은 학습의 깊이가 다르다. 특히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챕터는 실습 없이는 절반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단계는 예시문제 풀이와 오답 정 리다. 공식 가이드북과 함께 제공되는 예시문제 PDF를 반복해서 풀며 출제 경향을 파악한다. 틀린 문제는 단순히 정답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틀렸는지 이유를 언어로 명확히 정리한 뒤 해당 이론 파트로 돌아가 복습한다.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복적으로 약점 영역이 노출되면 그것이 곧 시험에서 실점하는 구간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통합 점검이다. 전체 학습을 마친 후 통합실전 강의를 통해 내용을 종합적으 로 복습하고, 시간 배분 전략을 실제 시험 조건에 맞게 훈련한다. 마지막에는 핵심 개념을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한 요약 자료를 만들어 시험 직전까지 반복 확인할 계획이다.

AIBT 시험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 과정이 수험 공부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프롬프트 하나를 정교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경영 전략 프레임워크를 AI와 연결하는 사고 실험을 하면서, 나는 조금씩 더 나은 PM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격증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이 공부가 끝났을 때, 나는 합격증 하나를 손에 쥐는 것보다 AI와 함께 일하는 방식을 제대로 체득한 실무자로 성장해 있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얻은 인사이트들이 같은 고민을 하는 누군가 에게도 작은 도움이 된다면, 이 공부의 의미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맥진습득법 - 누구나 맥진을 할 수 있게 된다
기도 마사오 외 지음, 유준상 외 옮김 / 청홍(지상사)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손가락 세 개를 손목에 올리는 것만으로 몸의 상태를 안다고? 현대 의 학의 정밀한 기계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그것도 손끝의 감각만으로? 하지만 맥진이라는 것이 무려 2천 년을 살아남았다 는 사실은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유행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살아남은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 맥 진이 오늘날까지 색이 바래지 않고 전해져 온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맥진을 배우는 일은 먼저 '어디에 손가락을 올리느냐'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손목의 촌, 관, 척, 검지, 중지, 약지가 각각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 위치를 정확히 잡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알면 알수록 새삼스럽다. 팔꿈치를 편 상태에서 전의 길이를 10촌으로 보고, 손목 주름에서 2촌 거리 안에서 다시 1푼을 빼고...... 이 정밀한 계 산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손목을 실측하고, 검증하고, 다듬어온 세월이 담겨 있다. 손가락 세 개의 폭이 평균 4.7센티미터 라는 실측 데이터, 손목 주름에서 기준점까지의 거리가 평균 1.32센티미터라는 수치. 이런 숫자들이 쌓여 하나의 방법론이 된다는 것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어릴 때 음악을 배우면서, 선생님이 손 모양부터 잡아주던 기억이 난다. 피아노 건 반에 손가락을 올리는 자세, 활을 쥐는 방법, 붓을 잡는 각도...••.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올바른 자세를 먼저 몸에 새기는 일에서 시작한다. 맥진도 다르지 않았다. 첫걸음을 제대로 밟지 않으면 잘못된 습관이 붙고, 그것이 나중에는 오히 려 실력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고 했다. 기초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는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맥진에서 흥미로운 역설 중 하나는, 잘 느끼기 위해서는 오히려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부, 중, 침. 피부 위에서 뼈 쪽으 로 향하는 이 세 가지 깊이의 감각은, 손가락에 얼마만큼의 압력을 가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피부에 닿기도 전에 맥의 박동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손가락이 아직 허공에 있는데, 그 미세한 진동이 전해진다는 것.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쩌면 집중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듣고 싶을 때,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 전부터 이미 듣기 시작한다. 맥진도 손가락이 피부에 닿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한 좌맥과 우맥이 다르다는 것도 흥미롭다. 같은 사람의 몸에서도 왼손과 오른손의 맥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신체란 대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나 비대칭이며, 그 미묘한 차이 속에 몸의 균형과 불균형이 담겨 있다. 맥진은 그 차이를 읽는 일이다.

오랫동안 맥진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맥진을 이미 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쓰여 있었다고 한다. 허맥이 어떻고, 실맥이 어 떻고, 육부정위가 어떻다는 설명들. 하지만 정작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친절하게 써두지 않았다. 그래서 맥진을 배우려는 사람은 저마다 혼자 시행착오를 겪으며 더듬더듬 길을 찾아가야 했다. 그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좋은 기술이 있어도 전달하는 방법이 없으면, 그 기술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머물다 조금씩 옅어진다. 장인의 기술이 사라지는 방식이 대개 그렇다. 너무 어렵다고, 오래 걸린다고, 가르쳐줄 사람이 없다고, 하나씩 포기하면서. 그래서 수십 년간 학생 들을 가르치며 공통의 실수와 오류를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표준 매뉴얼로 정리한 책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초보자도 단기간에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계단을 놓은 일. 그것은 2천 년의 기술을 다음 세대에 연결하는 다리를 놓은 것이다.

맥진을 배우는 데는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여섯 군데 맥진 부위에서 허와 실만 구분하는 비교맥진에서 시작한다. 그다음 은 맥의 상태를 보는 맥상진, 그리고 위치와 상태를 종합해서 읽는 맥위맥상진으로 나아간다. 이 세 단계를 모두 통합하면 천문학적인 수의 패턴을 판별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 전부를 목표로 하면 누구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계단씩 오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첫 계단이 선명하면, 두 번째 계단이 보이고, 세 번째 계단도 멀지 않다. 인간 능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는 말이 어쩌면 이 단계적 배움 속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의 손목 안에서 맥이 뛰고 있다. 바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의 맥도, 오래 아파 지친 사람의 맥도, 무언가 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의 맥도. 그것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리듬으로, 다른 깊이로, 다른 강도로 뛰고 있을 것이다. 맥진 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그 다름을 듣는 귀를 손끝에 키우는 일이다. 오랫동안 많은 것들이 기계로 대체되었지만, 사람이 사람의 손목을 잡고 그 안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이 방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맥진이 2천 년을 살아남은 가장 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기술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성. 데이터가 아니라, 닿는다는 것의 따뜻함이다. 손끝으로 듣는 2천 년의 언어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왜 끌리는 브랜드에는 틈이 있을까 - 현대미술에서 훔쳐온 욕망의 공식
윤상훈 지음 / 미래의창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얼마 전, 오래 쓰던 노트를 다 쓰고 새 것을 샀다. 무인양품 노트였다.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손이 갔다. 집에 돌아와 새 노 트를 펼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걸 샀지?' 가격이 특별히 저렴하지도 않았고, 기능이 놀랍도록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표지에는 아무 그림도 없었고, 브랜드 로고조차 작고 조용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골랐다. 그 이유를 당 시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윤상훈님의 <왜 끌리는 브랜드에는 틈이 있을까>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언어로 붙잡 을 수 있었다. 브랜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말을 그 안에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브랜드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단순한 구매를 기억으로 바꾸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좋은 브랜드란 완벽한 브랜드라고 믿어왔다. 메시지는 명확해야 하고, 이미지는 일관되어야 하며, 소비 자가 오해할 여지는 없어야 한다고. 기능을 빠짐없이 설명하고, 장점을 목록으로 정리하고, 광고 문구는 귀에 쏙 들어와야 했다. 그 믿음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브랜드들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애플 은 아이폰의 사양을 줄줄이 나열하지 않았다. 나이키는 운동화가 발에 얼마나 편한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것은 훨씬 적었고, 그래서 우리는 훨씬 많이 기억했다. 왜 그럴까. 완성된 이야기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모든 문장이 닫혀 있 고, 모든 여백이 채워져 있으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읽는 관객에 머문다. 읽고 나면 끝이다. 하지만 이야기 안에 빈자리가 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 한다. 그 순간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공동 저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참 여해서 만든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피카소가 황소를 계속 단순하게 만들어갈 때, 사람들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 다. 선 몇 개로 그린 그림이 황소라고? 그런데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멈춰 서서 생각했다. "이게 황소의 본질 인가?" 라는 질문이 생겼다. 세밀하게 그려진 황소 그림 앞에서는 그런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이미 다 보여주었으니까.

흥미로웠던 부분은 '거리두기'와 '충돌하기'의 개념이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결 합해 새로운 인상을 만드는 방식.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마케팅 기법처럼 보였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것이 훨씬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익숙한 것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매일 보는 거리, 매일 쓰는 물건, 매일 듣 는 말. 뇌는 이미 처리한 정보를 다시 처리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익숙함은 투명해진다. 반대로 낯선 것은 시선을 붙잡는다. 예상이 어긋나는 순간, 뇌는 깨어나 그것을 처리하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섬세한 균형을 요구한다. 너 무 낯설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한다. 너무 익숙하면 그냥 지나친다. 좋은 브랜드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알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 가까운 것 같은데 조금 다른 그 지점. 그 지점에서 사람들은 멈추고, 더 보려 하고, 생각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브랜드를 기억에 새긴다. 예전에 한 향수 브랜드의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아무 설명도 없 었다. 그냥 낯선 풍경, 낯선 사람, 낯선 감각이 짧게 지나갔다. 그 향수가 어떤 냄새인지는 광고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브랜드를 오래 기억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왠지 궁금했고, 왠지 끌렸다. 그 낯섦이 내 안에서 질문 을 만들었고, 그 질문이 브랜드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왜 지금 사람들은 기능보다 의미를 따지는가. 예전에는 성능 좋고 가 격 합리적인 제품이 잘 팔렸다. 지금도 그것이 기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이걸 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 이것은 소비가 필요 충족에서 자기 표현의 언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사느냐 가 자신이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는 신호가 되었다. 그렇다면 브랜드는 기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파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의미는 브랜드가 일방적으로 주입할 수 없다. 소비자가 스스로 발견하고 붙여야 진짜 의미가 된다. 론 뮤익의 조각이 단순한 밀랍 인형과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밀랍 인형은 아무리 정교 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것은 완성되어 있고, 닫혀 있다. 하지만 뮤익의 조각 앞에 서면 우리는 무언가를 느낀 다. 그 느낌을 설명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이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작품이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이 다. 브랜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비워두는 일이다. 뭔가를 더 넣고 싶은 충동은 자연스럽다. 설명을 하나 더 추가하면 오해가 줄 것 같고, 장점을 하나 더 나열하면 설득이 쉬울 것 같다.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유혹에 끌린다. 내가 만든 것 을 충분히 보여주고 싶고,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봐 주었으면 싶다. 그런데 그 욕심이 오히려 브랜드를 닫아버린다. 소 비자가 들어올 문을 막아버린다. 너무 많은 말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 된다. 독백 앞에서 상대는 참여자가 아니라 청중이 된다. 그리고 청중은 공연이 끝나면 돌아간다. 레고가 완성된 장난감이 아니라 블록을 파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완성된 장난감은 소비자를 사용자로 만든다. 블록은 소비자를 창조자로 만든다. 창조자는 그 경험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것 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결국 브랜드란 소비자와 함께 완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랜드가 설계하는 것은 완성품이 아니라 가능성의 구조다. 그 안에서 소비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브랜드를 살아있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