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혁명
박철진 지음 / 모티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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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티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때 나는 건강에 관한 한 꽤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유산균을 챙겨 먹었고, 물을 하루 2리터씩 마시려 애썼으며, 유행하는 식단이 나올 때마다 한 번쯤은 따라해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뭔가를 하고 있는데 몸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날은 더 무거웠다. 나는 그 이유를 의지력 부족이나 불규칙한 생활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문제는 노력의 양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저자는 16년 가까이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마주해온 한의사다. 그가 관찰한 것은 놀랍게도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열심히 건강을 챙겨온 사람들이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검증됐다는 건강법을 따랐는데 여전히 피곤하고 아프다는 사람들. 저자는 그 원인을 한 가지로 짚는다. 엉뚱한 지도를 들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책이 말하는 핵심은 사람마다 오장육부의 강약 배열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장기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어떤 장기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태어난다. 이 배열이 곧 체질이고, 체질에 따라 소화력, 면역 반응, 대사 속도, 심지어 성격과 기질까지 달라진다. 우리가 흔히 알던 사상체질의 네 가지 틀을 더 세분화해 금·토·목·수 각각의 음양으로 여덟 가지로 나눈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체질론이라는 것이 워낙 두루뭉술하게 쓰이다 보니, 어딘가 점술에 가까운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특히 금체질에 관한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금체질 여성에게 자궁근종이나 심한 생리통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로 저자는 간의 약함을 든다. 여성호르몬은 사용된 후 반드시 간에서 분해되어야 하는데, 간이 약한 체질은 이 처리 과정이 지연되고, 다 쓰인 호르몬이 몸속을 떠돌며 자궁 조직을 계속 자극한다는 것이다. 혈액 검사에서는 수치가 정상으로 나오지만 증상은 엄연히 존재하는 경우, 그 이유가 호르몬의 양이 아니라 호르몬을 처리하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설명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같은 원리로 스트레스가 심한 시기에 생리 주기가 흔들리는 것도 설명된다. 스트레스 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간에서 동시에 처리 경쟁을 벌이다 보니 여성호르몬 대사가 밀린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오랫동안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어떤 불편함의 맥락이 비로소 잡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책에서 또 인상 깊었던 것은 다이어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보통 건강에 관한 정보를 보편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단백질을 충분히 먹어야 한다, 닭가슴살은 다이어트의 정석이다,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모두가 특정 체질에는 맞지만 다른 체질에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금체질에게 닭가슴살 다이어트가 맞지 않는다거나, 수체질에게 차가운 음식과 해산물 샐러드가 독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득이 갔다. 누군가 따라했더니 효과가 있었다는 방법이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경험, 아마 많은 사람이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그 실패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체질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꽤 위안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 책이 말하는 체질론을 모두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저자 역시 정확한 체질 판단은 진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에 담긴 자가 체크리스트는 어디까지나 입문의 도구이지, 확정적인 진단이 아니다. 이 점을 명확히 짚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준다.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갖고 탐색하는 출발점으로 삼으라는 것이 저자의 진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면서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건강에는 정답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 맞는 해답은 반드시 있다. 이것은 단지 건강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보편적인 정답을 찾으려 했다. 남들이 성공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면 나도 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몸이 다르듯, 사람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평균으로 설계된 기준이 나에게 꼭 맞지 않는 것은 나의 결함이 아니다.

책은 건강서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태도에 관한 책이라고 나는 읽었다. 누구의 방식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몸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하는지에 귀 기울이는 것. 그 작은 관심이 쌓여 결국 내 몸에 맞는 지도를 그려간다는 것. 오랫동안 엉뚱한 지도를 들고 헤맸다면, 이제는 잠시 멈추고 나만의 지도를 펼쳐볼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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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의 설득법 - 10개의 질문으로 만나는
이현우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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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심리학자의 설득법>이 불편했던 이유는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내 일상이 그 안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어제 습관처럼 클릭한 유튜브 알고리즘, 친구 의 의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 "이 상품은 품절 임박입니다"라는 문구에 갑자기 빨라진 손가락. 나는 내가 꽤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 책은 조용하고 단호하게 묻는다. 정말로?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몇 해 전 내가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업무 환경은 분명히 나를 소진시키고 있었다. 야근은 일상이었고, 내가 기여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도 쌓여 갔다. 그런데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배우는 게 많아. 나는 성장하고 있어."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은 절반도 진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쏟아부은 시간과 에너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음 이 스스로 짜낸 서사였다. 페스팅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신념이 충돌할 때 행동을 바꾸기보다는 신념을 바꾸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나는 떠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 공간을 '의미 있는 곳'으로 재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묻는다. 지금 내가 굳게 믿고 있는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 기 위한 자기 설득일까? 디지털 환경은 이 기제를 더욱 정교하게 자극한다. 알고리즘은 내가 동의할 만한 콘텐츠만 골라 보여주고, 나는 그것을 보며 '역시 세상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 안도한다. 그 안도감 속에서 나의 인지 부조 화는 해소되고, 사고의 유연성은 조금씩 줄어든다. 설득의 가장 무서운 형태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 을 설득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컬럼비아 대학 삼총사의 연구, 그리고 솔로몬 애쉬의 선분 실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냈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들이 강권하는 음주 문화가 분명히 불편했다.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셨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다들 마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논리도 없었고, 강요도 없었다. 단지 '다수'라는 압 력이 있었을 뿐이다. 치알디니가 말하는 '사회적 증거'의 원리는 이것을 잘 설명한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타인의 행 동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은 진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위 험을 의미했고, 다수를 따르는 것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그 본능은 종종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 로 이끈다. 나는 요즘에도 그 패턴을 발견한다. '이 책 요즘 다들 읽던데', '그 카페 줄 서서 먹어야 한다던데'라는 말에 관심 이 생기는 것. 내가 정말로 원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느껴지 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지금 내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수의 선택을 빌려 쓰고 있 는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구분이 바로 이 책이 내게 요청하는 성찰이다.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연구, 그리고 치알디니의 '클릭-윙윙' 개념을 읽는 내내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못해 부끄러워졌다. 나는 꽤 많은 결정을 사실상 자동으로 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오늘 마감', '한정 수량, '지금 3명이 보고 있음' 같은 문구를 보면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이성이 개입하기 전에 감정과 본능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희소 성의 원칙, 손실 회피 편향, 프레이밍 효과 , 이 모든 것이 내 일상적 결정 속에 촘촘히 박혀 있다. 특히 손실 회피 편향은 생각할수록 섬뜩하다. '10% 할인'보다 '지금 사지 않으면 10% 더 내야 합니다'라는 말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 논리 적으로는 같은 정보이지만, 감정적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 상황에 놓이면 여전히 흔들린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나는 자책보다 이해를 선택하기로 했다. 휴리스틱은 인간이 에너지를 아끼며 살아가기 위한 진화적 전략이다. 문제는 휴리스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 을 읽고 난 뒤 내가 얻은 가장 실질적인 변화는 한 가지다. 충동적 결정을 내리기 직전, 짧게나마 멈추고 묻는 것. "나는 지금 진짜 원하는 건가, 아니면 설계된 자극에 반응하는 건가?"

책을 통해 설득의 무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설득당하는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 위협이 아니라 위안으로 들린 것도 그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결 국 그것이 작동하는 대상은 우리가 수만 년 동안 진화시켜 온 그 마음이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문학적 감각이다.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설득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책 을 읽고 나서 더 영리한 소비자나 더 강력한 설득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정직한 자기 관찰자 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엇에 움직이는지, 왜 멈추는지, 어떤 말에 마음이 열리고 어떤 순간에 닫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설득의 홍수 속에서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이 책은 조용하고 단단하게 가르쳐준다. 인생이 설득의 연속이라면, 그 연속 속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나 자신을 제대로 만나고 있는가. 그 질문을 품고 사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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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 않은 쌍둥이 - 프란츠 카프카 x 에곤 실레 세계문화전집 2
프란츠 카프카.에곤 실레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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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으며 작년 여름 휴가를 떠올린다. 비엔나에 도착한 날, 나는 먼저 커피를 마셨다. 링슈트라세의 카페에서 멜랑주 한 잔. 크림이 구름처럼 얹힌 그 커피를 홀짝이며 나는 생각했다. 이 도시는 세기말에도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아니면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균열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레오폴드 미술관 앞에 서자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심장이 아니라 가슴 어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자리가 조여드는 것 같았다. 매표구를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 나는 잠시 멈췄다. 프란 츠 카프카가 이 도시에 온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카프카는 프라하 사람이었다. 빈은 에곤 실레의 도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실레의 그림 앞에 서기 위해 이 계단을 오르면서, 카프카를 먼저 떠올렸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실레의 그림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낯설고 불편한 풍경이었다. 비틀린 몸통, 각이 진 팔꿈치, 살갗 아래에서 불거져 나올 것 같은 뼈의 윤곽, 그는 인간의 신체를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감추고 싶은 것들을 날카롭게 꺼내놓았다. 나는 <나무 네 그루, 1917 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가을의 나무들이다. 그러나 화려하거나 풍요롭지 않다. 나무들은 저마다 뒤틀린 몸으로 서 있고, 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 있지만 가지 끝은 허공을 향해 어딘가 부러질 듯 뻗어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무가 아니라 인간처럼 보인다. 고통을 흡수하면서도 어떻게든 서 있으려는, 조용하고 필사적인 존재들처럼. 그 앞에서 나는 카프카의 요제프 K를 떠올렸다. 그는 아침에 일어났고, 아무 이유 없이 체포되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법원은 지하 어딘가에 있었고, 판사는 보이지 않았으며, 절차는 끝나지 않았다. 죄가 있기 때문에 재판받는 것이 아니었다. 재판을 받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실레의 나무들도 그랬다. 무언가 를 잘못해서 저렇게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저 모양으로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은 그것을 불편하다고 말했다.


<초승달 모양을 이룬 집들, 1915년> 앞에서 나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우중충하고 불투명한 색깔들이다. 집들은 촘촘히 붙어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창문에는 빛이 없고, 벽과 벽 사이의 골복은 좁고 깊 다. 이 집들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꿈을 꿀까. 나는 갑자기 카프카의 문장 하나가 생각났다. "세상으로 도망쳐 들어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세상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카프카는 글을 썼고, 실레는 그렸다. 방식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사회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눈. 혹은 안에 갇혀서 바깥을 향해 손을 뻗는 팔. 그것 이 카프카의 문장이었고, 실레의 선이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실레는 빈에서 각자 의 불안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레오폴드 미술관의 전시실 안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라는 거대한 압력 아래 숨 막혔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무게를 작품 안에 새겨넣고 있었다. 쌍둥이처럼. 만나지 않은 쌍둥이처럼.


미술관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이번에는 한 잔이 아니었다. 두 잔. 어쩌면 세 잔. 카페인이 혈관을 달리는 것 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부정맥은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너무 깊이 들여다본 사람의, 불규칙한 두근거림이었다. 나 는 생각했다. 카프카와 실레는 결국 자신의 불안을 극단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것을 글로, 선으로, 색으로 터뜨렸다. 피폐한 삶의 어두운 에너지를 세상이 알아보기 오래 전부터, 그들은 이미 그것을 예술로 변환하고 있었다. 제국이 무너질 때 예술이 폭발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을 해부하던 시대, 클림트가 황금빛 관능을 그리던 시대, 쇤베르크가 불협화음으로 새로운 음악을 열던 시대. 그 한가운데서 카프카는 변신하는 인간을 썼고, 실레는 해체되는 신 체를 그렸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비엔나의 한 미술관에서 그들의 흔적 앞에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링슈트라세를 천천히 걸었다. 가을 빛이 기울어지는 거리였다. 마로니에 잎이 떨어지고,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트램이 낡은 선로 위를 달렸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지층 어딘가에 카프카의 문장들이 새겨져 있고, 실레의 선들이 뿌리처럼 박혀 있다는 것을. 불안은 어떤 방식으로 몸 안에 존재 하고 있는가.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품은 채 걷는 것,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프카도, 실레도 결국 그렇게 살았을 테니까, 불안을 안고, 그것을 쪼개어 세 상에 내놓으면서, 그들이 남긴 것들 덕분에 나는 오늘, 조금 덜 혼자였다. 책은 나의 추억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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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에 숨겨진 불멸의 바이블 : 구약 성경 명화 속에 숨겨진 불멸의 바이블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원재훈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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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처음 들었던 이야기들이 있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 다윗, 고래 뱃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은 신기하고 무서웠으며, 때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장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이야기들을 잊어버렸다. 어른이 되면서 세상은 더 복잡해졌고, 고대의 서사는 현실과 점점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구약 성경은 서재 한쪽에 꽂혀 있는 묵직한 책이었지, 내 일상 속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나는 뜻밖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들과 다시 만났다. 거장들의 그림 앞에서였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상 앞에 선다고 상상해본다. 대리석으로 빚어진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인내가 동시에 새겨져 있다. 40년을 광야에서 보낸 한 인간의 무게감이 돌 속에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텍스트로 읽을 때는 모세가 그저 '위대한 지도자'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했는데, 조각 속 그의 손가락 하나, 눈빛 하나가 나를 기원전 어느 사막 한가운데로 끌어당긴다는 것을. 예술은 시간을 접는다. 수천 년의 간극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브라함의 희생〉은 더욱 강렬하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의 손, 그 손 위로 천사가 내려와 칼을 막는 순간. 렘브란트는 그 찰나를 포착했다. 빛과 어둠이 극적으로 충돌하는 화면 속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손이 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라고 담담하게 기록하지만, 렘브란트는 그 담담함 이면의 인간적 고뇌를 화폭에 남겨두었다. 믿음이란 의심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을 끌어안고도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임을 그 그림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구약 성경은 참으로 이상한 책이다. 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다. 질투하고, 실수하고, 도망치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탐욕을 이기지 못하며, 솔로몬은 지혜의 절정에서 오히려 어리석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완벽한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진실하다. 루벤스의 그림들을 보면 이 아이러니가 더욱 선명해진다. 그의 화폭은 넘쳐흐를 듯 풍성하고 육감적이며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신의 계시를 받는 순간조차 그의 인물들은 땀을 흘리고 근육을 긴장시키며 살아서 꿈틀거린다. 성경의 이야기가 천상의 것이 아니라 지상의 것임을, 인간의 몸과 감각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임을 루벤스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헨드릭 빌렘 반 룬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는 방식, 즉 어려운 역사를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들려주듯 풀어내는 그 방식은 즉각 마음을 열게 만든다. 그는 구약의 이야기를 신앙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먼지바람 속에서, 이집트 나일강의 범람 속에서, 가나안 땅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역사의 언어로 재구성한다. 그 시선이 흥미로운 이유는, 성경을 읽는 행위를 종교적 의무가 아닌 지적 탐험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실재했던 대홍수의 기억과 겹쳐지고, 출애굽의 여정은 고대 이집트와 셈족 문명 사이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곧 인류 문명의 여명기를 읽는 것과 같다는 감각, 그 감각을 이 책은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일깨운다.


나는 가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서양 회화 앞에 서면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수태고지, 최후의 만찬, 다윗과 골리앗. 제목은 알겠는데 그림 속 인물들의 손짓과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배경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서양 미술의 절반 이상이 성경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구약의 서사를 그림과 함께 다시 읽기 시작하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의 방향, 인물의 시선, 화면 구석에 놓인 작은 사물들. 화가들은 성경을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 감응하고, 분노하고, 눈물 흘리며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그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곧 성경의 이야기를 그들과 함께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예술과 고전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간은 무의미해진다. 기원전 수천 년의 광야와 16세기 로마의 작업실과 21세기 서울의 내 책상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이어진다.


인류는 왜 이 이야기들을 이토록 오래 기억해왔을까. 홍수, 추방, 방랑, 약속, 배신, 귀환. 이 패턴들이 수천 년 동안 반복해서 그려지고, 쓰이고, 노래되어 온 까닭은 그것이 신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에덴 밖에서 길을 잃고, 언제나 약속의 땅을 향해 걷고, 언제나 믿음과 의심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간다. 렘브란트가, 미켈란젤로가, 루벤스가 그 이야기에 매혹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오래된 서사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화려한 색채와 드라마틱한 붓질 뒤에 숨겨진 것은 결국 이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어쩌면 그 질문에 완전한 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천 년 전 사막을 걸었던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화폭에 옮겼던 거장들도, 그리고 지금 이 책을 펼치는 나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덜 외롭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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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을 위한 부동산 절세의 모든 것 - 주택 생애주기별 세금 완전정복
김성욱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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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세금을 남의 이야기로 여겼다. 월급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소득세, 물건을 살 때 영수증에 찍히는 부가 가치세. 세금은 언제나 내가 의식하기 전에 이미 처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 했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부동산 세금은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집 한 채를 사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취득세, 재산세, 종합부동산세, 임대소득세, 건강보험료, 양도소득세, 증여세, 상속세. 하나의 주택이 이렇게 많은 세금과 연결되 어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집을 사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세금 여정의 출발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여정은 집을 처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것. 부동산 세금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것은 단순한 재테크 지식이 아니라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성인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생존 지식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집주인을 위한 부동산 절세의 모든 것>을 공부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같은 집이라도 언제 사고, 언제 팔고, 얼마나 보유했느냐에 따라 세금의 크기가 극적으로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세대 1주택자라면 양도소득세가 비과세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요건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2년 이상 보유해야 하고, 조정대상지역에서는 거주 요건까지 충족해야 한다. 이사나 상속 등의 이유로 일시적 2주택이 된 경우에도 비과세 특례가 있지만, 신규 주택 취득일로부터 3년 이내에 종전 주택을 팔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 기한을 단 하루라도 놓치면, 수천만 원의 양도소득세가 고스란히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부동산 세금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법이 정해놓은 기준점들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만 불필요한 세금 폭탄을 피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공부한 사람은 합법적으로 세금을 줄일 수 있는 기회가 곳곳에 존재한다. 비과세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보유 기간을 조정하거나, 증여와 상속의 타이밍을 계획적으로 설 계하거나, 다주택자라면 어떤 집을 먼저 팔아야 유리한지를 전략적으로 판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절세의 핵심이다.

2026년 현재,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가 종료되고 보유세 강화 논의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이 타이밍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정책 발표 이후에 부랴부랴 대응하는 것은 이미 늦다. 세제 변화의 흐름을 미리 읽고, 내 자산 구조 에 맞는 시나리오를 사전에 설계해두는 사람만이 세금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절세는 요행이나 편법이 아니 다. 철저한 준비와 시점 관리, 그것이 전부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살 때 취득세를 걱정하고, 팔 때 양도소득세를 걱정한다. 하지만 보유하는 동안의 세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재산세는 매년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부과된다.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시세가 오르면 자연스럽게 재산세 부담도 늘어난다. 2017년 이후 수도권 아파트 공시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재산세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보유 비용이 되었다. 여기에 종합부동산세까지 더해지면, 다주택자의 경우 연 간 보유세 부담이 수백만 원에서 심하면 수억 원에 달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보유세 4총사라는 개념이다.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만이 아니라, 주택 임대소득에 대한 종합소득세와 건강보험료까지 주택 보유와 직결된다. 특히 건강보험료는 많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는 직장가입자로서 보험료가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되지만, 퇴직 이후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면 보유 부동산의 가액이 보험료 산정에 직접 반영되어 예상 밖의 부담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보유세의 무게는 단순히 세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집을 보유하는 전략 자체를 바꾸는 힘이다. 시세 차익만을 기대하며 여러 채를 쌓아두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주택을 보유하고, 어떤 주택을 정리할 것인가. 그 판단에는 취득 원가와 예상 시세 차익만이 아니라, 보유 기간 동안 누적되는 세금 부담까지 포함한 총비용 계산이 필요하다. 부동산 투자의 수익률은 매도 시점의 가격 차이가 아니라, 세후 실질 수익으로 평가해 야 한다. 이것이 내가 부동산 세금 공부를 통해 얻은 가장 실용적인 통찰이다.

부동산 세법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장 상황이 급변할 때마다 수시로 개정된다. 규제 지역이 지정되고 해제되고, 중과세율이 도입되었다가 유예되고,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이 추진되었다가 사실상 폐지되기도 한다. 이 변화의 속도를 일반인이 따라가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세금의 기본 원리, 즉 취득• 보유-처분의 생애주기 구조 속에서 각 단계마다 어떤 세금이 발생하는지를 이해하면, 세법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 변화의 방향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세대 1주택 비과세의 틀은 계속 유지되어 왔다. 다만 조건이 강화되거나 완화되는 식으로 조정될 뿐이다. 종합부동산세의 공제 금액이나 세율은 바뀌지만, 인별 합산 과세라는 원칙은 지속된다. 부부 공동명의와 단 독명의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를 판단하는 논리 구조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세법 공부는 조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조문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아가, 세금은 단지 피해야 할 비용이 아니라 자산 관리의 나침반이 될 수 있 다. 어떤 지역의 주택이 세금 면에서 유리한지, 어떤 취득 방식이 장기적으로 절세에 도움이 되는지, 생애최초 주택 구입 감면이나 출산•양육 관련 취득세 감면 같은 혜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런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 람은 같은 자산을 보유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더 많은 부를 손에 쥘 수 있다.

집은 가족의 안정과 미래 자산이 동시에 담겨 있는 공간이다. 그 집을 둘러싼 세금의 세계는 복잡하고 때로는 가혹하게 느 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복잡함을 이해하고 준비한 사람에게는, 세금은 위협이 아니라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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