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기술 - 성공은 내가 던진 질문에서 시작된다
야마구치 다쿠로 지음, 김수경 옮김 / 레몬한스푼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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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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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묻는 행위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 날씨 어때?"라고 묻고, 점심 메뉴를 고르며 "뭐 먹을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런 물음들이 과연 진짜 질문일까? 아니면 그냥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불과한 것일까? 살면서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나는 늘 막연했다. 더 나은 답을 원했지만, 정 작 더 나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질문이란 그저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행위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환경에서 일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더 빠르 게 성장하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걸까?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잘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질문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질문은 정보 수집 그 이상이다. 좋은 질문은 생각의 방향을 정하고, 대화의 질을 바꾸며, 때로는 상대방과 나 자신 모두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목적'이다. 질문을 던지기 전에 "나는 왜 이것을 묻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목적 없이 던져진 질문은 산만하고 모호하다. 상대방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답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결국 둘 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대화가 끝나버린다. 좋은 질문은 목적 + 현황 파악 + 구체화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이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짧은 준비가 대화 전체의 방향을 바꾸고, 원하는 결과와의 거리를 좁혀준다. 좋은 질문은 우연히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좋은 준비에서 비롯된다.


질문에는 목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용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많은 질문을 삼킨다. "이것도 모르냐는 소리를 들을까봐", "괜히 분위기를 망칠까봐", "혼자만 뒤처지는 것처럼 보일까봐". 이런 두려움들이 입안에 서 질문을 녹여버린다. 그리고 모르는 채로, 불확실한 채로 앞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훨씬 더 큰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많이 성장했던 순간들은 용감하게 손을 들고 "저 이거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했던 때였다. 반면 가장 오래 제자리를 맴돌았던 시간들은 아는 척,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흘려보냈던 순간들이었다.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행위는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장에 대한 진지한 의지의 표현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빠르게 성장하 는 학생은 가장 많이 아는 학생이 아니라, 가장 많이 묻는 학생이다. 묻는 행위 자체가 이미 사고가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을 망설이게 만드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성장의 가장 큰 장벽이다. 그 장벽을 허물기 위해 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을 관찰하고 그 방식을 따라해보는 것, 답하기 쉬웠던 질문과 어려웠던 질문을 구분해보며 좋은 질문의 특성을 체득하는 것, 이런 작은 습관들이 쌓여서 결국 용기 있는 질문자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글을 쓰고, 코드를 짜고, 그림을 그린다. 이런 시대에 인간이 가져야 할 경쟁력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이 '질문하는 능력'을 꼽는다. AI는 질문을 받는 도구다. 같은 도구를 쓰더라도 어떻게 질문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수준이 극적으로 달라진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는 그저 그런 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목적이 분명하고, 상황이 구체화된 질문을 던지면 AI조차도 예상을 뛰어넘는 답을 내놓는다. 흔히들 말한다. "Garbage in, garbage out."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비단 AI에 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에게도, 책에게도, 경험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느 냐에 따라,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배우는 것의 깊이가 달라진다. AI 시대에 도태되지 않으려면 AI를 잘 부릴 수 있어야 하고, AI를 잘 부리려면 결국 질문을 잘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 고유의 사고력, 그 사고를 표현하는 질문력이 더 욱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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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질문의 힘이 외부 세계에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질문은 때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 질문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 이 질문을 품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선택의 기준이 달라지고, 행동의 무게가 달라지며, 삶에 대한 만족도가 달라진다. 이 질문이 없는 삶은 남의 기준에 따라 흘러가기 쉽다. 유행에 휩쓸리고, 타인의 시선에 끌려다니며,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채 바쁘게만 살아가게 된다. 인생이 크게 흔들리는 순간은 정답을 찾았을 때가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때라는 말이 있다. 좋은 질문 하나가 생각의 문을 열고, 그 열린 문 안에서 비로소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질문이란, 무언가를 물어보는 행위만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을 깨우는 도구이고, 성장의 시작점이며, 관계를 깊게 만드는 다리이고, 스스로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좋은 질문 하나가 대화를 바꾸고, 일의 방향을 바꾸고,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꾼다. 그러니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자. 모른다고 해서, 틀릴 수도 있다고 해서 입을 다물지 말아야 한다. 모르기 때문에 물어야 하고,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구체적으로 준비해서 물어야 한다. 앞으로 나는 더 자주, 더 용감 하게, 더 잘 준비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내가 던지는 질문이 나의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고, 나와 대화하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며, 결국에는 나라는 사람의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질문은 재능이 아니다. 누구나 갈고닦을 수 있는 기술이고, 그 기술을 연마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미 성장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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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이아코포 멜리오 지음, 최보민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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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단어 하나를 건네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찾아내도록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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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이아코포 멜리오 지음, 최보민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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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떤 날은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눌려 있는데, 그게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아니면 피로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분명히 느껴지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혀끝까지 왔다가 사라지는 그 감각.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몸 어딘가에 쌓이거나, 소화되지 못한 채 안쪽에서 조용히 곪아가지 않을까. 의학 용어로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라는 말이 있다. 감정표현불능증.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말로 꺼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이상 하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내가 말을 못하는 게 아니었다. 내 감정에 맞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도감이 바로 이 책,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을 읽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아코포 멜리오는 책에서 200개의 감정 단어를 전 세계 언어로부터 길어 올린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처럼 익숙한 언어는 물론, 웨일스어, 미크맥어, 킬리빌라어처럼 쉽게 마주 치지 못할 언어들로부터도. 그 단어들은 각자의 언어 안에서 오랜 시간 숨 쉬어온, 어떤 민족의 경험과 정서가 응축된 결 정체들이다. 번역하면 흐릿해지고, 옮기면 질감을 잃는 그런 단어들. 그러나 뜻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감정 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름을 몰랐을 뿐이라고.

노르웨이어에는 '포렐스케트(Forelsket)라는 단어가 있다. 사랑에 막 빠졌을 때 느끼는 어쩔 줄 모르는 설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몽롱함, 온몸을 감싸는 두근거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의 'falling in love'나 한국어의 '사랑에 빠지다'로 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그 감정의 질감 자체를 꼭 쥐고 있는 단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그 상태에, 이름이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말문이 막히는 순간을 스코트어로는 '타르틀(Tartle)'이라 부른다. 아, 분명히 아는 사람인 데. 분명히 여러 번 만났는데.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그 당혹스럽고 민망한 찰나를 딱 한 단어로 표현해버리다니. 단어를 알고 나면 그 상황이 조금은 덜 창피해진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 모두가 공 유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언어는 현실을 기술만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감정에 이름이 붙는 순간, 그 감정은 실체를 갖게 된다. 막연하게 떠돌던 것이 하나의 형태로 굳어지고, 비로소 내가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이름이 없었을 때 우리는 그 감정 안에 갇혀 있었다. 이름을 얻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 다. 책의 가장 조용하고도 강렬한 선물이다.

하와이어 '아키히(Akihi)는 길 안내를 받고 나서 곧바로 잊어버리는 그 어이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감사 인사까지 넉넉하게 건넨 뒤 출발했는데, 다섯 걸음도 채 안 가서 오른쪽인지 왼쪽인지가 사라진다. 분명히 들었는데,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 당혹스러운 경험에 하와이어 사용자들이 이미 이름을 붙여두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된다. 나 혼자만 이러 는 게 아니구나. 인류가 공유하는 실수가 있구나. 반투어의 '우분투(Ubuntu)'는 '타인을 향한 인간성에 의해 스스로 정의 된다는 믿음'이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이기도 하다는 철학.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공동체 정신을 담은 이 단어는, 개인의 성취와 효율을 지상과제로 삼는 시대에 놀랍도록 낯선 울림을 준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그리움을 불 러일으킨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혹은 아직 다 잃지는 않은 무언가에 대해, 벨라루스어 '탈라카(Talaka)'는 아무런 대가 없이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하는 문화를 뜻한다. 보상은 딱 하나, 일을 마치고 나누는 따뜻한 식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계약서 없이도 성립되는 이 연대의 언어가 낯설면서도 아프도록 아름답다.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 이런 단어를 일상 속에서 쓰는 사람들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이 책을 읽으며 그 문장이 새삼 몸으로 느 껴졌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은 그 동안 내 세계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거나, 이름 없이 떠돌았을 뿐. 감정에 이름이 생기면 달라진다. 설명하지 못해 혼자 삭혔던 것들을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게 된다. '나 지금 타르틀 상태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상대는 웃으며 그 민망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요즘 좀 이루수가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설명 없이도 나의 상태가 전달된다. 언어는 그렇게 관계의 다리가 된다. 우리가 가진 언어의 경계를 넓히는 일은, 곧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책은 그 확장의 여정으로 독자를 조용히 초대한다. 억지로 끌어당기 지 않는다. 그저 단어 하나를 건네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찾아내도록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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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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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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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정책 결정은 수많은 시민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다. 월급 명세서의 공제 항목, 병원비 부담, 자녀의 돌봄과 교육 조건, 노후의 생계까지, 이 모든 것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 정책 결정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결정이 어떤 경로로,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책은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시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실패하면 '시대적 한계'나 '개인의 불운'으로 귀결되곤 한다.


정책의 첫 번째 실패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 저출산 정책의 역사는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박정희 정부가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1983년 합계출산율은 2.06명까지 낮아졌다. 이 수치는 인구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대체 수준인 2.1명을 이미 밑돌고 있었다. 경고등이 켜진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부를 비롯한 사회 전반은 이를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지 못했고, 관성적인 산아 제한 정책은 무려 13년 뒤인 1996년에야 공식 폐기되었다. 정책은 '타이밍'이다. 구조적 문제는 현상으로 고착되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비용을 줄이고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시기를 놓치면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도 성과는 더디고 불확실하다. 2024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5명까지 추락했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저출산의 덫'은 그 결정적 타이밍을 놓친 대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행동을 미루는 관성이 정책 실패의 첫 번째 원인이다. 이는 단순한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정치적 의지의 부재이기도 하다.


문제를 인식했다 하더라도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빗나간다. 저출산 대책에서 역대 정부가 주로 선택한 방식은 '아이를 낳으면 보상하겠다'는 논리 아래 현금 지원과 출산 장려금, 바우처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출산이란 단기적 보상으로 유도할 수 있는 소비 행위가 아니다. 청년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는 주거 불안, 고용 불안정, 장시간 노동, 사교육 경쟁, 경력 단절에 대한 공포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현금을 주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발상은 문제의 본질과 처방을 동시에 그르친 것이다. 이는 비단 저출산 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책 전반에 만연한 '단기 성과주의'는 구조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표면적 증상만 다루는 처방을 낳는다. 각종 위원회와 기본계획이 쏟아지지만, 이념과 정권을 초월한 일관성이 요구되는 중장기 과제는 번번이 정권 교체와 함께 폐기되거나 후순위로 밀린다. 5년 단임제라는 제도적 한계는 대통령으로 하여금 집권 초반에 가시적 성과를 내려는 유인을 강하게 만들고, 이는 필연적으로 근본 처방보다 단기 대증요법을 선호하는 정책 문화를 고착시킨다.


정책 실패의 또 다른 핵심 원인은 결정 구조의 폐쇄성이다. 대한민국의 정책은 대통령 비서실, 경제 관료, 소수 정치 엘리트가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다. 대통령 비서실은 공식적으로는 '보좌 기관'이지만 현실에서는 국정의 실질적 컨트롤 타워로 기능한다. '비서실장이 훨씬 더 많은 일을 접한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발언처럼, 주요 정책 결정은 선출된 내각이 아니라 비선출 참모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당 역시 정책의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한국의 정당은 '정책 비전보다 유력 대선 주자나 계파 수장을 중심으로 결집하며 선거철에만 활성화되는' 가변적 속성을 갖는다. 정책은 정당이 아닌 후보 개인의 캠프에서 급조되고, 집권 후에는 관료 조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태가 반복된다. '한국 민주주의에서 정책 정당은 밤하늘의 북극성과 같다'는 어느 학자의 비유처럼, 정책 중심의 정당 경쟁은 지향점이지만 현실과는 여전히 먼 거리에 있다. 결정 과정이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정책 실패의 책임이 불분명해지는 구조는 더 나은 정책을 향한 학습과 환류를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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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방향이 올바르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정치적 의지가 없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출산율 하락을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규정하고 삶의 조건 개선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 패러다임 전환은 분명 진일보한 변화였다. 그러나 선언에 상응하는 실행의 속도와 강도는 미약했다. 장시간 노동 개혁은 기업의 반발을, 주거 문제 해결은 막대한 정치적 비용을, 교육 경쟁 완화는 기득권의 저항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는 번번이 이 문턱 앞에서 멈춰 섰다. 이익 집단의 압력도 정책의 발목을 잡는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정규직 중심의 이익 대변에 머물러 플랫폼·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하고, 언론은 건설 광고 수익과 부동산 플랫폼 운영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부동산 정책에 대한 공정한 비판 기능을 상실하기 쉽다. 금융실명제의 사례가 보여주듯, 진정한 개혁은 언제나 기득권의 보호막을 걷어내는 '권력 해체'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거센 저항을 수반하며, 그 저항을 버텨낼 정치적 동력이 없으면 개혁은 미완으로 끝난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책의 당사자인 시민이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는 사실 역시 실패의 근본 원인이다. 선거철에 정책 공약이 쏟아지지만, 그 정책이 어떤 경로로 탄생하고 누가 결정하는지 시민들은 알기 어렵다. 관료 조직의 관성, 재정 당국의 판단, 이익 집단의 압력, 언론의 프레임이 복잡하게 작용하는 과정에서 시민은 점점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정책이 가치 중립적 기술이 아니라 '누구의 삶을 우선 보호하고 누구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치 선택의 문제라는 점에서, 시민의 배제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다.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시민은 위기의 순간마다 역사를 바꾸는 주체로 등장해왔다.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2016~2017년 촛불혁명, 그리고 2024~2025년의 '빛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시민은 어긋난 역사를 바로잡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이 놀라운 주권 행사는 주로 위기의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일상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은 여전히 빈약하다. 광장의 민주주의가 일상의 민주주의로 이어지지 않는 한, 정책 실패의 순환은 끊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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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이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단일하지 않다. 문제를 제때 인식하지 못하는 타이밍의 실패, 증상만 다루고 구조를 외면하는 진단의 오류, 소수 엘리트에 집중된 폐쇄적 결정 구조, 기득권의 저항 앞에서 무너지는 정치적 의지의 부재, 그리고 시민의 배제라는 민주주의의 결함, 이 모든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정책 실패를 재생산한다. 더 나아가 이 실패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시민이 배제되면 진단이 편향되고, 진단이 편향되면 처방이 잘못되며, 처방이 잘못되면 정치적 동력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보다 질문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이 사회에서는 아이를 낳는 순간 삶이 위태로워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올바른 질문만이 표면적 처방에서 벗어나 구조적 해법으로 나아가게 한다. 동시에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시민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 혁신이 절실하다. 숙의민주주의, 공론화 위원회, 시민의회 같은 참여 메커니즘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시민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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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의 뇌과학
김대영 지음 / 다산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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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러닝화를 산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신발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말이다. 처음 달리기를 결심했을 때, 나는 꽤 진지했다. 러닝 앱을 설치하고, 새벽 알람을 맞추고, 스트레칭 루틴까지 유튜브로 찾아봤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알람은 꺼졌고, 앱은 실행 기록 없이 아이콘만 남았다. 그다음엔 어김없이 자기혐오가 찾아왔다. ‘또 작심 삼일이야.’ ‘나는 원래 끈기가 없어. ’의지박약.‘ 그 단어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붙여온 꼬리표였다. 책은 첫 페이지부터 그 꼬리표를 조용히 떼어낸다. 나의 뇌는 너무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생존과 에너지 보존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저항한 뇌가, 오히려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수년간 '나의 문제'라고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200만 년의 진화가 빚어낸 뇌의 정상적인 방어 반응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잘못된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숫자가 달리기를 망쳤다 돌이켜보면, 나는 달리기를 시작한 게 아니라 경쟁을 시작했었다. 킬로미터를 재고, 페이스를 확인하고, 어제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스마트워치의 숫자가 목표치에 미치지 못하는 날이면 그날의 달리기 전체가 실패처럼 느껴졌다.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괜히 속도를 높였다. 숨이 차도 걷지 않으려 했다. 걷는 것은 지는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뇌는 그 경쟁을 위협으로 읽는다. 비교의 눈길이 늘어날수록, 뇌 안의 스트레스 회로는 활성화되고, 달리기는 기쁨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의무는 피로하다. 피로한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매번 한 달을 넘기지 못했던 것이다.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 뇌가 달리기를 고통과 연결지어 기억하도록 내가 직접 훈련시켜온 셈이었다. 숫자는 목표를 명확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기록이 단축되지 않는 날, 뇌는 보상을 받지 못하고 동기를 잃는다. 반면 달리는 동안 느끼는 바람의 온도,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 호흡이 차츰 안정되는 리듬을 기록으로 삼는다 면, 보상의 기준 자체가 달라진다. 기록이 아니라 감각이 기준이 될 때, 뇌는 비로소 달리기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다.

달리기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다. 트랙 위도, 오르막 구간도 아니다.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기까지의 그 짧고도 긴 시간이다. 온종일 뇌를 쥐어짜고 난 저녁,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은 이미 방전 상태다. 그 틈을 타 생존 본능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전면에 나선다. 편도체는 달리기를 에너지 낭비로 판단하고, 소파의 포근함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다. 이 상태에서 '오늘도 달려야 한다'는 이성의 설득은 처음부터 질 수밖 에 없는 싸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뇌를 이기려 하지 말고, 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속이면 된다. 딱 5 분만, 집 앞까지만, 걷다가 오면 그만이라고. 뇌에게 위협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압박이 없으면 저항도 줄어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일단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뇌는 스스로 달릴 이유를 만들어낸다. 의욕은 시작 전에 오는 게 아니 라, 시작하고 난 뒤에 뒤따라온다. 행동이 선행되면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하고, 달리기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로 재등록 되기 시작하는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이다. 5분의 작은 승리가 매일 밤 도파민으로 쌓일 때, 그 미세한 보상들이 습관의 토대가 된다.

달리기를 지속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를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로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그 전환점이 바로 러너스 하이다. 장시간 달리기로 고통이 한계에 달할 즈음, 뇌는 아난다마이드라는 물질을 분비한다. 이것은 뇌의 보상 전략이다. 고통을 견디고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인류가 수 십만 년간 생존해 온 메커니즘이 지금 이 시대의 공원 트랙 위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한 사람의 뇌 안에서는 질문이 바뀐다. '오늘 꼭 달려야 해?'가 사라지고, '언제 또 달릴 수 있을까?'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뇌의 보상 시스템이 재구성된 것이다. 달리기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보상의 기억으로 저장될 때, 습관은 노력 없이 자동으로 반복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운동의 효과를 몸무게나 체형으로 측정한다. 오늘 달렸더니 몇 칼로리가 소모됐는지, 한 달 뒤에 살이 빠졌는지. 그러나 이 책이 제안하는 달리기의 의미는 훨씬 긴 시간축 위에 놓여 있다.

운동화 끈을 묶는 순간, 우리는 오늘의 건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20년 뒤의 기억력을, 집중력을,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설계하는 것이다. 달리기는 뇌에 새로운 신경 연결을 만들고, 인지 기능의 노화 속도를 늦추며, 우울과 불안에 저항하는 천연 항우울제를 매일 공급한다. 인류 조상들에게 달리기가 지형을 기억하고, 먹잇감을 예측하고, 무리와 소통하는 고도의 생존 활동이었듯, 우리의 유전자에는 달릴 때 뇌가 성장하도록 새겨진 본능이 살아있다. 그러니 달리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도 된다. 뇌는 그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환경을 설계하는 지혜다. 비교를 멈추고, 감각을 기록하고, 5분의 작은 시작을 이어가는 것. 그 조용하고 작은 리듬 안에서, 진짜 체력과 진짜 뇌가 함께 만들어진다. 달리기는 더 이상 포기의 역사를 반복하는 과제가 아니다. 뇌와의 다정한 밀당이자, 미래의 나를 향한 가장 조용하고 꾸준한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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