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 - 한글 580년, 팍스 코리아나로 가는 길
이현준 지음 / 해향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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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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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한글을 읽고 쓴다. 메신저로 안부를 묻고, 지하철 안내문을 읽고, 간판과 메뉴판을 스치듯 본다. 그러면서도 이 글자가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드물다. 학창 시절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창제 원리를 배웠고 '한글은 과학적인 문자'라는 말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그것은 시험을 위해 외운 지식에 가까웠다. 너무 익숙한 것은 오히려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역설이다. 올해 한글날은 특별하다. 훈민정음 반포 580년, 한글날을 제정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게다가 지금 세계는 K-팝을 듣고 K-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전에 없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이런 시점에 <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를 읽으며 한글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한류를 최근의 현상으로만 여기기 쉽지만, 이 책은 그 시선을 넓혀 준다. 846년 바그다드의 관료 이븐 쿠르다지바는 <도로와 왕국 총람>에 신라를 사람들이 찾아와 정착할 만큼 풍요로운 나라로 기록했다. 천이백 년 전에도 한반도는 멀리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의 관심이 우연한 유행이 아니라 오랜 교류의 역사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류를 오래 지속되는 흐름으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노래와 드라마는 관심의 문을 열어 주지만, 그 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길은 결국 언어와 문자다. 실제로 한국어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이 학습되는 언어가 되었고, 세종학당도 2007년 3개국 13곳에서 시작해 89개국 273곳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한때 우리가 영어를 배우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면, 이제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글을 배우고 있다.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한글이 있다.


책에서 오래 생각이 머문 대목은 '이름'이었다. 세종이 붙인 이름은 훈민정자(訓民正字)가 아니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글자보다 소리를 앞세운 이 이름에는, 훈민정음이 단순히 우리말을 적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 내는 소리를 정확히 표현하려는 체계였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해례본」이 말하듯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 적을 수 있다는 자부심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 체계의 원리는 지금 보아도 놀랍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기본자를 만들고,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획을 더해 확장한다. 소리의 성질과 글자의 모양이 대응하는 문자는 세계 문자사에서도 드물다. 페니키아 문자가 그리스 문자와 라틴 문자로 이어지듯 대부분의 문자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교류 속에서 조금씩 변해 온 산물이라면, 훈민정음은 한 사람의 깊은 고민 끝에 원리부터 설계된 문자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막연히 '한글은 훌륭하다'고 말하던 나는, 무엇이 어떻게 훌륭한지를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책은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세종이 만든 것은 스물여덟 자였는데, 왜 우리가 쓰는 것은 스물네 자일까. 사라진 것은 아래아(ㆍ), 반치음(ㅿ), 여린히읗(ㆆ), 옛이응(ㆁ)이다. 우리말에서 쓰이지 않게 된 소리에 맞춰 글자도 함께 정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저자의 표현대로 '훈민정음의 절반만 쓰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았다.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어서 쓰이지 않는 소리가 사라지고 글자가 정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실용을 위해 글자를 줄인 선택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저자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분명히 곱씹을 만하다. 우리말에서는 쓰지 않게 되었을지라도, 그 글자들이 담고 있던 소리를 적는 원리까지 잊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오늘날 한글로 외국어를 적을 때 b와 v, f와 p, l과 r 같은 소리를 구별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사라진 글자와 창제 원리를 다시 활용할 여지가 있다는 제안은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옛 글자를 복원하자는 주장에 대한 찬반과는 별개로, 잃어버린 것의 의미를 묻는 일 자체가 값지다고 느꼈다.


책을 덮고 나니 늘 쓰던 글자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한글이 위대하다는 말은 자랑으로 그칠 때 힘이 없다. 어떤 원리로 설계되었고, 무엇을 잃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때 비로소 그 위대함은 실체를 갖는다. 남의 글자를 빌리지 않고 온전히 우리 글자로 우리말을 적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러나 행운은 누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지키고 가꾸는 책임으로 이어진다. 세계가 한국어에 관심을 보이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관심을 뿌듯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준비하는 것이다. 한글이 지닌 소리 표현의 가능성을 정확히 알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학습 환경을 마련하며,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말과 글을 소중히 쓰는 일이다. 해외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한국어가 제2외국어가 되지 않도록 지켜 주자는 저자의 당부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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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 인생의 굴레마다 찾아온 뜻밖의 해답
우인 지음 / 서울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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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어렵고 만만치 않은 사회생활에서 큰 위안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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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 인생의 굴레마다 찾아온 뜻밖의 해답
우인 지음 / 서울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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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가위 연휴의 마지막 밤,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늦잠도 자고, 오랜만에 가족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명절 음식 냄새가 옷에 배도록 부엌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런데 연휴 마지막 날 저녁이 되니 이상하게 마음이 벌써 회사 책상 앞에 가 있었습니다. 밀린 메일함이 떠오르고, 다음 주 회의 안건이 스쳐 가고, 아직 오지도 않은 월요일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몸은 아직 명절 연휴 한가운데 있는데, 마음은 이미 일상으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문득 책에서 읽은 도거掉擧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끌어다 걱정하는 들뜬 마음. 부처님은 이것을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라고 하셨다는데, 저는 그것이 수행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명절 마지막 밤 소파에 누운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걱정한다고 월요일 업무가 미리 끝나는 것도 아닌데, 저는 그 시간 동안 애꿎은 연휴의 마지막 밤을 월요일에 빼앗기고 있었던 셈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쉬어야 다음 순간을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이, 그날 밤 유난히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출근한 첫날, 예상대로 하루는 퍽퍽했습니다. 밀린 업무 사이로 동료와 사소한 의견 차이가 있었고, 저는 회의 내내 제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 대화를 곱씹으며 왜 그렇게까지 날을 세웠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책에서 말한 아집我執이라는 단어가 그제야 실감 나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직접 확인하지도 않은 것을 마치 유일한 진실처럼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부처님이 두 청년에게 던진 질문처럼, 저 역시 제가 믿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그렇게 확신했던 것들 중 상당수는,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그저 익숙해서 옳다고 믿어온 것들이었습니다. 확신이 강할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좁아진다는 것을, 그날 회의실 안에서 뒤늦게 배웠습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휴대폰을 열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명절 사진을 넘겨 보았습니다. 누구는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누구는 새 차를 뽑았고, 누구는 부모님께 큰 선물을 안겨드렸다고 했습니다. 화면을 넘길수록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이번 연휴에 무엇을 했나 돌아보니 딱히 내세울 것 없이 평범했던 며칠이었는데, 그 평범함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저는 지금 물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는 원숭이처럼 굴고 있었습니다. 남의 하이라이트 장면만 보면서 제 삶 전체를 그것과 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대가 올려둔 것은 그의 삶의 극히 일부일 뿐인데, 저는 그 일부와 제 하루 전체를 저울질하고 있었습니다.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결핍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그제야 몸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 손에 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남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부족함이 태어난다는 것을요. 퇴근 후에는 오랜만에 부서 회식 자리가 있었습니다. 다들 웃고 떠드는 사이, 한 동료가 은근히 선을 넘는 부탁을 계속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웃으며 다 받아주었을 텐데,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선을 그어보았습니다. 방편方便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를 무너뜨리면서까지 남에게 맞추는 것이 자비가 아니라, 나와 상대 모두를 지키는 질서를 세우는 것이 진짜 지혜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울타리가 있어야 꽃이 핀다는 문장처럼, 저도 처음으로 관계에 작은 울타리 하나를 세워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선을 그은 뒤에 그 동료와의 사이가 더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느낀 것은, 연휴가 끝났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더 힘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명절 동안 잠시 느슨해졌던 마음이 다시 예전의 습관대로 돌아가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미리 걱정하고, 내 생각만 옳다고 믿고, 남과 비교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나를 잃어버리는 그 오래된 패턴들이요.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그 패턴에 이름을 붙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도거, 아집, 원후취월, 방편이라는 낯선 한자어들이 실은 제가 매일 겪는 감정에 붙은 오래된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그 감정들이 더 이상 저만의 결함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수천 년 전 사람들도 똑같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을 이렇게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언어로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연휴 끝의 일상은 여전히 퍽퍽합니다. 밀린 일은 그대로고, 관계는 여전히 신경 쓰이고, 통장 잔고는 늘 아쉽습니다. 다만 이제는 흔들릴 때마다 그 흔들림에 이름을 붙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도거인지, 아집인지, 아니면 그저 원숭이가 물속의 달을 움켜쥐려는 헛된 몸짓인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마음은 저를 완전히 삼키지 못하고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여지를 내어줍니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알아차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이번 한가위는 저에게 쉼과 동시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작은 지혜 하나를 쥐여준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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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거울 - 사랑하고 욕망하고 흔들리는 인간을 비추는 64개의 문장
민유하 지음 / 리프레시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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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문장들 앞에 서면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사실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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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거울 - 사랑하고 욕망하고 흔들리는 인간을 비추는 64개의 문장
민유하 지음 / 리프레시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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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문득 셰익스피어의 문장들이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이 아닌, 오늘의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사랑한다고 믿는 마음은 때로 상대를 향하기보다 내 안의 허기를 먼저 드러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 정말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려고 상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셰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눈은 상대를 보지만, 마음은 자신이 보고 싶은 의미를 입힌다. 사랑이라 믿은 것이 실은 나 자신의 결핍감을 채우려는 욕망이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랴 집착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상대가 내 모든 허기를 채워주지 못할 때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했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불완전한 자화상이었다 욕망에 대해서 읽으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이것을 이루면 행복할 거야"라고 중얼거렸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도 공허했다. 마치 맥베스 부인의 말처럼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도 만족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써버린 셈“이라는 심정 말이다. 욕망은 항상 나 앞에서 손짓한다. 아직 더 있다고, 더 나아가야 한다고 독촉한다. 현재의 순간을 살아야 하는데 나의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속해 있었 다. 지금 무엇에 감사해야 하는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잊고 살았다. 욕망이 나를 지배할 때 내게는 현재가 없었다. 오직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미래만 있었을 뿐이다.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라는 질문. 나는 나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제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니. 때론 직장 동료나 친구가 나를 더 정확히 본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 자신을 합리화하고, 좋게 해석하고, 자신의 약점은 감춘다. 하지만 남들의 눈에는 내 거짓과 위장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폴로니어스의 말, "자기 자신에게 거짓되지 마라. 그러면 밤 뒤에 낮이 따르듯, 다른 누 구에게도 거짓될 수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었다. 진실은 내가 먼저 나의 마음을 똑바로 보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에서만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연결이 시작된다. 기억에 남은 것은 용서에 관한 말이었다. 프로스페로의 "더 드문 행동은 복수보다 덕에 있다". 내 마음속에 간직해온 작은 복수심들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상처, 작은 배신, 무시당한 감정들. 나는 얼마나 오래 그 칼날을 갈며 언젠가의 복수를 꿈꿨던가. 하지만 책의 저자가 말한 대로 "내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이 어디선가 이를 갈며 복수의 칼을 칼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 나도 깨달았다. 복수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 는다. 그것은 오직 누군가가 먼저 그 칼을 강물에 던질 때만 끊어진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마음에서 복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행위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문장들 앞에 서면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사실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400년 전 무대 위의 드라마가 아니라, 내 삶의 그림자였다. 거울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문장들이 바로 그런 거울이다. 그 앞에 설 때마다 마음의 진실과 마주한다. 사랑인 줄 알았던 것이 집착이며, 욕망이 현재를 빼앗고 있고, 내가 얼마나 쉽게 거짓을 말해왔는 지를 알게된다. 오래된 문장은 때로 오늘의 나를 가장 조용하게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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