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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제인 오스틴 - 제인의 사람과 사랑, 문학에 대한 가장 내밀한 생각을 나눈 편지들
제인 오스틴 지음, 유혜인 옮김 / 이일상 / 2026년 3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제인 오스틴의 편지를 읽었던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오스틴을 소설가로만 알았고, 그 편지들도 소설의 연장선처럼 느꼈다. 언니 커샌드라에게 쏟아내는 무도회 이야기, 이웃의 사소한 험담,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그 모든 것이 경쾌하고 매력적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먼 시대의 재기 넘치는 여성이 남긴 기록 정도로 읽었다. 흥미로운 문학적 자료. 그게 전부였다. 그 책을 다시 집어 든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저녁이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펼쳤다. 그리고 첫 페이지부터 뭔가 달랐다. 분명히 같은 문장들인데, 다르게 읽혔다.
직장이라는 공간은 이상하다.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말 한마디를 뱉기 전에 이것이 적절한가를 따지고, 표정 하나를 지을 때도 상황에 맞는가를 계산한다. 처음에는 그 계산이 낯설고 피곤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당연해졌다.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조금씩 잊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오스틴의 편지 속 한 대목이 유독 눈에 걸렸다. 그녀는 언니에게 이렇게 썼다. 아일랜드 친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전하기가 두렵다고, 언니의 잔소리가 너무 심하니 둘이 함께 춤추고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최대한 방탕하고 충격적으로 상상하라고.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는 잔소리를 피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유머로 뒤집어버린다. 언니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 시선에 주눅 들지 않는다. 자신이 즐거웠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고수하면서, 동시에 언니와의 관계도 지켜낸다. 나는 그런 균형을 잃은 지 꽤 됐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오스틴은 또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언니가 어떤 집에서 '가구 중 하나 취급'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이 언니를 직접 설치한 적은 없지 않냐고. 신랄하고 유쾌한 문장이지만, 읽는 내내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가구. 그곳에 늘 있어서 아무도 존재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것.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체로 여겨지지도 않는 것. 직장에서 나는 가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 가구가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찰을 줄이고, 튀지 않고, 부드럽게 녹아들기 위해. 그것이 능숙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다운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놓친 것이 있었다. 오스틴이 언니에게 상기시켜 주듯, 가구는 설치되는 존재다. 누군가의 편의에 맞게 배치되는 것. 나는 그 배치에 너무 순순히 응하면서, 내가 어디에 서고 싶은지를 점점 묻지 않게 되었다.
오스틴은 편지에서 자신이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오로지 명성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이 문장을 대학 시절에 읽었을 때는 귀엽고 솔직한 자기 고백처럼 느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그 안에 다른 무게가 실려 있다. 명성이란 결국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이 인정받고 기억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 욕망을 그녀는 숨기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잘하고 싶다는 것, 인정받고 싶다는 것, 내가 한 일이 의미 있다고 여겨지기를 바란다는 것. 이런 욕망은 자칫 이기적이거나 유치한 것처럼 취급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고, 대신 팀을 위해서라거나 조직을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한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오스틴은 당당하다. 나는 명성을 위해 쓴다고. 그 솔직함이 지금의 나에게는 일종의 용기처럼 읽힌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그녀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오스틴의 편지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강요된 관용을 베풀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직접 그 생각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조카에게 자신의 물건을 주겠다고 결심하지 않겠다고. 얼핏 보면 인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다시 읽으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다. 마지못해 하는 친절은 친절이 아니라는 것. 진짜 다정함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강요된 관용'의 순간들이 온다.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동의하는 척해야 하는 회의, 별로 반갑지 않지만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자리, 억지로 짜낸 칭찬과 형식적인 응원. 그 모든 것이 조직을 매끄럽게 굴리기 위해 필요한 윤활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윤활유에 지쳐가고 있었다. 오스틴의 말은 그 피로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강요된 관용. 내가 지쳐 있던 것은 관계가 아니라, 자발성 없는 관계였다는 것.
오스틴은 조카에게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담은 편지를 여러 통 보냈다. 날카롭지만 따뜻하고, 정확하지만 격려를 잊지 않는 편지들. 그 편지들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단순히 재능 있는 소설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녀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언니에게, 조카에게, 세상에 솔직했다. 그리고 그 솔직함이 그녀의 문장을 200년이 넘도록 살아있게 했다. 다시 읽은 제인 오스틴의 편지는 문학적 자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과 나다움 사이에서 매일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보내온, 200년 전의 답장 같았다. 당신이 진짜로 즐거웠던 것을 기억하라고. 강요된 친절 말고 자발적인 다정함을 선택하라고. 검은 눈동자 같은 것에 솔직하게 끌려도 된다고. 그 목소리가 놀랍도록 선명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나다운 방식으로 누군가의 편지를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