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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끌리는 브랜드에는 틈이 있을까 - 현대미술에서 훔쳐온 욕망의 공식
윤상훈 지음 / 미래의창 / 2026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얼마 전, 오래 쓰던 노트를 다 쓰고 새 것을 샀다. 무인양품 노트였다.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손이 갔다. 집에 돌아와 새 노 트를 펼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걸 샀지?' 가격이 특별히 저렴하지도 않았고, 기능이 놀랍도록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표지에는 아무 그림도 없었고, 브랜드 로고조차 작고 조용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골랐다. 그 이유를 당 시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윤상훈님의 <왜 끌리는 브랜드에는 틈이 있을까>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언어로 붙잡 을 수 있었다. 브랜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말을 그 안에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브랜드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단순한 구매를 기억으로 바꾸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좋은 브랜드란 완벽한 브랜드라고 믿어왔다. 메시지는 명확해야 하고, 이미지는 일관되어야 하며, 소비 자가 오해할 여지는 없어야 한다고. 기능을 빠짐없이 설명하고, 장점을 목록으로 정리하고, 광고 문구는 귀에 쏙 들어와야 했다. 그 믿음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브랜드들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애플 은 아이폰의 사양을 줄줄이 나열하지 않았다. 나이키는 운동화가 발에 얼마나 편한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것은 훨씬 적었고, 그래서 우리는 훨씬 많이 기억했다. 왜 그럴까. 완성된 이야기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모든 문장이 닫혀 있 고, 모든 여백이 채워져 있으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읽는 관객에 머문다. 읽고 나면 끝이다. 하지만 이야기 안에 빈자리가 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 한다. 그 순간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공동 저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참 여해서 만든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피카소가 황소를 계속 단순하게 만들어갈 때, 사람들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 다. 선 몇 개로 그린 그림이 황소라고? 그런데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멈춰 서서 생각했다. "이게 황소의 본질 인가?" 라는 질문이 생겼다. 세밀하게 그려진 황소 그림 앞에서는 그런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이미 다 보여주었으니까.
흥미로웠던 부분은 '거리두기'와 '충돌하기'의 개념이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결 합해 새로운 인상을 만드는 방식.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마케팅 기법처럼 보였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것이 훨씬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익숙한 것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매일 보는 거리, 매일 쓰는 물건, 매일 듣 는 말. 뇌는 이미 처리한 정보를 다시 처리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익숙함은 투명해진다. 반대로 낯선 것은 시선을 붙잡는다. 예상이 어긋나는 순간, 뇌는 깨어나 그것을 처리하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섬세한 균형을 요구한다. 너 무 낯설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한다. 너무 익숙하면 그냥 지나친다. 좋은 브랜드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알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 가까운 것 같은데 조금 다른 그 지점. 그 지점에서 사람들은 멈추고, 더 보려 하고, 생각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브랜드를 기억에 새긴다. 예전에 한 향수 브랜드의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아무 설명도 없 었다. 그냥 낯선 풍경, 낯선 사람, 낯선 감각이 짧게 지나갔다. 그 향수가 어떤 냄새인지는 광고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브랜드를 오래 기억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왠지 궁금했고, 왠지 끌렸다. 그 낯섦이 내 안에서 질문 을 만들었고, 그 질문이 브랜드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왜 지금 사람들은 기능보다 의미를 따지는가. 예전에는 성능 좋고 가 격 합리적인 제품이 잘 팔렸다. 지금도 그것이 기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이걸 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 이것은 소비가 필요 충족에서 자기 표현의 언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사느냐 가 자신이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는 신호가 되었다. 그렇다면 브랜드는 기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파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의미는 브랜드가 일방적으로 주입할 수 없다. 소비자가 스스로 발견하고 붙여야 진짜 의미가 된다. 론 뮤익의 조각이 단순한 밀랍 인형과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밀랍 인형은 아무리 정교 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것은 완성되어 있고, 닫혀 있다. 하지만 뮤익의 조각 앞에 서면 우리는 무언가를 느낀 다. 그 느낌을 설명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이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작품이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이 다. 브랜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비워두는 일이다. 뭔가를 더 넣고 싶은 충동은 자연스럽다. 설명을 하나 더 추가하면 오해가 줄 것 같고, 장점을 하나 더 나열하면 설득이 쉬울 것 같다.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유혹에 끌린다. 내가 만든 것 을 충분히 보여주고 싶고,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봐 주었으면 싶다. 그런데 그 욕심이 오히려 브랜드를 닫아버린다. 소 비자가 들어올 문을 막아버린다. 너무 많은 말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 된다. 독백 앞에서 상대는 참여자가 아니라 청중이 된다. 그리고 청중은 공연이 끝나면 돌아간다. 레고가 완성된 장난감이 아니라 블록을 파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완성된 장난감은 소비자를 사용자로 만든다. 블록은 소비자를 창조자로 만든다. 창조자는 그 경험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것 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결국 브랜드란 소비자와 함께 완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랜드가 설계하는 것은 완성품이 아니라 가능성의 구조다. 그 안에서 소비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브랜드를 살아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