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다는 착각 - 시간 압박을 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9가지 심리 법칙
이언 테일러 지음, 최기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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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도 나는 바쁘다. 아니, 정확히는 바쁘다고 느낀다. 달력은 빽빽하고, 할 일 목록은 줄어들지 않으며, 하루가 끝날 때마다 무언가를 다 하지 못했다는 묵직한 감각이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돌아보면 그 하루 안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시간은 분명히 흘렀는데, 나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시간이 없어서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 말을 꺼내는지 생각해보면 놀랍다. 운동을 못하는 이유도,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도, 오래 묵혀둔 꿈을 꺼내지 못하는 이 유도 모두 시간 탓이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시간과 맺어온 관계 자체가 뒤틀려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고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의지력 부족이나 나쁜 습관을 탓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정교한 심리적 함정들이 숨어 있다. 첫 번째는 낙관적 자기기만이다. 우리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습관적으로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이 일은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판단하지만, 실제로는 두 시간이 걸린다. 이런 오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편향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생각할 때 이상적인 조건을 전제하지만, 현실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 집중력의 저하, 사소한 방해들이 끼어든다. 흥미롭게도 타인의 일을 예측할 때는 이런 실수와 지체를 자연스럽게 고려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너그럽고, 그래서 가장 쉽게 속는 사람이 된다. 두 번째는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시간이다. 어떤 일이든 주어진 시간만큼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한 시간짜리 일이 두 시간이 주어지면 두 시간을 꽉 채운다. 여유 있다고 생각할수록 시작은 늦어지고, 과정은 느슨해지며, 마감 직전에야 비로소 집중이 시작된다. 시간이 많다는 느낌이 오히려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고, 정작 그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가 끝난다. 이것이 역설이다. 시간이 더 많을수록 더 잘 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많이 흘려보낸다. 세 번째는 의지력에 대한 과신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믿는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결심만 하면 바뀔 수 있다고. 그러나 의지력은 근육과 같아서, 쓸수록 닳는다. 하루의 초반에는 단단하게 서 있던 결심이 오후가 되면 흐물거리고, 저녁이 되면 무너진다. 그래서 미룬다. 내일 하자, 다음 주에 하자, 언젠가 하자. 그러나 그 '언젠가'는 달력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력이 가장 충만한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을 배치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매번 잊는다.

바쁘다는 느낌이 반드시 많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일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은 흔히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한다. 시간이 없다는 감각은,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와 맞지 않거나, 나의 진짜 가치와 어긋나고 있다는 경고 신호일지 모른다. 몰입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흘러간다. 하지만 억지로, 불안하게, 마지못해 앉아 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형벌처럼 느껴진다. 결국 시간의 질감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 있으면, 그 흐름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게 된다. 실제로 할 일이 많지 않아도 초조해지고, 쉬고 있으면 뭔가를 놓치 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이 불안감이 바로 시간 부족의 진짜 원인인 경우가 많다.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분위기와 시선과 기대다.

우리는 오랫동안 빈 시간을 낭비로 여겨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목적 없이 걷는 시간. 이런 것들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죄책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빈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되찾는 시간이다. 뇌는 쉬는 동안에도 일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 뇌는 흩어진 정보들을 연결하고, 감정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종종 샤워 중에, 산책 중에, 잠들기 직전에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빈 시간이 생각을 발효시킨다.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무언가로 채우려는 충동, 스마트폰을 꺼내고, 영상을 틀고, SNS를 스크롤하는 행동들은 결국 그 발효의 시간을 빼앗는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비하지만 더 적은 것을 생각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더 적은 것을 느끼게 된다.

시간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30분을 채 우겠다는 계획보다 건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겠다는 지향이 더 강한 동력을 만든다. 책을 한 달에 몇 권 읽겠다는 목표보다 배우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정체성이 더 오래 지속된다. 정체성은 의지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책을 사 랑하는 사람은 굳이 읽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 든다. 달리기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은 오늘 뛸 지 말지를 매번 고민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과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엄청 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갈 때, 시간은 더 이상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흐름의 매체가 된다. 억지로 쪼개고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타고 가는 강물처럼.

시간은 늘릴 수 없다. 하루를 25시간으로 만들거나, 일주일에 하루를 더 끼워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느끼 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더 많은 일을 밀어 넣어서가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 더 깊이 있음으로써. 계획표를 촘촘하게 채워 서가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을 먼저 함으로써. 의지를 불태워서가 아니라, 나다운 정체성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결국 시 간이 없다는 느낌은, 내가 원하는 삶과 내가 실제로 보내는 시간 사이의 간격에서 온다. 그 간격을 줄이는 것, 그것이 시간 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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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어라 - 헤르만 헤세 청춘소설 3부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지음, 송동윤 옮김 / 스타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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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을 다시 꺼내 든 건,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오랫동안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막연했지만 분명했다. 책은 <수레바퀴 아래서>,<데미안>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를 같이 엮은 책이었다. 헤르만헤세의 대포작 세 권을 차례로 읽는 동안, 나는 한 인간이 깨어나는 과정을 함께 겪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스스로 깨어라>는 이 세 편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은 책이다. 제목에 담긴 두 겹의 뜻, 잠에서 깨어나듯 자신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껍질을 깨고 세계로 나오는 것은 편집자의 언어가 아니라, 헤세가 세 소설을 통해 일생 동안 탐구한 질문의 핵심일 것이다. 나는 세 권을 다시 읽으면서 그 질문이 얼마나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내 삶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 기벤라트는 모든 걸 갖춘 소년처럼 보였다. 뛰어난 머리, 성실한 태도, 마을 전체의 기대. 그러나 그를 에워싼 것들은 그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갈아먹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공부, 낚시와 산책마저 허락되지 않는 시간들, 그리고 쉬지도 못한 채 이어지는 시험들. 어른들은 그것을 '훈련'이라 불렀고, '사랑'이라 믿었다. 한스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그가 결국 강가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전에, 헤세가 차례차례 던지는 물음들이었다. 왜 토끼를 빼앗았는가, 왜 낚시를 금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쉬지 못하게 했는가. 이 질문들은 한스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향해 있다. '스스로 깨어라'는 말이 한스에게는 얼마나 잔인하게 들렸을까. 그는 깨어날 기회 자체를 빼앗긴 소년이었다. 깨어남 이전에 짓눌려 버린 삶, 그것이 <수레바퀴 아래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첫 번째 진실이다. 깨어나는 것은 때로 먼저 부서지는 일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부서짐이 외부의 폭력에 의한 것일 때,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파괴가 된다. 한스의 비극은 그 차이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는 한스와 달리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생존이 아니었다. 싱클레어는 두 세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라지는 고통을 겪는다. 아버지의 세계(빛과 질서, 예배와 도덕)와 그 너머의 세계, 냄새도 말투도 다른, 혼돈과 욕망과 스캔들로 가득한 세계.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흔들렸다. 그때 데미안이 등장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싱클레어가 스스로 묻게 만드는 존재다. 카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그의 언어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낯설게 만든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으며, 강한 자는 두려움을 받는다는 것, 이 뒤집기는 싱클레어의 세계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다.' 데미안이 보낸 쪽지의 이 문장은, 성장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은유 중 하나다. 알 안은 안전하다. 그러나 새는 그 안에서 죽는다. 껍질을 깨는 일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싱클레어는 그 과정을 에바 부인과의 만남,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이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차례차례 겪으며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싱클레어의 방황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새삼 느꼈다. 그는 선하려 하면서도 타락하고, 이상을 좇으면서도 현실에 무너진다. 그 흔들림이 있었기에 그의 깨어남은 설득력을 갖는다. 완전한 인간이 깨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그 불완전함을 껴안으며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것이 데미안이다.

싯다르타는 처음부터 구도자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그 앎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앎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를, 싯다르타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사문이 되어 고행을 겪고, 고타마 부처를 만나 그의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세속으로 내려가 카말라 곁에서 쾌락과 욕망을 직접 살아낸다. 싯다르타가 세속에서 겪는 타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서 그 안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깨달아 그 안에서 빠져나온다. 그가 강가에서 오랜 시간 바시테바와 함께 보내며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깨달음이 얼마나 조용한 형태로 찾아오는지를 보여준다. 강은 모든 것을 동시에 흐르게 한다, 시작도 끝도, 삶도 죽음도, 기쁨도 슬픔도. 그 강물 속에서 모든 얼굴이 하나로 이어지는 환상을 싯다르타는 마침내 이해한다. 고빈다에게 싯다르타가 전하는 마지막 말은 가르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을 언어로 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고빈다에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게 한다. 그리고 고빈다는 그 순간, 수천 개의 얼굴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지식이 아니라 체험, 교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 그것이 싯다르타가 말하는 깨어남은 그런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아직 알 안에 있는가, 아니면 껍질을 깨는 중인가. 그것도 아니면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명확한 답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깨어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소설은 100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불안과, 그 알을 깨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따라 스스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일, 그것이 헤세가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유일한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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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격차 - 미래를 보는 인문 고전 99선
장은조 지음 / 아이콤마(주)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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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두꺼운 책 표지와 빽빽한 활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곧이어 "언젠가는 읽어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책장 한편에 고이 모셔두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우파니샤드>, <주역>, 키케로의 <의무론> 같은 이름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압박감으로만 존재했지, 실제로 내 삶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전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혹시 내가 질문을 잘못 들고 있어서가 아닐까?"

고전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로 접근한다. 저자의 논리를 파악하고, 시대적 배경을 암기하고, 핵심 개념을 정리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각 고전에 붙여놓은 제목들을 보면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눈에 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인생의 고통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는 법". 이 질문들은 학문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지금 이 순간의 것들이다. 고전은 원래 이런 질문들에서 태어났다. 수천 년 전 인도의 현인들이 스승 곁에 가까이 앉아 나눈 대화가 <우파니샤드>가 되었고, 석가모니가 인간의 고통 앞에서 내놓은 솔직한 대답이 <아함경>이 되었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극이 있지만, 질문 자체는 놀랍도록 동일하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변화 앞에서 두려워하며, 권력 앞에서 헷갈린다. 그 질문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전을 그렇게 멀게 느끼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고전을 읽는다'는 행위에 너무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고전을 읽으면 인생이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전을 읽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불안이 고전과 나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놓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주역이 말하는 음양의 균형은 오늘 아침 회의에서 상사와 부딪혔을 때 '어느 한쪽의 입장만 옳은 건 아니구나'라고 잠깐 숨을 고르는 순간에 살아난다.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아들에게 건넨 이야기는, 단기 이익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직장인의 갈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던지는 불편한 통찰, 즉 권력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조직 생활을 하는 누구라도 어느 순간 뼈저리게 실감하는 진실이다. 고전이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완성된 진리를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함경은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는 결국 읽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사유의 종착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이다. 고전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더 좋은 질문을 품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카로스가 날개가 녹아 추락한 것은 단순히 방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은 오만, 즉 히브리스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카로스적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공에 도취해 리스크를 과소평가하고,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결국 무너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뉴스에서도 매일 등장한다. 신화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의 반복되는 패턴을 압축한 언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고전이 가진 '낯선 위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방탕했던 청년 시절과 지적 오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1,600년 전의 인물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방황해도 된다는 것, 그 방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라는 것. 지눌의 보조법어가 전하는 "마음 밖에 딴 부처가 없다"는 말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 자주 바깥을 향해 달린다. 더 나은 조건,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인정. 그런데 그 달음질을 멈추고 잠깐 안을 들여다보라는 말은, 현대적 자기계발의 언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력하다. 아니, 그런 치장 없이 날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다. 고전이 주는 위로는 동정이 아니다. 고전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고통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온 것이야"라고 말해준다. 그 말이 주는 안도감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수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 그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함께 생각해온 긴 여정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롭다.

결국 고전 읽기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대화의 연장이다. 수천 년 전의 현인들과, 그리고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 '고전 격차'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그 격차는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느냐 읽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삶의 무게 앞에서 질문을 품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 불확실성 앞에서 고전이 전해준 지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호메로스가 그린 오디세우스는 20년의 고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여정에서 그를 지탱한 것은 근육이나 무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기억하는 마음, 그리고 어떤 유혹 앞에서도 그 방향을 잃지 않는 지혜였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오디세우스처럼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나침반을 손에 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전은 어렵지 않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질문을 멈추고 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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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이기는 전략 필사 : 손자병법 100 -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승리의 문장들
손무 지음, 진성수 감수 / 서울문화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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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글씨나 예쁘게 써볼 요량이었다. 우연히 집어 든 그 책이 내 일상의 어느 이른 아침, 조용히 전장을 열게 될 줄은 몰랐다. 표지를 넘기는 순간, 묘한 긴장감이 손가락 끝으로 스며들었다. 단순한 필사 노트가 아니었다. 고전 문장들이 활자로 촘촘히 박혀 있었고, 여백은 내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2천5백 년 전 한 전략가의 사유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상한 감각. 그것이 시작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낯설었다. 한자 원문과 그 아래 달린 뜻풀이를 보며, '이게 나한테 맞는 책인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고전이라고 하면 어쩐지 딱딱하고 먼 세계의 이야기 같고, 병법이라고 하면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전쟁터가 먼저 떠오르지 않던가. 그런데 첫 번째 문장을 천천히 받아 쓰면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한 획 한 획 옮기는 사이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스마트폰 알림도, 오늘 마감해야 할 업무도, 어제 어색하게 끝난 대화도 잠시 물러나 있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오직 그 문장과 나만 남는 느낌. 그 고요함이 낯설고도 반가웠다. 필사는 속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평소 텍스트를 읽는 방식으로 쓱 훑어 넘길 수가 없다. 손이 느리기 때문에 눈과 머리가 억지로 그 속도에 맞춰진다. 덕분에 평소라면 그냥 흘렸을 문장 하나가, 천천히 씌어지는 동안 오래 마음에 머물렀다.

필사를 이어가면서 손무가 단순히 전쟁을 논한 인물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을 먼저 말했고, 싸움보다 싸움을 피하는 지혜를 더 높이 쳤다. 그 태도가 어쩐지 요즘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자주 그 반대로 살아왔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상대는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흥분하거나, 나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무리하게 몰아붙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필사를 하면서 나는 그 문장의 주인이 된다. 손무의 언어가 내 손을 빌려 다시 태어나는 동안, 나는 어느새 그 의미를 내 삶의 맥락 위에 겹쳐 놓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를 시작할 때 이 책을 먼저 펼치게 되었다.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아직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이른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한 문장을 써 내려간다. 그것이 내 하루의 준비 운동이 됐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써 놓은 문장들이 하루 안 어딘가에서 불쑥 떠오른다는 점이다. 회의 중 누군가와 의견이 엇갈릴 때,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할 때, 혹은 오랫동안 피해 왔던 결정을 앞두고 망설일 때. 그 문장들은 조용히 나타나 하나의 시각을 제안해 준다. 강요하지 않고, 그저 한 방향을 가리키는 방식. 전술을 쓰면서 서서히 알게 됐다. 준비하고, 실행하고, 변화를 읽고, 정보를 장악하는 그 흐름은 어떤 프로젝트를 이끌거나, 어떤 관계를 돌보거나,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병서가 지금 내 삶의 지도가 되는 순간이었다.

필사를 하다가 문득 내 글씨를 바라본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의 글씨와 몇 주가 지난 글씨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더 반듯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편안해졌달까. 힘을 빼고 쓰는 법을 몸이 조금씩 익히는 것처럼. 그게 필사의 이상한 점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남는다. 예쁜 글씨체를 연습하는 게 목적이 아닌데 어느 순간 손이 문장을 기억하고, 뇌가 그 문장의 리듬을 따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읽었을 때와 달리, 손으로 옮긴 문장은 기억의 결 속 깊은 곳에 자리를 튼다. 나는 이 책이 어떤 고전 해설서보다 솔직하다고 느꼈다. 거창하게 손무의 철학을 논하거나 수십 개의 주석을 달지 않는다. 그냥 쓰게 한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문장의 진의에 더 가까이 닿게 해준다.

물론 이 책을 필사한다고 해서 삶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조급해지고, 여전히 감정이 앞서는 날이 있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건, 그런 순간에 '아, 잠깐' 하는 짧은 브레이크가 생겼다는 점이다. 손으로 써서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된 그 문장들이 위급한 순간 조용히 손을 잡아당긴다. 책의 여백이 채워질수록 그것은 점점 '내 것'이 되어간다. 손무의 언어와 내 필체가 한 페이지 위에 섞여 있는 그 공간은, 어떤 고급 다이어리나 독서 노트로도 대체되지 않는 고유한 기록이다. 오래된 지혜들이 나의 이른 아침마다 한 문장씩 쌓여간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조용히 오늘의 나를 지탱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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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기 전에 읽는 심리학 - 이대로 살긴 싫은데 바꾸자니 두려운 어른들에게
김혜령 지음 / 메이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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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을 안고 산다. 직업의 안정성도, 인간관계도, 미래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안은 공기처럼 우리 곁에 머문다. 그런데 심리상담가로 17년을 일해 온 저자는 묻는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불안이,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것일까? 저자 자신도 한때 불안에 짓눌려 살았다. 대학원 시절 부모님의 경제적 어려움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오직 '안정'만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전공과 무관한 직장에 취업해서 잘리지 않을 만큼만 일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삶.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안정이 아니라 정체가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역동적 평형'이라는 개념을 만났다. 변화와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유연하게 대처하고, 내적 자원을 활용해 균형을 되찾아 가는 과정. 진정한 안정이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흔들리는 존재다. 흔들리지 않으려 바위처럼 굳어 있겠다는 건, 어쩌면 죽은 듯이 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탈 벤 샤하르는 안전지대와 위험지대 사이의 '건강한 중간 지대'를 발견하기 위해 모험을 시도하라고 했다. 저자는 그 말을 몸으로 증명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심리상담가의 길을 걸으며 수입이 전혀 없는 시기도 견뎌 냈다. 서른이 넘어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칠 때의 불안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을 위기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였을 때,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들이 쌓였다. 마흔이 넘은 지금, 저자가 20년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불안을 더 이상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안해도 결국 해냈던 경험, 흔들리면서 무너지지 않았던 시간들이 쌓이면서, 불안은 그를 끌고 다니는 주인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보다 기꺼이 흔들리는 자신을 허용해 보자. 불균형과 균형 사이의 시소 타기는 위기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가장 자기다운 성장의 과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말을 참 자주 한다. 직업의 안정성도, 성공의 공식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닻으로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나다움'이 진짜 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가 원하는 '자기다움'을 흉내 낸 것인지.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은 타인의 기대에 맞춰 방어적으로 만들어진 자기를 '거짓 자기'라고 불렀다. SNS에서 나다운 스타일, 말투, 행동을 전시하며 그것을 진짜 자신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또 다른 거짓 자기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모순되고 변해 가는 다양한 나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남에게 보여 주기 싫고 나조차 외면하고 싶은 초라한 모습까지 포함해서.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나에 대한 생각이 지나칠수록 오히려 삶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청소년기 내내 삶을 증오하고 자살 충동을 안고 살았다. 그가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줄이고, 세상의 일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만 존재하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저자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일이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사라지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크게 확장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몰입을 두려워한다. 최선을 다했다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할까 봐, 깊이 사랑했다가 상처만 남을까 봐. 그래서 차라리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무언가에 몰두해 본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삶의 자산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감각이다. 어디까지 해봤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지, 어느 지점에서 포기하고 싶어지는지, 그럼에도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런 감각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두려움에 '나'만 붙들고 살지 말기를. 삶에, 사람에, 일에, 사랑에 한 번쯤은 온 힘을 다해 미쳐 보기를 생각해 본다.

사회심리학자 앤드루 힐과 토머스 커런이 27년간 4만 명 이상의 대학생을 분석한 결과, 완벽주의의 세 가지 유형 중 '사회 부과적 완벽주의' (타인이나 사회가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기대한다고 느끼는 경향)의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을 타인의 기대 속에서 정의한다는 것이다. 외모, 성격, 직업, 재테크, 육아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좇으려 하니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한다. 하지만 완벽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부지런함이나 성실함이 아니라, 게으름과 회피, 끝없는 자기 비난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 사람을 더 주저하게 만든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존재를 객체화한다고 말했다. 그의 유명한 말 '타인은 지옥이다'의 본래 의미는, 타인의 시선 속에 갇힌 나의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에 있다. 그 시선에 나를 모두 내맡기느냐, 아니면 중심을 잘 잡고 그 시선을 하나의 의견으로 여기느냐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저자는 대안으로 '완주'를 제안한다.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대단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정한 방향이기에 할 수 있다면 계속하는 것. 학창 시절 공부를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면, 대부분 1등을 못 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에 충실하지 않아서 후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련과 후회는 결과 그 자체보다 그 순간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남는 것이다. 완벽함이 아니라 꾸준함. 그것이 결국 재밌었던 삶을 만드는 힘이다.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좋은 통로가 된다. 저자는 한때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두려움은 삶의 장애물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지켜 주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두려움은 대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상담한 20대 여성 승주 씨는 타인의 어두운 표정만 마주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감정 기복이 심했던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경험이 있었다. 뇌가 그 패턴을 위협으로 기억해, 어른이 된 지금도 비슷한 상황에서 과거의 공포를 재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몸에 새겨진 두려움은 생각을 바꾼다고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살펴보고, 최초의 두려움을 겪었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해의 단계를 통해 '나는 더 이상 무력한 아이가 아니라 나를 지켜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것이 진짜 용기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용감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함께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저자의 바람은 이렇게 바뀌었다.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에서 '두려움과 함께 더 자유롭게'로. 두려움을 이해할수록 더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우리 모두의 두려움이, 결국 그럭저럭 살 만한 날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겉으로는 제각각이다. 이직을 해야 할지,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지, 이 친구와 관계를 끊어야 할지. 저자는 오랜 시간 이런 사연들을 마주하며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그 답을 타인에게 요청할 수밖에 없는 마음 이면에 있는 두려움이었다. 틀린 길을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저자도 오래 그랬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종교에 기대고, 별자리 운세까지 찾으며 삶의 해결사를 구해 헤맸다. 그러나 돌고 돌아 얻은 깨달음은 단순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 살아가는 한 나라는 존재의 운전대는 다른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다. 심리학적 지식이나 심리치료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저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자아를 건강하게 키워 가도록 돕는 안내자일 뿐이다. 변화와 성장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그 자신이기에.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내가 나를 믿어 주는 것,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힘. 이 세 가지가 어려움을 풀어 가는 유일한 비법이다. 약함을 인정할 때 가장 강한 모습이 드러난다. 힘들다고 말을 꺼내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것, 막막하다고 토로하는 것, 그 모든 행동이 바로 당신이 가진 힘이다. 삶이 멈춘 듯 느껴질 때,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보자. 나에게는 내 삶을 잘 꾸려 갈 힘이 있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믿어 주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강해진다. 아니, 강해지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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