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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격차 - 미래를 보는 인문 고전 99선
장은조 지음 / 아이콤마(주) / 2026년 3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두꺼운 책 표지와 빽빽한 활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곧이어 "언젠가는 읽어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책장 한편에 고이 모셔두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우파니샤드>, <주역>, 키케로의 <의무론> 같은 이름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압박감으로만 존재했지, 실제로 내 삶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전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혹시 내가 질문을 잘못 들고 있어서가 아닐까?"고전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로 접근한다. 저자의 논리를 파악하고, 시대적 배경을 암기하고, 핵심 개념을 정리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각 고전에 붙여놓은 제목들을 보면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눈에 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인생의 고통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는 법". 이 질문들은 학문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지금 이 순간의 것들이다. 고전은 원래 이런 질문들에서 태어났다. 수천 년 전 인도의 현인들이 스승 곁에 가까이 앉아 나눈 대화가 <우파니샤드>가 되었고, 석가모니가 인간의 고통 앞에서 내놓은 솔직한 대답이 <아함경>이 되었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극이 있지만, 질문 자체는 놀랍도록 동일하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변화 앞에서 두려워하며, 권력 앞에서 헷갈린다. 그 질문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전을 그렇게 멀게 느끼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고전을 읽는다'는 행위에 너무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고전을 읽으면 인생이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전을 읽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불안이 고전과 나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놓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주역이 말하는 음양의 균형은 오늘 아침 회의에서 상사와 부딪혔을 때 '어느 한쪽의 입장만 옳은 건 아니구나'라고 잠깐 숨을 고르는 순간에 살아난다.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아들에게 건넨 이야기는, 단기 이익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직장인의 갈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던지는 불편한 통찰, 즉 권력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조직 생활을 하는 누구라도 어느 순간 뼈저리게 실감하는 진실이다. 고전이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완성된 진리를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함경은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는 결국 읽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사유의 종착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이다. 고전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더 좋은 질문을 품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카로스가 날개가 녹아 추락한 것은 단순히 방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은 오만, 즉 히브리스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카로스적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공에 도취해 리스크를 과소평가하고,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결국 무너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뉴스에서도 매일 등장한다. 신화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의 반복되는 패턴을 압축한 언어다.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고전이 가진 '낯선 위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방탕했던 청년 시절과 지적 오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1,600년 전의 인물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방황해도 된다는 것, 그 방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라는 것. 지눌의 보조법어가 전하는 "마음 밖에 딴 부처가 없다"는 말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 자주 바깥을 향해 달린다. 더 나은 조건,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인정. 그런데 그 달음질을 멈추고 잠깐 안을 들여다보라는 말은, 현대적 자기계발의 언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력하다. 아니, 그런 치장 없이 날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다. 고전이 주는 위로는 동정이 아니다. 고전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고통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온 것이야"라고 말해준다. 그 말이 주는 안도감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수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 그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함께 생각해온 긴 여정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롭다.결국 고전 읽기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대화의 연장이다. 수천 년 전의 현인들과, 그리고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 '고전 격차'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그 격차는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느냐 읽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삶의 무게 앞에서 질문을 품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 불확실성 앞에서 고전이 전해준 지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호메로스가 그린 오디세우스는 20년의 고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여정에서 그를 지탱한 것은 근육이나 무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기억하는 마음, 그리고 어떤 유혹 앞에서도 그 방향을 잃지 않는 지혜였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오디세우스처럼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나침반을 손에 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전은 어렵지 않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질문을 멈추고 살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