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 서른에 다시 읽는 어린 왕자
김진하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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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보며 꿈을 꾸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고, 소중한 이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일. 그것이 나이를 먹어도 잃지 말아야 할,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해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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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 서른에 다시 읽는 어린 왕자
김진하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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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어린 왕자를 읽었을 때, 나는 아마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장미가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지, 여우가 말하는 '길들임'이 왜 그토록 특별한 것인지, 왕자가 결국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해 뱀에게 물리는 장면이 왜 슬픔이 아니라 선택처럼 읽혀야 하는지...아무것도. 그러나 이상하게도 책은 재미있었고, 삽화는 예뻤으며, 나는 별 감흥 없이 책을 덮었다. 어린이는 그렇게 어린 왕자를 지나쳤다. 어른이 되어 다시 펼쳤을 때, 나는 첫 페이지에서 이미 멈추었다. 생텍쥐페리가 그린 보아뱀 그림을 보고 어른들이 모자라고 말한다는 대목. 어릴 때는 그 '어른들'이 남의 이야기였는데, 이제 나는 그 어른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아도 모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어른들. 놀랍게도 나는 그게 슬펐다.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얻는 과정처럼 보인다.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두터워지며, 세상을 읽는 눈이 생긴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조용히 반문한다. 당신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느냐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던 감각,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던 힘, 관계를 '쓸모'가 아닌 '고유함'으로 느끼던 마음, 그것들은 언제 어디서 사라진 걸까. 우리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상실을 기꺼이 정당화했던 건 아닐까.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한다. 나를 길들여 달라고. 프랑스어로 '아프리부아제(apprivoiser)', 사적인 것으로 만들다는 뜻의 이 단어는 단순히 친해지는 것을 넘어선다. 서로의 마음에 길을 내는 일, 시간을 들이고 책임을 지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일. 어른의 언어로 말하자면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여우는 말한다. 길들여진 것만이 진정으로 알 수 있다.

나는 요즘 얼마나 많은 관계를 '기능'으로 대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필요할 때 연락하고, 일이 끝나면 잊어버리는 관계들. 상대방을 하나의 고유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역할로, 어떤 수단으로 인식하는 순간들. 어린 왕자의 장미가 까다롭고 허영 가득해 보여도 왕자가 그토록 그리워한 것은, 바로 그 꽃과 나누었던 시간과 정성의 무게 때문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장미들 중에서 그 꽃이 유일한 것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길들임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그런 시간을 얼마나 내어주고 있는가. 별별 소행성을 돌아다니며 왕자가 만나는 어른들은 우스꽝스럽다. 권력만 원하는 왕, 칭찬만 원하는 허영쟁이, 숫자만 세는 사업가. 읽으면서 나는 웃었다가, 이내 멈추었다. 그들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의 인정 없이는 불안한 나, 숫자로 환산되지 않으면 가치를 의심하는 나, 가진 것을 세느라 정작 누리지 못하는 나. 생텍쥐페리는 그 인물들을 조롱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가 거울을 보게 만든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어린 왕자는 우물을 찾는다. 어른인 나는 지도가 없으면 길을 나서지 않으려 한다. 실패의 가능성을 먼저 계산하고, 성과가 보장되지 않으면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그런데 왕자는 그냥 걷는다. 사막에 우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희망이란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행위 그 자체임을, 어른이 된 나는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잊어버렸다. 왕자가 뱀에게 물리는 마지막 장면을 다시 읽으며,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그것이 죽음인지 귀환인지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것을 이번에는 알아챘다. 어쩌면 그 모호함 자체가 생텍쥐페리의 말이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별을 보면 웃음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조종사에게 왕자는 말한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철학이었다. 이별 이후에도 의미는 다른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여러 해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조용히 잃었다. 이 책이 슬픈 것은 어떤 비극 때문이 아니라, 읽는 내내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명함 속에서, 아직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작은 가능성도 함께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지만, 깊이 살기 위해서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어린 왕자는 동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조용한 초대장이다. 별을 보며 꿈을 꾸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고, 소중한 이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일. 그것이 나이를 먹어도 잃지 말아야 할,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해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여우의 이 말을 어릴 때는 그냥 읽었다. 이제는 그 말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나는 오늘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 어린 왕자는 그런 질문을 남긴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묻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어른다움의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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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식사 혁명 - 먹어서 병을 예방하는 아주 작은 식습관의 힘
하마야 리쿠타 지음, 오시연 옮김, 김민지 감수, 김혜민 감수도움 / 부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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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나는 잠시 멈칫한다. 어제 사다 놓은 두부, 방치된 채로 시들어가는 대파, 그리고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요거트. 나는 분명히 '건강하게 먹으려고' 산 것들인데, 왜 이렇게 자주 버리게 되는 걸까. 그 질문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나는 늘 같은 결론으로 도망쳤다.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내가 '식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하루 식사를 솔직하게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장면들이 많다. 아침은 거르거나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은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 저녁은 퇴근 후 반쯤 지쳐 배달 앱을 뒤적이다 마라탕이나 치킨을 시키는 날이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가끔 채소를 잔뜩 넣은 샐러드를 먹거나 현미밥으로 바꿔보려 했다. 이런 노력이 꽤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내 시도가 왜 번번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용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해줬다.

책에서 가장 먼저 흔들린 것은 나의 이분법이었다. 나는 음식을 늘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눠서 생각해왔다. 현미는 좋고, 흰쌀밥은 나쁘다. 채소는 좋고, 햄버거는 나쁘다. 술은 나쁘지만, 레드와인은 조금 좋다. 이런 식의 이분법은 건강 정보를 소비하는 나의 기본 언어였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가 대부분 흐릿하다는 것, 심지어 어디서 들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직면했다. 예를 들어 나는 달걀을 하루에 하나 이상 먹으면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콜레스테롤 때문이라는 이유도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책에 따르면 이 믿음에는 실제로 확립된 과학적 근거가 없다. 더 흥미로운 것은, 어떤 식재료가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를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모든 음식에는 여러 성분이 복잡하게 섞여 있고, 그것이 몸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단 하나의 영양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커피에 발암물질이 들어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커피는 암 예방 효과가 있다는 연구도 많다. 나는 그동안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 나만의 '건강 교리'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대신 무엇을 먹는가"라는 시각의 중요성.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덜 먹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채소 주스를 마시면서 건강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만약 그 주스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무엇을 마셨을까. 아마 달콤한 아이스 음료나 탄산음료를 집어들었을 것이다. 그 맥락에서는 채소 주스가 나쁜 선택이 아니다. 반대로, 평소에 충분히 채소를 잘 먹는 사람이 채소 주스를 마신다면 그건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음식의 가치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무엇을 대신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발상은 내 머릿속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그 다음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환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은 식습관이 개인의 의지보다 환경에 훨씬 더 크게 좌우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말이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음식을 선택해왔다. 회의가 길어져 점심 시간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편의점으로 향했다. 야근 후에는 배달 앱 외에 다른 선택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 저녁에는 단 것이 당겼다. 이것들이 과연 순수한 '선택'이었을까. 책에서 말하는 '시스템화'라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만드는 것. 예를 들어 냉장고에 건강한 음식을 먼저 눈에 띄는 곳에 두거나, 사 놓는 식재료의 종류 자체를 바꾸는 일 같은 것들이다. 의지력을 높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의지력이 필요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 이 발상은 나에게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집에 과자가 있으면 반드시 먹고, 없으면 굳이 사러 나가지 않는다. 환경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면서, 왜 항상 의지 탓만 했을까.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내가 '식사 패턴'이 아닌 '식재료'에 집착해왔다는 사실이다. 오늘 뭘 먹었는지, 그 음식이 좋은 음식인지 나쁜 음식인지에 집중하면서, 정작 한 달 동안 내 식사 전체가 어떤 모양인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은 하루 단위가 아니라 일주일, 혹은 한 달을 단위로 식습관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어느 날 햄버거를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쁜 식습관이 되는 게 아니다. 그 햄버거 안에 채소가 들어있다면, 그날따라 채소 섭취량이 평소보다 늘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매일 샐러드를 먹더라도, 부족한 열량을 단 빵으로 채운다면 전체적인 균형은 무너진다. 이 관점에서 나의 식사를 다시 보면, 나는 생각보다 형편없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개선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채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나트륨은 과하며, 과일은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가끔 먹는 마라탕에 들어있는 다양한 채소들, 편의점 도시락 옆에 끼워 먹는 삶은 계란 하나, 저녁에 무심코 마신 두유 한 팩. 이것들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한 식사가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전체적인 흐름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가이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냉장고를 다시 열어봤다. 시들어가는 대파가 여전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나 자괴감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걸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가벼운 궁금증이 생겼다. 냉장고 앞자리에 두거나, 사는 양을 줄이거나, 아예 냉동 채소로 대체하거나.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변화. 아마도 그게 지속 가능한 첫걸음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식사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알게 됐다. 완벽한 식사를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조금 덜 나쁜 선택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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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지키는 것이다 - 농부와 소설가가 심은 한 알의 진심
이동현.김탁환 지음 / 해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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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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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지키는 것이다 - 농부와 소설가가 심은 한 알의 진심
이동현.김탁환 지음 / 해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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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늘 어딘가를 지나친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이름 모를 마을들, 고속도로 표지판에 잠깐 눈길을 주다 이내 잊어버리는 지명들. 곡성도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남원과 구례 사이, 어느 쪽으로도 확실하게 기울지 않는 그 어정쩡한 자리. 지도 위에서조차 존재감이 희미한 고장. 누군가 거기 뭐 있어요?"라고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머뭇거려야 하는 이름.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곡성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느리게 살아가는 것들이었는지도.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계절의 속도를 따라 숨 쉬는 삶이었는지도. 섬진강은 말없이 흐른다. 굽이굽이 돌아 구례로, 하동으로, 광양으로 내려가는 그 강물은 곡성을 가로지르면서도 요란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흐른다. 그냥 거기 있다. 어쩌면 그것이 곡성을 닮았다. 어쩌면 그것이 미실란을 닮았다.

옛 초등학교 교정을 상상해본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 칠판 먼지가 내려앉던 교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리던 복도. 그 자리에 이제는 논이 생겼다. 교실 대신 발아현미 연구실이 들어섰고, 운동장이었을 자리엔 텃밭이 쌀 미 자 모양으로 일궈졌다. 아이들 대신 벼가 자라고, 수업 종소리 대신 개구리 울음소리가 절기를 알린다. 처음엔 낯설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던 박사가 흙냄새 나는 시골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 일. 논문과 데이터로 가득한 세계를 뒤로하고, 손에 흙을 묻히는 농부의 삶을 선택하는 일. 사람들은 물었을 것이다. "박사 양반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하지만 과학자가 된 농부는 알았을 것이다. 볍씨 한 알 안에 담긴 것이 어떤 논문보다 깊다는 사실을. 흙과 물과 햇볕이 빚어내는 화학반응은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씨앗이 땅 속에서 발아하는 순간, 그 생명의 떨림은 어떤 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측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630종의 벼를 한 논에 심는다는 것은 농사 실험만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 이다. 하나의 품종만을 대량으로 키워 효율을 극대화하는 시대에, 다양성을 지키겠다는 완고하고 아름다운 고집. 소멸해 가는 품종들을 붙잡아두려는 조용한 저항. 씨앗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긴 호흡의 의지다.

현대 도시의 삶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빠르게, 더 빠르게. 효율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우리는 목적지만 바라보며 걷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사치로 여기며 산다. 걷다가 길 위에 눕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퐁퐁 다리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드러눕는 두 중년 남자의 이미지가 그토록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등을 통해 올라오는 강물 소리. 온몸을 감싸는 물의 진동. 하늘과 땅 사이에 그냥 존재하는 것.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것이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는 비밀이다. 미실란의 시간은 절기를 따라 흐른다. 소한과 대한의 고요 속에서 한 해를 준비하고, 입춘과 우수의 기운을 따라 땅을 깨운다. 종의 분주함 속에서 씨앗을 심고, 백로의 이슬이 벼 이삭을 여물게 한다. 인간이 만든 시계가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리듬 위에 삶을 얹는 것이다. 그 삶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자동화된 농기계 대신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제초제 대신 직접 김을 매고, 데이터 대신 하늘의 구름을 읽는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비효율은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계절을 잃어버리고, 흙을 잊어버리고, 밥 한 그릇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비효율인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는 조급하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고, 변화를 당장 확인하고 싶다. 심은 씨앗이 그날 안에 싹트기를 원하고, 뿌린 노력이 이번 달 안에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하지만 농사는 다르다. 농사는 계절을 앞서갈 수 없다. 절기를 건너뛸 수 없다.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그 이치 앞에서 인간은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미실란이 2006년에 시 작해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은 그래서 의미 깊다. 유기농 쌀 시장이 외면받던 시절에도, 농촌이 소멸해간다는 뉴스가 쏟아지던 때에도, 미실란은 볍씨를 뿌렸다. 음악회를 열었다. 책방을 만들었다. 글쓰기를 가르쳤다. 아이들을 논에 데려와 흙을 만지게 했다. 천년 숲도 오늘 심은 묘목 한 그루에서 시작된다. 지금 당장 울창한 숲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묘목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자신이 심은 나무의 그늘 아래 자신이 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를 향한 행동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이 슬프지 않은 이유는, 흙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 땅을 사랑했다는 것을. 미실란은 그 기억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들녘에서, 계절의 리듬을 따라 숨쉬며, 흙과 씨앗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 그곳에서 나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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