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돈이 좋아요
디노더노마드(이지영) 지음 / 모티브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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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린 시절, 나는 돈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마치 그것이 천박한 욕심이라도 되는 양, 우리는 돈을 멀리해야 하고 정신적 가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말들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매달 통장에 찍히는 숫자 앞에서 한숨을 내쉬며, 카드값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왔다. 그런데 이지영 대표의 이야기를 읽으며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에 대한 위선적인 초연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 '솔직함'이었다는 것을. 170만 원이라는 월급 앞에서 불안해하고, 에르메스 가방을 든 누군가를 보며 부러워하는 마음. 그 감정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변화의 첫걸음이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내 욕망을 감춰왔다. 더 나은 집에서 살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을 가격 걱정 없이 사고 싶고,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다는 평범한 바람들을. 그런 마음을 드러내면 속물처럼 보일까 봐, 혹은 너무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비춰질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 뒤에 숨어 있던 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나는 그렇게까지 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다. 안정적이고, 정년이 보장되며, 복지가 좋다는 이유로 수많은 청년들이 그 자리를 향해 달려간다. 나 역시 그랬다. 취업이 되지 않아 방황하던 시기,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고민이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막상 그 '안정'을 손에 쥐고 나면, 우리는 또 다른 불안과 마주하게 된다. 이지영 대표가 느꼈던 그 불안. '이대로 평생을 살아도 괜찮을까?'라는 질문. 그것은 단순히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 내 삶이 예측 가능한 궤도 위를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 조금씩 오르는 연봉, 정해진 승진 경로. 그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안정은 때로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그 안에서는 안전하지만, 동시에 성장도 멈춘다. 새로운 시도는 리스크가 되고, 도전은 무모함으로 치부된다. "그래도 지금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라는 주변의 말들이 나를 제자리에 묶어두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계속 물음표가 떠올랐다. 정말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일까? 이렇게 살다 죽는 게 후회 없는 선택일까? 이지영 대표는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용기. 그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신념이었다. 그녀의 선택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진짜 위험은 실패가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말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불안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긴다. 불안은 제거해야 할 감정이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지영 대표의 이야기는 불안을 다르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불안은 견뎌야 할 고통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강력한 에너지였다. 월급 170만 원 앞에서 느꼈던 답답함,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에르메스 같은 걸 들어봐야 알지"라는 자극적인 한마디.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불안은 그녀를 마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전환되어, 부업을 검색하고, 첫 상품을 올리고, 주문 알림에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들로 이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내 불안을 숨기려고만 했다. 잘될 거야, 괜찮을 거야, 다들 이렇게 사는 거야. 이런 말들로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변화를 미루어왔다. 하지만 불안을 억누르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시간을 늦추는 것뿐이었다. 진짜 필요한 건 불안을 인정하고, 그것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불안은 내면의 경보음이다. 지금의 상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신호.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 이지영 대표는 그 경보음을 무시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연료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3년 만에 연 매출 100억 원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번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그 솔직함을 행동으로 옮긴 용기의 결과였다.


이지영 대표의 성공 스토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시스템'에 대한 강조였다. 단순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진짜 부자가 되는 길이라는 그녀의 통찰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더 많이 일하는 것'과 동일시한다. 더 오래 앉아 있고,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더 적게 쉬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시간을 파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수익도 멈추는 구조. 그런 방식으로는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지영 대표는 온라인 셀러로 시작하면서, 작은 주문 하나의 짜릿함에서 시작해 점차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쿠팡 로켓그로스, 구매대행 같은 플랫폼을 활용하고,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며, 혼자가 아닌 팀과 함께 일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일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자유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시스템에 대해 고민했을까? 나는 여전히 내 시간을 쪼개서 파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더 많이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일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지 않은가? 진짜 변화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나만의 콘텐츠, 나만의 제품, 나만의 프로세스. 그것들이 나 없이도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 때, 비로소 시간과 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책에서 가장 인간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메시지였다. 이지영 대표는 성공한 후에도 자신의 노하우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제자들과 함께 도전의 길을 걷고, 그들의 성공을 돕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다. 부자가 되면 외로워진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고립되거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이지영 대표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성공을 혼자만의 것으로 가두지 않고, 그것을 나누고 확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녀에게 진짜 부는 혼자 쌓는 것이 아니라, 함께 키워가는 것이었다. 함께 성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생태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객이 되고, 파트너가 되고, 지지자가 된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지만, 함께라면 훨씬 더 큰 파급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얼마나 나눔을 실천하고 있을까?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을까? 아니면 경쟁 심리에 갇혀, 내 것만 지키려고 움츠러들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부자는 나누는 사람이다. 그것이 물질이든, 지식이든, 시간이든,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이지영 대표에게 "에르메스 같은 걸 들어봐야 알지"라는 말은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그 한마디가 그녀에게 비전을 심어주었고, 그 비전이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 행동이 결과를 만들어냈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나만의 '에르메스 모멘트'. 나를 흔들고, 자극하고, 깨우는 그 무언가.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안전하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실패하지 않는 것, 부끄럽지 않은 것,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내 기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삶이지,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은 아니었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무엇을 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실패를 두려워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성공을 꿈꾸는가. 이지영 대표는 에르메스 가방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시각화했다. 나도 그런 구체적인 비전이 필요하다. 막연한 '잘 살고 싶다'가 아니라,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이런 일을 하고 싶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명확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앞으로 나는 나만의 시스템을 만들어갈 것이다. 지금 당장은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불안은 나를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 더 빨리 달리게 만드는 신호등이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귀 기울이며, 행동으로 옮기겠다. 이지영 대표는 말한다. 누구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믿는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하겠다. 돈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그 솔직함을 무기로 삼아, 내가 꿈꾸는 삶을 향해 나아가겠다. 공무원에서 100억 원 사업가로 변신한 이지영 대표처럼,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속도로, 변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책을 덮는 순간,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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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서양철학사 - 탈레스부터 보드리야르까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기
강영계 지음 / 해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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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함이란 과거의 철학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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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서양철학사 - 탈레스부터 보드리야르까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기
강영계 지음 / 해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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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정말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대개 일상의 바쁨 속에서 묻혀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철학은 바로 이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현대사회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뉴스를 접하고, SNS를 통해 타인의 삶을 엿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고 생산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상식, 비판 없이 따르는 관습들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철학은 바로 이러한 일상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서 출발한다. 이번에 읽어본 <처음 시작하는 서양 철학사>를 읽으며 어렵지만 서양 철학사에 대해서 짧으나마 이해를 하기위해 노력해 본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본성상 앎을 추구한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본능적으로 진리를 갈구한다.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 선을 추구하며 아름다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철학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지적 여정이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주장했을 때, 그것은 물질에 대한 관찰을 넘어서는 혁명적 사고의 전환이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 현상 너머에 있는 근본 원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탈레스의 위대함은 그가 제시한 답이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최초로 추상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신화와 미신으로 세계를 설명하던 시대에, 이성적 탐구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철학의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후계자들이 탈레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물이 너무 구체적이라며 '무한정자'라는 더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아낙시메네스는 다시 이것이 너무 추상적이라며 '공기'를 원질로 보았다. 이러한 비판과 종합의 과정에서 우리는 서양철학의 핵심적 특징을 발견한다. 바로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정신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철학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그들은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원질을 찾는 것을 넘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와 법칙, 조화의 원리를 탐구한 것이다. 칠현금의 음조가 현의 길이라는 수적 비율로 설명된다는 발견은, 자연현상 이면에 수학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통찰로 이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수학적 탐구와 윤리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화로운 우주의 질서를 깨닫고, 그러한 조화를 자신의 삶에서도 실현하고자 했다. 엄격한 금욕생활과 영혼의 순화를 추구한 것은, 철학이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여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탐구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현대 물리학의 통일장이론이나 만물의 이론 추구는, 탈레스가 시작한 그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세철학은 흔히 '암흑시대의 철학'으로 폄하되곤 한다. 신학이 학문을 지배했고, 자유로운 사고가 억압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이해다. 중세철학은 그리스의 합리적 사유와 기독교의 신앙을 종합하려는 거대한 지적 프로젝트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이러한 중세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고, 마니교를 거쳐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했으며, 최종적으로 기독교로 귀의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 여정은 고대의 철학적 유산을 기독교 신학 안에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그의 시간론은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시간은 존재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지금'이라는 영원 속에 있다고 말한다. 과거는 기억으로서의 지금이고, 현재는 감각으로서의 지금이며, 미래는 기대로서의 지금이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현상학의 시간 이해를 선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철학이 근대철학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 보편자 논쟁, 신 존재 증명 등 중세에 다루어진 문제들은 근대 철학자들의 사유를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나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통찰에 빚지고 있다.


근대철학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베이컨은 귀납법을 통해, 데카르트는 연역법을 통해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종합하여 인간 인식의 한계와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철학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는 우리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틀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 이성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의지'로 보았고, 니체는 이성 중심의 서양 철학 전통 자체를 비판했다. 그들은 이성만으로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삶의 비합리적이고 본능적인 측면, 고통과 욕망, 권력에의 의지 같은 것들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철학은 언어에 주목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따라서 철학의 문제는 상당 부분 언어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 그 자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관계 맺으며, 의미를 창조한다. 이러한 언어철학의 전개는 철학의 과제를 새롭게 규정했다. 철학은 더 이상 세계의 궁극적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 자체를 성찰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철학의 영역을 축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한 것이다. 과학, 예술, 일상언어 등 모든 의미 있는 담론이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사 2500년의 여정을 돌아보면, 한 가지 일관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 종합과 극복의 과정이다. 탈레스의 물은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해 비판되었고,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는 아낙시메네스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비판되었고, 중세 스콜라철학은 근대 합리론에 의해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극복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었다. 각 시대의 철학자들은 선배들의 통찰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칸트가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했듯이, 헤겔이 변증법을 통해 대립을 지양했듯이, 철학은 항상 더 높은 종합을 향해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기후위기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든다. 극심한 불평등과 양극화는 정의와 윤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 SNS와 가짜뉴스의 범람은 진리와 허위의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철학은 즉각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철학은 우리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준다.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는 법을, 상식을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대립하는 견해들을 종합하여 더 높은 진리에 도달하는 법을 알려준다.


철학함이란 과거의 철학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태도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었듯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혼란의 시대에 철학은 나침반이 된다. 수많은 정보와 가치가 충돌하는 시대에, 철학은 우리에게 명확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철학은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길을 열어준다.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철학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는 보루가 된다. 철학함이란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여정이다. 그것은 쉬운 길이 아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하고, 익숙한 사고방식을 버려야 하며, 확실성 없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이 사고하고, 더 현명하게 판단하며,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철학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지금이야말로 철학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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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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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무 살의 수잔 스캔런이 뉴욕 주립 정신의학연구소의 병동 문을 처음 통과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거기서 3년을 보내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1992년, 프로이트 사진이 간호사 스테이션을 내려다보던 그곳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공간이었다. 프로작이 등장하고 정신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던 시대에, 그녀는 여전히 히스테리아 진단을 받았고, 의사들은 그녀의 자살 시도를 설명할 "마법 같은 트라우마"를 찾아 과거를 파헤쳤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계속 멈춰 섰다. 병동의 여성 환자들이 항정신성 약물로 인한 지발성 운동장애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 스캔론이 자신의 고통을 의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연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이미지들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을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정말로 그때보다 나아진 것일까? 스캔런은 자신이 "아픈 것을 더 잘하게 되었다"고 쓴다. 돌봄을 받기 위해 질병을 수행하는 법을 배웠다고.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것은 단지 1990년대 정신병동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고통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고, 포장하고, 때로는 과장하거나 축소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의료 시스템이 요구하는 서사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일. 그것은 케어를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처럼 보인다.


스캔런은 전통적인 회복 서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리학의 시작점을 계속 찾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일 수도, 뉴욕으로의 이사일 수도, 첫 자살 시도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의료 기록이 제공하는 깔끔한 이야기—우울한 젊은 여성이 병원에 들어가고, 3년을 머물고, 의사들의 개입 덕분에 나아진다—는 거짓말이다. 아니, 적어도 불완전한 진실이다. "나는 세부사항들을 원한다"고 그녀는 쓴다. "공식적인 언어, axis 1이나 axis 2, 약물과 증상의 목록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병원에서의 우리의 길고 지루한 날들과 해들의 이야기다. 내가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일상이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의 삶을 진단명과 증상 목록으로 환원하는지 생각했다. 의료 차트는 효율적이고 필요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텍스처, 그들의 일상, 그들이 살아낸 시간의 질감을 담지 못한다. 책은 그 의료 기록에 대한 수정이자 반박이며, 무엇보다 증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진단명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하고 모순적이라고 말한다.

스캔런이 퇴원한 1995년, 그 병동은 영구 폐쇄되었다. 그리고 1997년, FDA가 제약회사들의 직접 광고를 허용하면서, 정신질환자들은 "소비자"가 되었다. "당신에게도 졸로프트가 맞을까요?" 라고 묻는 광고들이 쏟아졌다. 화학적 불균형 이론—아직도 논쟁적이고 반복적으로 반박되어 온—은 엘리 릴리와 다른 제약회사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나는 2004년, 열아홉 살에 처음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 당시 내 주변에는 그런 약을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안 먹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우울증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생물학적 질병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이전의 "성격적 결함"이라는 관념을 반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을 덜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진보다. 하지만 스캔러이 지적하듯, 약이 작동한다고 해서 화학적 불균형이 우울증의 원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약들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가? 202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29%가 평생 동안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항우울제 사용은 증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다. 이 역설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정신질환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들을 무시하고, 그것을 개인적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정신질환은 세상의 어떤 것이 아픈지를 보여주는 거울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 거울을 약으로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캔런을 구원한 것은 약도, 정신분석도 아니었다. 그것은 독서와 글쓰기였다.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라스, 오드리 로드, 이 작가들은 스캔론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넓은 틀을 제공했다. 로드의 <암 일기>는 "지배적인 의료 모델의 질병과 회복 서사에 맞서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정상성 바깥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슬픔이 삶의 장애물이 아니라 당신을 만드는 것의 일부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과민했다. 평생 그렇게 들어왔다. 그것은 약점이었다. 하지만 독서에 있어서는 그것이 힘이었다. 초예민함." 우리는 너무 자주 민감함을 치료해야 할 증상으로 본다. 하지만 그 민감함이야말로 세계를 더 깊이 느끼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아름답게 쓸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아닐까. 스캔론은 자신의 "다공성"을 약점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자산으로 재해석한다. 애니타 힐이 클래런스 토머스를 고발하는 청문회를 병동에서 지켜보며, 스캔런은 깨달았다. "내가 살 수 있는 두 개의 세계가 있었다. 조 바이든과 클래런스 토머스 같은 남자들이 권위를 가진 세계, 그리고 문학의 세계." 그녀는 문학을 선택했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섬뜩하다. 현재의 스캔론이 새로운 의사를 만난다. 그녀의 파일을 본 의사는 놀라며 말한다. "이건 매우 드문 경우네요. 요즘은 환자들을 그렇게 오래 입원시키지 않아요. 상황을 더 악화시키니까요." 스캔론은 안다고 답한다. 그녀가 그것을 살았으니까. 15분 진료가 끝날 때, 의사는 말한다. "당신이 왜 그렇게 오래 입원했었는지 정말 상상이 안 가네요." 여기서 나는 의료 시스템의 망각을 본다. 3년이 스캔런의 삶에 여전히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인 반면, 그것은 의사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스캔런은 생각한다. 만약 의사가 인문학을, 의료 역사를 더 배웠다면, 그녀를 호기심이 아닌 한 사람으로 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 이건 나일 수도 있다"고 스캔런은 말한다. "나는 아픈 사람과 아팠던 사람의 구분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이고, 모두 연약하다. 우리는 모두 해체로부터 한순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정상과 비정상, 정신과 광기, 건강과 질병 사이의 경계가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만큼 확고하지 않다는 인식.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어머니를 잃은 여덟 살 소녀가 슬픔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듯이, 우리 모두는 때때로 우리 안의 무언가를 말할 언어를 찾지 못한다. 책은 그 언어를 찾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것은 의료 차트가 아니라 문학이 될 수 있는, 진단이 아니라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언어. 그녀가 찾은 것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다. "나는 다시는 정상인이 되지 못했다. 병의 느낌을 내 시스템에서 완전히 빼내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그 병을, 그 민감함을, 그 다공성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쓰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나은 약을 가지고 있지만 더 많이 아프다. 더 빠른 진단을 받지만 덜 이해받는다. 더 많이 치료하지만 덜 치유된다. 스캔런이 제시하는 대안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이다: 읽고, 쓰고, 생각하라. 고통을 의료 차트가 아닌 이야기로 만들어라. 그리고 무엇보다, 민감함을 약점이 아닌 힘으로 보라. 정신질환의 치료는 1992년 이후 변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진보인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의학이 실패하는 곳의 틈을 메우고, 더 사려 깊고 확장된 방식으로 인간 경험의 핵심에 있는 슬픔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그 일에 동참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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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명품 - 사람이 명품이 되어가는 가장 고귀한 길
임하연 지음 / 블레어하우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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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품격’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그녀는 화려한 배경과 특권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 모든 빛 아래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 정의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읽은 <인간명품>은 재클린의 대담 형식의 이야기 접하면서 자기 운명을 다시 쓰는 인간의 지혜를 접하게 되었다. 그녀의 삶은 ‘누구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았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것인가’를 묻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흔히 “수저의 색깔”로 인생의 출발선을 규정한다. 금수저, 흙수저, 혹은 아무 색도 없는 무명(無名)의 수저. 하지만 재클린은 이 불평등의 언어 속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무엇을 물려받았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것을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로 사고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삶은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길러낸 정신의 유산으로 빛났다.

‘상속자 정신’은 피와 가문의 전통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넘어서는 힘, 과거를 재구성하는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재클린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갔다. 그녀에게 상속이란 부모의 재산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세상을 해석하는 눈이었다. 그녀는 불행을 숨기지 않았다.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세상은 그녀에게서 절망을 기대했지만 재클린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자기 존엄을 지키는 언어였다. 그녀는 고통을 감추는 대신, 그것을 품격으로 승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상속자 정신’의 본질이다. 주어진 운명에 휘둘리지 않고, 그 운명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써내려가는 힘이다. 우리는 종종 삶의 불평등 앞에서 체념한다. 그러나 재클린은 말했다. “상속은 부모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스승, 우연한 만남, 한 권의 책도 나를 길러내는 유산이 된다.” 그녀의 말은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상속이란 반드시 눈에 보이는 자산일 필요가 없다. 나를 성장시키는 감동, 나를 변화시킨 관계, 나의 시선을 바꾼 한 문장 또한 상속의 형태다. 그녀의 철학은 자율 승계권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받은 것들을 다시 해석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덧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 권리를 행사하는 순간, 우리는 수혜자가 아니라 창조자가 된다. 그녀는 우리에게 말했다. “인생의 상속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재클린의 매력은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조용한 태도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절제 속에서 더 큰 힘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백악관을 ‘권력의 집’이 아니라 ‘국민의 집’으로 바꾸었던 일은 그녀의 겸손과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품격은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품격은 마음을 다스리는 자의 조용한 영향력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고, 비극을 견디면서도 다른 이에게 희망을 건넸다. 그녀의 침묵은 고통의 무게를 가리는 가면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배려의 형태였다. 오늘의 사회는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명품 가방, 고급 자동차, 화려한 직함. 그러나 <인간명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가장 값진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재클린의 우아함은 그녀가 걸친 옷이 아니라, 그녀의 사유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외적인 장식이 아니라 내면의 단단함으로 세상과 마주했다.

먼저 읽었던 제클린의 책을 생각해 본다. 책은 특히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서른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를 느끼는 시기이자, 미래를 향한 불안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재클린의 철학은 이 불안한 시기를 ‘성장으로의 초대’로 바꾸어놓는다. 그녀는 말했다. “젊음은 불안정하지만, 그 불안은 변화를 향한 희망이다.” 불안이란 미숙함의 증거가 아니라, 가능성의 흔들림이다. 우리는 불안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배운다. 그 배움이 바로 성숙의 과정이며, 상속자 정신의 출발점이다. 재클린은 변화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되, 그것에 종속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의 증거였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비극을 품격으로 바꿔낼 수 있었다. 서른의 나이에 이르러 나 또한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물려받았고,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교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이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기준으로 나를 재정의하는 일. 그것이 재클린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일지도 모른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걸작이 아니다. 걸작은 살아가는 동안 만들어지는 것이다. 품격은 유전되지 않으며, 경험 속에서 길러진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 상처를 어떤 색으로 칠할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인간명품’이라는 말은 단지 세련된 외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조화,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해석하려는 의지의 총합이다. 재클린의 상속자 정신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은 이미 누군가의 유산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시작이다.” 이제 나는 재클린의 우아함을 단지 외적인 미덕으로 보지 않는다. 그녀의 품격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빚어낸 사람의 조용한 강인함이었다. 그녀처럼, 나 또한 내 삶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란다. 눈에 보이는 금빛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품격의 빛으로. 그 빛은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으며,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또 하나의 유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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