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하는 서양철학사 - 탈레스부터 보드리야르까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기
강영계 지음 / 해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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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정말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대개 일상의 바쁨 속에서 묻혀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철학은 바로 이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현대사회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뉴스를 접하고, SNS를 통해 타인의 삶을 엿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고 생산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상식, 비판 없이 따르는 관습들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철학은 바로 이러한 일상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서 출발한다. 이번에 읽어본 <처음 시작하는 서양 철학사>를 읽으며 어렵지만 서양 철학사에 대해서 짧으나마 이해를 하기위해 노력해 본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본성상 앎을 추구한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본능적으로 진리를 갈구한다.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 선을 추구하며 아름다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철학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지적 여정이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주장했을 때, 그것은 물질에 대한 관찰을 넘어서는 혁명적 사고의 전환이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 현상 너머에 있는 근본 원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탈레스의 위대함은 그가 제시한 답이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최초로 추상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신화와 미신으로 세계를 설명하던 시대에, 이성적 탐구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철학의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후계자들이 탈레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물이 너무 구체적이라며 '무한정자'라는 더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아낙시메네스는 다시 이것이 너무 추상적이라며 '공기'를 원질로 보았다. 이러한 비판과 종합의 과정에서 우리는 서양철학의 핵심적 특징을 발견한다. 바로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정신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철학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그들은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원질을 찾는 것을 넘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와 법칙, 조화의 원리를 탐구한 것이다. 칠현금의 음조가 현의 길이라는 수적 비율로 설명된다는 발견은, 자연현상 이면에 수학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통찰로 이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수학적 탐구와 윤리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화로운 우주의 질서를 깨닫고, 그러한 조화를 자신의 삶에서도 실현하고자 했다. 엄격한 금욕생활과 영혼의 순화를 추구한 것은, 철학이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여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탐구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현대 물리학의 통일장이론이나 만물의 이론 추구는, 탈레스가 시작한 그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세철학은 흔히 '암흑시대의 철학'으로 폄하되곤 한다. 신학이 학문을 지배했고, 자유로운 사고가 억압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이해다. 중세철학은 그리스의 합리적 사유와 기독교의 신앙을 종합하려는 거대한 지적 프로젝트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이러한 중세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고, 마니교를 거쳐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했으며, 최종적으로 기독교로 귀의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 여정은 고대의 철학적 유산을 기독교 신학 안에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그의 시간론은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시간은 존재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지금'이라는 영원 속에 있다고 말한다. 과거는 기억으로서의 지금이고, 현재는 감각으로서의 지금이며, 미래는 기대로서의 지금이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현상학의 시간 이해를 선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철학이 근대철학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 보편자 논쟁, 신 존재 증명 등 중세에 다루어진 문제들은 근대 철학자들의 사유를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나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통찰에 빚지고 있다.


근대철학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베이컨은 귀납법을 통해, 데카르트는 연역법을 통해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종합하여 인간 인식의 한계와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철학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는 우리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틀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 이성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의지'로 보았고, 니체는 이성 중심의 서양 철학 전통 자체를 비판했다. 그들은 이성만으로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삶의 비합리적이고 본능적인 측면, 고통과 욕망, 권력에의 의지 같은 것들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철학은 언어에 주목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따라서 철학의 문제는 상당 부분 언어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 그 자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관계 맺으며, 의미를 창조한다. 이러한 언어철학의 전개는 철학의 과제를 새롭게 규정했다. 철학은 더 이상 세계의 궁극적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 자체를 성찰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철학의 영역을 축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한 것이다. 과학, 예술, 일상언어 등 모든 의미 있는 담론이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사 2500년의 여정을 돌아보면, 한 가지 일관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 종합과 극복의 과정이다. 탈레스의 물은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해 비판되었고,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는 아낙시메네스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비판되었고, 중세 스콜라철학은 근대 합리론에 의해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극복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었다. 각 시대의 철학자들은 선배들의 통찰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칸트가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했듯이, 헤겔이 변증법을 통해 대립을 지양했듯이, 철학은 항상 더 높은 종합을 향해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기후위기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든다. 극심한 불평등과 양극화는 정의와 윤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 SNS와 가짜뉴스의 범람은 진리와 허위의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철학은 즉각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철학은 우리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준다.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는 법을, 상식을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대립하는 견해들을 종합하여 더 높은 진리에 도달하는 법을 알려준다.


철학함이란 과거의 철학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태도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었듯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혼란의 시대에 철학은 나침반이 된다. 수많은 정보와 가치가 충돌하는 시대에, 철학은 우리에게 명확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철학은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길을 열어준다.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철학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는 보루가 된다. 철학함이란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여정이다. 그것은 쉬운 길이 아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하고, 익숙한 사고방식을 버려야 하며, 확실성 없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이 사고하고, 더 현명하게 판단하며,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철학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지금이야말로 철학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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