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학파는 철학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그들은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원질을 찾는 것을 넘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와 법칙, 조화의 원리를 탐구한 것이다. 칠현금의 음조가 현의 길이라는 수적 비율로 설명된다는 발견은, 자연현상 이면에 수학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통찰로 이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수학적 탐구와 윤리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화로운 우주의 질서를 깨닫고, 그러한 조화를 자신의 삶에서도 실현하고자 했다. 엄격한 금욕생활과 영혼의 순화를 추구한 것은, 철학이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여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탐구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현대 물리학의 통일장이론이나 만물의 이론 추구는, 탈레스가 시작한 그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세철학은 흔히 '암흑시대의 철학'으로 폄하되곤 한다. 신학이 학문을 지배했고, 자유로운 사고가 억압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이해다. 중세철학은 그리스의 합리적 사유와 기독교의 신앙을 종합하려는 거대한 지적 프로젝트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이러한 중세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고, 마니교를 거쳐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했으며, 최종적으로 기독교로 귀의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 여정은 고대의 철학적 유산을 기독교 신학 안에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그의 시간론은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시간은 존재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지금'이라는 영원 속에 있다고 말한다. 과거는 기억으로서의 지금이고, 현재는 감각으로서의 지금이며, 미래는 기대로서의 지금이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현상학의 시간 이해를 선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철학이 근대철학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 보편자 논쟁, 신 존재 증명 등 중세에 다루어진 문제들은 근대 철학자들의 사유를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나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통찰에 빚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