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런은 전통적인 회복 서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리학의 시작점을 계속 찾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일 수도, 뉴욕으로의 이사일 수도, 첫 자살 시도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의료 기록이 제공하는 깔끔한 이야기—우울한 젊은 여성이 병원에 들어가고, 3년을 머물고, 의사들의 개입 덕분에 나아진다—는 거짓말이다. 아니, 적어도 불완전한 진실이다. "나는 세부사항들을 원한다"고 그녀는 쓴다. "공식적인 언어, axis 1이나 axis 2, 약물과 증상의 목록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병원에서의 우리의 길고 지루한 날들과 해들의 이야기다. 내가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일상이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의 삶을 진단명과 증상 목록으로 환원하는지 생각했다. 의료 차트는 효율적이고 필요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텍스처, 그들의 일상, 그들이 살아낸 시간의 질감을 담지 못한다. 책은 그 의료 기록에 대한 수정이자 반박이며, 무엇보다 증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진단명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하고 모순적이라고 말한다.
스캔런이 퇴원한 1995년, 그 병동은 영구 폐쇄되었다. 그리고 1997년, FDA가 제약회사들의 직접 광고를 허용하면서, 정신질환자들은 "소비자"가 되었다. "당신에게도 졸로프트가 맞을까요?" 라고 묻는 광고들이 쏟아졌다. 화학적 불균형 이론—아직도 논쟁적이고 반복적으로 반박되어 온—은 엘리 릴리와 다른 제약회사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나는 2004년, 열아홉 살에 처음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 당시 내 주변에는 그런 약을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안 먹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우울증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생물학적 질병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이전의 "성격적 결함"이라는 관념을 반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을 덜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진보다. 하지만 스캔러이 지적하듯, 약이 작동한다고 해서 화학적 불균형이 우울증의 원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약들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가? 202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29%가 평생 동안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항우울제 사용은 증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다. 이 역설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정신질환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들을 무시하고, 그것을 개인적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정신질환은 세상의 어떤 것이 아픈지를 보여주는 거울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 거울을 약으로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