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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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르네상스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보편적 천재성이나 미켈란젤로의 불굴의 예술혼을 떠올린다. 그러나 조반니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라는 이름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다. 1463년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불과 3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 철학자는, 짧은 생애 동안 교황의 분노를 사고, 감옥에 갇히고, 그의 저서가 인쇄된 책 중 최초로 교회에 의해 금서가 되는 파란만장한 운명을 겪었다. 에드워드 윌슨-리(Edward Wilson-Lee)의 전기 The Grammar of Angels은 피코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선사하는지 이야기한다. 피코의 삶과 사상을 추적하는 이 여정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이며, 언어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라는 오래되고도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피코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의 표시를 달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단테의 신곡 전편을 한 번만 들어도 앞뒤로 완벽하게 암송했다는 일화는 과장이 아니라, 그가 언어와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 보통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시사 한다. 그에게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초월적인 질서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열 살에 교회의 사무직에 임명되고, 볼로나와 페라라, 파도바와 파리의 대학들을 순례하며 법학과 의학, 고전어를 차례로 정복해간 피코의 학문 편력은,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더 큰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끝없는 질주였다. 그러나 정통적인 학문의 경계를 모두 섭렵한 후, 피코가 도달한 것은 만족이 아니라 더욱 깊은 갈증이었다. 그는 유대 학자들을 찾아가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배우고, 조로아스터의 언어라고 믿었던 칼데아어(실제로는 에티오피아의 전례 언어인 게에즈어였지만)를 익히면서, 동방의 고대 텍스트들 속에 감추어진 신성한 지식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윌슨-리 책의 핵심 주제이자 피코 철학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언어 자체에 대한 그의 사유이다. 피코가 던진 하나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의미 있는 말보다 더 강한 마법적 힘을 가진다. 명상가들이 반복하는 만트라, 마법사의 주문 "아브라카다브라", 혹은 경기장에서 군중이 함께 외치는 구호 등은 그 언어적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을 움직인다. 피코는 언어가 의미를 초과하여 작동하는 영역에 천사가 있다고 보았다. 윌슨-리는 이를 황홀하게 하는 말(enrapturing speech)"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합창단에서 함께 노래할 때, 또는 군중 속에서 하나의 구호를 외칠 때, 우리는 잠시 개별적 자아의 경계가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다. 피코에게 이것은 감정적 경험만이 아니라 신비적 합일의 전조였으며, 인간이 천사적 존재, 즉 개별성을 초월한 순수한 이성의 존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거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 즉 공동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틀 안에서 천사를 인간보다 상위에 위치한 존재, 즉 불완전한 육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이성으로 정의했다. 피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철학적 이해를 통해 천사의 경지에, 나아가 신성한 합일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급진적인 가능성을 탐구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만든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이단이기 이전에 인간의 가장 오래된 열망 중 하나를 담고 있다. 피코의 900개 명제는 바로 이 야심찬 통합의 기획 위에 세워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유대 카발라 전통,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에 이르기까지, 피코는 모든 지적 전통을 하나의 거대한 통일 이론으로 종합하고자 했다. 그것은 지식의 과시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혜가 실은 하나의 진리를 다른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심층적인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피코의 장대한 지적 기획은 당대의 권력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1486년 로마에 도착한 스물세 살의 피코는 자신의 900개 명제를 공개 토론에 부치겠다고 선언하고, 도전자들의 여행 경비까지 부담하겠다고 했다. 이 대담한 선언은 지적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사유가 얼마나 공개적이고 보편적인 대화를 원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토론 자체를 금지했고, 명제들을 이단으로 판정한 교황청 위원회의 결정에 피코는 격렬한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 결과 그의 저서는 교회에 의해 최초로 금서가 된 인쇄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얻었고, 피코 자신은 도피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피코가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박해를 받는 방식이다. 그는 권위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비판자들을 경멸하는 글을 발표했다. 겸손이나 유화의 기술을 익히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윌슨-리의 서술은 피코를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이단아로 그려낸다. 그는 고집스럽지 않았다기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 앞에서 정치적 타협이 의미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피코를 구한 것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우정이었다. 로렌초는 피코를 위해 도서관을 지을 수 있다면 파산해도 좋겠다고 말했을 만큼 그를 아꼈고, 실제로 동지중해 전역에 사람을 보내 희귀 필사본을 수집했다. 피코의 말년은 플로렌체에서 조용하게 연구에 몰두하는 시간이었지만, 로렌초의 죽음과 함께 사보나롤라의 광풍이 도시를 휩쓸면서 그는 또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피코는 자신이 플로렌체로 불러들인 바로 그 사보나롤라의 수도원 산마르코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보나롤라는 군중을 열광적인 집단적 황홀경으로 이끄는 웅변의 힘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보티첼리가 그의 설교에 설득되어 자신의 그림을 불태웠다는 일화는, 피코가 그토록 탐구했던 황홀하게 하는 말"의 힘이 실제로 얼마나 강렬하고 동시에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피코는 그 힘의 신성한 가능성을 보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파괴적인 집단 광기로 전환 될 수 있는지를 목격하면서 생을 마쳤다.

윌슨-리가 피코를 통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현대적 질문은 개인주의에 관한 것이다. 바사리에서 부르크하르트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는 오랫동안 개인 천재의 시대로 해석되어 왔다. 피코 역시 그 신화의 일부로 위치 지어졌다. 그러나 윌슨-리는 피코의 철학이 실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피코에게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는 개인이란 과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을 파도의 물마루에 비유했다. 각각의 물마루는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거대한 대양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 관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낯설고 불편하다. 현대 서구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자명한 가치로 여기도록 훈련받았다. 그러나 윌슨-리는,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이 집단적 정체성을 개인적 정체성보다 우선시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음을 지적한다. 문제는 집단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가이다.

20세기 파시즘은 개인이 집단 속으로 해소되는 황홀경의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피코가 탐구했던 집단적 합일의 경험은 파시즘적 강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자발적인 신비적 참여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연결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 위기가 증명했듯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절박한 도전들은 개인적 해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피코의 질문은 이 맥락에서 새롭게 울린다: 우리는 개별적 자아의 경계를 초월하여 공동의 운명 을 인식할 수 있는 철학적, 정신적 자원을 갖추고 있는가? 윌슨-리는 피코를 직접적인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피코의 사유가 우리에게 익숙한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의 외부에 다른 가능성이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고 제안한다. 새들의 언어에 대한 믹스텍 문명의 관심, 아이슬란드 서사시의 신화, 인도 브라만의 신성한 언어관 이 피코의 천사 언어에 대한 탐구와 연결되는 방식은, 인간이 의미와 의미를 초월하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언제나 같은 질 문을 던져왔음을 암시한다.


피코는 로마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의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위대한 일에서는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체념처럼 들리기도 하고, 숭고한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마도 피코 자신도 그 양가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천사의 언어를 해독하고, 모든 지혜를 하나의 통일 이론으로 종합하고, 언어가 의미를 초월하는 영역에서 신성과 접촉하겠다는 그의 야망은 달성되지 못했다. 그가 죽기 직전 산마르코에서 미친듯이 써내려간 마지막 원고들은 이후 아무도 읽을 수 없는 "난해한 혼돈"이었고, 결국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The Grammar of Angels가 설득력 있게 보여주듯, 피코의 실패한 탐구는 실패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더 오래 기억된다. 계몽주의 이후의 지성사는 피코 식의 탐구를 "학자들의 허영"이라고 조소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데이터의 지속적 확장이 지식의 이상이 되었고, 이해보다 정보가, 지혜 보다 혁신이 우선시되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오늘날 행성 규모의 위기 속에서 목격하고 있다. 결국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짧고 눈부신 생애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질문 그 자체다. 언어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집단 속으로 녹아드는 경험은 위험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피코는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질문들을 가능한 한 멀리, 가능한 한 깊이 밀어붙였다. 위대한 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했다. "In great things, it is enough to have tried" Propertius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좌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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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다는 착각 - 시간 압박을 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9가지 심리 법칙
이언 테일러 지음, 최기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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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도 나는 바쁘다. 아니, 정확히는 바쁘다고 느낀다. 달력은 빽빽하고, 할 일 목록은 줄어들지 않으며, 하루가 끝날 때마다 무언가를 다 하지 못했다는 묵직한 감각이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돌아보면 그 하루 안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시간은 분명히 흘렀는데, 나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시간이 없어서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 말을 꺼내는지 생각해보면 놀랍다. 운동을 못하는 이유도,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도, 오래 묵혀둔 꿈을 꺼내지 못하는 이 유도 모두 시간 탓이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시간과 맺어온 관계 자체가 뒤틀려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고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의지력 부족이나 나쁜 습관을 탓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정교한 심리적 함정들이 숨어 있다. 첫 번째는 낙관적 자기기만이다. 우리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습관적으로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이 일은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판단하지만, 실제로는 두 시간이 걸린다. 이런 오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편향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생각할 때 이상적인 조건을 전제하지만, 현실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 집중력의 저하, 사소한 방해들이 끼어든다. 흥미롭게도 타인의 일을 예측할 때는 이런 실수와 지체를 자연스럽게 고려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너그럽고, 그래서 가장 쉽게 속는 사람이 된다. 두 번째는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시간이다. 어떤 일이든 주어진 시간만큼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한 시간짜리 일이 두 시간이 주어지면 두 시간을 꽉 채운다. 여유 있다고 생각할수록 시작은 늦어지고, 과정은 느슨해지며, 마감 직전에야 비로소 집중이 시작된다. 시간이 많다는 느낌이 오히려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고, 정작 그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가 끝난다. 이것이 역설이다. 시간이 더 많을수록 더 잘 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많이 흘려보낸다. 세 번째는 의지력에 대한 과신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믿는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결심만 하면 바뀔 수 있다고. 그러나 의지력은 근육과 같아서, 쓸수록 닳는다. 하루의 초반에는 단단하게 서 있던 결심이 오후가 되면 흐물거리고, 저녁이 되면 무너진다. 그래서 미룬다. 내일 하자, 다음 주에 하자, 언젠가 하자. 그러나 그 '언젠가'는 달력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력이 가장 충만한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을 배치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매번 잊는다.

바쁘다는 느낌이 반드시 많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일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은 흔히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한다. 시간이 없다는 감각은,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와 맞지 않거나, 나의 진짜 가치와 어긋나고 있다는 경고 신호일지 모른다. 몰입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흘러간다. 하지만 억지로, 불안하게, 마지못해 앉아 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형벌처럼 느껴진다. 결국 시간의 질감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 있으면, 그 흐름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게 된다. 실제로 할 일이 많지 않아도 초조해지고, 쉬고 있으면 뭔가를 놓치 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이 불안감이 바로 시간 부족의 진짜 원인인 경우가 많다.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분위기와 시선과 기대다.

우리는 오랫동안 빈 시간을 낭비로 여겨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목적 없이 걷는 시간. 이런 것들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죄책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빈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되찾는 시간이다. 뇌는 쉬는 동안에도 일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 뇌는 흩어진 정보들을 연결하고, 감정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종종 샤워 중에, 산책 중에, 잠들기 직전에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빈 시간이 생각을 발효시킨다.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무언가로 채우려는 충동, 스마트폰을 꺼내고, 영상을 틀고, SNS를 스크롤하는 행동들은 결국 그 발효의 시간을 빼앗는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비하지만 더 적은 것을 생각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더 적은 것을 느끼게 된다.

시간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30분을 채 우겠다는 계획보다 건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겠다는 지향이 더 강한 동력을 만든다. 책을 한 달에 몇 권 읽겠다는 목표보다 배우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정체성이 더 오래 지속된다. 정체성은 의지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책을 사 랑하는 사람은 굳이 읽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 든다. 달리기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은 오늘 뛸 지 말지를 매번 고민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과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엄청 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갈 때, 시간은 더 이상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흐름의 매체가 된다. 억지로 쪼개고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타고 가는 강물처럼.

시간은 늘릴 수 없다. 하루를 25시간으로 만들거나, 일주일에 하루를 더 끼워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느끼 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더 많은 일을 밀어 넣어서가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 더 깊이 있음으로써. 계획표를 촘촘하게 채워 서가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을 먼저 함으로써. 의지를 불태워서가 아니라, 나다운 정체성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결국 시 간이 없다는 느낌은, 내가 원하는 삶과 내가 실제로 보내는 시간 사이의 간격에서 온다. 그 간격을 줄이는 것, 그것이 시간 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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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어라 - 헤르만 헤세 청춘소설 3부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지음, 송동윤 옮김 / 스타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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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을 다시 꺼내 든 건,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오랫동안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막연했지만 분명했다. 책은 <수레바퀴 아래서>,<데미안>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를 같이 엮은 책이었다. 헤르만헤세의 대포작 세 권을 차례로 읽는 동안, 나는 한 인간이 깨어나는 과정을 함께 겪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스스로 깨어라>는 이 세 편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은 책이다. 제목에 담긴 두 겹의 뜻, 잠에서 깨어나듯 자신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껍질을 깨고 세계로 나오는 것은 편집자의 언어가 아니라, 헤세가 세 소설을 통해 일생 동안 탐구한 질문의 핵심일 것이다. 나는 세 권을 다시 읽으면서 그 질문이 얼마나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내 삶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 기벤라트는 모든 걸 갖춘 소년처럼 보였다. 뛰어난 머리, 성실한 태도, 마을 전체의 기대. 그러나 그를 에워싼 것들은 그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갈아먹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공부, 낚시와 산책마저 허락되지 않는 시간들, 그리고 쉬지도 못한 채 이어지는 시험들. 어른들은 그것을 '훈련'이라 불렀고, '사랑'이라 믿었다. 한스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그가 결국 강가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전에, 헤세가 차례차례 던지는 물음들이었다. 왜 토끼를 빼앗았는가, 왜 낚시를 금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쉬지 못하게 했는가. 이 질문들은 한스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향해 있다. '스스로 깨어라'는 말이 한스에게는 얼마나 잔인하게 들렸을까. 그는 깨어날 기회 자체를 빼앗긴 소년이었다. 깨어남 이전에 짓눌려 버린 삶, 그것이 <수레바퀴 아래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첫 번째 진실이다. 깨어나는 것은 때로 먼저 부서지는 일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부서짐이 외부의 폭력에 의한 것일 때,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파괴가 된다. 한스의 비극은 그 차이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는 한스와 달리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생존이 아니었다. 싱클레어는 두 세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라지는 고통을 겪는다. 아버지의 세계(빛과 질서, 예배와 도덕)와 그 너머의 세계, 냄새도 말투도 다른, 혼돈과 욕망과 스캔들로 가득한 세계.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흔들렸다. 그때 데미안이 등장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싱클레어가 스스로 묻게 만드는 존재다. 카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그의 언어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낯설게 만든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으며, 강한 자는 두려움을 받는다는 것, 이 뒤집기는 싱클레어의 세계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다.' 데미안이 보낸 쪽지의 이 문장은, 성장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은유 중 하나다. 알 안은 안전하다. 그러나 새는 그 안에서 죽는다. 껍질을 깨는 일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싱클레어는 그 과정을 에바 부인과의 만남,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이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차례차례 겪으며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싱클레어의 방황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새삼 느꼈다. 그는 선하려 하면서도 타락하고, 이상을 좇으면서도 현실에 무너진다. 그 흔들림이 있었기에 그의 깨어남은 설득력을 갖는다. 완전한 인간이 깨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그 불완전함을 껴안으며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것이 데미안이다.

싯다르타는 처음부터 구도자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그 앎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앎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를, 싯다르타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사문이 되어 고행을 겪고, 고타마 부처를 만나 그의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세속으로 내려가 카말라 곁에서 쾌락과 욕망을 직접 살아낸다. 싯다르타가 세속에서 겪는 타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서 그 안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깨달아 그 안에서 빠져나온다. 그가 강가에서 오랜 시간 바시테바와 함께 보내며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깨달음이 얼마나 조용한 형태로 찾아오는지를 보여준다. 강은 모든 것을 동시에 흐르게 한다, 시작도 끝도, 삶도 죽음도, 기쁨도 슬픔도. 그 강물 속에서 모든 얼굴이 하나로 이어지는 환상을 싯다르타는 마침내 이해한다. 고빈다에게 싯다르타가 전하는 마지막 말은 가르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을 언어로 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고빈다에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게 한다. 그리고 고빈다는 그 순간, 수천 개의 얼굴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지식이 아니라 체험, 교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 그것이 싯다르타가 말하는 깨어남은 그런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아직 알 안에 있는가, 아니면 껍질을 깨는 중인가. 그것도 아니면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명확한 답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깨어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소설은 100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불안과, 그 알을 깨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따라 스스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일, 그것이 헤세가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유일한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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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격차 - 미래를 보는 인문 고전 99선
장은조 지음 / 아이콤마(주)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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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두꺼운 책 표지와 빽빽한 활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곧이어 "언젠가는 읽어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책장 한편에 고이 모셔두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우파니샤드>, <주역>, 키케로의 <의무론> 같은 이름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압박감으로만 존재했지, 실제로 내 삶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전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혹시 내가 질문을 잘못 들고 있어서가 아닐까?"

고전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로 접근한다. 저자의 논리를 파악하고, 시대적 배경을 암기하고, 핵심 개념을 정리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각 고전에 붙여놓은 제목들을 보면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눈에 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인생의 고통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는 법". 이 질문들은 학문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지금 이 순간의 것들이다. 고전은 원래 이런 질문들에서 태어났다. 수천 년 전 인도의 현인들이 스승 곁에 가까이 앉아 나눈 대화가 <우파니샤드>가 되었고, 석가모니가 인간의 고통 앞에서 내놓은 솔직한 대답이 <아함경>이 되었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극이 있지만, 질문 자체는 놀랍도록 동일하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변화 앞에서 두려워하며, 권력 앞에서 헷갈린다. 그 질문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전을 그렇게 멀게 느끼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고전을 읽는다'는 행위에 너무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고전을 읽으면 인생이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전을 읽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불안이 고전과 나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놓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주역이 말하는 음양의 균형은 오늘 아침 회의에서 상사와 부딪혔을 때 '어느 한쪽의 입장만 옳은 건 아니구나'라고 잠깐 숨을 고르는 순간에 살아난다.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아들에게 건넨 이야기는, 단기 이익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직장인의 갈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던지는 불편한 통찰, 즉 권력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조직 생활을 하는 누구라도 어느 순간 뼈저리게 실감하는 진실이다. 고전이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완성된 진리를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함경은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는 결국 읽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사유의 종착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이다. 고전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더 좋은 질문을 품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카로스가 날개가 녹아 추락한 것은 단순히 방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은 오만, 즉 히브리스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카로스적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공에 도취해 리스크를 과소평가하고,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결국 무너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뉴스에서도 매일 등장한다. 신화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의 반복되는 패턴을 압축한 언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고전이 가진 '낯선 위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방탕했던 청년 시절과 지적 오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1,600년 전의 인물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방황해도 된다는 것, 그 방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라는 것. 지눌의 보조법어가 전하는 "마음 밖에 딴 부처가 없다"는 말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 자주 바깥을 향해 달린다. 더 나은 조건,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인정. 그런데 그 달음질을 멈추고 잠깐 안을 들여다보라는 말은, 현대적 자기계발의 언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력하다. 아니, 그런 치장 없이 날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다. 고전이 주는 위로는 동정이 아니다. 고전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고통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온 것이야"라고 말해준다. 그 말이 주는 안도감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수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 그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함께 생각해온 긴 여정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롭다.

결국 고전 읽기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대화의 연장이다. 수천 년 전의 현인들과, 그리고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 '고전 격차'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그 격차는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느냐 읽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삶의 무게 앞에서 질문을 품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 불확실성 앞에서 고전이 전해준 지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호메로스가 그린 오디세우스는 20년의 고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여정에서 그를 지탱한 것은 근육이나 무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기억하는 마음, 그리고 어떤 유혹 앞에서도 그 방향을 잃지 않는 지혜였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오디세우스처럼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나침반을 손에 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전은 어렵지 않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질문을 멈추고 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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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이기는 전략 필사 : 손자병법 100 -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승리의 문장들
손무 지음, 진성수 감수 / 서울문화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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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글씨나 예쁘게 써볼 요량이었다. 우연히 집어 든 그 책이 내 일상의 어느 이른 아침, 조용히 전장을 열게 될 줄은 몰랐다. 표지를 넘기는 순간, 묘한 긴장감이 손가락 끝으로 스며들었다. 단순한 필사 노트가 아니었다. 고전 문장들이 활자로 촘촘히 박혀 있었고, 여백은 내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2천5백 년 전 한 전략가의 사유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상한 감각. 그것이 시작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낯설었다. 한자 원문과 그 아래 달린 뜻풀이를 보며, '이게 나한테 맞는 책인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고전이라고 하면 어쩐지 딱딱하고 먼 세계의 이야기 같고, 병법이라고 하면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전쟁터가 먼저 떠오르지 않던가. 그런데 첫 번째 문장을 천천히 받아 쓰면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한 획 한 획 옮기는 사이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스마트폰 알림도, 오늘 마감해야 할 업무도, 어제 어색하게 끝난 대화도 잠시 물러나 있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오직 그 문장과 나만 남는 느낌. 그 고요함이 낯설고도 반가웠다. 필사는 속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평소 텍스트를 읽는 방식으로 쓱 훑어 넘길 수가 없다. 손이 느리기 때문에 눈과 머리가 억지로 그 속도에 맞춰진다. 덕분에 평소라면 그냥 흘렸을 문장 하나가, 천천히 씌어지는 동안 오래 마음에 머물렀다.

필사를 이어가면서 손무가 단순히 전쟁을 논한 인물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을 먼저 말했고, 싸움보다 싸움을 피하는 지혜를 더 높이 쳤다. 그 태도가 어쩐지 요즘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자주 그 반대로 살아왔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상대는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흥분하거나, 나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무리하게 몰아붙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필사를 하면서 나는 그 문장의 주인이 된다. 손무의 언어가 내 손을 빌려 다시 태어나는 동안, 나는 어느새 그 의미를 내 삶의 맥락 위에 겹쳐 놓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를 시작할 때 이 책을 먼저 펼치게 되었다.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아직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이른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한 문장을 써 내려간다. 그것이 내 하루의 준비 운동이 됐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써 놓은 문장들이 하루 안 어딘가에서 불쑥 떠오른다는 점이다. 회의 중 누군가와 의견이 엇갈릴 때,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할 때, 혹은 오랫동안 피해 왔던 결정을 앞두고 망설일 때. 그 문장들은 조용히 나타나 하나의 시각을 제안해 준다. 강요하지 않고, 그저 한 방향을 가리키는 방식. 전술을 쓰면서 서서히 알게 됐다. 준비하고, 실행하고, 변화를 읽고, 정보를 장악하는 그 흐름은 어떤 프로젝트를 이끌거나, 어떤 관계를 돌보거나,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병서가 지금 내 삶의 지도가 되는 순간이었다.

필사를 하다가 문득 내 글씨를 바라본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의 글씨와 몇 주가 지난 글씨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더 반듯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편안해졌달까. 힘을 빼고 쓰는 법을 몸이 조금씩 익히는 것처럼. 그게 필사의 이상한 점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남는다. 예쁜 글씨체를 연습하는 게 목적이 아닌데 어느 순간 손이 문장을 기억하고, 뇌가 그 문장의 리듬을 따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읽었을 때와 달리, 손으로 옮긴 문장은 기억의 결 속 깊은 곳에 자리를 튼다. 나는 이 책이 어떤 고전 해설서보다 솔직하다고 느꼈다. 거창하게 손무의 철학을 논하거나 수십 개의 주석을 달지 않는다. 그냥 쓰게 한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문장의 진의에 더 가까이 닿게 해준다.

물론 이 책을 필사한다고 해서 삶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조급해지고, 여전히 감정이 앞서는 날이 있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건, 그런 순간에 '아, 잠깐' 하는 짧은 브레이크가 생겼다는 점이다. 손으로 써서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된 그 문장들이 위급한 순간 조용히 손을 잡아당긴다. 책의 여백이 채워질수록 그것은 점점 '내 것'이 되어간다. 손무의 언어와 내 필체가 한 페이지 위에 섞여 있는 그 공간은, 어떤 고급 다이어리나 독서 노트로도 대체되지 않는 고유한 기록이다. 오래된 지혜들이 나의 이른 아침마다 한 문장씩 쌓여간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조용히 오늘의 나를 지탱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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