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 회복력의 기술 - 자기 의심을 끊고 원하는 삶을 밀어붙이는 힘
데이먼 자하리아데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서울문화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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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머릿속에 끊임없이 말을 거는 존재를 품고 산다. 그것은 때로 격려자이기도 하지만, 더 자주 가혹한 비평가로 나타난다. 데이먼 자하리아데스는 이 내면의 비판자에게 '샘'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막연했던 자기비판의 메커니즘을 눈앞에 드러낸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곧 인식의 시작이며, 인식은 변화의 첫걸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시도 앞에서 주저하고, 실패의 가능성에 압도되며,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민감해진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내면화된 비판의 목소리가 자리한다. 저자가 지적하듯, 이 목소리는 단순히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방식 전체를 왜곡하고, 감정을 교란하며, 결국 행동의 마비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 내면의 비판자가 교묘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정당한 우려나 합리적 판단의 형태로 위장되어 나타난다.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실패하면 어쩌지" 같은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신중함을 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족쇄가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반복되면서 배경 잡음처럼 일상화되고, 결국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과 소속감을 갈망하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다. 문제는 내면의 비판자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을 때, 그 목소리는 "네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실패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창피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속삭인다. 이러한 두려움은 행동을 가로막는 강력한 억제제가 된다. 사람들은 실제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시도 자체를 포기한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소심함이나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비판자가 우리의 정당한 욕구를 왜곡하여 만들어낸 함정임을 분명히 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행동의 동력이 아닌 마비의 원인이 될 때다.

자기 의심은 내면 비판자가 가장 선호하는 도구다. 그것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비난보다 훨씬 교묘하게 작동한다. 의심은 레이더 아래에서 움직이며,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자신감의 토대를 서서히 침식시킨다. "내가 정말 이걸 아는 게 맞나?", "내 판단이 틀린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이라면 더 잘했을 텐데" 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특히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치명적이다. 모든 선택이 거대한 도박처럼 느껴지고, 작은 결정조차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 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결정을 회피하거나 과도하게 미루게 되며, 이는 다시 자기 불신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부정적인 자기 대화의 가장 위험한 측면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자기비판이, 반복되면서 일상의 일부가 된다. 냉소와 조롱, 비난이 제2의 천성처럼 자리 잡으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상화 과정은 변화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해결할 수도 없다. 자기비판이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게 되면, 그것 없는 삶을 상상하기조차 힘들어진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각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익숙하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며, 오래되었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변화의 첫 단계는 인식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성찰 일기는 기록을 넘어선 강력한 도구다. 자기비판적인 생각들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들은 머릿속의 추상적인 소음에서 구체적이고 검토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내면 비판자의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 그 목소리가 강해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하는지, 그리고 그 주장들이 얼마나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는지 명확히 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곧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무능하다"라는 생각과 "지금 내 머릿속에서 내가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는 인식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절대적 진실처럼 느껴지지만, 후자는 관찰 가능하고 평가 가능한 정신 현상이 된다. 이 차이가 변화의 문을 연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비전은 단순히 부정적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실패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전진하는 삶이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는 믿음, 완벽하지 않아도 가치 있다는 인식, 타인의 평가보다 자신의 진정성을 우선하는 용기가 그 중심에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다. 저자도 인정하듯, 평생의 주의와 실천이 필요한 여정이다. 하지만 그 보상은 엄청나다. 자기비판의 족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책은 추상적인 개념 설명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 5단계 훈련 과정과 각 장마다 제공되는 실천 과제들은 독자가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변화의 주체가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국 내면의 비판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자하리아데스가 제시하는 길은 그 목소리를 인식하고, 그것의 권위에 도전하며, 결국 그것을 길들이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가능성에 기반한 삶, 비판이 아닌 연민으로 자신을 대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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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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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기계화 전쟁이 벌어진 시기였다. 기관총, 화염방사기, 독가스, 폭탄 파편 등 새로운 살상 무기들은 이전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혹한 부상을 초래했다. 특히 참호전의 특성상 머리를 내밀어야 하는 병사들은 얼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약 28만 명의 병사들이 안면 부상을 당했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을 넘어섰다. 당시 사회는 얼굴에 상처를 입은 병사들을 영웅이 아닌 괴물처럼 취급했다. 다리를 잃은 병사는 동정과 존경을 받았지만, 얼굴이 일그러진 병사는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황급히 집안으로 들어갔고, 약혼녀들은 파혼을 통보했다. 프랑스에서는 '부서진 얼굴들', 독일에서는 '뒤틀린 얼굴' 또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라 불렸으며, 영국에서는 '가장 외로운 토미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외과의사 해럴드 길리스가 등장했다. 1915년 프랑스 전선에 파견된 32세의 그는 처참한 안면 부상자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턱뼈가 사라지고, 코가 날아가고, 혀가 찢어지고, 안구가 탈출한 병사들. 전차나 항공기 화재로 얼굴 전체가 녹아내린 이들. 기존의 의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참고할 교과서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구순구개열 교정이나 귓불 수술 같은 초보적인 성형술은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처럼 광범위한 안면 재건은 전례가 없었다. 치료의 과학은 파괴의 과학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길리스는 문자 그대로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는 먼저 프랑스와 벨기에 전선에서 치과의사들이 턱과 코가 손실된 병사들을 돌보는 모습을 관찰했다. 거기서 영감을 얻은 그는 안면 재건만을 전담하는 전문 센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처음에는 올더샷의 케임브리지 군병원에 병동 하나를 배정받았고, 1917년에는 시드컵의 조지아풍 저택과 주변 목조 건물들로 이루어진 퀸스 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길리스의 천재성은 단순히 외과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외과의사, 치과의사, 마취과의사, 간호사,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로 구성된 다학제 팀을 최초로 구성했다. 이는 현대 의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협진 시스템의 선구적 모델이었다. 치과의사들의 역할은 특히 중요했다. 항생제가 없던 시대였기에 입 내부에서 금속판으로 뼈를 고정할 수 없었다. 대신 얼굴 외부에서 틀과 핀으로 턱을 고정하면서, 외과의사가 다른 부위를 치료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가 음식을 먹고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재건 수술 성공의 핵심이었다. 화가와 조각가들도 필수 인력이었다. 그들은 수술 전후의 모습을 세밀하게 기록했고,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들에게는 전쟁 전 사진을 참고해 정교한 금속 마스크를 제작했다. 이러한 시각적 기록은 다른 의사들이 복잡한 재건 수술을 배우고 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과 의학의 협력은 성형외과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길리스는 각 수술 전에 사무실에 틀어박혀 담배를 피워대며 계획을 강박적으로 검토했다. 참고할 선례가 없었기에 모든 것을 직접 고안해야 했다. 그는 종종 봉투 뒷면에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후, 수십 차례에 걸친 수술을 진행했다. 그의 가장 혁신적인 기법은 '피부판(skin flap)' 기술이었다. 가슴이나 다른 부위에서 피부를 떼어내되, 한쪽 끝은 붙여둔 채로 혈액 공급을 유지하면서 얼굴 쪽으로 회전시켰다. 획기적인 순간은 이 연결 부위를 관(튜브) 모양으로 만들었을 때였다. '경관(pedicle)' 기법이라 불린 이 방법은 감염 위험을 크게 낮췄다. 어떤 환자는 코를 재건하기 위해 40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어떤 이에게는 가슴에 얼굴 전체를 그려놓고 통째로 이식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실패도 많았다. 재건된 코는 점막이 없어 수축되었고, 이식된 피부는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길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간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얼굴의 절반이 완전히 날아가고 피부가 갈기갈기 찢긴"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퀸스 병원은 치료 시설만이 아니었다. 길리스는 환자들의 정신 건강이 육체 회복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병원에서는 체육대회를 열고 연극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환자들이 지역 거리를 산책하도록 권장했고, 파란색으로 칠한 벤치를 곳곳에 배치해 행인들에게 미리 경고했다. 처음에는 병동에 거울을 금지했다. 새로 온 환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작업을 마치면 당신도 우리 대부분만큼 괜찮은 얼굴을 갖게 될 겁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환자들은 고통스러운 실험적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 야전병원 외과의사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환자가 정상적인 얼굴로 돌아가기 위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리라는 것을 안다." 길리스도 재건 수술이 시작되면 환자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많은 이들이 새로 자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듬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전쟁이 끝난 후 길리스는 개인 병원을 열어 계속 선구적인 수술을 시행했다. 1949년에는 최초의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전환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그의 사촌 아치볼드 맥인도가 2차 세계대전에서 화상을 입은 조종사들을 치료한 '기니피그 클럽'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현대 성형외과를 실질적으로 창시한 사람은 길리스였다. 그는 코 성형술 같은 기존 기법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기술들을 상상하고 검증하고 표준화했다. 기능뿐 아니라 미학까지 고려하는 신세대 성형외과의사들을 배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준 연민과 인간애였다. 그는 단순히 얼굴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갖도록 도왔다. 전쟁의 참혹함은 의학의 혁명을 낳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겪은 고통과, 한 외과의사의 불굴의 노력이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현대 성형외과였다. 길리스의 이야기는 인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모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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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회복력 - 아파서 시작한 일, 몸을 살리는 회복의 비밀
박희연 지음 / 바이북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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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몸이 차갑다는 것은 우리 감각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견딜 만하다고 여기며 외면해온 신호들이 쌓인 결과다. 우리는 추위를 느끼면서도 '원래 손발이 찬 편'이라고 말하고, 잠들지 못하면서도 '요즘 바빠서'라고 둘러댄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차가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다. 저자가 발견한 진실은 복잡한 의학 이론이 아니었다. 체온이 생명이라는, 지극히 근본적인 원리였다. 몸이 차가워지면 면역은 무너지고, 순환은 막히며, 통증과 불면이 찾아온다. 그 악순환의 출발점에서 그는 따뜻함이라는 해법을 찾았다. 겉만 덥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중심까지 온기가 스며들게 하는 것. 하루 20분의 찜질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발견은, 거창한 치료법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몸을 '참는 대상'으로만 여겨왔는가 하는 반성이었다. 피곤해도 커피로 버티고, 잠이 부족해도 일정을 우선하고, 손발이 차가워도 '체질'이라 치부했다. 회복을 미루는 것이 곧 삶을 미루는 일임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수면은 쉬는 시간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몸이 스스로를 복구하고, 면역세포가 깨어나며, 하루를 정리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에서 잠은 늘 뒤로 밀린다. 해야 할 일이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으며, 밤은 유일하게 나만의 시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불면의 고통 속에서 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얼마나 긴지, 수면이 부족할 때 통증이 얼마나 증폭되는지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리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기 시작하면서, 깊은 잠을 되찾았다. 같은 시간에 눕고 일어나는 습관, 잠들기 전 몸을 이완시키는 루틴, 전자기기와의 거리 두기 같은 실천은 새롭지 않지만, 체온 관리와 결합되면서 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나 역시 매일 밤 잠들기 어려운 사람이다. 침대에 누워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할 일 목록을 정리하고, 내일을 걱정한다. 충분히 잔 것 같지 않은 상태로 아침을 맞는 일이 반복되면서도, 그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잠을 지키는 일이 나를 지키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회복은 잠 속에서 일어나고, 내일의 에너지는 오늘 밤의 온기에서 비롯된다.

몸이 굳으면 마음도 굳는다. 순환이 막히면 염증이 쌓이고, 통증은 일상을 잠식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순환과 스트레칭의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굳은 곳을 풀어주며, 막힌 곳을 흐르게 하는 것. 케겔운동, 림프 마사지, 두피 마사지, 족욕 같은 방법들은 '운동'이라는 부담 대신 '돌봄'이라는 언어로 다가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부위별 찜질에 대한 설명이다. 배를 따뜻하게 하면 소화뿐 아니라 면역력까지 살아나고, 눈과 귀를 데우면 긴장이 풀리며, 발을 따뜻하게 하면 전신의 순환이 개선된다. 이는 몸이 분리된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시스템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한 곳을 돌보는 것이 전체를 돌보는 일이 된다. 나는 그동안 몸의 신호를 무시하는 데 익숙했다. 어깨가 뻐근해도 그냥 참았고, 허리가 아파도 일단 끝내고 보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참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 돌보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임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아침과 밤, 일과 중간에 나를 잠시 살피는 행위 자체가 회복이다.

책은 마음의 태도도 다룬다. 두 마리 늑대 이야기, 불안과 분노, 감사와 평안 중 어느 쪽에 먹이를 줄 것인가,는 회복이 몸만의 문제가 아님을 일깨운다. 체온을 높이는 일은 곧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고, 매 순간 감사와 희망을 선택하는 태도가 결국 몸을 살린다. 작가가 '들꽃잠'이라는 이름에 담은 의미도 마찬가지다. 들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강인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향기를 내뿜는다. 척박한 땅에서도 묵묵히 피어나는 들꽃처럼, 우리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복할 수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오늘 조금 더 따뜻하게 나를 대하는 선택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기적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따뜻함을 건넨다. 몸을 데우고, 잠을 지키고, 순환을 돕고, 굳은 몸을 풀어주는 일. 그 반복 속에서 몸은 스스로 할 일을 시작한다. 나에게 이 책은 '건강해져야지'라는 거창한 다짐보다, '이제는 나를 좀 덜 혹사시키며 살고 싶다'는 작은 마음을 남겼다. 불면과 피로, 손발의 차가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일상을 갉아먹는 불편함을 그냥 참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책은 꽤 다정하게 다가올 것이다. 회복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태도에서 시작된다. 당장 무엇을 바꾸라고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몸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오늘 밤만큼은, 조금 더 따뜻하게 나를 대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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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비움은 자유다, 새롭게 정리한 개정증보판
김세중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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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두드릴 때, 나는 문득 내 방을 둘러본다.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 서랍 가득 쌓인 명함들, 언젠가 입으려고 옷장에 매달아 둔 옷들. 이 모든 것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리라 믿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조용한 새벽에 마주하는 진실은 조금 다르다. 내가 가진 것들이 나를 채우기보다는, 오히려 내 마음 한쪽을 조여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철 스님의 삶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경외심을 넘어선다. 그것은 어쩌면 부끄러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평생을 가난과 함께 살아가신 분의 이야기는,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메말라가는 우리 시대의 영혼에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많은 것을 움켜쥐려 애쓰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한자의 조형 속에 담긴 지혜는 때로 놀랍도록 직관적이다. 탐욕의 '탐'자가 화폐를 움켜쥔 손의 모습이라면, 가난의 '빈'자는 나누는 행위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석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섰다. 우리가 오랫동안 오해해 온 것은 아닐까. 가난을 단지 결핍의 상태로만 여겨온 것이. 진정한 가난, 청빈이란 가진 것이 없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여유로움일지도 모른다. 봄날 공원을 걷다가 만난 노부부를 기억한다. 벤치에 앉아 빵 한 조각을 비둘기들과 나누던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평화가 어려 있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함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나누는 행위 속에서 피어나는 기쁨. 그것이 바로 무소유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번째 선물이 아닐까.

혜능 대사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가 진정으로 가슴에 와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바람이 부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를 두고 다투던 사람들. 그러나 진짜 움직이고 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었다는 깨달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선문답을 넘어,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담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외부의 현상에 휘둘리며 살아가는가. 주가가 오르내릴 때마다, 날씨가 변할 때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우리의 마음은 요동친다. 하지만 정작 흔들리는 것은 밖의 세계가 아니다. 내 안의 집착과 욕망, 두려움과 기대가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가을 저녁, 한강변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강물은 늘 그 자리에서 흐르는데, 어째서 어떤 날은 평온하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슬프게 다가오는가. 강이 변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결이 달라진 것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그것은 결국 우리 내면의 상태를 반영한다.


테레사 수녀의 말씀을 읽을 때면 가슴 한편이 뜨거워진다. 바다에 붓는 물 한 방울처럼 보일지라도, 그 한 방울이 없다면 바다는 그만큼 줄어든다는 진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거창한 성공과 화려한 성취를 요구하지만, 정작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런 거대한 것들이 아니다. 한 번에 한 사람을 껴안는 따뜻함, 지금 이 순간 눈앞의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진심이 세상을 조금씩 밝게 만든다.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업무에 치여 지쳐 있을 때, 옆자리 선배가 건넨 따뜻한 커피 한 잔. 그것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고, 내 상태를 헤아려 주고 있다는 작은 신호였다. 그날 그 커피가 준 위로는 어떤 거창한 격려의 말보다 깊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한 번에 한 사람씩, 작지만 진심 어린 손길을 건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의 용맹정진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숙연해진다. 42일간 잠을 자지 않고 화두를 붙든 그 치열함 앞에서, 나는 내 일상의 나태함을 돌아보게 된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러한 극한의 수행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전하는 본질적 메시지는 분명하다. 진정한 깨달음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정일여,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한결같은 상태. 이것이 과연 우리의 삶에서 가능한 일일까.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회의실의 긴장된 공기 속에서, 주말 저녁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어느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유지한다는 것. 그것은 마치 불가능한 이상처럼 들린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 그 경지가 엿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새벽 요가 매트 위에서 호흡에만 집중할 때,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 빗소리를 들으며 차 한 잔을 마실 때. 그 짧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느낀다. 세상의 모든 소란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고요함을. 그것이 비록 몇 초에 불과할지라도, 그 경험은 내 안에 작은 씨앗을 심는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를 새롭게 읽었을 때, 나는 그동안 놓치고 있던 중요한 차이를 발견했다. 두 사람 모두 스승을 배반했지만, 한 사람은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해 무너졌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놓아주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 대비는 우리 삶에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서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가혹한 심판을 내린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자책이 아니라 놓아줌에서 시작된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걸어갈 용기를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무소유의 또 다른 차원이 아닐까.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마저 내려놓는 것이다. 몇 년 전, 중요한 프로젝트를 망쳤던 일이 있었다. 한동안 나는 그 실패의 무게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실패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과거를 바꾸지도 못하면서, 현재의 나만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나는 그 경험을 놓아줄 수 있었다. 잊은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배우되 거기에 묶이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자연의 순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교훈을 준다. 제비꽃이 피어나는 데에는 제비꽃만의 노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씨앗을 옮기는 개미의 부지런함이 함께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두 생명체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작동 원리다. 우리 역시 혼자가 아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의 작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상호의존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얼마나 자주 우리는 이 연결을 잊어버리는가.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이루려 하고, 다른 이들의 공헌을 당연하게 여긴다. 산책길에서 만난 제비꽃 군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작은 꽃들이 여기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을까. 바람과 비, 햇살과 흙, 그리고 수많은 미생물들과 곤충들.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이 한 송이가 피어난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인연들이 함께했다.


무소유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삶의 본질을 묻는 일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분주하게 움직이는가. 그 질문 앞에서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이 보여준 삶은 하나의 분명한 답이 된다. 행복은 많이 가진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나머지를 나눌 줄 아는 데서 온다. 자유는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가벼움에서 온다. 평화는 모든 것을 통제할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흐름에 맡기고 놓아줄 때 찾아온다. 오늘 아침, 나는 다시 내 방을 둘러본다. 어제와 같은 물건들이 같은 자리에 있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보는 눈은 조금 달라졌다. 이것들이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무엇을 쥘 것인가보다, 무엇을 놓아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창밖으로 봄바람이 불어온다. 가볍고 따뜻한 바람. 그 바람처럼, 나도 조금 더 가벼워지고 싶다. 움켜쥔 손을 펴고, 마음의 문을 열고, 삶이 흘러가는 대로 함께 흐르고 싶다. 그것이 무소유가 내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비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진정한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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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인생수업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 기념 에디션) - 품격 있는 나라와 삶을 꿈꾼 백범 선생의 신념과 지혜
김옥림 지음 / 미래북(MiraeBook)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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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떤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저 연대기적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떤 선택의 순간마다 무엇을 붙잡았고, 무엇을 내려놓았으며, 어떤 믿음으로 다시 일어섰는지를 목격하는 일이다. 백범 김구라는 이름 앞에서 우리가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수없이 무너졌다가도 끝내 일어섰기 때문이다. 탄생 150주년을 맞아 다시 펼쳐진 그의 삶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우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닌 동시대의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다가온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흔들릴 때마다 어디로 돌아가는가. 실패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생각해 본다.


백범의 삶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배움에 대한 집요함이다. 그는 평생을 두고 배웠다. 나이가 들어서도, 감옥에 갇혀서도, 망명길 위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배움은 그에게 단순히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방식이었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얼마나 깊어지고 있을까. SNS를 통해 무수한 정보가 쏟아지지만, 그것이 진짜 배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백범이 보여준 배움이란, 세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성실한 노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단단해졌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얻었다. 그의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의리와 진정성이다. 백범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한번 맺은 관계는 끝까지 지켰고, 배신당해도 먼저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평생 함께한 동지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는 그가 먼저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의리나 진정성을 말하면 구시대적이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 관계는 가벼워지고, 이해관계로만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백범은 말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정성을 잃으면, 결국 자기 자신마저 잃게 된다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곧 자신을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백범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자주정신과 주체의식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나라, 스스로 설 수 있는 민족을 꿈꿨다. 그 꿈은 단순한 정치적 독립을 넘어섰다. 정신의 독립, 문화의 독립, 사상의 독립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자주적인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가.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백범이 강조한 자주정신은 거창한 국가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이다. 그가 평생 추구한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철학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존엄을 가지고,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 누구도 억압받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백범에게 민주주의는 형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정신을 살아내고 있는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가. 다름을 인정하는가.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가. 백범이 꿈꾼 민주주의는 투표함 안에 갇힌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에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수없이 무너졌다가도 다시 일어섰다는 점이다.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문당하고, 배신당하고, 가족을 잃고, 동지를 떠나보내면서도 그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작은 실패에도 쉽게 무너진다. 한 번의 좌절로 모든 것을 포기하곤 한다. 그러나 백범은 보여준다. 인생이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 후에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라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더 깊어지며, 더 넓어진다. 백범이 꿈꾼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가장 아름다운 나라였다. 문화가 꽃피고, 사랑이 넘치며, 평화를 만들어내는 나라. 그는 힘이 아니라 문화로 세계에 기여하는 나라를 원했다.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가. 무엇으로 세계에 기여할 것인가. 백범은 말한다. 진정한 위대함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고.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외부의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신 안의 나약함, 두려움, 의심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계속해서 이겨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거나, 반대로 너무 가혹하거나. 쉽게 포기하거나,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나. 백범이 보여준 삶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범의 삶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무엇을 기준으로 살 것인가. 어떤 가치를 지킬 것인가. 무너졌을 때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그의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실수도 했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도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조국과 민족, 평화와 문화, 자주와 독립이라는 가치를 평생 붙잡고 살았다. 150년 전 태어난 한 사람의 삶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던진 질문들이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적인가. 진정성을 지키고 있는가. 배움을 멈추지 않는가. 쓰러진 후에도 다시 일어서는가.


결국 백범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정답이 아니라 태도다. 삶을 대하는 자세, 어려움을 견디는 방법, 사람을 대하는 원칙,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 그것들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많은 의미를 선사한다. 지금 이 순간, 기준 없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범의 삶은 하나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때, 무엇이 옳은지 혼란스러울 때, 그의 삶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그가 걸어간 길이 우리의 길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걸어간 방식은 배울 수 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 사람을 진정성으로 대하는 것,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 이것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삶의 원칙이다. 백범 김구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가 남긴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 질문들과 마주할 용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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