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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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기계화 전쟁이 벌어진 시기였다. 기관총, 화염방사기, 독가스, 폭탄 파편 등 새로운 살상 무기들은 이전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혹한 부상을 초래했다. 특히 참호전의 특성상 머리를 내밀어야 하는 병사들은 얼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약 28만 명의 병사들이 안면 부상을 당했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을 넘어섰다. 당시 사회는 얼굴에 상처를 입은 병사들을 영웅이 아닌 괴물처럼 취급했다. 다리를 잃은 병사는 동정과 존경을 받았지만, 얼굴이 일그러진 병사는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황급히 집안으로 들어갔고, 약혼녀들은 파혼을 통보했다. 프랑스에서는 '부서진 얼굴들', 독일에서는 '뒤틀린 얼굴' 또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라 불렸으며, 영국에서는 '가장 외로운 토미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외과의사 해럴드 길리스가 등장했다. 1915년 프랑스 전선에 파견된 32세의 그는 처참한 안면 부상자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턱뼈가 사라지고, 코가 날아가고, 혀가 찢어지고, 안구가 탈출한 병사들. 전차나 항공기 화재로 얼굴 전체가 녹아내린 이들. 기존의 의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참고할 교과서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구순구개열 교정이나 귓불 수술 같은 초보적인 성형술은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처럼 광범위한 안면 재건은 전례가 없었다. 치료의 과학은 파괴의 과학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길리스는 문자 그대로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는 먼저 프랑스와 벨기에 전선에서 치과의사들이 턱과 코가 손실된 병사들을 돌보는 모습을 관찰했다. 거기서 영감을 얻은 그는 안면 재건만을 전담하는 전문 센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처음에는 올더샷의 케임브리지 군병원에 병동 하나를 배정받았고, 1917년에는 시드컵의 조지아풍 저택과 주변 목조 건물들로 이루어진 퀸스 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길리스의 천재성은 단순히 외과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외과의사, 치과의사, 마취과의사, 간호사,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로 구성된 다학제 팀을 최초로 구성했다. 이는 현대 의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협진 시스템의 선구적 모델이었다. 치과의사들의 역할은 특히 중요했다. 항생제가 없던 시대였기에 입 내부에서 금속판으로 뼈를 고정할 수 없었다. 대신 얼굴 외부에서 틀과 핀으로 턱을 고정하면서, 외과의사가 다른 부위를 치료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가 음식을 먹고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재건 수술 성공의 핵심이었다. 화가와 조각가들도 필수 인력이었다. 그들은 수술 전후의 모습을 세밀하게 기록했고,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들에게는 전쟁 전 사진을 참고해 정교한 금속 마스크를 제작했다. 이러한 시각적 기록은 다른 의사들이 복잡한 재건 수술을 배우고 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과 의학의 협력은 성형외과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길리스는 각 수술 전에 사무실에 틀어박혀 담배를 피워대며 계획을 강박적으로 검토했다. 참고할 선례가 없었기에 모든 것을 직접 고안해야 했다. 그는 종종 봉투 뒷면에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후, 수십 차례에 걸친 수술을 진행했다. 그의 가장 혁신적인 기법은 '피부판(skin flap)' 기술이었다. 가슴이나 다른 부위에서 피부를 떼어내되, 한쪽 끝은 붙여둔 채로 혈액 공급을 유지하면서 얼굴 쪽으로 회전시켰다. 획기적인 순간은 이 연결 부위를 관(튜브) 모양으로 만들었을 때였다. '경관(pedicle)' 기법이라 불린 이 방법은 감염 위험을 크게 낮췄다. 어떤 환자는 코를 재건하기 위해 40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어떤 이에게는 가슴에 얼굴 전체를 그려놓고 통째로 이식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실패도 많았다. 재건된 코는 점막이 없어 수축되었고, 이식된 피부는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길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간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얼굴의 절반이 완전히 날아가고 피부가 갈기갈기 찢긴"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퀸스 병원은 치료 시설만이 아니었다. 길리스는 환자들의 정신 건강이 육체 회복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병원에서는 체육대회를 열고 연극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환자들이 지역 거리를 산책하도록 권장했고, 파란색으로 칠한 벤치를 곳곳에 배치해 행인들에게 미리 경고했다. 처음에는 병동에 거울을 금지했다. 새로 온 환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작업을 마치면 당신도 우리 대부분만큼 괜찮은 얼굴을 갖게 될 겁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환자들은 고통스러운 실험적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 야전병원 외과의사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환자가 정상적인 얼굴로 돌아가기 위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리라는 것을 안다." 길리스도 재건 수술이 시작되면 환자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많은 이들이 새로 자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듬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전쟁이 끝난 후 길리스는 개인 병원을 열어 계속 선구적인 수술을 시행했다. 1949년에는 최초의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전환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그의 사촌 아치볼드 맥인도가 2차 세계대전에서 화상을 입은 조종사들을 치료한 '기니피그 클럽'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현대 성형외과를 실질적으로 창시한 사람은 길리스였다. 그는 코 성형술 같은 기존 기법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기술들을 상상하고 검증하고 표준화했다. 기능뿐 아니라 미학까지 고려하는 신세대 성형외과의사들을 배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준 연민과 인간애였다. 그는 단순히 얼굴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갖도록 도왔다. 전쟁의 참혹함은 의학의 혁명을 낳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겪은 고통과, 한 외과의사의 불굴의 노력이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현대 성형외과였다. 길리스의 이야기는 인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모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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