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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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국악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여러 K-드라마의 주제 음악으로 국악이 사용되고, 국악을 노래하는 가수들이 늘어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악의 현대적 재해석과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 드라마에서 국악이 주제 음악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전통 음악의 매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이러한 접근은 국악을 새로운 세대에게 친숙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최근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가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전통 국악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 음악에서도 국악과 현 대 음악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통해 국악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영화 <서편제>의 팬으로 판소리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에 판소리에 대해 감성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신간을 읽었다. 이서희님의 방구 석 판소리>였다. ^.^

어떤 예술 장르는 시간의 강을 건너며 그 본질을 잃지 않는다. 판소리가 바로 그런 예술이다. 조선시대 광대들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이 독특한 음악극은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와 오늘날 우리의 거실 한켠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쉰다. 현대인들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듯, 과거의 사람들은 장터에서, 양반가 사랑채에서 한 명의 소리꾼이 들려주는 서사에 몰입했다. 판소리는 우리 국악 장르에서 하나의 완성된 세계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때로는 슬픈 여인이 되고, 때로는 용맹한 장수가 되며, 때로는 간교한 악역이 되어 청중 앞에서 펼쳐지는 대서사시다. 서양의 오페라가 여러 명의 성악가와 오케스트라, 화려한 무대장치를 필요로 한다면, 판소리는 오직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장의 북만으로도 우주를 창조해낸다. 저자는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러 판소리에 대해 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심청가를 다시 읽으며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이 이야기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해왔다는 사실이다. 효녀 심청이라는 도덕적 프레임 너머로, 극한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을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은 단순한 효행담이 아니라, 가난과 절망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 젊은 여성이 내린 비극적 결단의 순간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모순이다. 심청이는 효녀인 동시에 불효녀다.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홀로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이런 복합적 해석이야말로 판소리가 지닌 깊이를 보여준다. 선악의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노래 속에 담아낸 것이다.

적벽가에서 만나는 조조의 군사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준다. 역사서에서는 한 줄로 넘어가는 '병사들'이 판소리에서는 각각의 개성과 사연을 가진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대의명분보다는 집에 남겨둔 가족을 걱정하고, 전쟁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판소리가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 권력자들의 거대한 서사 뒤에 숨겨진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을 길어 올리는 것. 역사의 주역 이 아닌 그저 시대에 휘둘린 개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런 시각은 오늘날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큰 사건들 뒤에 있는 개개인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판소리의 가장 독특한 점은 그것이 '소리'라는 점이다. 글자로 쓰인 이야기와 소리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소리꾼의 목소리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감정의 언어가 된다. 목메는 소리는 슬픔을, 우렁찬 소리는 기쁨을, 떨리는 소리는 분노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계면조와 우조로 나뉘는 판소리의 선법은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담아낸다. 계면조의 서글픈 선율은 한이라는 감정을, 우조의 밝고 씩씩한 선율은 희망과 의지를 표현한다. 이런 음악적 특성은 서양 음악과는 다른 독특한 정서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방구석 판소리'라는 표현이 주는 친근함은 전통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 변화를 보여준다. 더 이상 판소리는 국악당이나 특별한 공연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리타분한 예술이 아니다. 유튜브로, 팟캐스트로, 그리고 책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이런 변화는 매우 의미가 크다. 전통문화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문화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이 국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악을 듣고, 전통 스토리텔링에서 웹툰의 소재를 찾아내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판소리는 본질적으로 소통의 예술이다. 소리꾼과 청중 사이의 호흡, '얼씨구', 좋다'는 추임새로 이어지는 즉석 소통은 일방적인 공연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이는 현대의 인터랙티브 미디어보다도 훨씬 앞선 참여형 예술의 모범이었다.

이런 소통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디지털 시대의 소통이 빠르고 효율적이긴 하지만, 때로는 깊 이와 온기가 부족하다. 반면 판소리적 소통은 느리지만 진정성이 있고, 단순하지만 깊이가 있다. 판소리와 우리 고전의 가치는 과 거를 그리워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이 미래를 살아갈 우리에게 주는 영감과 지혜에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되 는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감정과 이야기,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다. 판소리가 수백 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다루기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 희망과 절망, 정의와 불의 같은 주제들은 시대를 초월해 우 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런 근본적 감정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방구석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만나는 판소리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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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 숲의 말을 듣는 법
김용규 지음 / 디플롯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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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일 아침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나는 그동안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바쁜 발걸음에 쫓겨 스쳐 지나가던 나무들과 풀잎들이 사실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닫게 되었을까. 김용규의 글을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숲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순간 들려온 것은 말이 아니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새들이 가지 사이를 오가며 내는 작은 움직임, 그리고 땅 속 깊은 곳에서 뿌리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을 것 같은 기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평화가 바로 여기, 내 발밑과 머리 위에 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완벽한 인생을 꿈꾸며 살아온 나에게 숲의 첫 번째 가르침은 충격적이었다. 여기 서 있는 모든 나무와 풀들이 결코 완벽한 조건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어떤 나무는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그늘진 곳에서 몸을 비틀며 빛을 찾아 자랐고, 어떤 풀은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더 깊이 내려 생명수를 구했다.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는 곧게 뻗지 못하고 구부러진 채로 살아가지만, 그 굽은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문득 내 삶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해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이 준비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숲은 말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자리에서도, 아니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게 삶을 일궈나갈 수 있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말자. 지금 이 순간, 이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고, 바위틈의 소나무처럼 굽어져도 좋으니 꾸준히 자라나가자고•• 도시에서 살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피상적으로만 느끼게 된다. 달력으로 봄이 왔다는 걸 알고, 에어컨을 틀며 여름을 맞이하고, 단풍 사진으로 가을을 확인한다. 하지만 숲에서 만난 계절은 전혀 달랐다. 봄에 돋아난 새싹들이 여름의 뜨거운 시련을 견디며 단단해지고, 가을에 열매를 맺은 후 겨울의 춥고 긴 잠에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삶에도 계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늘 여름이기를 바랐다. 활기차고 뜨겁게 성장하는 시기만을 원했다. 겨울 같은 침잠의 시간이나 가을 같은 성찰의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조급해했다. 하지만 나무들을 보니 겨울이 없으면 봄도 올 수 없고, 가을의 떨어짐이 없으면 새로운 싹도 자랄수 없다는걸 알게 되었다. 요즘 나는 내 삶의 계절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충분히 쉬고, 봄이라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여름이라면 열정적으로 달리고, 가을이라면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감사한다. 각 계절마다 그 계절만의 아름다움과 의미가 있다는 걸 숲이 가르쳐주었다.

숲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각자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땅 밑에서는 뿌리로 연결되어 있고, 균류를 통해 영양분을 나누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큰 나무가 작은 새싹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낙엽이 썩어 거름이 되어 다른 생명을 키우고, 벌과 나비가 꽃가루를 옮겨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누구도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경쟁에 익숙해진 나에게 이는 큰 깨달음이었다. 나 역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마시는 공기, 먹는 음식, 입고 있는 옷,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종이와 펜까지 모두 수많은 생명과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이뤄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받은 도움에 감사하고, 나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숲처럼 서로를 살리는 관계 속에서 살고 싶다. 도시의 시간은 빠르고 촉박하다. 분 단위, 초 단위로 쪼개어진 시간 속에서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산다. 하지만 숲의 시간은 달랐다. 여기서는 계절이 시간의 단위이고, 해와 달의 순환이 리듬이다. 수백 년을 산 거대한 나무 앞에 서면 내가 고민하던 일들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 나무가 견뎌온 수많은 계절, 폭풍, 가뭄, 혹독한 추위를 생각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도 결국 지나갈 하나의 계절일 뿐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동시에 한 해살이풀들을 보며 짧은 생이라도 최선을 다해 꽃피우고 열매 맺는 모습에서 삶의 소중함을 배운다. 긴 시간의 관점에서는 겸손을, 짧은 생의 관점에서는 간절함을 얻는다. 이제 나는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내 인생도 한 그루 나무처럼 천천히 자라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오늘 이 하루도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라고 여기며 충실하게 산다.

숲에서 배운 지혜들을 일상에 적용하려 노력하는 요즘, 내 삶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게 되었고, 완벽하지 않은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침묵의 가치를 깨달았다. 무엇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문제와 어려움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상처도 성장의 과정으로 여기며, 작은 것들에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아침 걷는 그 길이 이제는 출근길의 의미만이 아니다. 숲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가 시작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으며,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듣고,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한다. 숲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말없이 서서 누구든 찾아오는 이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준다. 오늘도 나는 숲으로 간다.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더 깊은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숲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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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존재의 연결을 묻는 카를로 로벨리의 질문들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 쌤앤파커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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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카를로 로벨리의<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를 처음 펼쳤을 때, 나는 완전히 길을 잃었다. 장자의 철학에서 시작해 레스보스 섬으로, 전쟁 이야기에서 편집자 자랑으로, 태양의 거리에서 코로나바이러스까지. 저자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각각의 주제는 흥미로웠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두 번째 독서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로벨리는 처음부터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보기에 무관해 보이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연결'이라는 주제 말이다. 이 경험 자체가 로벨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종종 부분만 보고 전체를 놓치며, 개별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

로벨리가 제시하는 관계적 존재론은 내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의자를 볼 때 물질적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능과의 공명, 기억과의 연결을 통해 '의자'라는 의미를 구성한다는 관점은 매우 설득력 있다. 이는 내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머니의 찻잔을 볼 때 나는 도자기 그릇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찻잔에는 어머니와의 수많은 오후 시간들, 따뜻한 차향, 조용한 대화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 찻잔은 물질적 실체 이상의 것이며, 관계와 기억의 네트워크 속에서만 그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하지만 동시에 나는 의문을 갖는다. 이러한 관계적 존재론이 개체의 고유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개별적 정체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로벨리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갈릴레오에 대한 로벨리의 해석은 내게 과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과학적 발견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의 획득이라는 관점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갈릴레오의 <대화>가 과학적으로는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에 혁명적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인상적이다. 이는 내가 학교에서 배운 과학관과는 다르다. 나는 과학을 객관적 사실들의 체계로 이해해왔는데, 로벨리는 과학도 결국 인간의 관점과 해석이 개입되는 활동임을 보여준다. 이는 과학을 더 인간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보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과학적 객관성을 훼손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든다. 모든 것이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라면, 과학적 진리의 보편성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로벨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로벨리의 사회정치적 비전, 특히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현재의 세계 상황을 생각할 때 매우 절실하게 다가온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국제적 갈등들을 보면서 나는 그의 말이 이상론이 아님을 실감한다.지구가 작고 인류가 연약하다는 그의 지적은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의 작은 우주선에 함께 타고 있는 승객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협력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집단 간의 이해관계 충돌을 고려할 때, 로벨리가 제시하는 전 지구적 협력이 실현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그는 필요성을 잘 설명하지만, 구체적인 실현 방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는 것 같다.

로벨리의 시간 개념, 특히 기억의 시간, 욕망의 시간, 영원한 현재의 시간이라는 구분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물리학적 시간을 넘어서는 실존적 시간성에 대한 통찰이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나는 정말로 이 세 가지 시간 속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미래에 대한 욕망과 기대가 나를 이끌며,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의 현재 속에서 실제로 살아 가고 있다. 이러한 시간성의 복합성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특징이라는 그의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시간이 때로 는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속박하거나, 미래에 대한 욕망이 현재의 순간을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로벨리는 이러한 갈등적 측면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을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에 비유한 로벨리의 겸손한 존재론은 나에게 위로가 되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을 준다. 우리가 만물의 주인이 아니라는 인식은 분명 필요하다. 인간의 오만함이 환경 파괴와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친 겸손함이 무력감으로 이어질 위험은 없을까? 우리가 낙엽과 같은 존재라면, 우리의 노력과 선택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로벨리는 미래가 우리에게도 달려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의 겸손한 존재론과 어느 정도 긴장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겸손함과 주체성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주의 작은 부분이지만, 동시에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인 것 같다.

로벨리는 완벽한 체계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많은 질문들이 답변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때로는 논리적 비약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가치는 크다. 무엇보다 책은 분절된 현대 세계에서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소중한 시도다. 과학과 철학, 개인과 사회,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연결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시도들이 축적되어야 우리는 더 통합적인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벨리의 다정한 어조와 따뜻한 시선은 차가운 과학적 사실들에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는 복잡한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면서도 위로와 희망을 전달한다. 이러한 과학자의 모습 자체가 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철학에 대한 신선한 접근 방법으로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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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착각 -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이정표
안호기 지음 / 들녘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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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한민국은 기적이라 불릴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1960년대 최빈국에서 시작하여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분명 놀라운 성취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장의 이면에는 우리가 간과해온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현실, 그리고 143개국 중 52위에 머물고 있는 행복지수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성장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이번에 읽은 안호기님의 <성장이라는 착각>은 이러한 모순된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성장 신화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은 더 이상 실물경제를 지원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끝없이 증식하는 괴물로 변했다. 한국의 GDP가 1990년 200조 원에서 2021년 2,072조 원으로 10배 증가한 동안, 금융시장 규모는 158조 원에서 5,662조 원으로 36배나 급증했다. 2004년 서울에서 30평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노동자 월급 18년 치가 필요했지만, 2022년에는 36년 치로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시장 확대에 따른 자산 거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과거 18-19세기 유럽에서 자본 축적이 예술과 문화의 후원으로 이어져 사회적 잉여를 창출했던 것과 달리, 현대의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 증대에만 몰두하고 있다. 예술작품조차 대물림의 수단으로 수집할 뿐, 진정한 문화적 가치 창조에는 관심이 없다. 성장주의가 낳은 가장 심각한 결과 중 하나는 환경 파괴다. 기후변화에 대한 개인적 대응, 즉 재활용품 사용이나 금속 빨대 사용 등이 마치 기후 위기의 해결책인 양 포장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양적 성장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발생한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허황된 믿음일 뿐이다.

친환경적이라고 여겨지는 전기차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을 위해 필요한 코발트의 70%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채굴되는데, 그 상당량이 어린이를 포함한 광부들의 원시적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리튬 1톤을 생산하려면 약 200만 톤의 물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 남미 리튬 삼각지대는 심각한 물 고갈을 겪고 있다. 칠레에서만 지역 물의 65%가 리튬 추출에 사용될 정도다. 성장을 위한 기술 혁신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환경 파괴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ESG, 그린 뉴딜과 같은 개념들도 결국 자본의 탐욕을 감추는 포장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또한 GDP 중심의 성장주의는 돌봄 노동을 철저히 평가절하한다. 2019년 한국 가사 노동 서비스의 가치는 490조 9천억 원으로 GDP의 4분의 1 규모로 추산되지만, 이는 GDP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사회 유지와 재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슈퍼 리치 2,640명 중 여성은 337명(12.8%)에 불과하며, 그나마 10위 안에는 한 명도 없다. 자산이 가장 많은 여성인 프랑수아즈베탕쿠르메이예조차 할아버지가 창업한 로레알 그룹의 지분을 상속받은 것이다. 이는 성장주의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성별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구에서 탈성장과 새로운 경제체제 논의가 활발해지는 이유는 성장이 정점에 도달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주의의 모순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피케티는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심화하고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고 진단하며, "참여적이고 지방 분권화된, 연방제 방식이며 민주적이고, 또 환경친화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혼종되어 있으며, 여성 존중의 사상을 담은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탈성장 담론이 제시하는 비전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탈성장 이론의 가장 큰 문제는 구체적인 대안의 부재다. 성장을 멈추고 현상 유지를 하자고 하지만, 이것이 성립하려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성장이 아닌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과 경쟁 본능을 고려할 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유럽의 협동조합을 성공 사례로 제시하지만, 제스프리나 FC 바르셀로나 같은 협동조합들도 결국 시장에서 다른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협동조합이라는 형태 자체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조력, 풍력, 태양열 등 재생에너지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5천만 인구가 살고 있는 좁은 국토에서, 게다가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으로 덮인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것만으로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원자력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현실적인 대안 없이 신재생에너지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책임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미래성장이라는 착각을 넘어서 <성장이라는 착각>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분명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살아왔지만, 그 성장이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지속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더 많이 가졌지만 더 공허해진 현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늘어나는 자살률과 우울감은 성장 신화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탈성장이라는 대안도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다. 현실적 제약과 인간 본성을 고려할 때, 성장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보다는 성장의 방향과 내용을 바꾸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접근법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과 평등, 효율과 형평,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지만,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 불평등 심화, 사회 통합의 위기 등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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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행복 사전
김은아 지음, 하선정 그림 / 담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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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넘기며 마주한 첫 번째 깨달음은 단순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들이 얼마나 무뎌져 있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던 온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놓치고 살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나무'라는 글자를 보면 가로수나 산속의 식물을 떠 올리던 내가, 이제는 뿌리 깊은 생명력과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살아있는 존재를 상상하게 되었다. 아침 출근길에 스쳐 지나던 은행나무가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도로변에 줄지어 선 나무가 아니라, 수십 년을 그 자리에서 도시의 변화를 지켜본 침묵의 증인처럼 느껴졌다. 가을이 되어 노란 잎을 떨어뜨릴 때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희망의 메신저 같기도 했다. 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일상 속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렘에 대한 앤의 정의를 읽으며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세상을 향한 끝없는 경이와 꿈을 품게 하는 감정"이라는 표현은 사전적 정의보다 훨씬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언제부터인가 설렘이라는 감정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나 호기심보다는 안정과 예측 가능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왔다.하지만 앤의 단어들을 만나고 나서 작은 설렘들을 다시 발견하기 시작했다. 새로 개봉하는 영화에 대한 기대, 친구와의 만남에서 나눌 새로운 이야기들, 계절이 바뀌며 달라지는 거리 풍경에 대한 관찰. 이런 소소한 것들에서도 충분히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설렘은 거창한 사건이나 특별한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에 따라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바람의 메시지바람에 대한 앤의 해석은 특히 인상 깊었다. 슬픔을 기억하지만 그것을 비워내는 바람의 모습에서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상처와 슬픔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 아픔을 그대로 품고만 있으면 무거워져서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진다. 바람처럼 우리도 슬픔을 인정하되 그것에 매이지 않고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이 바람이 내 안의 무거운 감정들 도 함께 데려가 주기를 바라면서. 실제로 바람을 맞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일은 아직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은 새로운 날 " 이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실수를 하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면 자책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로는 그런 날들도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아쉬웠던 점들을 떠올리곤 했다. 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사람, 미처 하지 못한 일들, 놓쳐버린 기회들에 대한 후회로 잠이 오지 않는 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앤의 말을 떠올린다. 내일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가득한 선물 같은 날이라고. 오늘의 실수는 내일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때 지금 말해도 될까?", "너무 참견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안의 말처럼 계산하지 않는 즉각적인 친절이 더 큰 감동을 준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할 때,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도울 때, 힘들어 보이는 동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때의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친절은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앤의 행복은 거창한 성취나 큰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다. 벚꽃잎이 휘날리는 창가에서의 독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산책,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 평범해 보이는 것들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았다. 이런 앤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의 행복 기준을 되놀아보게 되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정작 진짜 행복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좋아 하는 책을 읽는 조용한 저녁 시간, 가족과 함께 나누는 소소한 대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의 변화하는 색깔 같은 것들에 있었다. 글쓰기라는 치유책의 오른쪽 페이지에 마련된 글쓰기 공간은 나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앤의 행복 사전과 함께한 시간들이 쌓이면서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변화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평범한 하루에서도 작은 기쁨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에도 하늘의 구름 모양을 관찰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늘어났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 - 따뜻한 집, 건강한 몸,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늘 하루 감사했던 세 가지를 떠올려보는 습관이 생겼고, 이런 작은 실천이 하루 전체의 기분을 밝게 만들어 주는 것을 경험했다. 앤의 76개 단어들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지혜의 보물창고였다. 각각의 단어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철학을 이루고, 그 철학이 내 삶에 조용하지만 확실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작은 사전은 앞으로도 내 곁에서 일상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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