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 숲의 말을 듣는 법
김용규 지음 / 디플롯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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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일 아침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나는 그동안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바쁜 발걸음에 쫓겨 스쳐 지나가던 나무들과 풀잎들이 사실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닫게 되었을까. 김용규의 글을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숲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순간 들려온 것은 말이 아니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새들이 가지 사이를 오가며 내는 작은 움직임, 그리고 땅 속 깊은 곳에서 뿌리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을 것 같은 기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평화가 바로 여기, 내 발밑과 머리 위에 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완벽한 인생을 꿈꾸며 살아온 나에게 숲의 첫 번째 가르침은 충격적이었다. 여기 서 있는 모든 나무와 풀들이 결코 완벽한 조건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어떤 나무는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그늘진 곳에서 몸을 비틀며 빛을 찾아 자랐고, 어떤 풀은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더 깊이 내려 생명수를 구했다.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는 곧게 뻗지 못하고 구부러진 채로 살아가지만, 그 굽은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문득 내 삶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해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이 준비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숲은 말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자리에서도, 아니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게 삶을 일궈나갈 수 있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말자. 지금 이 순간, 이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고, 바위틈의 소나무처럼 굽어져도 좋으니 꾸준히 자라나가자고•• 도시에서 살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피상적으로만 느끼게 된다. 달력으로 봄이 왔다는 걸 알고, 에어컨을 틀며 여름을 맞이하고, 단풍 사진으로 가을을 확인한다. 하지만 숲에서 만난 계절은 전혀 달랐다. 봄에 돋아난 새싹들이 여름의 뜨거운 시련을 견디며 단단해지고, 가을에 열매를 맺은 후 겨울의 춥고 긴 잠에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삶에도 계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늘 여름이기를 바랐다. 활기차고 뜨겁게 성장하는 시기만을 원했다. 겨울 같은 침잠의 시간이나 가을 같은 성찰의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조급해했다. 하지만 나무들을 보니 겨울이 없으면 봄도 올 수 없고, 가을의 떨어짐이 없으면 새로운 싹도 자랄수 없다는걸 알게 되었다. 요즘 나는 내 삶의 계절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충분히 쉬고, 봄이라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여름이라면 열정적으로 달리고, 가을이라면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감사한다. 각 계절마다 그 계절만의 아름다움과 의미가 있다는 걸 숲이 가르쳐주었다.

숲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각자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땅 밑에서는 뿌리로 연결되어 있고, 균류를 통해 영양분을 나누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큰 나무가 작은 새싹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낙엽이 썩어 거름이 되어 다른 생명을 키우고, 벌과 나비가 꽃가루를 옮겨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누구도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경쟁에 익숙해진 나에게 이는 큰 깨달음이었다. 나 역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마시는 공기, 먹는 음식, 입고 있는 옷,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종이와 펜까지 모두 수많은 생명과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이뤄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받은 도움에 감사하고, 나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숲처럼 서로를 살리는 관계 속에서 살고 싶다. 도시의 시간은 빠르고 촉박하다. 분 단위, 초 단위로 쪼개어진 시간 속에서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산다. 하지만 숲의 시간은 달랐다. 여기서는 계절이 시간의 단위이고, 해와 달의 순환이 리듬이다. 수백 년을 산 거대한 나무 앞에 서면 내가 고민하던 일들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 나무가 견뎌온 수많은 계절, 폭풍, 가뭄, 혹독한 추위를 생각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도 결국 지나갈 하나의 계절일 뿐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동시에 한 해살이풀들을 보며 짧은 생이라도 최선을 다해 꽃피우고 열매 맺는 모습에서 삶의 소중함을 배운다. 긴 시간의 관점에서는 겸손을, 짧은 생의 관점에서는 간절함을 얻는다. 이제 나는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내 인생도 한 그루 나무처럼 천천히 자라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오늘 이 하루도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라고 여기며 충실하게 산다.

숲에서 배운 지혜들을 일상에 적용하려 노력하는 요즘, 내 삶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게 되었고, 완벽하지 않은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침묵의 가치를 깨달았다. 무엇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문제와 어려움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상처도 성장의 과정으로 여기며, 작은 것들에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아침 걷는 그 길이 이제는 출근길의 의미만이 아니다. 숲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가 시작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으며,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듣고,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한다. 숲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말없이 서서 누구든 찾아오는 이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준다. 오늘도 나는 숲으로 간다.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더 깊은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숲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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