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 - 세상을 읽는 기술
에드워드 R. 듀이.오그 만디노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는 수많은 변화와 사건들을 경험한다. 주식시장의 급락과 급등, 경기침체와 호황의 반복, 자연재해의 발생 주기, 심지어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우연의 산물일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규칙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Edward R. Dewey와 Og Mandino가 공동 저술한 『Cycles: The Mysterious Forces That Trigger Events』는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책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주기적 패턴의 존재를 과학적 데이터와 철학적 성찰을 통해 탐구하는 야심찬 시도이다

책의 핵심 주장은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이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된다는 것이다. Dewey는 이를 추측이 아닌 엄밀한 통계적 분석을 통해 입증하려 시도한다. 그가 발견한 주요 사이클들은 18.2년 주기의 부동산 사이클, 9.6년 주기의 주식시장 사이클, 11년 주기의 태양흑점 활동, 기후변화의 장주기 패턴, 전쟁과 평화의 반복, 정치적 변화의 주기성, 동식물의 개체수 변화, 질병의 유행 주기 등이다. Dewey의 연구 방법론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그는 수십 년, 때로는 수백 년에 걸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동평균(moving average)과 통계적 분석을 통해 숨겨진 패턴을 찾아냈다. 특히 그가 개발한 '스펙트럼 분석' 기법은 복잡한 데이터 속에서 다양한 주기들을 분리해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영역의 사이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예를 들어, 태양흑점 활동의 11년 주기가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시 농업생산량과 경제활동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의 복잡계 이론이나 나비효과 이론의 선구적 사고로 평가받을 만하다.

Dewey의 사이클 이론은 여러 측면에서 학문적 가치를 갖는다. 첫째, 그는 경제학을 순수한 인문사회과학에서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경제현상을 물리학이나 천문학의 주기적 현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둘째, 그의 연구는 현대 시스템 이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서로 다른 영역의 현상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오늘날의 네트워크 이론이나 복잡적응시스템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셋째, 데이터 기반의 실증적 접근방식을 통해 직관적 추측을 과학적 가설로 발전시켰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Dewey의 분석 방법은 당시 기준으로는 혁신적이었지만, 현대 통계학의 엄밀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특히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통계적 유의성에 대한 검증도 부족하다. 또한 사이클 패턴을 찾는 과정에서 이론에 맞는 데이터만을 선별적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패턴을 찾지 못한 사례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반증 시도가 부족하다. 특정 영역에서 발견된 주기성을 모든 영역에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현상의 복잡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사이클의 존재를 입증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미래 예측의 정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경제 예측이 빗나간 사례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Dewey의 사이클 이론은 현대 과학의 여러 분야와 흥미로운 연결점을 보인다.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나 프랙탈 구조는 Dewey가 발견하고자 했던 숨겨진 질서와 유사한 개념이다. 또한 생태학에서의 포식자-피식자 관계의 주기성, 경제학에서의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 등은 모두 Dewey의 연구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Dewey의 사이클 이론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대량의 데이터 분석과 패턴 인식이 가능해지면서, 그의 가설들을 보다 정교하게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현대의 알고리즘 트레이딩이나 경제 예측 모델들은 Dewey가 추구했던 사이클 분석의 현대적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Dewey가 발견한 일부 사이클들은 인간의 심리적 편향과 집단 행동 패턴으로 설명될 수 있다. 버블과 공황의 반복, 유행의 주기성 등은 인간의 인지적 편향과 군집심리로 설명 가능하다.

많은 투자자들과 사업가들이 Dewey의 사이클 이론을 실제 의사결정에 활용하려 시도했다. 주식시장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입문서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러한 실용적 가치 때문이다. 실제로 부동산 시장의 18년 주기나 주식시장의 중장기 사이클은 어느 정도 경험적 타당성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러한 사이클들도 완벽하지는 않으며, 예외적인 상황들이 자주 발생한다. Dewey의 이론은 정부의 경제정책 수립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경기순환의 주기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하는 정책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경제 충격의 완충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경제정책은 정치적 고려사항, 국제정세, 기술혁신 등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너무 많아 사이클 이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책은 복잡한 경제 이론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되었다. 딱딱한 통계 자료와 그래프들을 흥미로운 일화와 사례들로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특히 역사적 사건들을 사이클 이론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부분들은 매우 흥미롭다. 책 전반에 걸쳐 풍부한 그래프와 도표가 제공되어 복잡한 주기적 패턴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으며, 현대의 데이터 시각화 트렌드를 선도한 측면이 있다. Dewey와 Mandino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었을 것이다. 무작위적이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어떤 질서와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영원한 탐구정신,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힐 가치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십에 읽는 자본론 - 풍요의 이름으로 우리가 놓친 모든 것에 대하여
임승수 지음 / 다산초당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읽어본 자본론.. 스토리 라인이 재미있다. 책은 의대 진학을 앞둔 자녀가 마르크스 강의를 듣고 사회학과로 진로를 바꾸겠다고 선언하자, 화가 난 아버지가 강사인 임승수 작가를 찾아가 따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들의 만남은 격렬한 논쟁이 아닌 깊이 있는 대화로 발전한다. 작가 임승수는 자수성가한 자본가와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며 『자본론』을 논한다. 이 아이러니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대화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학술적 이론이 아닌 생생한 현실 문제로 끌어온다. 책은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어 읽기 쉽고, 복잡한 경제 이론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낸다. 더불어 와인 이야기, 자녀 교육 문제, 인생 철학까지 다양한 주제가 자연스럽게 엮여 있어 독자는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마르크스를 악마화하거나 신화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본론』이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책이지 사회주의 선전물이 아니라고 명확히 구분한다. 또한 개별 자본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모순을 지적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참으로 묘한 지점이다. 젊음의 패기는 사라졌지만 아직 노년의 여유는 오지 않았다. 사회적으로는 한창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점점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이들은 독립을 준비하고, 부모님은 나이가 들어가신다. 나 자신은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이 시기에 『자본론』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자, 앞으로 살아갈 방향에 대한 성찰이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안한가? 왜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가? 오십에 이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거나, 새로운 취미를 찾거나,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임승수 작가는 다른 제안을 한다. 마르크스를 읽어보라고 말이다.

『자본론』의 핵심은 시간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시간을 사서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다. 그 과정에서 창출된 가치 중 일부만 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이윤으로 가져간다. 이것이 바로 착취의 메커니즘이다. 오십이 되어 돌아보니, 우리는 평생 누군가에게 시간을 팔아왔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 생각을 하며, 휴가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렇게 판 시간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우고, 노후를 준비했다. 하지만 언제나 부족했다. 더 많이 벌어야 했고, 더 오래 일해야 했다. 그런데 문득 깨닫는다. 나는 시간을 파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판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구나.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현실이다.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학습한다. 경쟁이 당연하고, 성장이 필수이며, 효율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긴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부자는 노력한 결과라고 믿는다. 하지만 오십이 되어 뒤돌아보면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일면적인지 알 수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집값은 내 노력과 상관없이 오르고, 일자리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진다. 경제 위기가 오면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가 어려워진다. 마르크스는 이런 현상들이 우연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문제 삼는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지적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때 기계가 인간의 팔다리를 대신했다면, 이제는 인간의 두뇌까지 대체하려 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오십대인 우리는 이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젊은 세대처럼 새로운 기술에 쉽게 적응할 수도 없고, 기성세대처럼 변화를 외면할 수도 없다. 우리는 과도기를 살아가는 세대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인공지능과 로봇은 새로운 생산력이다. 문제는 이 생산력을 누가 소유하느냐다.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소득이 사라질 것이다. 반면 사회 전체가 공유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개인적인 적응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십이면 대략 44만 시간을 살았다. 깨어 있는 시간만 해도 30만 시간이 넘는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과 생각과 감정들이 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두세 시간의 강의나 며칠간의 독서로 그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을까? 임승수 작가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살아온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오십에 『자본론』을 읽는 의미다.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해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혁명가였지만, 그의 분석은 매우 차분하고 과학적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감정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냉정하게 해부한다. 그리고 그 모순과 한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이런 접근 방식이 오십대에게는 더 적합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경험했고, 충분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새로운 틀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틀을 제공한다.


오십에 『자본론』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리는 인간이기보다는 노동력이고, 소비자이고, 경쟁자다. 내 가치는 시장에서 매겨지고, 내 행복은 소유의 정도로 측정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말한다. 인간의 가치는 시장에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고. 인간은 본래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라고. 노동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십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시스템의 요구에 맞춰 살았다면, 이제는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더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더 창조적인 일을 하고,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그런 조건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물론 그의 모든 처방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분석 틀과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조선시대 노비가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는 세상'을 꿈꿨다면 몽상가로 여겨졌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꿈꾸는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십에 『자본론』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미래를 꿈꾸면서도 현재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가는 작은 실천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디츠 - 나치 포로수용소를 뒤흔든 집요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콜디츠 성(Colditz Castle)은 연합군 포로들에게는 탈출 불가능한 감옥이었지만, 동시에 창의성과 용기, 그리고 인간 정신의 불굴함이 집약된 무대이기도 했다. Ben MacIntyre의 <콜디츠 : Prisoners of the Castle>은 이 특별한 감옥에서 벌어진 놀라운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 창의력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콜디츠 성은 일반적인 포로수용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다른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문제 포로들'을 위한 특별 감옥이었다. 라이프치히 근처 산중에 위치한 이 중세 성은 400년 된 견고한 건물로, 비나치 지역으로부터 400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독일군은 이곳을 탈출 불가능한 감옥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역설적으로 여기에 수용된 포로들은 더욱 창의적이고 대담한 탈출 계획들을 세우게 된다. MacIntyre는 콜디츠의 독특한 성격을 잘 포착해낸다. 이곳에는 "공산주의자들, 과학자들, 동성애자들, 여성들, 미학가들과 속물들, 귀족들, 스파이들, 노동자들, 시인들, 그리고 배신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콜디츠를 단순한 감옥이 아닌 하나의 작은 사회로 만들었으며,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의 목표 - 탈출 - 를 위해 협력하는 흥미로운 무대가 되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포로들의 기발하고 정교한 탈출 시도들이다. 1943년 마이클 싱클레어(Michael Sinclair)의 변장 탈출 시도로 시작되는 이 책은 독자들을 즉시 긴장감 넘치는 탈출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영국 장교였던 싱클레어가 독일군 하사관으로 완벽하게 변장하고 20명의 동료 포로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은 마치 스파이 소설의 한 장면 같다. 포로들의 창의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들은 비누로 열쇠 본을 떠서 나무로 진짜처럼 작동하는 열쇠를 만들었고, 모노폴리 게임 돈 사이에 진짜 독일 화폐를 숨겨 받았으며, 책을 속을 파내어 밀수품을 숨겼다. 심지어 33피트 날개폭을 가진 글라이더를 다락방에서 비밀리에 제작하기까지 했다. 이 글라이더는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포로들의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MacIntyre가 이 책에서 특히 잘 그려낸 부분은 독일군 관리들의 복잡한 모습이다. 콜디츠의 지휘관이었던 라인홀트 에거스(Reinhold Eggers) 중위는 프로이센의 학교 교사 출신으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영국을 사랑했다. 그는 나치가 아니었으며, 나치들을 기껏해야 어리석고 최악의 경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에거스와 같은 독일군 장교들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려 노력했으며, 때로는 포로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들은 포로들의 탈출 시도를 막아야 하는 의무와 인간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러한 묘사는 전쟁 중에도 존재했던 인간성과 직업적 양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1943년부터 정규군 장교들이 SS와 게슈타포로 교체되기 시작했고, 콜디츠의 분위기도 점점 더 어둡고 위험해졌다. 탈출 시도에 대한 처벌도 더욱 가혹해져서, 결국에는 총살형까지 가능해졌다.

MacIntyre는 콜디츠 내부의 계급 의식과 차별 문제도 솔직하게 다룬다. 장교들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부관(batman)이라는 개인 하인을 두었고, 이러한 주인-하인 관계는 감옥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인도계 영국 장교인 비렌다나트 마줌다르(Birendanath Mazumdar)는 다른 포로들로부터 조롱과 의심을 받았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스파이로 의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군이 실제로 그를 스파이로 포섭하려 했지만, 그는 석방 제의를 거부하고 영국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이러한 묘사는 전쟁 포로들 사이에도 당시의 사회적 편견과 계급 의식이 그대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MacIntyre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며, 영웅적인 이야기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약점들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책의 전개 과정에서 전쟁 상황의 변화가 콜디츠에 미친 영향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신사적인' 분위기였던 콜디츠가, 독일이 패전의 길로 접어들면서 점점 더 억압적이고 위험한 곳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1944년 D-Day 이후부터는 탈출 시도가 거의 불가능해졌고, 포로들의 생명도 더욱 위험해졌다. 특히 마이클 싱클레어의 죽음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던 그는 1944년 9월 마지막 탈출 시도 중 사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콜디츠에서 탈출이 더 이상 게임이 아니라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1945년 4월, 콜디츠는 마침내 해방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역사적인 순간을 받아들인 것은 앨런 머피(Alan Murphy)라는 이등병이었다. 그는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우연히 콜디츠를 발견했고, 유럽에서 가장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 중 하나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영예를 얻었다. 이러한 극적인 대조 - 이등병이 받은 유명한 성의 항복 - 는 전쟁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해방 후 많은 전 포로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일부는 높은 정치적 지위에 올랐고, 많은 이들이 작가가 되었다. 에거스 중위는 전쟁범죄로 기소되지 않았지만, 동독에서 가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된 고난을 보여준다.

Ben MacIntyre는 철저한 자료 조사와 생동감 넘치는 서술, 그리고 균형 잡힌 시각이 조화를 이루어 깊은 감동과 교훈을 전달한다. 이 책은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용기와 창의성, 그리고 불굴의 의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인 것 같다. 콜디츠 성의 포로들이 보여준 것은 결국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떠한 물리적 구속도 인간의 상상력과 희망,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현무계획 - 맛 좀 아는 먹브로의 무계획 유랑기
MBN <전현무계획> 제작팀 지음 / 다온북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SNS를 열면 화려한 플레이팅의 음식 사진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해시태그로 가득한 설명과 함께 '핫플레이스', '인생 맛집'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음식들. 하지만 그런 사진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정말 맛있을까?'라는 의구심이다.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진짜 맛은 과연 무엇일까. <전현무계획>을 통해 접한 맛집들의 이야기는 이런 의구심에 대한 하나의 답처럼 느껴졌다.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 가게, 현지인들만 아는 숨은 보석 같은 곳들. 이런 장소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맛집이 아닐까 싶다. 화려한 외관이나 세련된 인테리어가 아닌, 오직 맛과 정성으로만 승부하는 곳들 말이다.

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애호박찌개와 제육볶음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음식들이 소개되는 대목이었다. 흔하디흔한 이 음식들이 어떻게 특별해질 수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 집만의 레시피와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에 대한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전현무계획'이라는 제목 자체가 주는 역설적 매력이 있다. 계획이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계획이 되는 셈이다. 미리 정해진 각본도, 사전 섭외도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사람들의 추천에 따라 움직이는 여행. 이런 방식의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발견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며 살아간다. 여행을 갈 때도 미리 맛집을 검색하고, 예약을 하고, 동선을 짜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계획된 여행에서는 예상치 못한 발견의 기쁨을 놓치기 쉽다. 「전현무계획」이 보여주는 무작정 떠나는 용기는 어쩌면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여행의 본질적 재미를 되찾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길을 잃어도 괜찮고, 문이 닫혀있어도 괜찮다. 그런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오히려 여행의 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계획에 매여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유롭게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단순히 맛집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에 얽힌 이야기들을 함께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시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백년 가옥의 이야기,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던 죽의 역사,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철학까지. 특히 죽집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지금은 간식으로 취급되지만 예전에는 서민들의 주식이었던 죽. 그 죽을 기억하는 소수의 단골손님들을 위해 오늘도 솥을 뜨겁게 달구는 사장님의 이야기는 단순한 음식 이야기를 넘어서는 깊이가 있었다. 음식이 단지 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시대의 기억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음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층 넓어진 것 같다. 그저 맛있다, 맛없다로 평가하던 음식들에도 각각의 배경과 맥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먹는 행위 자체가 더욱 의미깊게 느껴진다.

화려한 마케팅이나 유명 인플루언서의 추천이 아닌, 그저 그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추천. 이것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한 맛집 정보가 아닐까? 현지인들이 진짜로 자주 찾는 곳, 관광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검증된 곳들이다. 이런 곳들의 공통점은 화려함보다는 진정성에 있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음식에만 집중해온 장인정신, 단골손님들과의 끈끈한 관계, 그리고 음식에 대한 변하지 않는 철학. 이런 것들이 진짜 맛집을 만드는 요소들인 것 같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현무의 '어머니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섭외가 잘 된다'는 부분이었다. 어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진정성 있게 다가간다는 뜻일 테니까. 화려한 말솜씨나 기교보다는 진심이 통하는 소통의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책에서 소개된 음식들 대부분이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라는 점이 좋았다.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나 이국적인 퓨전 음식이 아닌, 국밥, 찌개, 분식류 같은 서민적인 음식들. 하지만 그 평범한 음식들이 각각의 집에서 어떻게 특별해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었다. 대구의 4대 떡볶이집이라는 표현을 보며, 같은 떡볶이라도 각기 다른 맛과 개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음식들도 사실은 만드는 사람의 철학과 노하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일상에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인 것 같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각자만의 특별함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화려하지 않아도, 남들이 주목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쌓아가는 것들이 결국 진짜 가치를 만든다는 것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여행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유명한 관광지나 인스타그램에서 본 핫플레이스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여행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곳들보다 현지인들의 일상 속 공간들이 더 궁금해졌다. 현지인에게 물어보고, 그들이 진짜로 추천하는 곳을 찾아가는 여행. 미리 계획하고 예약하는 대신, 그 순간의 직감과 운에 맡기는 여행. 이런 방식의 여행이 주는 설렘과 긴장감은 어떨까? 분명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 문이 닫혀있거나, 예상과 다를 수도 있고,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예상치 못한 상황들도 여행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완벽한 계획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맛집 가이드북을 넘어서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는 것 같다. 유명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가는 것, 화려하지 않아도 진정성으로 승부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음식에만 집중해온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요즘 세상의 빠른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렌드를 쫓기보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지켜가는 것의 소중함 말이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쌓아가는 것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점점 소홀해지는 대면 소통의 중요성을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당장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졌다. 계획 없이,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그들이 추천하는 진짜 맛집을 찾아보고 싶다. 아마 그런 여행에서 찾게 될 맛집들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이티브의 눈으로 다시 배우는 티처조의 영어식 사고 수업 - 생각이 영어가 되는 2단계 사고 학습법
조찬웅(티처조).Coleen Dwyer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성인 학습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벽은 무엇일까? 단어를 모르는 것도, 문법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바로 '한국어로 먼저 생각하고 영어로 번역하는' 뿌리 깊은 습관이다. "티처 조의 영어식 사고 수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성인이 된 후에도 충분히 '영어식 사고'를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기존의 암기와 문법 중심 학습법에서 벗어나 사고의 경로 자체를 바꾸는 훈련을 제안한다. 생각해 보면, 언어를 대하는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을 의미한다.


첫 번째 단계는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언어를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꾸는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영어 단어를 많이 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어 "be starting to like"라는 표현을 통해 저자가 보여주는 접근법은 참신하다. 대부분의 한국인 학습자들은 이 표현을 "좋아하기 시작하다"로 직역하며 끝낸다. 하지만 저자는 이 표현의 진짜 의미를 파고든다. "처음엔 별로였는데, 하다 보니 슬슬 좋아짐"이라는 감정의 변화, 그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하도록 돕는다. 헬스장을 처음 갔을 때는 "그냥 쇳덩이 드는 모임"인 줄 알았지만, "어느새 그 쇳덩이가 저를 부르고 있다"는 감각적 표현으로 영어식 사고를 구체화한다. 두 번째 단계는 바뀐 생각을 즉각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는 훈련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 문장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새로운 두뇌 회로를 만드는 것이다. 책은 짧은 문장부터 시작해 대화, 상황 설명, 자기표현으로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각 표현마다 "Think in English" 섹션을 통해 영어식 사고의 틀을 제공하고, 실제 대화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예시를 제시한다.


전통적인 영어 학습법은 주제별 문장을 제시하고 해석과 문법, 영작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학습자를 수동적 위치에 머물게 하고, 실제 대화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지식을 축적하게 만들었다. 책은 다르다. 영어 표현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원어민의 입장에서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지, 어떤 감정과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지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 학습 예시에서 "I'm starting to like learning the violin"이라고 할 때, 단순히 "바이올린 배우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가 아니라 "처음엔 손가락도 아프고 소리는 고양이 비명 같았지만, 연습을 계속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재미가 붙는" 그 감정의 변화를 함께 전달한다. 책에 나오는 모든 표현들은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들이다. 운동 끝나고 나오는 친구의 밝은 표정을 보고 "드디어 헬스장에 정들었나 봐"라고 말하는 상황, 온라인 강의가 처음엔 어려웠지만 점점 재미있어지는 상황 등은 모두 우리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것들이다. 이런 친근한 상황들을 통해 학습자들은 영어를 '공부'가 아닌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QR코드를 통해 제공되는 저자의 강의 또한 "조곤조곤" 설명하는 방식으로 학습의 부담을 줄이고 흥미를 높인다.


이 책을 접하기 전 나의 영어 학습은 전형적인 한국식이었다. 영어를 들으면 먼저 한국어로 번역하고, 말할 때는 한국어로 생각한 후 영어로 옮기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대화 속도는 현저히 느려지고, 자연스러운 표현보다는 문법적으로 '안전한' 문장만 구사하게 되었다. 책의 접근법을 따라 첫 번째 실험을 해보았다. 평소 자주 경험하는 상황들을 영어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 시작한 요가 수업에서 처음엔 몸이 경직되고 어색했지만 몇 주가 지나니 유연해지고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기존의 나라면 "I like yoga now" 정도로 단순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방식을 적용해보니 "I'm starting to like yoga"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정확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좋아함'이 아니라 '변화하는 감정'을 포착한 것이다. 두 번째 실험은 일상의 다양한 상황을 영어식으로 해석해보는 것이었다. 책에서 제시하는 "Think in English" 방식을 활용해, 한국어 번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영어로 상황을 인식하려고 노력했다. 카페에서 새로운 원두의 커피를 마시며 처음엔 쓴맛이 강했지만 점점 그 깊은 맛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을 때, "This coffee was too bitter at first, but I'm starting to like its rich flavor"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전 같았으면 "커피가 처음엔 너무 써서 별로였는데, 이제는 진한 맛이 좋아지기 시작했어"라고 한국어로 먼저 정리한 후 영어로 번역했을 것이다.


책을 통해 가장 크게 변화한 부분은 감정 표현의 정교함이다. 기존에는 like, dislike, good, bad 같은 단순한 형용사나 동사로만 감정을 표현했다면, 이제는 감정의 변화와 과정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처음 몇 주간은 적응이 어려웠지만, 동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업무에도 익숙해지면서 점점 회사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을 때, "I'm starting to like my new workplace"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는 단순히 "I like my job"과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다. 번역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가장 먼저 느낀 변화는 처리 속도의 향상이었다. 영어를 들을 때 한국어로 번역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니, 전체적인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이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전에는 자막에 의존하거나 한 문장씩 끊어서 이해하려 했다면, 이제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단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대화의 핵심은 놓치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 변화는 표현의 다양성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에 따라 다른 표현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을 '좋아한다'고 할 때도 완전히 좋아하는 상태(I love it), 좋아하기 시작하는 단계(I'm starting to like it), 조건부 좋아함(I like it when...) 등을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글쓰기에서도 나타났다. 이전의 영작문은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직역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영어권 화자의 사고방식으로 상황을 재구성해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자신감의 증진이다. 문법적으로 완벽하지 않더라도 의미 전달에 집중하게 되면서, 영어 사용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틀릴까 봐' 망설이는 시간이 줄어들고, '전달하고 싶은 의미'에 집중하게 되었다.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개별 학습자가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표현들을 그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 패턴과 관심사에 맞춰 응용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나의 경우 책에서 제시한 "be starting to like" 패턴을 운동, 음식, 취미, 직장 등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보면서 이 표현의 활용 범위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하나의 표현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영어식 사고의 패턴 자체를 체화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암기식 학습은 단기간에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동기를 유지하기 어렵다. 반면 이 책의 접근법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학습이 지속된다. 매일 경험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영어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해보는 것 자체가 학습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 과정 자체가 영어 학습의 연장선이 되는 것이다.


책은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도구'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십 년간 굳어진 한국어식 사고 패턴을 바꾸는 것은 분명히 도전적인 일이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체계적이고 점진적인 접근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영어가 '번역해야 하는 언어'가 아닌 '직접 생각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어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은 영어식 사고에서 나온다. 이 책은 바로 그 영어식 사고로 가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길잡이가 되어준다. 번역을 멈추는 순간, 진짜 영어가 시작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제는 생각 자체를 영어로 하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때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