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쁜 추적 - 코로나19는 어디서 왔는가?
데이비드 쾀멘 지음, 유진홍 옮김 / 군자출판사(교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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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2025년 가을, 거리를 걸으며 마스크를 쓴 사람을 찾기란 이제 쉽지 않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마스크 없이 외출하는 것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점점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일상을 되찾았고, 그만큼 빠르게 그 시절을 잊어가고 있다. 하지만 망각이 항상 치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망각은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마저 함께 지워버린다. 쾀멘의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팬데믹의 고통은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너무 쉽게 내려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게 뭐가 중요해? 이미 지나간 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바이러스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에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장 번지는 불을 끄기도 바쁜데, 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근시안적 사고다. 화재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으면 같은 사고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팬데믹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다. 이 점에서 쾀멘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고, 또 절박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로르샤흐 테스트에 대한 비유였다. “같은 증거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박쥐를 보고, 어떤 사람은 실험실을 본다.” 코로나19 기원 논쟁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실험실 유출설은 처음부터 강력한 직관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한에 바이러스 연구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최초의 대규모 감염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과관계를 상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중국 정부의 불투명한 태도와 정보 통제는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고의든 실수든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는 서사는 분노의 대상을 명확히 해준다는 점에서 감정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반면 자연 기원설은 상대적으로 덜 드라마틱하다. 야생동물에서 자연스럽게 진화한 바이러스가 우연히 인간에게 넘어왔다는 설명은 덜 선명하고, 책임 소재도 모호하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다. 하지만 과학적 증거들은 지속적으로 이쪽을 가리켜왔다.

문제는 우리 시대가 증거보다 서사를 더 갈망한다는 점이다. SNS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정보 환경에서 복잡한 과학적 논증보다 명쾌한 음모론이 더 빨리, 더 넓게 퍼진다. 쾀멘이 이 책에서 끝까지 과학적 엄밀성을 유지하려 애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과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과학의 영역을 지켜내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에서 더욱 멀어질 뿐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저자는 본래 생물학자가 아니라 문학 전공자였다고 한다. 윌리엄 포크너를 연구하던 사람이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중요한 시사점을 담고 있다. 복잡한 과학적 사실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서사적 능력이 필요하다.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진정한 대중적 이해가 가능해진다.

과학자들은 어떤 것도 100퍼센트라고 말하지 않는다. 책은 이 점을 명확히 짚어낸다. 중국 당국의 비협조와 정보 은폐도 문제지만, 이는 과학의 본성이기도 하다. 과학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현재의 증거로 최선의 판단을 내릴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때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대중은 명확한 답을 원한다. 흑이냐 백이냐, 실험실이냐 자연이냐. 하지만 현실은 거의 언제나 회색 지대에 있다. 쾀멘이 제시하는 것도 확정적 결론이 아니라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다. 박쥐 등에서 재조합되어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동물이나 냉동 체인을 통해 화난수산시장을 중심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확실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쾀멘의 태도가 빛을 발한다. 그는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로르샤흐 테스트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일 수 있지만, 잉크 얼룩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 증거는 존재한다. 그 증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만든다. 우리는 너무 자주 명쾌한 답을 요구하고, 그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과학자들을 무능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적 정직성의 표현이다. 확신이 없는데도 확신하는 척하는 것이 오히려 비과학적이다. 코로나19 기원 논쟁이 케네디 암살 사건처럼 영원히 논란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쾀멘의 지적은 씁쓸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완벽한 답을 얻을 수 없더라도,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좁혀가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다음 팬데믹을 대비하는 유일한 길이다.

팬데믹이 지나간 지금,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빨리 잊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기억하고 배울 것인가. 전자는 쉽고 편하다. 후자는 불편하고 때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배우지 않는 자들에게만... 쾀멘의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결국 하나다. 과학적 사고와 품위 있는 판단을 지켜내는 것. 증거를 존중하고, 불확실성을 인정하며, 그럼에도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것. 정치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우리 시대처럼 확증편향과 정보 과잉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다음 팬데믹이 왔을 때,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게 대응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코로나19는 끝났지만, 코로나19가 남긴 질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내서는 안 된다. 그 질문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우리가 팬데믹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쾀멘의 책은 그 씨름을 위한 훌륭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 전문가든 일반인이든, 과학자든 인문학자든, 우리 모두는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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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빌려드립니다 : 영국 - 인류 역사와 문화의 새로운 발견 박물관을 빌려드립니다
손봉기 지음 / 더블북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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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박물관은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대영박물관의 그레이트 코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그 투명한 천장 아래에서 수천 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몰라 입구를 서성이다가, 결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을 따라 걷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박물관에서 겪는 솔직한 경험이 아닐까. 이번에 읽은 <박물관을 빌려드립니다 : 영국>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대영박물관과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은 인류가 걸어온 길의 흔적들이 모여 있는 곳이며,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기억들이 뒤섞인 복잡한 장소이기도 하다. 800만 점, 280만 점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압도적이다. 하지만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숫자의 압도가 아니라, 그 속에서 꼭 만나야 할 이야기들을 골라내는 섬세한 손길이다. 박물관을 '힙플레이스'라고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들어서면 우리는 여전히 길을 잃는다. SNS에 올릴 만한 사진을 찍기 위해 유명한 유물 앞에 줄을 서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지나친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유물을 보는 것과 유물을 읽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으며,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결국 이야기라고 말이다.


대영박물관의 이집트관에서 람세스 2세의 석상을 마주할 때, 우리는 거대한 돌덩어리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럽인들의 오만한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양 문명의 뿌리가 그리스에 있다고 믿었던 그들에게, 그리스보다 훨씬 앞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찬란한 문명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인들도 이집트 문명 앞에서 비슷한 열등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피라미드를 지키는 수호신에게 자신들의 신화 속 괴물 이름인 '스핑크스'를 갖다 붙였다. 용맹과 지혜를 상징하는 '지평선의 호루스'라는 웅장한 이름 대신에 말이다. 문명과 문명이 만날 때, 우리는 때로 상대의 위대함을 인정하기보다 폄하하는 방식으로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이런 문화적 열등감과 우월감의 역학은 박물관 곳곳에서 발견된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의 '티푸의 호랑이'는 그 극명한 예다. 영국에 저항하던 인도 술탄 티푸가 두 아들을 인질로 빼앗긴 분노로 만든 이 작품은, 영국군 병사를 공격하는 호랑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술탄은 이것을 궁전 음악실에 두고 손님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한 후, 이 작품은 런던으로 옮겨져 영국인들이 대영제국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전리품이 되었다. 박물관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승자의 공간이며, 때로는 약탈의 역사가 '보존'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곳이기도 하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낸 '엘긴 마블'을 보면서, 우리는 예술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관을 걷다 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얼마나 죽음에 집착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미라, 사자의 서, 카노푸스 단지, 샤브티 인형 등 거의 모든 유물이 죽음과 사후세계에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듯, 이집트인들이 꿈꾼 내세는 천국이 아니라 현세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세케트 이아르', 즉 갈대의 들은 물과 곡식이 풍부한 낙원이었다. 그들은 죽어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네바문의 벽화에서 보이는 연회 장면을 떠올려본다. 왜 그들은 인물의 얼굴을 측면으로, 눈과 가슴은 정면으로, 발은 다시 측면으로 그렸을까? 그것은 단순히 미적 선택이 아니라, 부활했을 때 자신의 몸을 정확히 찾기 위한 실용적 이유였다. 죽음 이후에도 자신으로 남고 싶었던 그들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다르게 바라봤다. 펜테실레이아와 아킬레우스의 이야기에서 보듯,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인간적 감정을 놓지 않았다. 적을 죽이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은,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리고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직전에 이렇게 물었다. "내 연기가 볼 만했습니까?" 삶을 연극으로, 자신을 배우로 본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죽음의 철학을 본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그에게 삶은 견뎌내야 할 무대였고, 죽음은 그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의 카스트 코트를 생각하면 묘한 감정이 든다. 그곳은 복제품들을 모아놓은 전시실이다. 산업혁명으로 부유해졌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변방이었던 영국이, 그랜드 투어를 갈 수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 만든 공간. 트라야누스 승전비의 복제품, 미켈란젤로 다비드상의 복제품들이 그곳에 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진품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복제를 통해서라도 배우려 했던 그 열망이 더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복제품을 모으던 박물관이 이제는 전 세계에서 가져온 진품들로 가득 차 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가시 성물함'의 이야기다. 예수가 쓴 가시관의 일부를 보관했다는 이 성물함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거쳐 복원을 위해 골동품 상인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상인은 진품을 가지고 가짜를 만들어 돌려보냈고, 진품은 결국 대영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신성함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물함이, 금과 보석 때문에 세속화되고, 결국 진품과 가짜가 뒤바뀌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박물관을 걷는다는 것은 인류의 욕망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사랑과 증오, 신성함과 세속성이 뒤엉킨 공간을 통과하는 일이다. 로제타스톤 앞에서 우리는 해독되지 않던 문자가 풀리는 순간의 흥분을 상상하고,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의 점토판 앞에서는 기록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생각한다. 니네베 궁전의 사자 사냥 부조를 보면서, 사자의 근육과 분노가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숨이 막힌다. 성난 눈빛과 피가 솟구치는 상처까지, 동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3000년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리고 동시에, 왜 그들은 사자를 죽이는 장면을 이토록 정교하게 남겨야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그날의 꿈>에서 인동덩굴을 든 제인 모리스를 보면서, 우리는 빅토리아 시대의 은밀한 사랑을 떠올린다. 그녀는 화가의 친구 아내였고, 화가와 불륜 관계였다. 예술 작품 속에 담긴 것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금기를 넘는 욕망이기도 하다. 저자가 26년간 도슨트로 일하며 선택한 100여 점의 유물들은, 결국 인간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는 박물관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지금의 우리 자신을 본다.


박물관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수천 년의 시간과 수백만 점의 유물 사이에서, 우리가 명확한 방향을 가지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목소리다. "여기를 보세요. 이것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왕이 사후세계에서도 자신으로 남고 싶어 했던 간절함이 담긴 조각입니다." "저 항아리에 그려진 것은 단순한 전투 장면이 아니라, 적을 죽이는 순간 사랑에 빠진 영웅의 비극입니다." "이 복제품은 문화적 열등감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배움에 대한 열망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26년간 같은 박물관을 안내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저자의 시선이 귀하다. 박물관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시선에 따라 계속 새롭게 읽히는 텍스트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가지고 가느냐에 따라, 같은 유물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영박물관과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은 제국주의의 산물이자, 인류 문명의 보고이며, 약탈의 증거이자 보존의 노력이 공존하는 모순된 공간이다. 그 모순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유물 하나하나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박물관을 제대로 걷는 방법일 것이다. 언젠가 런던을 방문하게 된다면, 나는 이 책을 들고 대영박물관의 입구에 설 것이다. 그리고 800만 점의 유물 사이에서 길을 잃을 준비를 하되, 동시에 저자가 건네는 이야기의 실을 따라 걸을 것이다. 박물관은 이제 더 이상 두려운 미로가 아니라, 걸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는 시간의 정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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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힘 - 부의 본질을 묻는 12가지 질문
주정엽 지음 / 리프레시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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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결코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무의미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돈을 적절한 위치에 두고, 그것을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쓰는 지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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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힘 - 부의 본질을 묻는 12가지 질문
주정엽 지음 / 리프레시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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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주식 계좌를 열면 초록색 숫자들이 춤을 춘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SNS에는 수익 인증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가 돈을 버는 시기인데,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더 긴장되어 간다.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 더 많이 벌지 못했다는 아쉬움, 남들보다 덜 벌었다는 조급함. 상승장은 부를 안겨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가난함을 선물한다. 마음의 가난함이다. 우리는 부를 숫자로 측정하는 데 익숙하다. 몇 퍼센트 올랐는지, 얼마를 벌었는지가 그날의 기분을 좌우한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내 계좌의 숫자가 커질 때, 내 삶의 질도 함께 커지고 있는가?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걱정거리를 의미하는가? 이번에 주정옆님의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힘>을 읽으며 부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돈과 함께 살아간다. 출근길 커피 한 잔, 점심 식사비, 저녁 귀갓길의 택시비까지. 그러나 정작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 앞에 서면 우리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단지 필요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저자가 책에서 제시하는 12개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돈을 모으는 방법론이 아니라, 돈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근본적 성찰이다. 저자가 강조하듯, 돈을 불리는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돈을 대하는 태도다. 기술은 환경에 따라 변하지만, 태도는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앞에서 흔들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돈이 우리에게 단순한 교환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돈은 안전함의 상징이고, 선택의 자유이며, 때로는 사회적 성공의 척도가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이 시작된다. 돈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빠져든다.

많은 이들이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목표했던 금액을 손에 쥐게 되면,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1억이 모이면 5억이 필요해지고, 10억이 모이면 100억을 꿈꾼다. 이 끝없는 추구의 배후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것처럼, 적은 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명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외부의 기준으로 자신의 충분함을 판단한다는 데 있다. SNS에는 더 화려한 삶이 넘쳐나고, 주변 사람들은 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부정적인 답변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충분함은 객관적 수치가 아니라 주관적 감각의 문제다. 같은 금액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풍요이고, 다른 이에게는 결핍이다. 이것은 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유한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경제적 자유라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 많은 이들이 이를 목표로 저축하고 투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상태에 도달한 이들이 모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돈이 많아지면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생긴다.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관리해야 할 자산의 무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까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깨달았듯이, 소유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오히려 그 소유에 종속된다. 집이 커지면 관리할 공간이 늘어나고, 차가 늘면 주차 걱정이 생기며, 재산이 많아지면 세금과 운용에 대한 고민이 커진다. 진정한 자유는 통장 잔고가 아니라 선택의 주도권에서 나온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쓸 수 있는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거절할 수 있는가, 두려움 없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유에 가까운 상태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많은 돈을 전제하지 않는다. 적은 돈으로도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을 설계한다. 반면 큰 부를 가졌어도 불안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며,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결국 자유는 외적 조건보다 내적 태도의 문제다.

우리는 언제부터 부유함을 성공으로, 가난을 실패로 여기게 되었을까. 이 단순한 등식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가치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성과는 곧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증명하는 지표로 간주되었고, 이는 점차 한 사람의 전체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등식은 위험하다. 부를 성공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순간, 우리는 다른 모든 가치를 경시하게 된다. 예술적 성취, 인간적 따뜻함, 윤리적 실천, 공동체에 대한 기여 같은 것들은 돈으로 환산되기 어렵기에 낮게 평가된다. 심지어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뭐 하시는 분이세요?"라는 질문을 통해 먼저 그의 직업과 경제적 지위를 확인한다. 칸트가 강조했던 인간 존엄의 개념을 떠올려보자.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어떤 수단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인간을 끊임없이 경제적 가치로 측정하려 한다. 연봉이 얼마인지, 어떤 집에 사는지, 무슨 차를 타는지가 그 사람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왜곡된 시선은 개인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한다. 충분히 잘 살고 있어도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초라함을 느끼고,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무의식적 낙인이 담긴다. 가난은 개인의 나태함이나 무능력의 결과로 치부되고, 구조적 불평등은 간과된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돈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 행복의 조건일 수는 있지만 행복 그 자체는 아니라고 했다. 행복은 덕을 실천하고 좋은 삶을 사는 데서 온다. 돈은 그 과정을 돕는 도구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더욱 비관적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긴다. 따라서 욕망을 통해서는 결코 진정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다. 돈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싸우는 과정이 된다. 동양 철학에서 장자는 무위의 가르침을 남겼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고 축적하려는 노력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르며 소박하게 사는 것이 더 큰 평화를 가져온다. 현대의 미니멀리즘 운동이 주목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유를 줄이고 단순하게 살수록 오히려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깨달음이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자신의 귀족 신분과 재산을 포기하고 농민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물질적 부보다 도덕적, 정신적 풍요가 진정한 삶의 가치라고 믿었다. 이는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프롬이 제기한 "소유냐 존재냐"의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가지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로 사느냐의 문제다.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공허한 사람이 있고, 적게 가졌어도 풍요로운 사람이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다. 마음의 풍요는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에서 나온다. 감사할 줄 알고, 현재를 즐기며,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오히려 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가치들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했던 의료진의 증언은 의미심장하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단 한 명도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자신의 진짜 꿈을 실현하지 못한 것, 용기 내어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삶의 끝에서 돌아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단순히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은 삶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부는 사랑, 시간, 관계, 의미, 자유 같은 본질적 가치들이다.


우리는 어떤 부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끝없는 추구와 경쟁 속에서 불안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충분함을 알고 평온하게 살 것인가. 많이 가지되 공허할 것인가, 적게 가지되 풍요로울 것인가. 소유를 쌓을 것인가, 존재를 키울 것인가다. 정답은 없다. 각자의 가치관과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돈만을 목표로 삼는 삶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돈은 삶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힘>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관점의 전환이다. 돈을 쫓지 말고 삶을 살라는 것. 숫자에 집착하지 말고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다. 소유보다 존재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면,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얼마나 벌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나눴는가".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행복했는가". 돈은 결코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무의미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돈을 적절한 위치에 두고, 그것을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쓰는 지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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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과 WEB 3.0 장자철학으로 이해하다 - 고대 철학자 장자가 꿈꾸던 무위의 세상 블록체인 기술로 실현하다
박수억 지음 / 하움출판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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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철학을 과거의 학문으로, 기술을 미래의 도구로 여긴다. 하지만 어쩌면 철학은 늘 미래를 예견해왔던 사유의 지도였는지도 모른다. 2천여 년 전 장자가 꿈꾸었던 자유로운 세계와 오늘날 블록체인이 추구하는 탈중앙화된 미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갈구해온 자율성과 평등에 대한 열망이 서로 다른 형태로 표현된 결과일 것이다. 장자의 핵심 개념인 '무위자연'은 인위적인 통제와 강제를 거부하고, 사물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놀랍게도 블록체인의 작동 원리와 맞닿아 있다. 중앙의 권위 없이도 네트워크가 스스로 합의에 도달하고, 누구의 강제 없이도 시스템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방식 말이다. 장자가 붕새의 비상으로 표현했던 무한한 자유의 경지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디지털 공간에서 실현하려는 개인 주권의 회복과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장자가 '쓸모없음의 쓸모'를 역설했던 것처럼, 블록체인 역시 기존 사회가 쓸모없다고 여겼던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 권력이 없어도 신뢰가 형성되고, 거대 기업이 없어도 거래가 성립되며, 정부의 통제 없이도 공동체가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존 시스템의 상식을 뒤집는다. 장자가 꿈꾸었던 이상향이 공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미래였음을 기술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인류 문명은 오랫동안 신뢰를 중앙기관을 통해 확보해왔다. 왕과 제사장, 은행과 정부, 그리고 오늘날의 거대 플랫폼 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항상 '제3자'를 믿음으로써 서로를 믿는 간접적 신뢰 구조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편중과 불평등을 낳았고, 중개자는 막대한 수수료와 영향력을 독점해왔다. 블록체인은 이 오래된 신뢰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중앙의 보증 없이도 암호학과 분산 네트워크를 통해 신뢰를 생성할 수 있다는 발견은 혁명적이다. 이것은 마치 장자가 말한 '도가 곧 만물에 내재해 있다'는 사상과 닮아 있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 자체에 신뢰가 내장되어 있는 구조 말이다. 특히 스마트 계약은 이러한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구현한 사례다. 계약의 이행을 법원이나 중재자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 자체가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실행되는 방식이다. 이는 인간의 개입과 자의적 판단을 최소화하고, 규칙 그 자체가 작동하도록 만든다. 장자가 꿈꾸었던 '사람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금융 영역에서 디파이(탈중앙화 금융)의 등장은 더욱 급진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은행 없이도 대출이 가능하고, 증권사 없이도 투자가 이루어지며, 중개인 없이도 글로벌 송금이 실시간으로 처리된다. 이것은 단순히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던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중앙의 허락 없이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시스템, 이것이야말로 장자가 꿈꾸었던 평등한 세계의 현대적 구현이다.


웹 2.0 시대는 '참여의 시대'라고 불렸다.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러나 이 화려한 참여의 이면에는 씁쓸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우리가 만든 모든 콘텐츠, 우리가 남긴 모든 흔적은 결국 플랫폼 기업의 자산이 되었다. 우리는 콘텐츠를 생산했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소유한 적은 없었다. 웹 3.0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핵심은 '소유'의 개념을 디지털 공간에 구현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NFT는 디지털 자산에 대한 진정한 소유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술가는 더 이상 갤러리나 유통사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며, 음악가는 스트리밍 플랫폼의 불공정한 수익 배분에 종속되지 않는다. 창작자가 곧 플랫폼이 되고, 개인이 자신의 경제 주권을 직접 행사하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이는 장자가 말한 '각자의 본성대로 존재하는 것'과 깊이 연결된다. 외부의 기준이나 강제된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세계 말이다. 웹 3.0에서 크리에이터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 누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수익은 어떻게 분배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인권 선언과도 같다. 게임 산업에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수백 시간을 투자해 얻은 아이템과 캐릭터는 게임사의 소유물이었다. 게임사가 서버를 닫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진정한 소유자가 된다. 게임 내 자산을 다른 게임에서 사용하거나, 실제 경제적 가치로 교환할 수 있다. 이것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디지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가능하게 한다.


장자는 이상적인 통치를 '무위지치', 즉 다스리지 않는 다스림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통치자가 자의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오늘날의 정치 시스템과는 정반대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DAO(탈중앙화 자율 조직)의 작동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DAO는 중앙의 CEO나 이사회 없이 운영되는 조직이다. 모든 구성원이 토큰을 보유하고, 주요 의사결정은 투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규칙은 스마트 계약으로 코드화되어 있어, 누구도 임의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은 권력의 남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참여자 모두가 조직의 주인이 되는 구조를 만든다. 장자가 꿈꾸었던 '위계 없는 공동체'가 디지털 공간에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DAO가 기존 조직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관료제의 복잡한 절차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제안이 올라오면 커뮤니티가 투표하고, 통과되면 즉시 실행된다. 이는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는 무위의 방식과 닮아 있다. 실물 자산의 토큰화(RWA)는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확장한다. 부동산이나 미술품 같은 고가의 자산을 여러 명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 수익을 투명하게 분배받을 수 있다. 소수의 자본가만이 독점하던 투자 기회가 일반 대중에게도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부의 재분배를 국가의 강제적 개입이 아니라, 기술을 통한 구조적 변화로 달성하려는 시도다.

장자의 사상 중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개념이 '쓸모없음의 쓸모'다. 세상은 유용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정작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더 오래 생존하고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오늘날 효율성과 생산성에 지배당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하다. 블록체인과 웹 3.0은 이러한 철학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기존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블록체인은 비효율적이다. 같은 데이터를 수천 대의 컴퓨터에 중복 저장하고, 합의 과정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중앙 서버 하나면 해결될 일을 굳이 복잡하게 처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비효율'이 시스템의 핵심 가치다. 중복과 분산이 있기에 검열이 불가능하고, 느린 합의 과정이 있기에 조작이 차단된다. DePIN(탈중앙화 물리적 인프라 네트워크) 같은 개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통신이나 에너지 인프라는 대규모 자본과 중앙 집중적 관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반의 분산형 인프라는 개인들의 작은 기여가 모여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각자의 기여는 미미해 보이지만, 전체로서는 강력하고 복원력 있는 시스템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장자가 말한 '작은 것들의 큰 쓸모'가 아닐까. 메타버스와 가상 공간의 경제 활동도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가상 세계의 자산은 '실체 없는 것', 즉 쓸모없어 보인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실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물리적 실체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형의 것들이 더 자유롭게 유통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세상인가,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하는 세상인가.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신뢰인가, 시스템 자체에 내장된 신뢰인가. 개인이 플랫폼에 종속되는 구조인가, 개인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구조인가? 장자의 철학이 2천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갈망하고, 평등을 원하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기술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 욕구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단,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우리 모두가 단순한 소비자나 관망자를 넘어서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데이터를 지키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새로운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말이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식의 문제다. 장자가 꿈꾸었던 소요유의 세계, 아무런 속박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는 어쩌면 디지털 공간에서 먼저 실현될지도 모른다. 물리적 세계의 제약을 넘어서, 국경과 인종과 계급의 벽을 허물고, 순수하게 개인의 가치만으로 평가받는 세상. 그것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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