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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겨울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었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보이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고, 얼어붙은 나무 가지 안에서 수액이 조금씩 이동하며, 땅속 깊은 곳에서는 뿌리들이 봄을 준비한다. 클레어 키건의 첫 단편집 <남극>을 읽는 경험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표면은 고요하고 차갑지만, 그 아래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1999년에 처음 출간된 이 작품집을 손에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키건의 후기작들을 통해 그녀의 문장이 지닌 힘을 알고 있었다. <포스터>와 <작은 것들이 빛나는 순간>에서 보여준 그 절제된 문체, 한 단어도 허투루 쓰지 않는 정교함, 그리고 독자에게 여백을 남겨주는 관대함. 그런데 그녀의 데뷔작을 읽으며 나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이미 그 시작점에서부터 키건은 완성된 작가였다는 것을. 물론 후기작들에서 보여준 극도의 절제와 완벽함에는 미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첫 작품집에는 젊은 작가의 실험정신과 대담함,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구석을 들여다보려는 용기가 있었다.
나는 이 책을 늦은 밤에 읽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창밖으로는 간간이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한 편 한 편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키건의 이야기들은 결코 큰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속삭이듯 조용히 다가와, 어느새 독자의 가슴 한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 울림이 사라지지 않는다. 15편의 단편 중 일부는 아일랜드를, 일부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배경이 어디든, 키건이 탐구하는 것은 동일하다. 인간 관계의 복잡성,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무게,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몸부림. 특히 여성들의 삶에 대한 그녀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냉철하다. 동정이나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저항과 희망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표제작 「남극」을 읽으며 나는 처음에 혼란스러웠다. 왜 하필 '남극'이라는 제목일까? 이야기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여성의 일탈을 그린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문득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면 어떨지 궁금해진다. 이것은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다. 단지 경험하지 못한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 자신이 살지 않은 또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 때문이다. 그녀는 다음 주말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마치 오랫동안 미뤄왔던 여행을 떠나듯, 마치 너무 늙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처리하듯. 키건은 이 여성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걷는 도시의 풍경, 차가운 공기, 얼음처럼 단단해진 거리를 통해 그녀의 심리를 드러낸다. 빛이 빠져나가고 어둠이 밀려오는 황혼의 묘사는 단순한 시간적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넘어서려는 경계, 익숙한 삶에서 낯선 영역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의 불안과 떨림을 상징한다.
바에서 만난 남자와의 대화는 평범하다. 그들은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함께 밤을 보낸다. 키건은 이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다음날 아침의 감각, 낯선 침대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어색함과 혼란을 통해 독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 만남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 불안은 점점 커지고, 도시의 차가운 밤 풍경은 위협적으로 변한다. 키건은 결말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독자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저 불안과 공포의 가능성만이 남을 뿐이다.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남극'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이해했다. 남극은 지구상에서 가장 차갑고 황량한 곳이다. 인간이 살 수 없는, 생명이 존재하기 어려운 극한의 공간. 이 여성의 일탈은 어쩌면 그런 곳으로의 여행이었는지 모른다. 따뜻하고 안전한 일상에서 벗어나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거기에는 낭만이나 자유가 아니라 얼어붙은 고독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의 욕망과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사이의 긴장. 키건은 이 주제를 비난이나 교훈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섬뜩하다. 20세기 중후반 아일랜드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부엌에서 닭을 채우고, 파슬리를 다듬고, 일요일 경기의 소음을 참아내는 것. 남자들로부터 격리되고, 숨겨지고, 문제가 되지 않도록 관리되는 존재다. <노래하는 계산원>에서는 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공짜 생선 소포를 받기 위해 으스스한 우체부와 관계를 맺는 젊은 여성 코라. 이 이야기는 코라의 어린 여동생의 시선으로 전달되는데, 그 순진한 목소리가 상황의 추악함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우체부가 올 때마다 심부름을 나가야 하는 화자는, 집에 돌아와서 냄새를 맡는다. 끈적해진 잠 같은, 오트밀이 넘쳐흐른 듯한 냄새. 키건은 직접적인 묘사를 피하면서도 모든 것을 느끼게 만든다.
키건의 이야기들은 처음에는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어 평범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독자를 부드럽게 이끌어 그 리듬에 맞춰 걷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울리는 소리들을 듣게 된다. 말하지 못한 것들, 억눌린 욕망들, 폭발하지 못한 분노들이다. <남극>은 재능 있는 작가의 초기작이 지닌 모든 매력을 담고 있다.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생생하고 대담하다.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여줄 완숙함의 씨앗들이 여기 있고, 동시에 다시는 시도하지 않을 실험들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추위를 느꼈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겨울 바람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냉혹함, 가부장제의 얼음장 같은 구조,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