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5000 주식의 시대 -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 프리미엄으로 가는 길
강대권.이민호.라이프자산운용 지음 / 페이지2(page2)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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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한국 주식시장을 가리켜 "국장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냉소가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 기업들은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소액주주들은 구조적으로 소외당했으며, 시장 전체는 일종의 투전판으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2025년을 기점으로 한국 증시는 세계 최고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코스피 5000이라는 숫자는 지수의 상승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구조적 병폐가 해소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전환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는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뿌리는 단순한 경기 침체나 외부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고유한 지배구조 문제, 즉 지배주주 중심의 기업 경영 관행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였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오랫동안 소수 지배주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여 왔다. 사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은 새로운 투자나 주주 환원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지배구조 강화를 위한 복잡한 순환출자, 혹은 비수익성 계열사 지원에 묶였다. 특히 상속세 문제는 이 왜곡을 더욱 심화시켰다. 한국의 상속세는 주식의 시가를 기준으로 산정되므로,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주가가 낮을수록 절세에 유리하다. 이는 기업 오너가 주가 부양을 꺼리도록 만드는 구조적 유인으로 작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이 잘 되어도 주주들이 그 혜택을 나눠 갖지 못하는 시장, 그것이 한국 증시가 수십 년간 저평가를 면치 못한 핵심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에 더해 이사회 기능의 형식화, 소액주주 권익 보호 장치의 부재, 불투명한 경영 정보 공시는 시장의 가격 발견 기능 자체를 무력화했다. 정보는 비대칭적으로 흘렀고, 그 수혜는 언제나 내부자와 지배주주에게 돌아갔다. 시장은 기업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공간이 아니라, 특정 세력의 이익 실현 수단으로 전락해 있었다.

2024년부터 본격화된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이 고질적인 병폐에 대한 제도적 응답이었다. 기업들이 자본 효율성과 주주 환원 지표를 공시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지수에 반영함으로써 투자자들이 보다 명확한 기준으로 기업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물론 초기에는 자율 공시에 그쳐 실효성 논란이 있었지만, 기업들이 하나둘 동참하면서 시장의 기대가 바뀌기 시작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이 '회사'에서 '모든 주주'로 확대된 것이다. 이는 법적으로 경영진이 지배주주만이 아닌 전체 주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원칙을 명문화한 것으로, 한국 자본시장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적 전환점이었다. 지배구조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법적 토대가 바뀌면 기업의 행동 방식도, 투자자의 기대도, 시장의 평가 기준도 점차 변화하게 된다. 이와 함께 반도체와 인공지능 산업의 글로벌 슈퍼사이클이 한국 증시 상승의 실물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면서, 기업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이것이 시장 전체를 견인했다. 구조 개혁과 산업 호황이 동시에 맞물린 결과, 코스피는 역사적인 랠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코스피 5000의 의미를 주가 지수의 숫자로만 읽으면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 숫자가 진정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한국 사회 전체의 자산 배분 방식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가계의 자산은 지나치게 부동산에 편중되어 있었다. 주식시장이 신뢰받지 못하고, 장기 투자의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산으로 부동산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천문학적인 집값, 과도한 가계 부채, 그리고 젊은 세대의 좌절이었다. 건강한 주식시장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주가가 기업의 실제 가치와 성장을 반영하고, 그 과실이 배당과 주가 상승으로 일반 투자자에게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투기적 수단으로 부동산을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간접투자 상품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장기 투자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 국민들은 투자 걱정에 쏟던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의 일과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효율성의 문제를 넘어, 삶의 질 전체와 연결된 문제다. 더 나아가, 자본시장이 제 기능을 하면 혁신의 생태계 자체가 달라진다. 유망한 기업이 시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자본을 조달할 수 있을 때, 혁신가들은 더 많은 도전을 감행하게 된다. 반대로 무능하거나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기업은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퇴출된다. 이 선순환이 작동할 때, 한국 경제 전체의 역동성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코스피 5000은 시작일 뿐이다. 진정한 과제는 이 상승이 일시적 열풍으로 끝나지 않고, '코리아 프리미엄'이라는 지속 가능한 평가 체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구조적 과제들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지배구조 개혁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이사회가 실질적으로 경영진을 견제하고, 사외이사가 독립성을 갖추며, 감사 기능이 투명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상법 개정으로 원칙이 세워졌다면, 이제는 그 원칙이 실제 기업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감독과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메리츠금융지주와 같이 주주 중심 경영을 앞장서 실천하는 기업들이 모범 사례로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세제 개혁도 빼놓을 수 없다. 지배주주의 저주가로 주가를 묶어두려는 유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상속세 체계의 개편이 필요하다. 주가가 오르면 지배주주도 이익을 보는 구조, 즉 지배주주와 소액주주의 이해관계가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세제를 재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금융에 대한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제도와 법이 아무리 잘 갖춰져도, 투자자들이 시장을 신뢰하지 않으면 자본은 모이지 않는다. 한국 주식시장이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시장이라는 믿음이 쌓여야 장기 투자 문화가 정착되고, 국내외 자본이 지속적으로 유입될 수 있다.


코스피 5000은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다. 그것은 오랫동안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한국 기업들과, 정당한 몫을 돌려받지 못했던 수많은 투자자들의 이야기다. 동시에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배구조 개혁, 세제 정비, 시장 신뢰 회복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흐름이 단순한 경기 사이클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의 시작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주식시장이 한국에서도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제도적 노력과 사회적 합의가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가는 진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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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업 AI 플레이북 - AI 시대, 금융 현장의 실전 가이드
임태중.김동석 지음 / 경향BP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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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2년 11월, ChatGPT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 그 '장난감'은 기업들의 전략 회의실 한가운데로 들어왔고, 금융, 의료, 교육, 제조를 가리지 않고 각 산업의 근간을 흔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AI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업 AI 플레이북>은 제목 속 '플레이북'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이 책은 미식축구 팀의 작전 지침서처럼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전략을 담고 있다. 금융업이라는 경기장에서 AI라는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포지션을 잡고, 어떤 플레이를 구사하며, 결국 승리해야 하는가. 저자는 그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한다. 하지만 이 책의 메시지는 금융업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AI라는 파도는 업종과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 금융인이든 마케터든 교사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직업인에게 동일한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당신은 이 변화에 올라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책의 구성은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의 두 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축에서는 조직이 AI를 어떻게 도입하고 내재화할 것인가를 다룬다. 단순히 솔루션을 구입하고 업무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문화와 인재, 프로세스 전반을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다. 두 번째 축에서는 개인이 ChatGPT, Perplexity, Gamma 같은 AI 도구들을 실제 업무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단순히 '이런 도구가 있다'고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 속 한 인물의 사례가 특히 와닿았다. 예전에는 하루 업무의 절반 이상을 정보 수집에 쏟아붓던 그가, AI 도구들을 활용하면서 같은 작업을 수분의 일로 줄이고, 오히려 분석과 판단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빠른 것이 아니라, 일의 무게 중심이 바뀐 것이다. 데이터를 모으는 사람에서 데이터를 해석하는 사람으로의 전환, 이것이 AI 시대가 요구하는 진짜 역할 변화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속한 조직을 떠올렸다. 최근 경영층에서 'AI를 활용한 업무 효율화'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그 요구가 다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그 막연함은 경영층의 무지가 아니라, 조직 전체가 아직 구체적인 전략을 설계하지 못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방향을 제시해 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전략의 일부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통계 하나가 등장한다. AI 트렌드 관련 자료를 공유했을 때 실제로 읽은 직원이 절반도 안 되었고, 그중 실제 업무에 활용한 사람은 그 절반의 10%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성장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은 전체의 5%에도 못 미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저자는 덧붙인다. 다시 말해, 그 5%는 나머지 95%와는 다른 궤도로 움직이고 있다. 이 숫자가 불편한 것은, 나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책을 읽고 눈이 커지고 머리가 열리는 느낌을 받지만, 책장을 덮으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지식과 실천 사이의 간극, 그것이 5%와 95%를 나누는 진짜 경계선이다. AI 도구를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만드는 일이다. 정보를 검색할 때 한 번 더 AI에게 물어보고, 보고서를 쓸 때 초안을 AI와 함께 구성해보고, 회의 자료를 만들 때 발표 흐름을 AI와 먼저 설계해보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쌓일 때, 그것이 진짜 역량이 된다.

저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AI가 판단을 내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AI가 설계한 금융 전략을 우리는 믿고 맡길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저자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가장 솔직한 부분일지 모른다. AI 도입이 생산성 혁명을 가져오는 동시에 대규모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이면에 도사린 사회적·철학적 비용에 대해 이 책은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적인 선택이기도 하고, 구조적 공백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공백이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막은 그 자체로 척박하지만, 어딘가에 우물을 품고 있기에 아름답다. AI라는 광대한 사막 속에서 인간이 찾아야 할 것, 혹은 만들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우물이다. 효율성이 극대화된 세상에서, 오히려 인간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함, 판단, 공감, 윤리적 감각이 더욱 빛날 것이다. 기술이 완성될수록 인간의 자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해질 수 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AI 도구의 사용법만이 아니다. AI와 공생하는 시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까지 이어진다. 기술을 익히는 일과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 이 둘은 분리된 과제가 아니다. 파도를 타는 기술을 연마하면서도, 바다 위에서 흔들리지 않을 중심을 키워야 한다.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직업인에게 유효한 화두를 던진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파도를 두려워하는 것도, 맹목적으로 올라타는 것도 아니다. 그 파도의 성질을 이해하고, 나만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사람으로 사는 법'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남긴, 그리고 내가 오래 생각하게 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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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말이 관계를 완성한다 - 언어 너머의 진짜 언어, 파라랭귀지 가이드
이인지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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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화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왠지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분명 상대방은 친절한 말을 했다. 틀린 것도 없고, 무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따뜻하지가 않다. 무언가가 어긋난 느낌, 마치 꼭 맞아야 할 퍼즐 한 조각이 빠진 것 같은 그 허전함.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다. 직장에서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상사는 화면에서 눈도 들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한다. "수고했어요. 옆에 두고 가세요." 내용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면 어딘가 쓸쓸하고, 심하면 불쾌하기까지 하다. 주변 동료는 말한다. 저 분은 악의가 없는 분이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경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파라랭귀지의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파라랭귀지란 단어 그 자체가 아닌, 말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다. 억양과 음높이, 말의 속도, 호흡의 리듬, 목소리의 떨림, 그리고 때로는 침묵까지. 우리가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사실 우리의 감각은 그 보이지 않는 언어를 먼저 읽고 있다.


열 대여섯 살 무렵 담임 선생님. 스물 즈음에 처음 사랑했던 사람. 기억이 떠오를 때, 가장 먼저 오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 사람의 얼굴보다 그 사람의 분위기, 목소리의 느낌, 그리고 그가 건넸던 말의 온도일 것이다. 우리는 단어를 기억하지 않는다. 말의 결을 기억한다. "잘했어"라는 한마디가 진심 어린 눈빛과 함께 천천히 건네졌을 때와, 바쁜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흘러나왔을 때의 차이. 내용은 같다. 그러나 그 말이 남기는 흔적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오래도록 가슴속에 따뜻하게 남고, 다른 하나는 허공에 흩어진다.

"사랑해"라는 말이 설렘 가득한 고백에서 들릴 때와, 15년을 함께한 부부 사이에서 흘러나올 때는 다른 울림을 갖는다. 단어는 같아도, 그것을 감싸는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라랭귀지의 본질이다. 말의 의미는 머리로 전달되지만, 말의 결은 마음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관계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후자다. 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 그 말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훨씬 더 오래 기억한다.


파라랭귀지를 이루는 요소들은 생각보다 섬세하고 다양하다. 억양은 문장의 끝을 어디로 데려가느냐에 따라 의미를 바꾼다. 같은 "그래"라도 끝을 내리면 동의가 되고, 위로 올리면 의심이나 물음이 된다. 음높이는 감정의 온도계다. 흥분하면 목소리는 올라가고, 지치거나 슬프면 낮게 가라앉는다. 말의 속도는 심리의 높낮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긴장하거나 불안할 때 말은 빨라지고, 무언가를 신중하게 전달할 때는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음량은 공간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너무 크면 상대를 압도하고, 너무 작으면 존재감을 잃는다. 그리고 침묵. 말하지 않는 순간이야말로 때로는 가장 강렬한 메시지가 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처음 공개하던 날, 그는 핵심 문장을 말하고 나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짧은 침묵이 청중 전체를 붙잡았다. 무엇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 요소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섬세하게 조율되고 혼합될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같은 말이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진심 어린 사과인데도 형식적으로 들리고, 걱정에서 나온 말인데도 잔소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바로 이 미세한 어긋남에서 비롯된다.


파라랭귀지를 의식하고 훈련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마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인위적으로 설계하는 것 같다는 느낌. 그러나 실은 그 반대다. 우리가 목소리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지금 상대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이 말이 온기를 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서두르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말을 천천히 하려면 마음도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목소리를 낮추어 상대를 압박하지 않으려면, 먼저 내 안의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침묵을 허용하려면, 상대에게 충분한 공간을 내주겠다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파라랭귀지를 익히는 것은 단순한 화술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태도의 훈련이다. 먼저 듣는 것, 인정하는 것, 품격 있게 말하는 것. 이 세 가지는 기술이기 이전에, 사람을 향한 마음의 방향이다. 외면의 변화가 내면을 건드리고, 그 내면의 변화가 다시 말의 결을 바꾸고, 그 말의 결이 관계를 새롭게 만든다.

이 시대의 소통은 대면 대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메신저와 이메일, SNS의 문자들이 관계의 많은 부분을 채운다. 그렇다면 파라랭귀지는 이 디지털 언어의 세계에서는 힘을 잃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텍스트에도 온도가 있다. 같은 "네"라는 단어가 "네~"와 "넵"과 "네네"로 달라질 때, 읽는 사람은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다. 마침표 하나가 문장의 느낌을 차갑게 만들기도 하고, 이모티콘 하나가 긴 설명보다 더 따뜻하게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문장의 길이, 단어의 선택, 응답의 속도. 이 모든 것이 디지털 파라랭귀지가 된다. 우리가 보내는 한 줄의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도 있고, 마침표 하나가 관계의 온도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가끔 관계의 어려움을 말의 내용에서 찾으려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현이 더 좋을지를 고민한다. 그러나 정작 관계를 만드는 것은, 그 말을 어떤 온도로 건네는가다. 파라랭귀지의 주파수가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 관계는 깊어진다. 신뢰가 자란다. 반대로 조금만 어긋나도, 말은 통하면서 마음은 멀어진다. 그 미세한 차이가 쌓여서 어떤 관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어떤 관계는 조금씩 식어간다. 그리고 그 조율의 감각은 누군가는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의식적인 노력과 연습을 통해 갖추어진다. 거울 앞에서 말해보는 것,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들어보는 것, 신뢰하는 사람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구하는 것. 이런 작은 시도들이 모여 우리 목소리의 결을 다듬어 간다. 그 결이 다듬어질 때, 우리가 맺는 관계의 질도 함께 달라진다.


첫인상은 말이 아니라 온도로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그 온도는 거창한 것에서 오지 않는다. 말을 건네기 전 잠깐의 숨,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짧은 순간, 말끝을 어디로 가져가느냐 하는 사소한 선택들.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여 한 사람의 인상을 만들고, 그 인상이 관계의 방향을 정한다. 우리는 때로 화려한 말을 준비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는다. 가장 좋은 말은 유창한 말이 아니라, 상대에게 닿는 말이다. 그리고 말이 닿기 위해서는 내용보다 먼저, 말의 결이 상대의 마음과 같은 리듬으로 움직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그 언어가, 결국 관계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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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리포트 - 인생 제2막을 위한 융 심리상담
대릴 샤프 지음, 정여울 옮김 / CRETA(크레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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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금껏 잘 작동하던 삶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일어나 회사에 나가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일상의 리듬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데도,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오랫동안 들어왔던 음악이 어느 순간부터 소음처럼 들리기 시작하듯이. 이것이 중년의 위기가 시작되는 방식이다. 노먼이라는 인물은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사회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너진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동안 자신이 구축해온 삶이 사실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비로소 직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카를 구스타프 융의 통찰이 빛을 발한다. 융은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본질적으로 다른 과제를 요구하는 두 개의 국면으로 보았다. 전반부의 삶은 바깥 세계를 향해 있다. 사회적 역할을 익히고, 직업을 얻고, 관계를 맺고, 가정을 꾸리는 일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 시기의 에너지는 대체로 외향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다. 그런데 중년에 이르면 이 방향이 뒤집힌다.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향해야 할 때가 온다. 지금까지 무시하거나 억압해왔던 내면의 목소리들이 마침내 들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년의 위기는 단순한 병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면이 보내는 신호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변해야 한다는, 아직 만나지 못한 자기 자신과 조우해야 한다는 신호. 노먼이 분석실 문을 두드린 것은 패배가 아니라, 어쩌면 그의 삶에서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융은 이것을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본래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융은 이를 빌려와 우리가 사회와 상호작용하기 위해 발전시킨 외적 인격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페르소나는 나쁜 것이 아니다. 사회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가면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가면을 자신의 진짜 얼굴로 착각할 때 시작된다. 노먼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좋은 남편', '책임감 있는 아버지', '유능한 세일즈맨'이라는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왔다. 그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자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중년에 이르러 그 가면들이 갑자기 얼굴에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는 충격에 빠진다. 가면 뒤에 있는 진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실 그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 현대 사회는 페르소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취업 면접에서는 '강점'만을 말해야 하고, SNS에서는 가장 빛나는 순간만을 공유하며, 사람들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이 환경에서 우리는 점점 더 두꺼운 가면을 쓰는 법을 익힌다. 그리고 그 가면이 충분히 두꺼워졌을 때, 내면의 진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년의 위기는 종종 이 페르소나가 균열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더 이상 그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 혹은 연기를 계속할 의욕 자체를 잃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뒤에 있는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두렵고 낯설지만, 바로 이 만남이 진정한 자기 발견의 출발점이 된다.


페르소나가 우리가 세상에 내보이는 모습이라면, 그림자는 우리가 보이고 싶지 않아 숨겨온 모든 것들이다. 의식이 거부하고 억압해온 욕구들, 충동들, 감정들, 특성들이 그림자를 이룬다. 그림자는 부정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사회가 허용하지 않거나 자신이 감당하기 두렵다고 느껴서 억눌러온 긍정적인 잠재력들도 그 안에 잠들어 있다. 그림자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할수록 더욱 강해진다. 의식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면, 그림자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특정 사람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이나 혐오, 반복되는 실수와 자기파괴적인 행동 패턴,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편한 특성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노먼이 아내 낸시에게 집착하며 그녀의 감정 상태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결정되는 것도, 융의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내면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결과였다. 융 분석이 요구하는 가장 힘든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이 그림자와의 대면이다. 분석실에서 환자는 자신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부분들과 조우하게 된다. 샤프는 이 과정을 '그림자와 악수하기'라고 표현한다. 단순히 그림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림자를 통합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더 완전하고 솔직한 이해를 얻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해 위에서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해진다. 중년에 이르러 그림자와 대면하는 것은 젊었을 때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 된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억압의 층위가 두껍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년은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과 성숙함을 갖추는 시기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에는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의 억압이 필요했다. 이제는 그 억압을 조금씩 풀어낼 때다.


융은 남성의 무의식 속에는 여성적인 원형적 이미지가, 여성의 무의식 속에는 남성적인 원형적 이미지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전자를 아니마, 후자를 아니무스라고 불렀다. 이 개념은 '남성도 여성적인 면이 있다' 혹은 '여성도 남성적인 면이 있다'는 식의 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심리 구조 속에 깃든 타자성, 즉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내면의 이질적인 차원에 관한 것이다. 아니마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대인 관계, 특히 친밀한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아니마를 인식하지 못하는 남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성적 이미지를 실제 여성에게 투사한다. 연애의 초기에 상대방에게 비현실적으로 매료되는 것, 이상화했다가 幻滅하는 반복적 패턴, 특정 유형의 여성에 대한 강박적인 끌림, 이 모두가 투사된 아니마의 표현일 수 있다. 노먼과 낸시의 관계는 이 역학의 전형적인 예다. 노먼이 낸시에게 보이는 집착적인 의존성, 그녀의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끊어내지 못하는 관계는 단순히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낸시라는 실제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니마를 그녀 위에 덧씌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분석을 통해 이 투사를 거두어들이는 작업, 즉 낸시는 낸시이고 자신의 내면적 이미지는 별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그의 성장의 일부였다. 아니마를 인식하고 통합한다는 것은 관계에서의 투사를 거두어들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자기 내면의 풍부함을 발견하는 일이다. 억눌러온 감수성, 직관, 창의성, 연결에 대한 욕구 — 이런 것들이 아니마의 영역에 속한다. 중년 이후의 삶에서 이것들을 되찾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치유가 아니라, 삶 자체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다.


융이 심리적 성숙의 목표로 제시한 개성화(individuation)는 종종 오해를 받는 개념이다. '더 강해지는 것', '완전한 자아실현', 혹은 '완벽한 심리적 균형에 도달하는 것' 같은 이미지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융이 말한 개성화는 그런 거창한 도달점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이고 방향이며, 분열된 것들을 하나로 통합해나가는 끊임없는 작업이다. 개성화의 핵심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 즉 외부의 기대나 역할 대신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림자를 인식하고, 투사를 회수하고,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와 관계를 맺고, 자아(ego)와 더 큰 자기(Self) 사이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작업들이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선형으로 반복되고, 퇴행하고, 다시 진전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펼쳐진다.

오늘날 중년의 위기는 여러 방식으로 표출된다. 충동적인 이직, 갑작스러운 관계의 파탄,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 이유를 모를 분노나 슬픔. 이것들을 단순한 호르몬의 문제나 의지력의 부족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쉬운 답이다. 융의 시각에서 이것들은 내면이 보내는 메시지다. '이제는 나를 좀 들여다보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할 때'라는 신호다. 책을 덮으며 남는 것은 한 가지 확신이다. 무너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는 것. 위기는 변장한 초대장일 수 있다는 것. 그 초대에 응할 용기, 낯설고 두려운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갈 용기가 두 번째 삶의 시작이다. 그 여정은 빠르지도 않고, 쉽지도 않고, 보장된 결말이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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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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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에서 마주한 캠핑장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충격적이어야 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서 더 슬펐다. 코끼리 코 열 바퀴를 돌아야 하는 게임에서 여덟 바퀴만 돌고 깃발을 선취한 아이가 1등을 했다. 그 아이의 부모와 운영진이 친한 사이였기에 아무도 항의하지 못했고, 정직하게 규칙을 지킨 아이들은 의기소침해졌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분노 보다 깊은 허탈함을 느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이런 장면을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 지어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도. 공정하다고 믿었던 경쟁이 사실은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었다는 것을. 규칙은 힘없는 자만 지키면 되고, 연줄과 배경이 실력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위조된 표창장'이라고 표현했다. 얼마나 정확한 비유인가.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표창장을 나눠주면서도, 그것이 진짜 노력의 결과인지는 묻지 않는다. 아니, 묻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이 시스템의 공범이거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불편했다. 그것은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이 나를 향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어떤 부모인가? 나는 정말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역시 내 아이만을 위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탐욕스러운 돌봄'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한동안 그 단어를 곱씹었다. 탐욕과 돌봄. 이 두 단어가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 돌봄은 본래 가장 순수하고 이타적인 행위여야 하는데, 그것이 탐욕이 될 수 있다니. 하지만 책을 읽어 가면서 나는 점점 더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동시에 내 안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우리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은 진심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오직 내 아이만을 향할 때, 그것은 어느새 사랑이 아니라 탐욕이 되어버 린다. 저자가 소개한 '탐스러운 결혼'이라는 사회학 용어처럼,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내 아이, 내 가족. 그 바깥의 세계는 경쟁자이거나 무관심의 대상일 뿐이다. 이웃의 아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다른 가정이 돌봄의 어려움으로 무너지는 것은 그들의 문제라고 치부한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내 주변의 사람들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에 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한다. 더 나은 교육환경, 더 많은 경험, 더 풍부한 기회.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다. 내 아이의 성공을 위해 다른 아이의 기회를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 내 아이 의 표창장을 위해 다른 아이들이 들러리가 되는 것을 묵인할 때, 우리는 이미 사랑의 영역을 벗어나 탐욕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다.

책에는 초등학교 때 이미 장래희망을 명확히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컨설턴트 이야기. 적성이나 진로를 천천히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입시라는 목표를 향해 최단거리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돌봄'의 실체다. 여행도 '사진과 경험'에서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할 만한 콘텐츠'로 변질된다. 그 정점이 바로 '··에서 한 달 살기'라 는 저자의 지적은 얼마나 냉소적이면서도 정확한가. 관광에서 체험으로, 체험에서 생활로 부모의 과제는 수시로 갱신되지만, 그 모든 것의 목적은 결국 하나다. 대학입시다.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아이들의 삶을, 아이들의 시간을, 아이들의 경험을 모두 입시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도구화하고 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학교생활기록부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다. 우리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이를 경쟁의 도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행복보다 아이의 성공을, 아이의 현재보다 아이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이것이 아이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불안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내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마음이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동력으로 삼기에, 아무리 성실하게 내달려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인 것은 아닐까?

책을 덮으며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저자가 던진 질문들은 답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한 명의 어른도,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사회. 누구나 충분한 기회를 얻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 돌봄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공동체 전체로 확장되는 곳. 샤오메이가 더 이상 NPC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세상. 열 바퀴를 정직하게 돌고도 웃을 수 있는 아이들, 부모의 경제력이나 배경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 로 평가받는 청년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이상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부터 작은 것이라도 시작하려 한다. 내 아이에게 남들 다 한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 것, 다른 아이 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 불공정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 침묵하지 않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결국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책은 육아서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어른들을 위한 성찰서다. 부모든 아니든,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탐욕이 아니라 진정한 돌봄으로, 지성보다는 용기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 나아갈 때 비로소 다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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