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 삶이 흔들릴 때 꺼내 읽는 문장들
부아c 지음 / 페이지2(page2)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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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웠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주말에 집에만 있으면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SNS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즐거운 모임을 보여주고, 우리는 그 화면 앞에서 스스로를 소외된 존재로 느낀다. 하지만 정말 외로움은 우리가 피해야 할 감정일까? 외롭다는 것은 사실 우리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 거다. 어린 시절에는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족과 함께하며,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고,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바로 고독이다. <외롭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를 읽으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관계를 요구한다. 직장 동료, 동창회, 동호회,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우리의 연락처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만, 정작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피상적인 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시간을 때우기 위한 만남, 의무적인 사교, 형식적인 대화에서는 진정한 교감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더 큰 공허함을 경험한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외롭다면, 그것은 당신이 더 깊고 진실한 연결을 갈망하고 있다는 신호다. 진정한 관계는 양이 아닌 질로 측정된다. 백 명의 지인보다 한 명의 친구가 더 소중할 수 있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당신이 이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단지 외로움을 메우기 위해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 진심어린 대화, 깊이 있는 이해, 서로의 취약함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 이것은 성숙한 인간관계에 대한 건강한 욕구다.

외로움은 우리를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함께 있고, 무언가를 하고,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가? 내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 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은 고요한 시간 속에서만 제대로 답할 수 있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 사회적 기대와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 외로움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필요한 경험이다. 마치 근육이 운동 후 느끼는 통증처럼, 외로움은 성장통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키우며, 진정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는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대부분 고독 속에서 탄생했다. 작가들은 홀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고, 화가들은 아틀리에에서 고독과 씨름하며 작품을 완성했다. 과학자들은 연구실에서 혼자 실험을 반복했고, 철학자들은 고요한 산책 속에서 사색했다. 창조적인 작업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과정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혼자만의 시간에 찾아온다. 깊은 집중은 외부의 소음이 차단되었을 때 가능하다.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외롭다면, 아마도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것이 예술작품이든, 사업 아이디어든, 개인적인 프로젝트든, 혹은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과정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길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의 외로움은 종종 선택의 결과다. 우리는 편안하지만 의미 없는 관계 대신 진정성을 선택했다. 인기보다 진실을 선택했다. 모두가 가는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대신 자신이 진정 하고 싶 은 일을 선택한 사람은 외롭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길을 가는 동료는 많지 않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정해진 코스를 밟지 않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도 외롭다. 명절마다 듣는 잔소리와 이상한 시선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이 외로움은 타협하지 않은 삶의 대가다. 남들 눈에 맞추어 살면 외롭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자신을 잃게 될 것이다. 외로움을 느낀다면, 당신은 적어도 자신에게 정직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립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고립은 관계의 부재이지만, 외로움은 더 깊은 연결을 향한 갈망이다. 고립된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지만, 외로운 사람은 의미 있는 관계를 찾고 있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당신이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단지 피상적인 연결이 아닌, 진정한 교감을 원할 뿐이다. 이것은 건강한 욕구다. 문제는 외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외로움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외로움을 회피하기 위해 무의미한 관계로 시간을 채우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며,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외롭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성장하고 있고, 진정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쉬운 선택이 아닌 옳은 선택을 하고 있다. 외로움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다.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창조하며, 성장한다. 물론 외로움이 항상 편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힘들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있는 고통이다. 근육이 자라는 과정에서 느끼는 통증처럼, 외로움은 우리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다. 다음에 외로움이 찾아온다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겠다. 그 외로움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더 깊고 의미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표시다. 외로움은 피해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동반자다. 진정으로 외롭지 않은 삶은 나 자신과 친구가 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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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의 한 뼘 더 깊은 세계사 : 중동 편 - 6,000년 중동사의 흐름이 단숨에 읽히는
저스티스(윤경록)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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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역사는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저스티스의 <한 뼘 더 깊은 세계사(중동 편)>은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뉴스에서 끊임없이 접하는 중동의 분쟁과 갈등이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에서 시작된 형제의 이야기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가족사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다. 본처 사라와 여종 하갈 사이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의 희생양이 된 이스마엘과 이삭. 저자는 이 이야기를 종교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이 상징이 현실에 미친 영향은 결코 상징적이지 않다.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랍인이 되고, 이삭의 후손이 유대인이 되었다는 서사는 수천 년간 두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슬람이 초기에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같은 계열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꾸란에도 성경을 받은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들은 세금만 낸다면 공존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밀레트 제도나 지즈야 같은 시스템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차별적이지만, 당시로서는 나름의 공존 방식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수백 년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을 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유연성 덕분이었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이 유연성은 점차 경직되었고, 특히 근대 이후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공존의 틀은 완전히 무너졌다.

유대인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들의 생존력이다.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135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 이후 완전히 땅을 잃은 민족이 어떻게 2,000년 가까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저자가 언급한 제주 삼별초의 비유처럼, 그들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아니, 항복할 수 없었다. 땅을 잃은 민족에게 남은 것은 신앙과 공동체뿐이었다. 밀라노 칙령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었다는 대목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오히려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낙인이 찍힌 유대인들은 로마 사회에서 시민의 기본권마저 박탈당했다. 농사를 짓거나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제약을 오히려 기회로 바꾸었다. 상업과 금융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대 상인들의 네트워크는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로에서 그들은 중개자이자 촉진자였다. 흩어져 있었지만 그 흩어짐이 오히려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급부상에 유대인의 역할이 컸다는 언급은 디아스포라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의외였던 부분은 몽골 제국이 중동 역사에 미친 영향이다. 13세기와 14세기,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의 정복 활동은 중동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압바스 왕조가 당나라를 물리친 후 제지 기술이 서쪽으로 전파된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몽골이 화레즘 제국을 무너뜨리고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사건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지적처럼 이는 세계사가 여전히 서양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 제국의 위세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지만, 그들의 역사는 서양사의 주류에서 비껴나 있다. 그러나 몽골의 정복이 없었다면 중동의 이슬람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이고, 티무르 제국 같은 독특한 문화 융합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티무르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사마르칸트를 동방의 문화 수도로 만든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이면서 동시에 무자비한 정복 전쟁으로 수많은 도시를 파괴한 폭군. 이런 양면성은 비단 티무르만의 것이 아니다. 역사 속 많은 정복자들이 그랬고, 어쩌면 모든 제국이 그런 모순을 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명은 때로 폭력을 통해 전파되었고, 문화 교류는 종종 정복의 결과였다.

20세기 이란의 역사는 급진적 근대화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팔라비 왕조의 백색혁명은 표면적으로는 토지개혁, 여성 참정권 확대, 교육과 보건 개선 등 진보적인 목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있었고, 전통적 지주 계층과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억압하기 위한 공포정치가 있었다. 사바크라는 비밀경찰 조직이 CIA와 모사드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개혁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반대 세력을 고문하고 암살하는 모순적 상황. 이것이 결국 1979년 이란혁명으로 이어졌고, 호메이니가 이끄는 종교 국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만약 팔라비가 좀 더 점진적으로, 그리고 공포정치 없이 개혁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움이 남는다. 자유로운 복장의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1970년대 이란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의 이란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급진적 서구화에 대한 반발이 극단적 종교 국가를 낳았다는 역설. 이것은 문명의 충돌이 단순히 외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에서도 비롯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린 질문은 "왜 역사는 반복되는가"였다. 형제에서 시작된 갈등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 제국에 의해 땅을 잃은 유대인들이 2,000년 만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 살던 아랍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시오니즘 운동이 유대인에게는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는 아이러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동의 역사를 보면서 느낀 것은, 진정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다. 십자군 전쟁, 몽골의 침략, 오스만 제국의 흥망,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문제까지. 각각의 사건 속에서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싸웠고, 누군가는 정체성을 지키려 했으며, 누군가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 했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는 억압이 아닌 조율과 절충을 통한 공존의 모델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함께 살 수 있는 틀을 제공했다. 오늘날의 중동이 이런 포용의 원리를 되살릴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책은 중동사를 다루지만, 결국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생존과 번영, 갈등과 공존, 정체성과 변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인류 최초의 문명이 6,000년의 시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경이롭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중동을 '저 먼 곳'의 이야기로 치부하지만,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몽골의 정복이 중동에도 영향을 미쳤듯이, 역사는 연결되어 있다. 13세기 몽골족의 활동이 한국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중동의 역사는 곧 세계사이고, 세계사는 결국 우리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책을 덮으며 다시 한번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형제였듯이, 유대인과 아랍인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지금의 끝없는 갈등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가 그토록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쉬운 해답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중동의 6,000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겁지만, 그 질문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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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소한 갈등
민현기 지음 / Book Insight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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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갈등을 싫어한다. 불편하고, 피곤하고,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 그러나 돌이켜보면 갈등 없는 관계란 실은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런 마찰 없이 매끄럽게만 흘러가는 만남은 진짜 만남이라기보다 예의상 주고받는 인사에 가깝다. 진심이 오가는 곳엔 언제나 어긋남이 있고, 그 어긋남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간다. 갈등을 바람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불어오는 것이다. 어떤 바람은 부드럽게 등을 밀어주지만, 어떤 바람은 거세게 흔들어댄다. 중요한 것은 바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돛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갈등 역시 마찬가지다. 없앨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관리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그것을 다룰 여지가 생긴다. 생각해보면 갈등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말투 하나, 표정 하나, 무심코 던진 한마디. 그 자체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켜켜이 쌓여 어느새 거대한 벽이 된다. 누군가는 이를 과장이라 할지 모르지만, 관계 속에서 작은 상처들이 모여 큰 균열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문제는 그 균열이 서서히 진행된다는 점이다. 오늘 당장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물감이 번지듯 조금씩 스며들다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갈등 앞에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우리의 뇌는 위협을 감지하면 생존 모드로 전환되고, 그 순간 논리와 이해는 뒷전이 된다. 상대의 말보다 그 말이 내게 어떻게 들렸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그 감정에 휩싸여 우리는 방어하고 공격한다. 하지만 감정은 파도와 같아서, 아무리 높이 솟아올라도 결국엔 잠잠해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 파도를 계속 일으킨다는 것이다. 똑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그때 했어야 할 말을 되새기며 감정을 재생산한다. 그렇게 90초면 충분히 가라앉을 감정을 몇 시간, 며칠, 때로는 몇 년씩 붙들고 산다. 감정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것이다. 다만 그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 않는 연습은 할 수 있다.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추고,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이름을 붙여보는 것. 그 작은 거리두기만으로도 감정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속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착각한다. 늦게 오는 친구를 보며 성의 없다고 판단하고, 말을 아끼는 동료를 보며 비협조적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그 행동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맥락이 있다. 친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수 있고, 동료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일 수 있다. 갈등을 제대로 보려면 렌즈를 바꿔야 한다. 표면에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그 안의 맥락을, 행동이 아니라 욕구를 봐야 한다.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닌지, 그 사람이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판단에서 이해로 이끈다. 존중이란 결국 '다시 보는 것'이다. 한 번 보고 결론 내리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살피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갈등을 관계 회복의 기회로 바꾸는 열쇠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해야 한다.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참으면 배려처럼 보이지만, 실은 회피에 가깝다. 상대가 알아주길 기대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그렇게 쌓인 감정은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터져나온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상대는 당황한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라고. 갈등을 줄이려면 먼저 말해야 한다. 내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놓는 것, 그것이 상대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된다. 물론 어떻게 말하느냐도 중요하다. 판단하듯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서 묻는 것,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전하는 것. 이런 작은 차이가 대화를 공격이 아닌 소통으로 만든다.

갈등을 한자로 쓰면 칡 갈(葛)에 등나무 등(藤)이다. 두 덩굴이 서로 엉켜있는 모습. 이 표현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갈등은 뿌리부터 다른 두 나무의 전쟁이 아니라, 함께 자라다 보니 어느새 엉켜버린 덩굴이다.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하나씩 풀어가면 결국 각자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엉킨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없는 척하거나 외면한다고 풀리지 않는다.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마주 보고, 어디서부터 엉켰는지 살피고, 천천히 풀어가야 한다. 때로는 함께 풀어야 하고, 때로는 각자의 공간이 필요하다. 정답은 없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것, 그것이 관계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갈등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신호이자,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다.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자. 대신 그것을 다루는 법을 배우자. 덩굴은 아무리 엉켜도, 풀고자 하면 풀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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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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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옷, 누가 입겠지."

옷장을 정리하며 우리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조금 작아진 청바지, 유행이 지난 니트, 한 번도 입지 않은 셔츠를 비닐봉지에 담아 아파트 단지 한쪽에 놓인 의류 수거함으로 향한다. 초록색 철제 함에 옷을 밀어 넣는 순간, 우리의 책임은 거기서 끝난다. 혹은 끝났다고 믿는다. 한국은 연간 30만 톤의 중고의류를 수출하는 세계 4위 수출국이다. 그런데 공식 통계상 우리나라에서 수거되는 폐의류는 연간 10만 톤에 불과하다. 이 기묘한 불균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거함에 넣은 옷보다 더 많은 옷이 국경을 넘어간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이 옷들을 모으고, 분류하고, 선적하여 먼 나라로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취재진이 추적기를 옷에 달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불투명함 때문이었다. 슬로베니아의 탐사보도 언론이 플라스틱병과 전자제품에 추적기를 부착해 쓰레기의 여정을 따라간 사례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작동하는 적절한 추적 장비를 찾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위성 GPS는 너무 크거나 비쌌고, 저렴한 기기는 국경을 넘으면 작동하지 않았다.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졌다.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태그였다. 이 작은 장치는 GPS 없이도 주변 120미터 내 갤럭시 스마트폰과 블루투스로 교신해 위치를 알려준다. 동남아시아에서 갤럭시 점유율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활용 가능한 방법이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스마트태그 98개와 GPS 추적기 55개, 총 153개의 장치를 확보했다.

다음 과제는 옷을 구하는 일이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여온 배우 김석훈과 박진희, 방송인 줄리안, 크라잉넛의 한경록, 그리고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의 저자 이소연이 기꺼이 자신의 옷을 내놓았다. 기자들의 옷과 신발, 한 단체가 버리려던 의류까지 더해져 153벌의 실험 대상이 모였다. 가장 까다로운 작업은 추적기를 옷에 부착하는 일이었다. 접착제는 천과 신발 재질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선택한 방법은 바느질이었다. 올따개로 소매의 올을 뜯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추적기를 넣은 뒤 다시 꿰매는 방식이다. 무더운 여름날, 30시간이 넘는 작업 끝에 모든 옷에 추적기를 달았다. 미싱 기술을 가진 취재진의 배우자까지 동원된 대역사였다.

2024년 8월, 전국 각지의 의류 수거함에 추적기 달린 옷 153벌을 투입했다. 도심과 시골,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안배했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수출업체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옷이 국외에 도착하는 데 최소 한 달 반 이상 걸린다고 했다. 과연 이 작은 장치들이 먼 이국땅에서 신호를 보내올까? 4개월 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53벌 중 47벌(30.7%)이 국외에서 발견되었다. 김석훈이 기부한 검은색 바지는 말레이시아 조호르주의 파시르 구당 항구 컨테이너 창고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서울 마포구에서 출발해 4,500km를 이동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동용 운동화였다. 한국에서 17,340km 떨어진 볼리비아 파타카마야, 해발 3,800m 고산지대의 작은 마을 공터에서 발견되었다. 옷들이 가장 많이 도착한 곳은 말레이시아(11벌)와 인도(11벌)였다. 말레이시아로 간 옷 중 8개는 항구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수출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로 간 헌 옷의 90%는 주변국으로 재수출된다. 가장 많이 가는 곳은 중고의류 수입을 규제하는 인도네시아다. 말레이시아를 경유하는 것이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인 것이다. 인도로 간 11벌 중 9벌은 '헌 옷의 수도'라 불리는 파니파트시로 향했다. 이 도시는 세계에서 하루 250톤의 옷이 유입되어 재활용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필리핀으로 간 옷들은 지도상 좌표조차 불분명한 시골이나 창고에서 신호를 보냈다. 타이로 간 신발과 바지는 캄보디아 국경의 롱끌르아 시장에서, 페루로 간 베레모는 볼리비아 국경 근처 산골 마을로 이동했다. 흥미로운 점은 옷들이 도착한 국가 대부분이 중고의류 수입을 금지하거나 제한한다는 사실이다. 인도네시아는 2015년부터, 필리핀은 1960년대부터 헌 옷 수입을 금지했다. 페루와 볼리비아도 수입을 제한한다. 그럼에도 한국의 옷들은 편법과 불법을 통해 이 규제를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선진국의 중고의류가 개발도상국으로 흘러가는 전 지구적 흐름과 정확히 일치하는 패턴이었다.

타이 아라냐쁘라시의 쓰레기 매립지. 옷과 신발, 생활 폐기물이 오랫동안 뒤섞여 쌓인 쓰레기 산이다. 땅을 빈틈없이 메운 구더기와 하늘을 가득 메운 까마귀 떼, 수도 없이 날아다니는 파리. 이곳에서 한국에서 보낸 신발을 찾던 중, 한 어린아이와 조우했다. 매립지를 관리하는 노동자의 자녀로 보이는 이 아이는 서너 살쯤 되어 보였다. 외국인이 신기한지 호기심 섞인 눈망울로 바라보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바닥에 구더기가 가득한 터라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레 걷던 나와 달리, 아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발보다 큰 신발을 신어 종종 신발이 벗겨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땅을 디디며 걸음을 이어갔다. 혹여 구더기를 맨발로 밟을까 마음을 졸였지만, 정작 아이는 덤덤했다. 이 아이에게 쓰레기 매립지는 익숙한 공간이었다.

나는 아이를 향한 시선을 쉬이 거두지 못했다. 아이의 눈망울에는 알록달록한 자연이 아니라 구더기와 파리가 가득 메운 공간이, 거친 들개와 까마귀 떼가, 하늘로 치솟은 쓰레기 산이 어렸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아이에게 '세상'은 '쓰레기 산'이 전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에서 3,500km 떨어진 이곳. 내가 평소에 입고 신다가 쉽게 버린 의류와 신발이 이 쓰레기 산을 더 높이 쌓고 있었다. 파니파트 표백 공장의 네 아이들, 타이 매립지의 이 아이. 어른이 된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는 옷을 너무 쉽게 산다. 그리고 너무 쉽게 버린다. '재활용되겠지' '누군가 입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는 현실이 아니었다. 153개의 추적기가 보여준 진실은 명확했다. 우리가 외면해온 불편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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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어인 문장의 힘 - 하루 10분 필사, 당신의 미래가 바뀐다
케이크 팀 지음 / 케이크 / 202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필사라는 행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낡은 수첩에 또박또박 글씨를 옮겨 적던 모습이다. 책을 보시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반드시 손수 베껴 쓰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복사기도 있고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으면 되는데 왜 굳이 시간을 들여 옮겨 적으시나 싶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 역시 펜을 들고 타인의 문장을 따라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필사는 언어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유독 필사책이라는 장르가 큰 인기를 끌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다양한 형태의 필사 전 책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SNS에는 예쁜 글씨로 옮겨 쓴 문장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받았던 책들은 대부분 사철제본 방식으로 만들어진 리커버 에디션이었다. 사철제본이란, 책의 각 장을 실로 꿰매어 묶는 전통적인 제본 방식을 말한다. 이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은 180도로 완전히 펼쳐지기 때문에 필사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책장 사이의 골이 깊지 않아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고, 펜을 움직이는 동선이 자연스럽다. 리커버 에디션이란 기존에 출간되었던 책을 새로운 디자인과 구성으로 재출간한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표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내지 구성이나 종이 질감, 여백의 배치까지 세심하게 다시 설계한다. 특히 필사책의 경우, 손글씨를 쓰기 좋은 용지와 적절한 줄 간격, 그리고 필사 공간의 배치가 중요하기 때문에 리커버 과정에서 이런 요소들이 면밀히 고려된다. 원문과 번역, 그리고 내가 직접 쓰는 공간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가 하나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책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인 패턴이 보인다. 먼저 유명 인물이나 작가의 명언이 제시되고, 원문이 영어라면 함께 수록된다. 그리고 나서 직접 그 문장을 따라 쓸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펼쳐진다. 여기에 더해, 해당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는 '나의 말' 영역까지 포함되어 있다. 스스로가 문장의 의미를 내면화하고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도록 유도한다.

필사의 힘은 반복에서 나온다. 같은 문장을 매일 아침 펜으로 옮겨 적다 보면, 처음에는 그저 예쁜 말처럼 느껴졌던 구절이 어느 순간 내 안으로 스며든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다"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평범한 자기계발서의 클리셰처럼 들렸다. 하지만 열흘, 스무날 연속으로 그 문장을 손으로 써 내려가다 보니 달라졌다. 손끝에서 시작된 진동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문장이 단순히 눈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보가 아니라, 몸의 일부가 되는 경험이었다. 필사책이 제공하는 또 하나의 가치는 일상 속 정박지 역할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수많은 정보를 소비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부족하다. 아침마다 10분씩 책을 펼치고 문장을 쓰는 시간은, 그 자체로 하루를 정리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의식이 된다. 사실 필사라는 행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 책을 보급하는 유일한 방법은 손으로 베껴 쓰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필경사들은 평생을 바쳐 성경을 필사했고, 동양에서도 경전과 서적을 옮겨 적는 일은 수양의 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디지털 시대에 다시 필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역설적이다. 우리가 정보 과잉의 시대를 살면서 오히려 느림과 집중의 가치를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캡처하고 저장하는 것은 쉽지만, 그 문장이 내 안에 남지 않는다. 반면 손으로 직접 쓴 문장은 기억 속에 각인된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감동받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삶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필사책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 하루 10분, 한 문장을 쓰는 것. 이 작은 행동이 쌓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삶의 태도를 바꾼다. "나는 미루지 않는다. 지금 한다"는 문장을 매일 아침 쓰다 보면, 실제로 미루던 일들을 처리하게 된다. 문장이 선언이 되고, 선언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철제본으로 만들어진 필사책을 손에 쥐고 있으면, 책 자체가 주는 물성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실로 꿰맨 부분이 보이는데, 그 정교한 수작업의 흔적이 책에 대한 애정을 더한다. 무선제본이나 떡제본처럼 접착제로 붙인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풀이 떨어져 페이지가 분리되지만, 사철제본은 내구성이 뛰어나다. 오랜 시간 사용해도 튼튼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평생 곁에 두고 반복해서 펼칠 수 있다. 필사책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더해지는 기록물이다.

필사는 나 자신과의 대화다. 타인의 언어를 빌려 내 안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필사를 하면서 우리는 잠시 멈춘다. 쉼 없이 달려가던 일상에서 벗어나, 펜과 종이 앞에서 고요히 앉아 문장과 마주한다. 그 짧은 순간이 쌓여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꾼다.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마음을 거쳐 삶 전체로 확장된다. 어쩌면 필사책이 주는 진짜 선물은 완성된 책이 아니라, 매일 책을 펼치고 펜을 드는 그 순간들의 축적일지도 모른다. 오늘 쓴 한 문장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그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리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필사가 주는 진짜 의미다. 책의 의미가 정겹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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