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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불안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키렌 슈나크 지음, 김진주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불안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걷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크고 작은 불안의 파편들이 우리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직장인의 떨리는 손, 시험 기간 학생의 조여 오는 가슴, 자녀의 귀가를 기다리는 부모의 초조함. 이 모든 순간에 불안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불안을 느끼면서도 정작 불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마치 매일 마주치는 이웃의 얼굴은 알지만 그 사람의 이름과 사연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불안과 함께 살면서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두려워하기만 한다. 그렇게 불안은 우리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때로는 그림자보다 더 크고 진하게 우리를 덮어버린다.
불안은 원래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충실한 경보 시스템이었다. 원시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불안은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게 해준 본능이었다.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뛰고, 근육이 긴장하며,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 이 반응 덕분에 인류는 위험을 피하고 종을 보존할 수 있었다. 불안은 우리에게 각인된 생존 본능의 유산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불안의 경보 시스템은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맹수와 마주칠 일은 없지만, 우리의 뇌는 여전히 위협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상사의 날카로운 시선, 통장 잔고의 숫자, 소셜미디어의 타인과의 비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원시시대의 맹수 대신 현대적 위협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경보 시스템을 자극한다. 문제는 이런 위협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다. 경보음이 꺼질 틈이 없다.
불안은 단일한 감정이 아니다. 수많은 얼굴을 가진 변신의 귀재다. 어떤 이에게는 사회적 상황에서 얼어붙게 만드는 사회불안으로 나타나고, 또 다른 이에게는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공황발작으로 찾아온다. 건강에 대한 과도한 걱정으로 병원을 전전하게 만들기도 하고, 모든 일에 대해 끝없이 걱정하는 범불안장애로 드러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불안의 형태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는 사실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음에 대한 공포,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사고 패턴. 이런 공통된 토양 위에서 각자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의 불안이 싹튼다. 불안이 우리를 괴롭히는 방식도 다양하다. 신체적으로는 심장 박동수 증가, 호흡 곤란, 근육 긴장, 소화 불량 등으로 나타난다. 정신적으로는 집중력 저하, 반복되는 걱정, 부정적 사고의 소용돌이를 만든다. 행동적으로는 회피, 안전 추구 행동, 완벽주의적 태도로 드러난다. 불안은 우리 존재의 모든 층위를 관통하며 영향을 미친다.
불안의 가장 교묘한 속임수는 스스로를 강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불안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려 한다. 사회적 상황이 불안하면 모임을 피하고, 건강이 걱정되면 끊임없이 증상을 확인하며,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우면 모든 가능성을 통제하려 든다. 이런 회피와 안전 추구 행동이 순간적으로는 불안을 줄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회피는 불안에게 "네가 옳아. 이 상황은 정말 위험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가 무언가를 피할 때마다 그것이 위험하다는 믿음이 강화된다. 더 나아가 회피는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사회적 상황을 피하면 피할수록 사회적 기술은 녹슬고, 다음번 상황은 더 두렵게 느껴진다. 이렇게 불안의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 생각을 억누르려는 시도 역시 역효과를 낳는다. 분홍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분홍색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불안한 생각을 밀어내려 할수록 그 생각은 더욱 집요하게 돌아온다. 불안은 우리가 싸우면 싸울수록 더 강해지는 상대다.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불안한 마음은 특정한 사고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 패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왜곡된 시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파국적 사고는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해석한다. 작은 실수 하나가 인생의 파국으로 이어질 것처럼 느껴진다. 발표 중 말을 더듬으면 "이제 모든 사람이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할 거야. 승진은 물 건너갔어. 결국 회사에서 쫓겨날 거야"라는 식으로 생각이 꼬리를 문다. 흑백 사고는 중간 지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으면 완전한 실패로 여긴다. 시험에서 100점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극단적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는 긴장 속에 가둔다. 완벽과 실패 사이에 숨 쉴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로 시작되는 질문들도 불안을 키운다. "만약에 내가 실패하면? 만약에 그들이 날 싫어하면? 만약에 나쁜 일이 생기면?" 이런 가정적 질문들은 끝이 없다. 하나의 '만약에'가 해결되면 또 다른 '만약에'가 등장한다. 불안한 마음은 확실성을 갈구하지만, 삶에서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이 괴리가 불안을 증폭시킨다.
불안을 극복하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불안과 싸우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수용이란 불안을 좋아하거나 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불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파도가 밀려올 때 맞서 싸우면 지치고 휩쓸리지만,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 "이건 생각일 뿐이야. 사실이 아니야"라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과의 거리가 생긴다. 생각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아, 지금 파국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구나" "이건 흑백 사고네" 하고 알아차리면, 그 생각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관찰자의 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지금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이 얕아지고 있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신기하게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도록 허용하면, 그 감정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자연스럽게 물러간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려 하면 그것은 압력솥처럼 내부에 축적되어 더 강렬하게 폭발한다.
불안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체 경험이다. 심장은 빨리 뛰고, 숨은 가빠지며, 근육은 긴장한다. 이런 신체 반응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려 하면 불안은 더욱 강해진다. 오히려 몸의 신호를 듣고 그에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호흡은 우리가 직접 조절할 수 있는 자율신경계의 몇 안 되는 통로다. 천천히 깊게 호흡하면 부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어 몸이 이완된다. 근육 이완법도 효과적이다. 몸의 각 부위를 의식적으로 긴장시켰다가 이완하면서 긴장과 이완의 차이를 느낀다. 이런 신체적 개입은 불안의 악순환을 끊는 구체적인 도구가 된다.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몸을 움직이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해되고, 엔도르핀이 분비되며, 신경계가 재조정된다. 불안으로 가득 찬 잔을 비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규칙적인 운동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을 넘어 불안에 대한 전반적인 회복탄력성을 높인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다. 경제 위기, 기후 변화, 팬데믹, 기술의 급속한 발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속에서 살아간다. 불안한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가능성을 예측하며, 확실성을 확보하려 애쓴다. 하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를 좇는 것과 같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은 훈련될 수 있다. 작은 불확실성부터 시작한다. 완벽하게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행동해보기, 모든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결정 내리기, 통제를 조금씩 내려놓기. 처음에는 불편하고 불안하겠지만, 점차 불확실성 속에서도 괜찮을 수 있다는 경험을 쌓게 된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통제 가능한 영역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지혜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현재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모든 위험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는 있다.
때로 불안의 뿌리는 과거에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 트라우마, 불안정한 애착 관계가 현재의 불안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왜곡시킨다. 어린 시절 비판받은 경험이 많았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민감할 수 있다.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다.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 갇혀서는 안 된다. "내가 이런 경험 때문에 불안한 거구나"라고 인식하는 것과 "그 경험 때문에 나는 평생 불안할 수밖에 없어"라고 체념하는 것은 다르다. 과거는 현재를 설명할 수 있지만, 결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과거의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현재에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은 폭풍우를 겪은 배를 수리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며,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리된 배는 다시 항해할 수 있다. 트라우마를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어떻게 통합하고 성장의 계기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불안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이다. 회피는 단기적 안도감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불안을 강화한다. 반대로 두려운 상황에 점진적으로 노출되면, 그것이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우게 된다. 이것을 노출 치료라고 한다. 노출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다. 작고 관리 가능한 단계부터 시작한다. 사회불안이 있다면 먼저 편한 사람과 대화하고, 점차 낯선 사람과의 상호작용으로 나아간다. 공황장애가 있다면 먼저 안전한 환경에서 불안 증상을 경험하고, 점차 더 도전적인 상황으로 확장한다. 각 단계에서 두려움이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며, 자신감이 쌓인다. 두려움을 마주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다. "나는 이것을 견딜 수 있구나" "생각보다 괜찮네" "나도 할 수 있어"라는 경험이 쌓이면서 불안의 영역은 줄어들고, 자유의 영역은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