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불안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키렌 슈나크 지음, 김진주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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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불안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걷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크고 작은 불안의 파편들이 우리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직장인의 떨리는 손, 시험 기간 학생의 조여 오는 가슴, 자녀의 귀가를 기다리는 부모의 초조함. 이 모든 순간에 불안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불안을 느끼면서도 정작 불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마치 매일 마주치는 이웃의 얼굴은 알지만 그 사람의 이름과 사연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불안과 함께 살면서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두려워하기만 한다. 그렇게 불안은 우리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때로는 그림자보다 더 크고 진하게 우리를 덮어버린다.


불안은 원래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충실한 경보 시스템이었다. 원시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불안은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게 해준 본능이었다.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뛰고, 근육이 긴장하며,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 이 반응 덕분에 인류는 위험을 피하고 종을 보존할 수 있었다. 불안은 우리에게 각인된 생존 본능의 유산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불안의 경보 시스템은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맹수와 마주칠 일은 없지만, 우리의 뇌는 여전히 위협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상사의 날카로운 시선, 통장 잔고의 숫자, 소셜미디어의 타인과의 비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원시시대의 맹수 대신 현대적 위협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경보 시스템을 자극한다. 문제는 이런 위협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다. 경보음이 꺼질 틈이 없다.


불안은 단일한 감정이 아니다. 수많은 얼굴을 가진 변신의 귀재다. 어떤 이에게는 사회적 상황에서 얼어붙게 만드는 사회불안으로 나타나고, 또 다른 이에게는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공황발작으로 찾아온다. 건강에 대한 과도한 걱정으로 병원을 전전하게 만들기도 하고, 모든 일에 대해 끝없이 걱정하는 범불안장애로 드러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불안의 형태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는 사실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음에 대한 공포,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사고 패턴. 이런 공통된 토양 위에서 각자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의 불안이 싹튼다. 불안이 우리를 괴롭히는 방식도 다양하다. 신체적으로는 심장 박동수 증가, 호흡 곤란, 근육 긴장, 소화 불량 등으로 나타난다. 정신적으로는 집중력 저하, 반복되는 걱정, 부정적 사고의 소용돌이를 만든다. 행동적으로는 회피, 안전 추구 행동, 완벽주의적 태도로 드러난다. 불안은 우리 존재의 모든 층위를 관통하며 영향을 미친다.


불안의 가장 교묘한 속임수는 스스로를 강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불안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려 한다. 사회적 상황이 불안하면 모임을 피하고, 건강이 걱정되면 끊임없이 증상을 확인하며,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우면 모든 가능성을 통제하려 든다. 이런 회피와 안전 추구 행동이 순간적으로는 불안을 줄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회피는 불안에게 "네가 옳아. 이 상황은 정말 위험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가 무언가를 피할 때마다 그것이 위험하다는 믿음이 강화된다. 더 나아가 회피는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사회적 상황을 피하면 피할수록 사회적 기술은 녹슬고, 다음번 상황은 더 두렵게 느껴진다. 이렇게 불안의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 생각을 억누르려는 시도 역시 역효과를 낳는다. 분홍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분홍색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불안한 생각을 밀어내려 할수록 그 생각은 더욱 집요하게 돌아온다. 불안은 우리가 싸우면 싸울수록 더 강해지는 상대다.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불안한 마음은 특정한 사고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 패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왜곡된 시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파국적 사고는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해석한다. 작은 실수 하나가 인생의 파국으로 이어질 것처럼 느껴진다. 발표 중 말을 더듬으면 "이제 모든 사람이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할 거야. 승진은 물 건너갔어. 결국 회사에서 쫓겨날 거야"라는 식으로 생각이 꼬리를 문다. 흑백 사고는 중간 지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으면 완전한 실패로 여긴다. 시험에서 100점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극단적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는 긴장 속에 가둔다. 완벽과 실패 사이에 숨 쉴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로 시작되는 질문들도 불안을 키운다. "만약에 내가 실패하면? 만약에 그들이 날 싫어하면? 만약에 나쁜 일이 생기면?" 이런 가정적 질문들은 끝이 없다. 하나의 '만약에'가 해결되면 또 다른 '만약에'가 등장한다. 불안한 마음은 확실성을 갈구하지만, 삶에서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이 괴리가 불안을 증폭시킨다.


불안을 극복하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불안과 싸우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수용이란 불안을 좋아하거나 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불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파도가 밀려올 때 맞서 싸우면 지치고 휩쓸리지만,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 "이건 생각일 뿐이야. 사실이 아니야"라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과의 거리가 생긴다. 생각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아, 지금 파국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구나" "이건 흑백 사고네" 하고 알아차리면, 그 생각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관찰자의 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지금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이 얕아지고 있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신기하게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도록 허용하면, 그 감정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자연스럽게 물러간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려 하면 그것은 압력솥처럼 내부에 축적되어 더 강렬하게 폭발한다.


불안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체 경험이다. 심장은 빨리 뛰고, 숨은 가빠지며, 근육은 긴장한다. 이런 신체 반응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려 하면 불안은 더욱 강해진다. 오히려 몸의 신호를 듣고 그에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호흡은 우리가 직접 조절할 수 있는 자율신경계의 몇 안 되는 통로다. 천천히 깊게 호흡하면 부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어 몸이 이완된다. 근육 이완법도 효과적이다. 몸의 각 부위를 의식적으로 긴장시켰다가 이완하면서 긴장과 이완의 차이를 느낀다. 이런 신체적 개입은 불안의 악순환을 끊는 구체적인 도구가 된다.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몸을 움직이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해되고, 엔도르핀이 분비되며, 신경계가 재조정된다. 불안으로 가득 찬 잔을 비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규칙적인 운동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을 넘어 불안에 대한 전반적인 회복탄력성을 높인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다. 경제 위기, 기후 변화, 팬데믹, 기술의 급속한 발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속에서 살아간다. 불안한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가능성을 예측하며, 확실성을 확보하려 애쓴다. 하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를 좇는 것과 같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은 훈련될 수 있다. 작은 불확실성부터 시작한다. 완벽하게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행동해보기, 모든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결정 내리기, 통제를 조금씩 내려놓기. 처음에는 불편하고 불안하겠지만, 점차 불확실성 속에서도 괜찮을 수 있다는 경험을 쌓게 된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통제 가능한 영역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지혜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현재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모든 위험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는 있다.


때로 불안의 뿌리는 과거에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 트라우마, 불안정한 애착 관계가 현재의 불안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왜곡시킨다. 어린 시절 비판받은 경험이 많았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민감할 수 있다.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다.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 갇혀서는 안 된다. "내가 이런 경험 때문에 불안한 거구나"라고 인식하는 것과 "그 경험 때문에 나는 평생 불안할 수밖에 없어"라고 체념하는 것은 다르다. 과거는 현재를 설명할 수 있지만, 결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과거의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현재에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은 폭풍우를 겪은 배를 수리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며,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리된 배는 다시 항해할 수 있다. 트라우마를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어떻게 통합하고 성장의 계기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불안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이다. 회피는 단기적 안도감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불안을 강화한다. 반대로 두려운 상황에 점진적으로 노출되면, 그것이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우게 된다. 이것을 노출 치료라고 한다. 노출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다. 작고 관리 가능한 단계부터 시작한다. 사회불안이 있다면 먼저 편한 사람과 대화하고, 점차 낯선 사람과의 상호작용으로 나아간다. 공황장애가 있다면 먼저 안전한 환경에서 불안 증상을 경험하고, 점차 더 도전적인 상황으로 확장한다. 각 단계에서 두려움이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며, 자신감이 쌓인다. 두려움을 마주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다. "나는 이것을 견딜 수 있구나" "생각보다 괜찮네" "나도 할 수 있어"라는 경험이 쌓이면서 불안의 영역은 줄어들고, 자유의 영역은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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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쇼크 - 삼성은 몰락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세상을 뒤흔들 것인가?!
이채윤 지음 / 창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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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은 두 개의 주춧돌 위에 서 있었다. 하나는 전 세계 디지털 문명의 혈관을 흐르는 반도체, 다른 하나는 수십억 인류의 손안에서 빛나는 스마트폰. 이 두 축이 견고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 삼성은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산업 제국의 정점에 있었다. 반도체는 막대한 현금 흐름과 기술 패권을 가져다주었고, 갤럭시 시리즈는 브랜드의 존재감과 소비자 접점을 확보해주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이 두 기둥에서 동시에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균열의 징후였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로 삼성을 밀어냈고,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핵심 부품인 HBM 메모리에서 먼저 엔비디아의 손을 잡았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MZ세대가 갤럭시 대신 아이폰을 문화적 아이콘으로 선택했다. '삼성 쇼크'라는 말이 증권가와 언론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실적 부진이 아니라 제국의 구조적 위기를 암시하는 신호탄이었다. 저자는 이 위기의 본질을 기술 경쟁의 패배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직의 유연성 상실, 고객 중심 사고의 부재, 과감한 베팅을 주저하는 관료적 의사결정 구조. 삼성이 쌓아올린 규모와 시스템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반도체 산업의 게임 규칙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누가 더 미세한 공정을 먼저 구현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였다. 7나노, 5나노, 3나노로 이어지는 경쟁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기업이 시장의 왕좌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제 전선은 이동했다. 공정 미세화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진짜 승부처는 '패키징'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갔다. 패키징은 단순히 칩을 묶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 전체의 성능과 효율을 결정하는 최종 전장이다. 엔비디아 같은 팹리스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더 이상 단일 칩이 아니라, 칩과 메모리와 패키징이 완벽하게 통합된 '턴키 솔루션'이다. 설계부터 양산, 패키징, 테스트까지 모든 과정을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 TSMC가 이 영역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이유는 단순히 기술이 앞서서가 아니라, 고객의 요구를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생태계를 먼저 구축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 게임의 룰 변화를 뒤늦게 인식했다. HBM 메모리 시장에서의 고전이 그 상징적 사례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긴밀히 협력하며 AI 붐의 초기 단계부터 HBM3를 공급했다. 반면 삼성은 기술적 완성도와 수율을 높이는 데 집중하느라 시장 진입 타이밍을 놓쳤다. 결과는 명확했다. 하이닉스가 AI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는 동안, 삼성은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기술 격차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첩성의 문제였고, 리스크를 감수하는 용기의 문제였으며, 고객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능력의 차이였다. 삼성의 규모는 여전히 강점이지만, 그 규모가 만들어낸 관료주의와 느린 의사결정은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치명적 약점이 되었다.

이재용 회장이 내세운 '초격차'와 '초연결'은 구호만이 아니다. 그것은 삼성이 나아갈 방향을 정의하는 철학이자,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전략적 언어다. 아버지 이건희의 시대가 '신경영'과 '품질 혁명'으로 조직 내부를 뒤흔들었다면, 아들 이재용의 시대는 글로벌 생태계 속에서 삼성의 위치를 재정의하는 작업이다. 초격차는 경쟁자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선언이다. 3나노 공정, HBM4 메모리, 첨단 패키징 기술, 6G 통신. 이 모든 영역에서 삼성은 단순히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야심이 과거의 기술 중심주의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초격차는 기술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고객과의 신뢰, 파트너십의 깊이, 생태계 전체를 조율하는 능력이 함께해야 한다. 초연결은 더 흥미로운 개념이다. 5G를 넘어 6G로, 스마트폰을 넘어 IoT와 Home AI로 확장되는 연결의 세계. 삼성은 더 이상 하드웨어 제조사로 머물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갤럭시 스마트폰, 가전제품, 자동차 전장 시스템, 로봇, 의료 기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이는 미래.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 삼성이 서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초연결에는 위험도 따라온다. 개인정보 침해, 감시 사회로의 전락, 중앙집중화된 권력 구조. 이런 우려들을 삼성은 '녹스(Knox)'라는 보안 체계로 대응하려 한다. 보안 없는 연결은 불안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보안으로 보호되는 연결은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저자는 이 철학이 마케팅 문구를 넘어, 삼성이 구축하려는 미래 산업 생태계의 청사진임을 보여준다.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은 이건희와는 다르다. 아버지가 조직 내부를 뒤흔드는 카리스마형 리더였다면, 아들은 글로벌 무대에서 조용히 네트워크를 쌓아가는 협상가형 리더다. 그의 출장 일정은 단순한 스케줄이 아니라 삼성의 미래 전략을 읽는 지도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엔비디아, 메타, 퀄컴의 최고경영자들과 만나 차세대 칩 협력을 논의한다. 워싱턴에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반도체 보조금과 공급망 안정성을 협의한다. 베이징에서는 중국 시장의 기회를 저울질하면서도, 미중 갈등 속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소재·장비 기업들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한다. 저자가 포착하는 것은 이재용의 고독이다. 삼성의 모든 중대 결정이 그의 어깨에 실려 있다. 초격차를 위한 대규모 투자, 신사업 진출, 글로벌 동맹 구축.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제국 전체를 흔들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이건희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에 갇혀서는 안 된다. 비판도 존재한다. 오너 리스크, 지배구조의 불투명성, 전문경영인 체제와의 갈등. 그러나 저자는 이재용이 최근 몇 년간 확실히 성장했다고 평가한다. 법적 리스크를 넘어서고, 글로벌 CEO 네트워크 속에서 신뢰를 쌓아가며, 삼성을 단순한 제조 기업이 아니라 기술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재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위기는 있었고, 반격도 시작되었지만, 결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HBM4 전쟁, AI 반도체 생태계에서의 위치, 6G 표준 경쟁, 폴더블 스마트폰의 대중화, 신사업 성공 여부. 모든 것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저자는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삼성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초격차는 실현 가능한 목표인가, 아니면 허황된 구호인가? 이재용의 리더십은 충분한가? 한국 경제는 삼성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이 <삼성 쇼크>를 관통한다. 저자는 삼성을 비판하거나 찬양하려고만 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본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려 하는지, 그 여정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차분히 풀어낸다. 제국은 여전히 무대 위에 있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삼성은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다. 그 다음 장면이 몰락의 완성인지, 부활의 서막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삼성의 운명이 곧 한국의 운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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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훈의 랫시티 - 완벽한 세계 유니버스25가 보여준 디스토피아
에드먼드 램스던 외 지음, 최지현 외 옮김 / 씨브레인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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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Jon Adams와 Edmund Ramsden이 공저한 <Rat City>은 쥐에 관한 과학 실험 보고서로서의 의미만을 주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책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약 40년간 생태학자에서 심리학자로 변신한 존 B. 칼훈(John B. Calhoun)이 수행한 획기적인 연구를 통해, 과밀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며, 궁극적으로 현대 도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칼훈의 연구는 전후 볼티모어의 쥐 박멸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쥐를 해충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쥐들이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를 형성하는 사교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그를 인공적인 "쥐 도시"를 만드는 실험으로 이끌었고, 이 실험은 공간을 제외한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설치류 유토피아"였다. 책은 우리가 도시를 설계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칼훈의 가장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쥐들이 일종의 "산아제한"을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쥐는 두 마리에서 12개월 만에 거의 2천 마리로 증가할 수 있는 번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는 이러한 폭발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1940년대 후반 볼티모어에서 쥐를 연구하던 칼훈은 인구 수가 도시 블록당 약 150마리로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주민들은 도시에 얼마나 많은 쥐가 사는지에 겁을 먹었지만, 생태학자들은 오히려 쥐가 너무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 블록당 150마리는 환경 자원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도심 뒷골목에는 먹을 쓰레기가 부족하지 않았고 둥지를 틀 장소도 충분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인구 한계의 강건성이었다. 어느 블록의 쥐 개체수가 독극물이나 덫으로 줄어들면, 곧 다시 회복되었지만 결코 150마리 한계를 넘지 않았다. 칼훈에게는 마치 쥐들이 자체적인 산아제한을 실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추가 조사 결과, 쥐 사회는 섬세한 균형 속에 유지되고 있으며, 새끼를 젖떼기까지 키우려면 놀라울 정도로 가정의 평화가 필요했다. 수유 중인 어미가 방해를 받으면 새끼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거나 둥지와 새끼를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우세한 수컷이 둥지 침입을 막기 위해 경비를 서지만, 개체수가 너무 많아지면 가장 강한 우두머리조차 결국 압도당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 밀도가 증가하면 다툼이 가족 단위를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상황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과밀 지역의 번식률이 감소하여 최적 수준으로 다시 안정되었다. 개체수 자동 조절 뒤에 숨은 신비로운 메커니즘은 이용 가능한 음식이 아니라 이용 가능한 공간에 의해 부과된 한계로 밝혀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식지는 공간이 고갈되기 훨씬 전에 "사회적으로 가득" 찼다. 이 발견은 도시 계획과 인구 정책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인구 밀도의 문제는 물리적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한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1913년 시 "담 고치기(Mending Wall)"는 두 이웃이 그들의 재산 사이의 건식 돌담 경계를 수리하는 모습을 그린다. 시인이 왜 담이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동안, 그의 이웃은 "좋은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을 고집스럽게 되뇐다. 좋은 이웃은 상상하기 쉽지만, 좋은 울타리란 무엇일까? 초기 실험에서 칼훈은 쥐 도시를 전기 철선이 설치된 높은 벽을 사용하여 별도의 칸으로 나누어 쥐들이 우리의 어느 영역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쥐들은 단일 칸에 모이도록 조건화되었고, 그 결과 심각한 과밀, 사회적 붕괴, 잔인한 폭력이 발생했다. 후기 실험에서는 이러한 장벽이 쥐들이 넘을 수 있는 낮은 칸막이로 교체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원치 않는 접촉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에 충분했다는 점이다. 전기 철선이 설치된 높은 울타리는 이웃다운 울타리가 아니다. "좋은" 울타리는 경계를 명확히 하면서도 양쪽의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들은 사회적으로 투과성이 있다. 적어도 재산의 거리 쪽에서는 허리 높이나 무릎 높이의 말뚝 울타리가 그 역할을 한다. 그것은 경계를 알리고 지나가는 사람이 그것을 넘지 않을 만큼 예의 바르다고 가정한다. 더 높으면 울타리는 암묵적으로 침입 의도를 전제한다. "담 고치기"에서 프로스트는 물리적 경계의 필요성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낮은 돌담을 수리하는 내내 이웃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좋은 이웃이 좋은 울타리를 만든다. 칼훈의 실험은 도시 설계와 주거 계획에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완전한 분리도, 완전한 개방도 이상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경계를 설정하되, 그 경계가 필요할 때 넘을 수 있을 만큼 낮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높은 담장이나 감시 카메라로 둘러싸인 주거 단지가 왜 진정한 공동체 형성에 실패하는지를 설명한다.


뉴욕시장 에릭 애덤스(Eric Adams)는 최근 도시의 설치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쥐 차르(Rat Czar)"를 임명하며 선언했다: "나는 쥐를 싫어하며, 우리 시의 대부분의 주민들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쥐를 도시 쇠퇴의 토템으로 비난하지만, 쥐는 관리가 철회된 곳에서만 번성한다. 1940년대에 볼티모어시는 주택 재고를 개선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그렇게 함에 따라 도시 설치류 개체수가 대폭 감소했다. 가장 지속적인 쥐 통제 방법은 좋은 재산 유지 관리로 밝혀졌다. 정기적인 쓰레기 수거, 파손된 파이프와 설비 수리, 건물의 외풍 방지는 쥐가 주민들과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것을 막았다. 나쁜 건물은 쥐 군집을 배양했고, 나쁜 건물은 사회적 문제로 이어졌다. 1960년대 활동가 구호가 말했듯이: "쥐가 폭동을 일으킨다(RATS CAUSE RIOTS)." 그러나 꼬리가 실제로 개를 흔드는 것은 아니며, 쥐를 제거한다고 폭동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경력 내내 칼훈은 쥐 박멸이 순전히 미용적 작업이며,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방치되면 어떤 설치류 박멸 프로그램도 단기적 성공만 거둘 것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한 동료가 말했듯이, "쥐는 나쁜 주택의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다." 쥐는 보초 종(sentinel species)이었으며, 그 존재는 감염된 이웃이 유지 보수와 수리가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따라서 쥐를 죽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실제로는 메신저를 쏘는 것일 뿐이다. 이는 도시 정책과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한다.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다루어야 한다. 쥐 문제는 주거 문제이고, 주거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과 도시 관리의 실패를 반영한다. 쥐를 박멸하는 데 수백만 달러를 쓰는 대신, 그 돈을 주택 개선, 인프라 유지, 그리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투자에 사용해야 한다.


Jon Adams와 Edmund Ramsden의 Rat City는 현대 도시 생활의 근본적인 딜레마다. 칼훈의 쥐 실험은 과밀이 공간의 부족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질과 빈도에 관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그의 연구가 제시하는 교훈들은 오늘날 더욱 관련성이 있다.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인구 밀도가 증가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칼훈의 유산은 복잡하다. 그의 연구는 때때로 인구 과잉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공포를 정당화하는 데 오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Adams와 Ramsden이 보여주듯이, 그의 진정한 통찰은 더 미묘하고 희망적이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구조다. 적절히 설계된 환경에서, 적절한 사회적 메커니즘과 함께, 쥐든 인간이든 높은 밀도에서도 번성할 수 있다. <Rat City>는 우리에게 쥐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보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도시, 더 건강한 공동체, 그리고 더 인간적인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쥐는 메신저였고,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좋은 사회는 좋은 공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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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로 배우는 블록체인 첫걸음 에이콘 해킹과 보안 시리즈
이재인 지음 / 에이콘온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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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블록체인을 둘러싼 대화는 언제나 극단으로 치닫는다. 한쪽에서는 "미래를 바꿀 혁명적 기술"이라 외치고, 다른 쪽에서는 "투기꾼들의 놀이터"라며 냉소한다. 하지만 이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실이 있다. 블록체인은 암호화폐를 작동시키는 기반 기술이라는 의미 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생각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 열쇠도 아니다. 권력의 분산이라는 하나의 명확한 철학을 기술로 구현하려는 시도다.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기술 자체가 복잡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주변을 둘러싼 과장된 마케팅, 불투명한 정보, 그리고 투기 열풍이 본질을 가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록체인의 핵심 개념은 명쾌하다. 중앙 권력 없이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합의를 통해 거래를 검증하고, 그 기록을 투명하게 보관한다는 것. 이것이 전부다. 문제는 이 원칙이 현실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되어왔는가 하는 점이다.


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 백서를 발표했을 때, 그가 꿈꾼 것은 단순한 디지털 화폐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행이나 정부 같은 중앙 기관 없이도 개인 간 직접 거래가 가능한 시스템, 누구도 임의로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투명한 금융 네트워크였다. 이 비전의 핵심은 '탈중앙화'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하지만 오늘날 블록체인을 표방하는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살펴보면, 이 원칙이 얼마나 쉽게 희석되는지 알 수 있다. 소수의 노드가 네트워크를 지배하거나, 재단이나 기업이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거나, 심지어 중앙 서버를 통해 데이터가 관리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사실상 전통적인 중앙화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탈중앙화라는 외피만 걸쳤을 뿐, 그 안에는 여전히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질은 기술적 한계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도적인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완전한 탈중앙화는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빠른 의사결정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프로젝트들이 편의를 위해, 혹은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화 요소를 도입한다. 하지만 그 순간 블록체인의 가장 중요한 가치, 즉 누구도 신뢰할 필요가 없는 시스템이라는 본질이 사라진다.

블록체인의 진위를 판별하려면 세 가지 핵심 요소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합의 방식이다.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어떻게 거래의 유효성에 합의하는가? 작업증명(PoW)처럼 컴퓨팅 파워를 사용하는가, 지분증명(PoS)처럼 보유량에 따라 권한을 부여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가? 이 합의 메커니즘이 권력을 어떻게 분산시키는지, 혹은 집중시키는지가 블록체인의 성격을 결정한다. 둘째는 탈중앙화의 정도다. 누구나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아니면 허가받은 노드만 가능한가?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소수의 참여자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는가? 탈중앙화는 단순히 서버를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자체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분산되어 있어도 실질적으로 중앙화된 시스템은 블록체인의 본래 취지를 벗어난 것이다. 셋째는 블록 저장 방식이다. 데이터가 실제로 어디에, 어떻게 저장되는가? 모든 노드가 전체 블록체인을 보관하는가, 아니면 일부만 저장하는가? 중앙 서버에 의존하지는 않는가? 블록체인의 불변성과 투명성은 데이터가 분산되어 저장되고, 누구나 검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제대로 이해하면, 화려한 마케팅 문구에 속지 않고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탈중앙화를 추구하는 것은 쉽지만,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슬(SASEUL)은 바로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다. 이것은 또 하나의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토시가 제시한 원칙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실현하려는 시도다. 사슬의 가장 큰 특징은 100% 탈중앙화를 타협 없이 추구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없다. 재단도, 개발팀도, 대량의 코인을 보유한 투자자도 네트워크의 운영 방식을 좌우할 수 없다. 모든 노드는 평등하며, 의사결정은 참여자들의 합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기존의 많은 블록체인들이 직면했던 딜레마는 속도와 탈중앙화 사이의 균형이었다. 더 빠르게 거래를 처리하려면 노드 수를 제한하거나 합의 과정을 단순화해야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중앙화로 이어졌다. 사슬은 이 문제를 독특한 합의 알고리즘으로 해결한다. 모든 노드가 검증에 참여하되, 효율적인 방식으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이를 통해 탈중앙화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성능을 확보했다. 또한 사슬은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중점을 두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막대한 컴퓨팅 파워나 자본이 없어도 누구나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적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다. 소수의 자본가나 채굴 기업이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고, 진정한 의미의 분산을 실현하기 위한 설계다. 블록체인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공공재가 되려면, 참여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블록체인을 기술로만 이해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권력을 어떻게 조직하고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다. 역사를 통틀어 인류는 늘 중앙 권력에 의존해왔다. 국가가 화폐를 발행하고, 은행이 거래를 중개하고, 기업이 데이터를 관리했다. 우리는 이들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블록체인은 이 신뢰의 구조를 뒤집는다. 특정 주체를 신뢰하는 대신, 시스템 자체를 신뢰한다. 하지만 이 비전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다면, 블록체인은 그저 비효율적인 데이터베이스에 불과하다. 중앙화된 블록체인은 기존 시스템보다 느리고 복잡하기만 할 뿐, 어떤 이점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짜 블록체인과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탈중앙화라는 핵심 가치를 지키지 않는 프로젝트는, 아무리 화려한 기술을 자랑해도 블록체인의 본래 목적을 배신한 것이다. 사슬 같은 프로젝트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타협하지 않는 탈중앙화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론이 아니라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원칙을 지키면서도 실용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방향성은 명확하다. 블록체인은 누군가의 통제 아래에 있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오늘날 블록체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코인 투자다. 가격 변동성, 일확천금의 꿈, 때로는 사기와 거품. 이런 이미지들이 블록체인의 본질을 가렸다. 물론 암호화폐는 블록체인의 중요한 응용 사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블록체인이 제시하는 진짜 가능성은 화폐를 넘어 훨씬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된다. 투명하고 조작 불가능한 기록 시스템, 중개자 없는 직접 거래,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신원, 공정한 의사결정 플랫폼. 이 모든 것이 블록체인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핵심은 탈중앙화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을 때, 시스템은 투명해지고 공정해진다. 누구도 자의적으로 규칙을 바꾸거나 데이터를 조작할 수 없다. 이것이 블록체인이 우리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진짜 가치다. 하지만 이 가치를 실현하려면, 우리는 먼저 블록체인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마케팅 문구에 현혹되지 않고, 기술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어떤 프로젝트가 진정으로 탈중앙화되어 있는지, 어떤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 가능한지, 그리고 무엇이 단순한 과장 광고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블록체인이 투기의 도구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기술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블록체인은 완성된 기술이 아니다. 여전히 진화하고 있으며,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확장성의 한계, 에너지 소비, 사용자 경험의 개선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블록체인이 왜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기술은 수단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다.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세상인가, 아니면 모두에게 분산된 세상인가. 신뢰를 강제로 부여받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투명성을 통해 스스로 신뢰를 입증하는 시스템인가. 블록체인은 후자를 향한 하나의 시도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분명 의미 있는 시도다. 사슬 같은 프로젝트는 이 길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협하지 않고도, 원칙을 지키면서도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증거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답은 아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실험과 시도가 이어질 것이다. 어떤 것은 성공하고, 어떤 것은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미래는 기술 개발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사용하고, 판단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우리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을 때, 우리가 본질을 이해할 때, 비로소 블록체인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첫걸음은 오해를 걷어내고 본질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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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 치료의 시대 - DNA부터 뇌까지 최신 트렌드로 보는 12가지 건강수명 전략
이영진 지음 / 아침사과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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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노화를 자연스러운 생명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왔다. 주름이 늘어나고, 체력이 떨어지며,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을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남긴 흔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영진 박사의 <노화 치료의 시대>는 이러한 통념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노화는 정말 피할 수 없는 숙명일까, 아니면 우리가 개입하고 치료할 수 있는 생물학적 현상일까? 40년 넘게 노화 의학과 통합의학 분야를 개척해온 저자는 노화를 질병의 범주로 재정의한다. 최근 20여 년간 축적된 과학적 증거에 기반한 패러다임의 혁명이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암, 심혈관 질환, 치매, 대사성 질환 등은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세포 수준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세포 수준의 변화들은 이제 측정 가능하고, 진단 가능하며, 무엇보다 치료 가능한 대상이 되었다.


책은 노화를 유발하는 열두 가지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매일 십만 번씩 발생하는 DNA 손상과 그 복구 능력의 감소, 세포 분열 횟수를 제한하는 텔로미어의 단축, 염증 물질을 분비하며 주변 세포까지 노화시키는 좀비 세포의 축적, 세포 내 노폐물을 재활용하는 자가포식 기능의 저하 등이 그것이다. 이 메커니즘들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치 도미노처럼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들도 연쇄적으로 악화된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한 가지를 개선하면 다른 것들도 함께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고혈압이 심혈관 질환의 위험 요인이듯, 이 열두 가지 세포 수준의 이상은 대부분의 노화 관련 질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위험 요인이다.

DNA 손상을 예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세포는 자외선, 환경 오염물질, 대사 과정에서 생성되는 활성산소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공격받는다. 젊을 때는 복구 시스템이 활발하게 작동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나 열량을 제한한 식단, 규칙적인 운동, 항산화제 섭취 등으로 DNA 손상을 평균 20~30% 줄일 수 있다는 임상 연구 결과가 있다. 더 나아가 식물의 폴리페놀을 꾸준히 섭취하면 복구 속도가 18% 향상되고, NAD+ 같은 핵심 효소를 보충하면 손상이 40%까지 감소한다는 것이다. 텔로미어에 관한 내용도 흥미롭다. 염색체 끝을 보호하는 이 구조물은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지며, 일정 길이 이하로 줄어들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하고 노쇠 상태에 빠진다. 그런데 만성 스트레스를 받는 여성의 텔로미어는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평균 10년이나 빨리 짧아진다. 스트레스가 단순히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세포 수준에서 실제로 우리를 늙게 만든다는 과학적 증거다. 반대로 명상, 운동, 사회적 지지 같은 스트레스 관리법이 텔로미어 보호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된다.


특히 인상적인 개념은 노쇠 세포, 일명 좀비 세포다. 이들은 더 이상 분열하지는 않지만 죽지도 않은 채 염증성 물질을 분비하며 주변의 건강한 세포까지 노화시킨다. 마치 좀비 영화에서 감염이 퍼지듯, 이 세포들은 노화를 전염시킨다. 그런데 이런 노쇠 세포를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세놀리틱 약물을 투여하자 실험동물의 건강 상태가 개선되고 수명이 연장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놀리틱이 증상이 나타난 후에 대응하는 기존 치료법과 달리, 노화의 근본 원인을 다룬다는 점이다. 암이나 심혈관 질환, 신경 퇴행성 질환 등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다. 수명만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로 살아가는 시간, 즉 건강 수명을 증가시킨다. 자가포식 시스템도 흥미로운 주제다. 세포 내에서 낡고 손상된 단백질이나 소기관을 분해하고 재활용하는 이 메커니즘은 젊을 때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만 나이가 들면 약해진다. 마치 쓰레기 처리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노폐물이 쌓이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간헐적 단식이나 열량 제한, 운동 등이 이 시스템을 활성화시킨다. 더 흥미로운 것은 메트포르민, 라파마이신, 레스베라트롤 같은 약물들이 실제로 단식하지 않아도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세포의 발전소라 불리는 미토콘드리아의 기능 저하도 노화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이 소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세포는 활력을 잃고, 활성산소가 증가하며, 결국 세포 전체의 기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NAD+ 같은 핵심 조효소가 급격히 감소하는데, 이것이 사백 개 이상의 대사 반응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 영향은 전신적이다. 최근 연구에서는 건강한 조직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를 손상된 부위에 이식하는 치료법까지 시도되고 있다. 토끼와 돼지 실험에서 심근경색 부위에 미토콘드리아를 주입하자 심근 괴사가 현저히 줄고 심장 기능이 개선되었다. 간, 폐 등 다른 장기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확인되고 있다. 노화 치료가 단순히 증상 완화를 넘어 손상된 조직의 실질적 복구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후성 유전적 변화에 관한 설명은 또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DNA 염기서열은 바뀌지 않지만, 그 DNA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환경, 생활습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DNA에 붙는 메틸기나 아세틸기 같은 화학적 표지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데, 이것이 바로 후성 유전적 변화다. 놀라운 것은 이런 변화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후성 유전적 세포 재프로그래밍을 통해 노화 시계를 되돌리거나 재설정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에피드러그라 불리는 이런 약물들은 암 치료뿐만 아니라 건강한 노화, 만성 질환 예방, 손상된 조직의 재생에도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세포의 나이를 실제로 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공상과학 소설 같지만, 이제 과학적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 몸의 각 조직에 있는 줄기세포도 기능이 떨어지거나 숫자가 줄어든다. 피부, 장, 뇌, 근육, 간 등 모든 장기의 줄기세포가 노화하면서 조직 재생 능력이 감소한다. 하지만 저자는 줄기세포 치료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자신의 지방 조직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배양하여 손상된 부위에 주사하는 치료법이 이미 임상에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줄기세포가 분비하는 엑소좀이라는 미세 소포체가 주목받고 있다. 이 작은 입자들은 세포 간 통신 수단으로, 단백질, RNA, 성장인자 등을 담아 다른 세포에 전달한다. 노화한 세포의 엑소좀은 염증과 노화를 전파하지만, 젊고 건강한 줄기세포의 엑소좀은 손상된 조직을 회복시키고 염증을 억제한다. 실제로 지방 줄기세포 유래 엑소좀을 피부에 적용하면 주름이 개선되고, 탈모 부위에 적용하면 모발이 재생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면역 시스템의 노화도 빼놓을 수 없다. 나이가 들면 면역세포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만성 염증이 증가하며, 새로운 병원체에 대한 반응이 둔해진다. 그런데 백세 이상 장수 노인들을 연구해보니 그들의 면역 시스템에는 특별한 특징이 있었다. 염증을 조절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면역세포의 기능이 잘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장내 미생물의 역할도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우리 몸에는 수십조 개의 미생물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소화, 면역, 신경전달물질 생성, 염증 조절 등 다양한 기능에 관여한다. 일반 노인과 장수 노인, 쇠약한 노인의 장내 미생물 구성은 확연히 다르다. 장내 미생물 불균형이 노화와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프로바이오틱스나 대변 미생물 이식을 통해 이를 개선하는 것도 노화 치료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나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같은 신경발달 질환에서도 특정 유산균이 증상 개선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가 있다. 장과 뇌가 연결되어 있다는 장-뇌 축 이론이 실제 치료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학은 주로 질병이 발생한 후에 개입해왔다. 증상이 나타나면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고, 수술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노화를 질병으로 본다면,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세포 수준에서 예방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노화를 완전히 되돌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각 메커니즘마다 가능성과 한계를 분명히 언급한다. 개인마다 유전자, 환경, 생활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 하지만 방향성은 명확하다. 노화는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맞이해야 할 운명이 아니라, 이해하고 관리하며 대응할 수 있는 생물학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건강 수명, 즉 활기차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백 세까지 산다 해도 마지막 20년을 병상에서 보낸다면 그것이 진정한 장수일까? 저자는 삶의 마지막까지 자신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건강 수명이라고 강조한다. 수면, 운동, 스트레스 관리, 균형 잡힌 식사라는 기본 위에 자신에게 맞는 전략을 하나씩 단계적으로 실천하라고 권한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그것이 건강 수명 연장과 삶의 질, 존엄성을 지키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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