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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쇼크 - 삼성은 몰락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세상을 뒤흔들 것인가?!
이채윤 지음 / 창해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은 두 개의 주춧돌 위에 서 있었다. 하나는 전 세계 디지털 문명의 혈관을 흐르는 반도체, 다른 하나는 수십억 인류의 손안에서 빛나는 스마트폰. 이 두 축이 견고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 삼성은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산업 제국의 정점에 있었다. 반도체는 막대한 현금 흐름과 기술 패권을 가져다주었고, 갤럭시 시리즈는 브랜드의 존재감과 소비자 접점을 확보해주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이 두 기둥에서 동시에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균열의 징후였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로 삼성을 밀어냈고,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핵심 부품인 HBM 메모리에서 먼저 엔비디아의 손을 잡았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MZ세대가 갤럭시 대신 아이폰을 문화적 아이콘으로 선택했다. '삼성 쇼크'라는 말이 증권가와 언론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실적 부진이 아니라 제국의 구조적 위기를 암시하는 신호탄이었다. 저자는 이 위기의 본질을 기술 경쟁의 패배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직의 유연성 상실, 고객 중심 사고의 부재, 과감한 베팅을 주저하는 관료적 의사결정 구조. 삼성이 쌓아올린 규모와 시스템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반도체 산업의 게임 규칙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누가 더 미세한 공정을 먼저 구현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였다. 7나노, 5나노, 3나노로 이어지는 경쟁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기업이 시장의 왕좌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제 전선은 이동했다. 공정 미세화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진짜 승부처는 '패키징'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갔다. 패키징은 단순히 칩을 묶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 전체의 성능과 효율을 결정하는 최종 전장이다. 엔비디아 같은 팹리스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더 이상 단일 칩이 아니라, 칩과 메모리와 패키징이 완벽하게 통합된 '턴키 솔루션'이다. 설계부터 양산, 패키징, 테스트까지 모든 과정을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 TSMC가 이 영역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이유는 단순히 기술이 앞서서가 아니라, 고객의 요구를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생태계를 먼저 구축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 게임의 룰 변화를 뒤늦게 인식했다. HBM 메모리 시장에서의 고전이 그 상징적 사례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긴밀히 협력하며 AI 붐의 초기 단계부터 HBM3를 공급했다. 반면 삼성은 기술적 완성도와 수율을 높이는 데 집중하느라 시장 진입 타이밍을 놓쳤다. 결과는 명확했다. 하이닉스가 AI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는 동안, 삼성은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기술 격차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첩성의 문제였고, 리스크를 감수하는 용기의 문제였으며, 고객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능력의 차이였다. 삼성의 규모는 여전히 강점이지만, 그 규모가 만들어낸 관료주의와 느린 의사결정은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치명적 약점이 되었다.
이재용 회장이 내세운 '초격차'와 '초연결'은 구호만이 아니다. 그것은 삼성이 나아갈 방향을 정의하는 철학이자,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전략적 언어다. 아버지 이건희의 시대가 '신경영'과 '품질 혁명'으로 조직 내부를 뒤흔들었다면, 아들 이재용의 시대는 글로벌 생태계 속에서 삼성의 위치를 재정의하는 작업이다. 초격차는 경쟁자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선언이다. 3나노 공정, HBM4 메모리, 첨단 패키징 기술, 6G 통신. 이 모든 영역에서 삼성은 단순히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야심이 과거의 기술 중심주의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초격차는 기술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고객과의 신뢰, 파트너십의 깊이, 생태계 전체를 조율하는 능력이 함께해야 한다. 초연결은 더 흥미로운 개념이다. 5G를 넘어 6G로, 스마트폰을 넘어 IoT와 Home AI로 확장되는 연결의 세계. 삼성은 더 이상 하드웨어 제조사로 머물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갤럭시 스마트폰, 가전제품, 자동차 전장 시스템, 로봇, 의료 기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이는 미래.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 삼성이 서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초연결에는 위험도 따라온다. 개인정보 침해, 감시 사회로의 전락, 중앙집중화된 권력 구조. 이런 우려들을 삼성은 '녹스(Knox)'라는 보안 체계로 대응하려 한다. 보안 없는 연결은 불안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보안으로 보호되는 연결은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저자는 이 철학이 마케팅 문구를 넘어, 삼성이 구축하려는 미래 산업 생태계의 청사진임을 보여준다.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은 이건희와는 다르다. 아버지가 조직 내부를 뒤흔드는 카리스마형 리더였다면, 아들은 글로벌 무대에서 조용히 네트워크를 쌓아가는 협상가형 리더다. 그의 출장 일정은 단순한 스케줄이 아니라 삼성의 미래 전략을 읽는 지도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엔비디아, 메타, 퀄컴의 최고경영자들과 만나 차세대 칩 협력을 논의한다. 워싱턴에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반도체 보조금과 공급망 안정성을 협의한다. 베이징에서는 중국 시장의 기회를 저울질하면서도, 미중 갈등 속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소재·장비 기업들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한다. 저자가 포착하는 것은 이재용의 고독이다. 삼성의 모든 중대 결정이 그의 어깨에 실려 있다. 초격차를 위한 대규모 투자, 신사업 진출, 글로벌 동맹 구축.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제국 전체를 흔들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이건희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에 갇혀서는 안 된다. 비판도 존재한다. 오너 리스크, 지배구조의 불투명성, 전문경영인 체제와의 갈등. 그러나 저자는 이재용이 최근 몇 년간 확실히 성장했다고 평가한다. 법적 리스크를 넘어서고, 글로벌 CEO 네트워크 속에서 신뢰를 쌓아가며, 삼성을 단순한 제조 기업이 아니라 기술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재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위기는 있었고, 반격도 시작되었지만, 결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HBM4 전쟁, AI 반도체 생태계에서의 위치, 6G 표준 경쟁, 폴더블 스마트폰의 대중화, 신사업 성공 여부. 모든 것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저자는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삼성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초격차는 실현 가능한 목표인가, 아니면 허황된 구호인가? 이재용의 리더십은 충분한가? 한국 경제는 삼성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이 <삼성 쇼크>를 관통한다. 저자는 삼성을 비판하거나 찬양하려고만 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본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려 하는지, 그 여정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차분히 풀어낸다. 제국은 여전히 무대 위에 있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삼성은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다. 그 다음 장면이 몰락의 완성인지, 부활의 서막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삼성의 운명이 곧 한국의 운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