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1 : 天(천)
이마무라 쇼고 지음, 이형진 옮김, 이시다 스이 일러스트 / 하빌리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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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녘 텐류지 경내는 고요했을 것이다. 1878년 어느 가을날, 10만 엔이라는 광고 한 줄에 이끌려 모인 292명의 발걸음은 저마다 다른 무게를 지녔을 것이다. 어떤 이는 병든 가족을 떠올리며, 어떤 이는 빗쟁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또 어떤 이는 그저 내일의 끼니를 생각하며 그 문턱을 넘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몰랐다. 자신들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 될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의 원작을 읽었다. 한 장의 나무패를 손에 쥔 채,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패를 빼앗아야 하는 잔혹한 게임. < 오징어 게임>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겠지만, 작품이 품고 있는 정서는 사뭇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K-드라마가 자본주의 시스템 속 인간 소외를 다뤘다면, 이 일본 시대극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히 붕괴된 사무라이 계급의 존엄과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메이지 11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허리춤에 찬 칼이 신분의 상징이었고, 명예의 증표였던 시대. 그러나 총이 칼을 대체하고, 서양식 군대가 조직되고, 사무라이라는 존재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유물로 전락해버린 시점. 이 소설에 등장하는 292명은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당한 시대의 난민들이다. 주인공 사가 슈지로가 칼을 드는 이유는 명료하다. 병든 아내 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그의 손에 쥐어진 칼날은 더 이상 무사의 영혼이 아니라, 생계의 도구일 뿐이다. 이 전락의 서사는 슬프지만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이다. 명예보다 생존을, 자존심보다 가족을 선택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슈지로는 아마도 이 게임에서 가장 '정상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에게는 명확한 목적이 있고,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며,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하지만 정상성이란 때로 생존 게임에서 가장 큰 약점이 되기도 한다. 게임에서의 그의 선택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관문마다 요구되는 패찰의 수가 늘어난다면, 자비는 사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칸지야부코츠가 서 있다. 292명 중 유일하게 돈을 위해 이곳에 오지 않은 남자. 그는 무진 전쟁에서 총을 거부하고 오직 백병전만을 고집했던 인물이다. "총은 사람을 죽이는 맛이 나질 않아" 오싹하다. 그에게 전투는 생존 수단도, 의무도 아니다. 순수한 쾌락이다.

부코츠라는 캐릭터는 시대의 괴물이다.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가 끝나자,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렸다. 하코다테 전투에서 "어차피 마지막이니 상관없으려나"라며 아군 대장의 목을 베어버린 일화는 그의 광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전쟁이 끝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평화가 오는 것이 두려운 인간. 칼을 휘두를 수 없는 세상에서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다. 이런 부코츠에게 이 죽음의 게임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합법적으로, 제약없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며 강자들과 겨룰 수 있는 장. 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흥분한다. 부코츠와슈지로의 대결은 필연적일 것이다. 죽음을 즐기는 자와 살리기 위해 죽이는 자. 광기와 절박함.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것이다.

생존 게임물의 매력은 결국 '인간 탐구'에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누구는 배신하고, 누구는 연대하며, 누구는 광기에 빠지고, 누구는 끝까지 인간성을 지키려 한다. 292명이라는 숫자는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292가지의 서로 다른 절망이며, 292개의 평행한 비극이다. 어떤 이는 칼을 들어본 적 없는 평민일 것이고, 어떤 이는 한때 이름을 떨친 검객일 것이다. 여자도 있고 노인도 있다. 그들 각자에게는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 그 사연들이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누가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절망이 더 깊은가'를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특히 여성 캐릭터들의 존재는 주목할 만하다. 메이지 시대 여성에게 칼을 들 기회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 게임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들이 짊어진 절망이 성별이라는 제약마저 뛰어넘을 만큼 무거웠다는 뜻이다. 이들의 싸움은 시대와 성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도쿄까지의 여정. 교토에서 도쿄로 향하는 길은 상징적으로 옛 수도에서 새 수도로,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여정이다. 사무라이의 시대가 저물고 근대 일본이 열리는 그 경계선 위를, 시대에 버려진 자들이 피를 흘리며 걸어간다. 관문마다 요구되는 패찰의 수가 늘어난 다는 설정은 잔인하지만 효과적이다. 초반에는 운이나 기습으로 패찰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갈수록 더 많은 패찰이 필요해 진다면, 결국 직접적인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마저 더 강한 자에게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슈지로의 살려두겠다는 결심은 아름답지만 위태롭다. 그가 살려준 자들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감사하며 물러날까, 아니면 약점을 간파하고 다시 덤벼들까. 생존 게임에서 자비는 때로 가장 위험한 선택이다. 하지만 바로 그 위험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 있기에, 우리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292명의 사무라이를 모아 죽음의 게임을 벌이게 하는 이유. 혹시 메이지 정부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쓸모없어진 사무라이들을 정리 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기권을 허용하지 않고, 탈출을 시도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이 게임이 철저히 계획된 무언가임을 생각하게 한다.

292명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누가 누구인지, 누구와 누구의 관계는 어떤지, 각자의 목적은 무엇인지. 하지 만 바로 그 복잡함 속에서 이야기의 깊이가 생겨난다. 선악 구도가 아니라, 모두가 자신만의 정당성을 가진 채 충돌하는 회색 지대의 드라마다. 오랜만의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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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힘 2 (10주년 기념 김창열 특별판) - 최고의 나를 만드는 62장의 그림 습관 그림의 힘 시리즈 2
김선현 지음 / 세계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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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림을 '감상'이 아닌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미술관에 가도 작품 앞에서 충분히 머물지 못한 채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SNS에 올릴 인증샷을 찍느라 정작 그림과 눈을 맞추지 못한다. 그림은 그저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체크리스트의 일부이거나, 인테리어를 위한 장식품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그런데 김선현 작가의 <그림의 힘 2>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림이 정말 보는 것에 그치는가? 한 폭의 그림이 무너져가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지친 하루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앞으로 나아 갈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어떨까? 20여 년간 미술치료 현장에서 사람들의 변화를 목격한 작가는 그림이 우리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말한다.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이 개정판 10주년 기념 표지를 장식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물방울은 생명이고, 정화이며, 반복이다. 매일 똑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매번 다른 물방울들. 우리의 일상도 그렇다. 반복되는 것 같지만 매일이 새롭다. 그리고 그 매일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한다.


책은 총 62점의 그림을 통해 우리 삶의 다양한 순간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안한다. 유명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에게 낯선 작가들의 그림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이 책의 강점이다. 유명세나 미술사적 가치가 아닌, 순수하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힘'을 기준으로 선별된 그림들이기 때문이다. 오거스터스 레오폴드 에그의 "여행 친구"는 기차 안에서 마주 앉은 두 소녀를 그린다. 대칭을 이루며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두 소녀의 모습은 틀린 그림 찾기처럼 우리의 집중력을 자극한다. 정신이 산만할 때, 이 그림을 들여 다보며 하나하나 차이점을 찾다 보면 어느새 흐트러진 마음이 한 곳으로 모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누가 언니이고 누가 동생일까, 이들은 어디로 가는 중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시간이 된다. 피에트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화는 어떤가... 빨강, 파랑, 노랑, 검정, 회색으로 이루어진 마름모꼴 구성은 언뜻 차갑고 무미건조해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우리 전통의 오방색이 모두 담겨 있다. 작가는 이 그림이 "보기만 해도 머리가 좋아지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색채가 주는 자극과 균형 잡힌 구도가 두뇌 활동을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직장인들에게 이 그림은 실질적인 도구가 될 수 있 다. 팔 시네이메르세의"양귀비가 있는 목초지"는 강렬한 빨강 양귀비꽃이 들판을 가득 채운 풍경이다. 호선으로 구성된 역동적인 구도 는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되고 불안할 때, 이 그림의 빨강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입한다. 색채심리학에서 빨강은 활력과 열정을 상징한다. 그런데 빨간색을 보는 것과 예술작품 속 빨강을 마주하는 것은 다르다. 예술가의 손을 거친 색은 정서적 울림을 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 나무"에 대한 이야기다. 고흐가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가장 힘든 시기에 그린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그 어느 작품보다 평온하고 희망적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만발한 가지들이 뻗어 있다. 작가는 이를 혼신을 다해 선물한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종종 힘들 때 더 어두운 것에 끌리곤 한다.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듣고, 우울할 때 우울한 영화를 본다. 감정에 공명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고흐의 아몬드 나무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피어날 수 있는 희망,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창조해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이 그림은 "힘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증명한다. 나도 할 수 있다고, 이 어둠도 지나갈 것이라고. 로버트 던칸슨의"골짜기 초원"은 의대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그림이라고 한다. 고요한 풍경, 한적한 시골길, 평화로운 자연.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한 이들에게 이 그림은 시각적 피난처가 된다. 실제로 혼자 있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림 속에서라도 고요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의 마법이다. 물리적으로 그곳에 가지 않아도, 그 공간이 주는 정서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색채와 구도가 우리 심리에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에 대한 설명이다. 김보희 작가의 "Towards"는 녹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진 바다 풍경인데, 파란색은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초록색은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 이스트먼 존슨의 "내 뒤에 남기고 온 소녀"는 바람 부는 언덕 위에 당당히 서 있는 소녀를 그린다. 앞을 응시하는 시선, 곧게 선 자세.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어깨가 펴지는 느낌이다. 자신감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인 이미지로 체화될 수 있다. 중요한 면접이나 발표를 앞두고 이 그림을 본다면, 소녀의 당당함이 나에게로 전이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앙리 마티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창조란 곧 용기다"라는 그의 말은 예술가뿐 아니라 자기 삶의 창조자인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다. 남들과 다르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용기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마티스의 강렬 한 색채와 과감한 구도는 보는 이에게도 용기를 전염시킨다. 그림을 보며 "나도 내 방식대로 살아도 괜찮구나" 하는 허락을 받는 느낌이 랄까 생각해 본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매일'이라는 단위다. 하루하루 작은 목표를 달성하고 매듭을 짓는 것. 이것이 결국 큰 성공으로 이어 진다는 메시지다. 거창한 목표만 세우고 실천하지 못해 좌절하는 대신,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해내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 "매일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작은 목표들을 달성하면 적어도 오늘 하루의 나는 성공한 사람". 위안이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한 번 크게 감동받는 것보다, 매일 조금씩 그림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큰 변화를 만든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전, 로버트 던칸슨의 고요한 풍경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점심 식사 후 졸음이 올 때, 활기찬 색채의 그림으로 정신을 깨운다. 밤에 잠들기 전, 평화로운 그림을 보며 하루의 긴장을 풀어낸다. 이런 작은 습관들이 쌓여 우리의 정서적 풍경을 바꾼다. 코코 샤넬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고아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며 접한 색이 흰색과 검은색뿐이었던 그녀는, 이를 우울함이 아닌 세련됨의 상징으로 재해석했다. 주어진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은 내가 어디를 갈 수 있는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할지를 결정할 뿐이다.


비눗방울을 부는 과정에 대한 비유도 좋았다. 처음에는 힘을 꾹 줘야 하고,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가빠진다. 하지만 그 안간힘이 커다란 비눗방울을 만들고, 그다음부터는 예쁜 비눗방울들이 계속 나온다. 시작의 어려움을 견디면 흐름이 생긴다는 것. 끈기와 인내의 중요성을 그림을 통해 시각화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과일 정물화를 보며 공감각적 자극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새로웠다. 그림 속 사과와 포도를 보며 새콤달콤한 맛을 상상하고, 침샘이 자극받는다. 시각이 미각을 깨우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은 우리의 오감을 종합적으로 자극하며, 총체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달 항아리 그림 앞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형태. 이 낮달이 나와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 그리고 때를 만나 빛날 자신을 상상하는 것. 자존감이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이런 작은 자기 긍정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특별한 날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미술관에 가야만, 비싼 도록을 사야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 한 권, 스마트폰 하나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그림 앞에서 멈추는 시간, 그리고 그 그림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귀 기울이는 태도다. 모리스 위트릴로의 길 그림 앞에서 작가는 말한다. "뒤를 돌아보고 걸어온 발자국이 예쁜지 확인하는 대신, 저 모퉁이를 돌면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설레는 게 더 좋다"고. 과거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두려움보다 기대가 더 큰 마음, 그림 한 점이 이런 마음의 전환을 도울 수 있다. 저자는 그림을 ' 보라 '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제안한다.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에 맞는 그림을 찾아보라고. 집중력이 필요한가? 자신감이 필요한가? 위로가 필요한가? 에너지가 필요한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다가갈 그림이 다르다. 같은 그림이라도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어제는 그냥 지나쳤던 그림이 오늘은 유난히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와닿는다. 그것은 내가 변했기 때문이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림은 고정되어 있지만, 그림을 보는 나는 계속 변한다. 그래서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봐도 매번 새로운 발견이 있을 수 있 다. 유명한 그림이든 생소한 그림이든, 작가가 누구든, 중요한 것은 그 그림이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다. 미술사적 가치나 시장 가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움직이는가가 기준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명화 컬렉션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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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팬덤과 극단의 시대에 꼭 필요한 정치 교양
이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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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철희님의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그것은 정치인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동안 나는 정치가 망가진 것을 한탄하면서도, 정작 그 망가짐에 내가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SNS에서 상대 진영을 조롱하고,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모든 행동을 옹호하며, ' 우리 편' 이 아닌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던 순간들. 그것이 팬덤 정치였고, 정서적 양극화였으며,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저자가 말하는 '정치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12•3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그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극우 카르텔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60대 이상에서 6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보이는 국민의힘의 현실은, 한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세대별로, 지역별로, 이념별로 얼마나 깊게 분열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다.


책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팬덤 정치에 대한 분석이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정치인의 모든 결정을 무조건 지지하고, 그에 대한 비판은 '적의 공작'으로 치부했던 순간들이다. 이견을 내는 사람들을 '내부 총질'하는 배신자로 낙인찍고, 정치를 '죽고 사는 전쟁'으로 만들었던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저자는 "사랑은 말이 되고 혐오가 본이 된다"고 말한다. 정확한 지적이다. 처음에는 정말로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편을 증오하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인격을 모독하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악의로 해석하며, 심지어 그들이 잘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안티 팬덤이 팬덤 정치의 숨겨진 속성이라는 저자의 통찰이 날카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가 증오하는 것으로 더 강하게 결속된다.


이재명 대통령의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준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말은 핵심을 찌른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 자체에만 몰두하면서, 정작 그 민주주의가 누구의 삶을 어떻게 나아지게 하는지는 소홀히 했다. 미국 민주당의 패배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자신들 이 대표하고 대변하겠다고 했던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진보적 가치를 외치면서도, 정작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고통에는 둔감했다. 물가가 오르고 일자리가 불안정해지는 현실 앞에서, 추상적인 가치만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국의 진보 진영도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자부심, 계엄을 막아냈다는 성취감에 취해, 정작 청년들의 주거 문제,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 자영업자들의 생존 위기 같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외면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등을 돌릴 것이다. 정치가 '밥 먹여 주는' 데 실패하면, 극우와 내란 세력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또 하나의 진실은, 결국 정치의 질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도도 중요하다. 저자가 지적 하듯이 총리에게 법적 권한을 더 부여하고, 검찰의 정치 개입을 막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권력욕에 취하고 당파적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무용지물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전체 국민이 선출한 유일한 공직자라는 정통성, 막강한 법적 권력, 여론에 대한 호소력, 여당의 협력. 이 네 가지 수단을 가진 대통령은 '선출된 왕'이 되기 쉽다. 그리고 권력이 산술급수적으로 강해질수록, 오판의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권력을 가진 사람의 자기 절제와, 권력을 감시하는 사람들의 끈질긴 경계심이다. 여당 의원 8명만 뭉쳐도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중요하다. 국민의힘이 윤석열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어하지 않은 것이라는 진실. 탄핵 트라우마와 선거 패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명백한 잘못 앞에서도 침묵을 선택한 것. 이것이 바로 정치가 망가지는 메커니즘이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 중 하나가 검찰의 문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적폐 수사, 그리고 다시 윤석열 정부의 사법 탄압. 이 모든 것이 '피해-복수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냈고, 정서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검찰이 정치 권력의 도구로 사용될 때, 정치는 더 이상 정책 경쟁의 장이 아니라 생존 투쟁의 전장이 된다.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죽고 사는 전쟁이 되는 것이다. 승자는 패자를 물리적으로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려 하고, 패자는 억울한 피해자 서사를 만들어 복수를 다짐한다. 이 악순환 속에서 절제와 관용은 사라지고, 극단과 증오만 남는다. 저자가 "정치 검찰은 언제든지 총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경고하는 이유다. 지금은 내 편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권력의 향방이 바뀌면 언제든 나를 겨눌 수 있다. 검찰 개혁은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다. 정치가 검찰에 휘둘리는 한, 좋은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투표다. "투표권은 최고의 시정 권력"이라는 말은 진부해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진실이다. 6•3 대선을 정초 선거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극우 카르텔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는 요구는 절박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정당을 찍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던지는 '종이 짱돌'은 정치인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세력에게는 단호한 응징을, 하지만 동시에 집권 세력에게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라는 책임을. 방심도 온정도 사치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복수와 절멸만을 외쳐서도 안 된다. 정치적 대타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시각도 주목할 만하다. 탄핵을 밀어붙이되 여당에도 운신의 폭을 열어 줘야 한다는 것, 수적 우위로 서둘러 밀어붙이면 오히려 탄핵이 왜곡된다는 지적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지혜다. 승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승리를 통해 무엇을 이룰 것인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팬덤 정치를 무조건 악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팬덤 정치는 정치 실패와 정치 무능이 불러온 현상이며, 동시에 참여 의지를 가진 시민들의 주체적 시도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롯이 정치인에게 있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팬덤의 혐오를 부추기고 그 대가로 권한을 얻는 '거래의 코트십'이 아니라, 비전과 소신으로 팬덤을 이끄는 '책임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당이 게토화되고 행태가 일베화되는 것을 막는 것은 정치 지도자의 의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시민들도 성찰해야 한다. 나는 정말로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아니면 단지 상대편이 망하는 것을 보고 싶은가.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잘못도 비판할 용기가 있는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할 때, 팬덤 정치는 건강한 시민 정치로 진화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이자 핵심 질문으로 돌아온다. 좋은 정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는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가 피해야 할 함정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정치적 양극화, 팬덤 정치의 흑화, 검찰의 정치 개입, 권력욕에 취한 대통령, 굴종하는 여당, 복수에 집착하는 야당. 이 모든 것들이 정치 를 망가뜨리는 요인들이다. 좋은 정치는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보통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개선하는 정치. 이기고 지되, 패자를 절멸시키지 않는 정치. 권력을 가져도 교만하지 않고, 권력을 잃어도 존엄을 잃지 않는 정치.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되, 서로를 적이 아니라 경쟁자로 대하는 정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되, 그것이 실제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정치. 그리고 그런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 시민들이 투표로, 감시로, 비판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행동으로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지위 위협'을 느끼는 60대 이상 노년층의 두려움도 이해하고, 미래가 불안한 청년들의 분노도 헤아리며, 좌와 우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도 듣는 정치를 갈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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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난중일기 코드 - 류성룡과 이순신의 위대한 만남
김정진 지음 / 넥스트씨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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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 시선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한양의 의정부에서 전쟁 전체를 조망하던 류성룡의 눈과, 바다 위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적의 화살을 피하며 붓을 들었던 이순신의 손은 분명 같은 전쟁을 기록했지만, 그들이 남긴 문장의 온도는 달랐을 것이다. 김정진 교수의 신간이 던지는 가장 흥미로운 제안은 바로 이 '시차'를 동시에 읽어내자는 것이다. 징비록과 난중일기를 각각의 독립된 텍스트가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교차 배치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마치 입체영화를 볼 때 두 눈의 시차가 만들어내는 깊이감처럼, 두 기록의 간극에서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진짜 부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징비록을 읽을 때는 류성룡의 시각으로만, 난중일기를 읽을 때는 이순신의 내면으로만 전쟁을 이해했다. 그러나 1592년 같은 날, 한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남해 바다에서는 어떤 결단이 내려졌는지를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전쟁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류성룡이 징비록 속에 의도적으로 숨긴 '코드'의 존재다. 430년이 지나서야 해독되었다는 이 암호는 과연 무엇일 까. 책의 홍보 문구만으로는 그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류성룡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가 남긴 침묵과 생략이야말로 가 장 웅변적인 메시지였을 것이다.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고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파직당했다. 그가 징비록을 쓴 시점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후였다. 그럼에도 그는 개인적 원한이나 변명으로 책을 채우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국가 시스템의 실패와 교훈에 집중했다. 이런 류성룡이 '의도적으로 숨긴 메시지'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직접 말할 수 없었던 진실, 당대에는 너무 위험해서 명시할 수 없었던 비판, 혹은 미래 세대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경고였을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류성룡이 징비록 안에 '이순신 전기'를 숨겨두었다는 대목이다. 이순신이 전사하고 자신이 파직당한 후, 선조와 정적들이 이순신의 공적을 왜곡할 것을 우려해 아예 징비록 속에 이 순신의 일대기를 기록해둔 것이다. 이는 치밀한 전략이었다. 권력은 역사를 왜곡하지만, 기록은 진실을 보존한다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 미래의 독자가 이 진실을 발견해주리라는 희망. 류성룡은 징비록을 회고록이 아니라 '시간을 가로지르는 증언으로 설계했던 것이다.

책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화두는 '왜 기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순신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매일 일기를 썼다. 전투가 끝난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촛불을 켜고 붓을 들었던 그 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정진 교수가 지적하듯, SNS 몇 줄도 귀찮아하는 현대인들에게 이순신의 일기 쓰기는 거의 이해 불가능한 행위처럼 보인다.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일기인가. 그러나 바로 그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기록은 더욱 절실했는지 모른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다. 오늘을 기록하는 것은 내일을 믿는다는 의미이고, 누군가 이것을 읽어주리라는 믿음이다. 난중일기는 전투 일지 뿐만 아니라,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몸부림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한 줄, "몸이 아파 누웠다"는 소박한 기록, 간밤에 꿈에 류성룡을 만났다"는 그리움의 고백. 이런 문장들은 영웅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인간성이야말로 그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류성룡의 징비록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국가 시스템의 실패를 냉정하게 분석하면서도, 전쟁 속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 지 않았다. 기록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의미의 발견이다. 류성룡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징비, 즉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것은 기록 없이는 불가능하다. 잊혀진 것은 반복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책에서 류성룡과 이순신의 관계를 '한국 역사상 최고의 브로맨스'로 표현한 부분은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우정을 넘어선다. 그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어떻게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연대의 정치학'이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했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당시 이순신은 무명의 변방 장수였고,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발탁하는 것은 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류성룡은 이순신을 믿었고, 그 믿음은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 반대로 이순신은 류성룡을 '꿈에서조차 그리워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 문장은 전장의 고독 속에서 이순신이 어떤 심리적 지지를 필요로 했는지 보여준다. 이순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한양에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순신에게 엄청난 힘이었을 것이다. 이 연대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협력은 전시 수상과 전선 사령관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전술적 자율성을 부여했고, 이순신은 그 신뢰에 승리로 화답했다. 동시에 류성룡은 정치적으로 이순신을 보호했고, 이순신은 군사적으로 국가를 지켰다. 이것은 역할 분담과 상호 신뢰에 기반한 전문적 파트너십이었다. 430년 전 류성룡과 이순신이 남긴 기록이 지금도 우리를 흔드는 이유는, 그들이 던진 질문이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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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보는 기술 - 역술가 박성준이 알려주는 사주, 관상, 풍수의 모든 것
박성준 지음 / 페이지2(page2)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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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주, 관상, 풍수. 이 세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뉜다. 한쪽은 “그런 게 어디 있어"라며 코웃음 치는 회의론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한번 봐볼까?"라며 은근슬쩍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회의론자 중 상당수도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 이나 신년운세를 슬쩍 검색해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운명학의 영향권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를 주저한다. 이번에 읽은 박성준 저자의 <운명을 보는 기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미신도 아니고 맹신도 아닌, 오랜 시간 축적된 통계이자 인간 심리에 대한 관찰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수천 년간 동양에서는 사람의 얼굴, 태어난 시간, 사는 공간을 통해 그 사람의 성향과 미래 가능성을 예측해왔다. 단순하게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 패턴을 읽어내는 학문이었던 셈이다. 현대 심리학이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고 예측하려는 시도라면, 동양의 운명학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비슷한 작업을 해왔다. 다만 접근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서양이 실험과 데이터로 접근했다면, 동양은 관찰과 경험의 축적으로 접근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렌즈로 인간을 바라본 것이다.


사주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명리학이나 사주에서 나오는 목, 화, 토, 금, 수라는 오행은 인간 성격의 다섯 가지 기본 유형을 상징한다. 불이 많은 사람은 열정적이지만 쉽게 타오르고 쉽게 꺼진다. 물이 많은 사람은 유연하고 포용력이 있지만 때로는 방향성을 잃기도 한다. 나무가 강한 사람은 성장 지향적이지만 융통성이 부족할 수 있다. 금이 강한 사람은 결단력이 있지만 때로는 냉정해 보인다. 흙이 많은 사람은 안정적이지만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런 분석이 과학적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틀,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MBTI가 현대적 성격 분류 도구라면, 사주는 동양적 성격 분류 도구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사주를 통해 내가 어떤 시기에 있는지 아는 것은 실용적 가치가 있다. 대운과 세운 이라는 개념은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가 있고, 움츠릴 때와 뻗어나갈 때가 있다. 모든 시기에 전력질주하려다 지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관상학은 때로 천박한 미신으로 치부되곤 한다. "얼굴만 보고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나"라는 비판은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관상은 생김새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표정과 습관,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 얼굴에 어떻게 축적되는지를 관찰하는 학문이다. 늘 찡그린 사람의 얼굴에는 미간 주름이 깊게 패인다. 자주 웃는 사람의 눈가에는 웃음 주름이 생긴다. 탐욕스러운 사람의 눈빛은 날카롭고, 자비로운 사람의 눈빛은 부드럽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내면이 외면에 드러나는 것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부자의 관상, 사기꾼의 관상, 복 많은 사람의 관상은 흥미롭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심상이 관상보다 중요하다'는 대목이다. 타고난 얼굴이 별로라도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얼굴은 변한다. 유재석이 좋은 예다. 타고난 관상은 그리 길하 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성실함과 선한 의도가 얼굴을 바꿨다. 희망적인 메시지다. 우리는 타고난 얼굴의 죄수가 아니다. 성형수술로 외형을 바꾸는 것보다, 마음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는 것이 진짜 관상을 바꾸는 길이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웃어보라. 6개월 후 얼굴은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다.


풍수지리는 아마도 세 가지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일 것이다. "집 방향이 인생을 바꾼다"는 말은 너무 과장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햇빛이 잘 드는 집과 하루종일 어두운 집에서 사는 사람의 기분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과 습하고 답답한 곳은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음이 심한 곳과 조용한 곳은 집중력과 수면의 질을 좌우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삶의 질을 결정하고, 삶의 질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영향을 준다. 강남의 북향 집이 명당이라는 설명은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남향이 최고라고 알려져 있지만, 지형과 물의 흐름을 고려하면 북향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기준보다 맥락과 상황이 중요하다. 오션뷰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생각해 볼 만하다. 물이 바로 보이면 기가 빠져나간다는 풍수적 해석은 심리학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무한함과 공허 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온함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우울함이 될 수 있다. 도심 속에서 명당을 만든다는 것은 내가 머무는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고 관리하느냐의 문제다. 침대 방향, 책상 위치, 창문과의 거리, 조명의 밝기. 이 모든 것이 풍수의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편안하고 활력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실용적 지혜인 것이다.

운명학의 가장 큰 오해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운명학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흐름은 있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지 않다. 강물의 방향은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헤엄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사주를 안다는 것은 내가 어떤 강물에 있는지 아는 것이다. 지금이 급류인지 완만한 구간인지, 곧 폭포가 나올지 잔잔한 호수가 나올지를 미리 아는 것이다. 이 정보는 준비하는 데 쓰여야지, 포기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관상을 안다는 것은 내 얼굴이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듣는 것이다. 피곤함이 쌓여 있다면 쉬어야 한다는 신호고, 탐욕이 드러난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경고다. 거울은 현재를 보여주고, 관상은 그 현재가 축적된 결과를 보여준다. 풍수를 안다는 것은 내 주변 환경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불편하고 답답한 공간에 있다면 바꿔야 한다. 당장 이사가 어렵다면 배치라도 바꿔야 한다. 환경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꿀 의지가 있는지의 문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영감과 직감을 기르는 능력이다. 불길한 예감, 미묘한 위화감, 설명할 수 없는 끌림. 이런 것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의식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있고, 때로는 그것이 직관으로 떠오른다. 사기꾼을 만나기 전에 느껴지는 이상함, 좋은 기회가 오기 전에 느껴지는 설렘, 관계가 깨지기 전에 감지되는 냉기. 이런 신호들을 감지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운명을 바꾸는 핵심 기술이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사람으로부터 온다.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와 관계를 유지하느냐, 누구로부터 멀어지느냐. 이 모든 선택이 쌓여서 운명이 된다. 사주와 관상, 풍수는 이런 선택을 좀 더 현명하게 하도록 돕는 도구다.

책의 제한된 분량에 사주, 관상, 풍수를 모두 담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각각이 평생 공부해도 다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학문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전문서적이라기보다는 입문서이자 안내서의 성격이 강하다. 사주와 관상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현실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고 궁금해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 사주는 어떤가", "내 얼굴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나"는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본 질문이다. 풍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아쉬울 수 있지만, 현대인이 적용할 수 있는 핵심만 추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명당 묘자리를 찾는 전통 풍수보다는, 아파트와 사무실 환경을 개선하는 실용 풍수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책을 읽으며 자기 사주를 들여다보고, 거울을 보며 관상을 체크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전문가에게 돈을 내고 상담받는 것도 의미 있지만, 스스로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해석해보는 것도 가치 있는 경험이다. 물론 정확도는 떨어질 것이다. 전문가들은 수십 년간 수만 명을 봐온 경험이 있고,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는 눈이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는 스스로가 가장 좋은 전문가다. 외부 해석을 참고하되, 최종 판단은 본인이 내려야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좋은 사주", "나쁜 관상" 같은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저자도 강조하듯, 절대적으로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맥락 속에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리는 것. 이것이 운명학의 실용적 적용이다.

우리는 왜 운명을 알고 싶어 할까? 불안해서다. 미래가 두려워서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 신이 없어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이다. 운명학은 이 불안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방향을 제시 해줄 수는 있다. 지도가 있다고 여행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길을 잃을 확률은 줄어든다. 사주, 관상, 풍수는 인생이라는 여행의 지도다.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고, 패턴과 의미를 찾으려 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하는 영역에서, 운명학은 여전히 위안과 통찰을 줄 수 있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지도가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사주, 관상, 풍수는 수천 년간 검증된 지도다. 완벽하지 않지만, 쓸모는 충분하다. 현명하게 활용하는 사람에게는 어느정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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