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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과 크레테 -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쓴 차모니아의 동화
발터 뫼르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발터 뫼르스를, 차모니아를 만나는 일은 늘 설렌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로 처음 만났을 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사방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던 강펀치에 나의 보잘 것 없는 하나 뿐인 뇌(나흐티갈러 박사처럼 뇌가 일곱개라면..)와 약한 심장의 헐떡임에도 링을 향해 수건을 던져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서 얻게 된 발터 뫼르스의 세계 ‘차모니아’. 기발한 상상력으로 창조한 이 세계에 대한 경탄으로 시작해서 한 작품 한 작품 읽다보니 나에게 차모니아는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륙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버뮤다 삼각지대에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보기도 한다.
발터 뫼르스의 팬이라면 기본 상식으로 통하겠지만(그래서 나의 잘난 척에 콧방귀로 응수하겠지만) 초보자를 위한 안내를 간략하게 하자면 <푸른 곰 선장의 13 1/2의 삶>, <엔젤과 크레테>,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지칭해서 발터 뫼르스의 ‘차모니아 4부작’ 이라 일컫는다. 위의 작품들은 정교하게 얽혀있다.(하지만 따로 읽는다고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경력과 나이를 유추해서 연대별로 줄 세우기도 해보고, 전 편에 혹은 중복해서 등장하는 인물 찾는 재미라든가(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아이데트 종족에 속하는 나흐티갈러 박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전편에 등장한다. 이 책 ‘엔젤과 크레테’에서는 각주의 기본이 된 백과사전의 저자로 등장한다.) 읽을수록 친근해지는 차모니아의 종족들과 동,식물들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책 한권이 뚝딱 완성될 것 같다.(조앤 롤링이 심심풀이로 엮은 ‘신비한 동물 사전’과도 같은...) 이런 재미들은 혼자 즐기기에 참으로 아쉽다. 발터 뫼르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수다판을 벌이면 아마도 차모니아 원시수학으로 표현하자면 ‘이중 이중 이중 4’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언젠가 그런 행복한 수다의 시간도 기대해 본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발터 뫼르스의 작품에 대한 리뷰가 내게서 나오기는 틀렸다. 그의 눈부신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는데 절반이 넘게 할애했으니 나머지는 책 이야기를 해 보자. <엔젤과 크레테>..제목에서 노골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그림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패러디다. 금지된 숲에서 길을 잃은 페른하헨 난쟁이 오누이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사실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 아직은 풋내기 작가에 불과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이야기가 주류가 아닌가 싶다. ‘미텐메츠식 여담’이라는 새로운 서술형식을 빌어서 이야기 중간에 불쑥 끼어들기도 하고, 책 내용과는 무관한 신변잡기를 늘어놓는다거나 차모니아의 정치나 교육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기도 하고, 평생의 숙적이었던 평론가 라프탄티델 라투다(라투다와 미텐메츠의 인연의 시작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참조하기 바란다.)에 대한 인신공격을 퍼붓기도 하며 결론을 열어둔 상태에서 독자들과 흥정을 벌이기도 한다.(이야기 중간에 마음대로 끼어들 수 있는 ‘미텐메츠식 여담’이란 서술방식은 발터 뫼르스를 비롯해서 작가들이라면 꽤 관심을 보일 것 같다.) ‘엔젤과 크레테’의 이야기 끝에 자리 잡은 저자 소개란에도 떡하니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반생 전기’가 차지하고 있다. 발터 뫼르스의 역할은 차모니아어를 번역하고 삽화를 그린 정도다.^^
천재작가 호문콜로스를 부흐하임 지하세계의 괴물로 만들어버린 하르펜슈톡과 스마이크(꿈꾸는 책들의 도시), 잔인함의 끝을 보여주는 구리용병의 대장 ‘짹깍짹깍 장군’(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에 비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숲거미 마녀’나 ‘이파리 늑대’는 발터 뫼르스의 악당들에 내성이 생긴 독자에게는 정말 차모니아 동화 수준이다. 발터 뫼르스의 다른 작품들을 이미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은 다소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발터 뫼르스의 첫 작품으로 만난 독자라면 진정한 그의 대표작들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와 <루모와 어둠속의 기적>을 슬쩍 밀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