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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버스 ㅣ 파랑새 그림책 79
제인 고드윈 글, 안나 워커 그림, 강도은 옮김 / 파랑새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책이 전하는 강한 메시지도 없고, 잘근잘근 씹어서 내 것으로 소화시켜야 하는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한계를 뛰어넘은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면서 마냥 좋은 그림책이 있다. 다 읽고 난 후 앞표지와 뒤표지를 쓰다듬으며 손에서 쉽게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책, 바로 이 책 <빨간 버스>가 내게는 그랬다. 아이와 함께 읽으며 꽤 여러 번 그랬다. “엄마는 이 책 정말 마음에 든다. 너무 예쁘지 않니?” 오랜만에 만나는 따스한 책이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요란하지 않은 사랑스러움으로 꽉 찬 느낌...
스케치한 연필 선이 훤히 비치는 맑은 수채화 그림이 먼저 마음에 끈다. 특히 빨간 버스 창문 가득 쏟아지는 햇살을 담은 장면과 별이 총총 떠있는 밤 속으로 빨간 버스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출발하는 장면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빨간 스쿨버스가 달리는 궤적을 따라 펼쳐진 마을 풍경과 가로수 길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여서 이곳에 땅을 조금 얻어 내 집을 짓고 살면 저절로 마음의 평화와 일상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상상을 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심하고 조용하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 키티의 특별할 것 없이 특별한 하루가 가슴 속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학교 가방조차 버거워 보일 정도로 키티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키가 가장 작은 아이다. 성큼성큼 걷는 언니의 걸음을 쫓아다니느라 늘 총총대는 키티는 집으로 돌아가는 스쿨버스 안에서도 언니와 함께 앉고 싶지만 언니는 친구들과 앉고, 맨 앞자리에 앉고 싶지만 늘 다른 애가 먼저 앉는다. 우르르 모여 다니며 밀쳐대는 키 큰 애들 틈에서 이리저리 치일 게 분명한 아이 키티. 키티의 특별한 하루는 언니가 몹시 아파서 혼자 등교해야 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버스를 타고 혼자 집으로 가는 길, 여느 때처럼 조용히 혼자 앉아서 버스를 타고 가던 키티는 창문 가득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때문에 잠이 들고 만다. 집에 도착했으니 내리자고 말해줄 언니가 없어서 집을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된다. 아이들은 하나둘 내리고 결국 버스 안에는 키티 혼자 잠이 든 채 남아있다. 버스는 별이 떠 있는 밤풍경 속 가로등 아래 고요히 쉬고 있다.
현실이라면 아무리 작은 아이라지만 확인도 안하고 내려버린 운전기사가 뉴스거리가 될 테고, 아이는 어둡고 공포스런 순간의 기억으로 어쩌면 오래도록 힘들게 될 지도 모를 끔찍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오히려 이 상황을 아이에게 아주 특별하고 멋진 기억으로 선물한다. 이렇게 특별하게 멋진 추억은 아이 정서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가 무섭고 외로운 순간에 슬며시 되살아나며 따스하게 위로해 줄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니 키티와 닮은 어릴 적 내 친구가 생각난다. 지금의 키가 중학교 입학할 무렵과 비슷했던 나와 내 어깨에도 못 미치게 작고 수줍음 많았던 그 친구, 꼭 키티처럼 조용하고 섬세하고 감수성이 남달랐던 친구였다. 책의 앞 뒤 표지 안쪽을 꾸미고 있는 아기자기한 그림들은 키티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보여주는 듯하다. ‘재채기 하는 송아지’, ‘내 방 창문 밖 아기 새의 둥지’, ‘구름 낀 하늘색 잉꼬’ 어쩜 이리도 예쁠까...오래 전 소식이 끊겨 지금은 어찌 사는지 궁금한 친구의 풋풋한 얼굴이 키티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인다. 그리고 이 그림책을 좋아할 게 분명한 몇몇 친구의 이름도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