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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
이호백 글, 이억배 그림 / 재미마주 / 1997년 2월
평점 :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진 그림책이 있고, 일러스트도 별로이고 이야기도 특별할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열광하는 그림책이 있다. 훌륭하게 잘 만들어진 그림책에 아이들이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신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은 잘 만들어진 그림책에 속한다.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데 탁월한 이억배님의 그림은 책의 가치를 높이는데 부족함이 없지만 글 속에는 몇 가지 맹점들을 안고 있기는 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의 이야기 속에 실패와 좌절의 순간 술로 소일하며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을까, 수탉과 암탉의 역할 분담을 단정 짓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까 하는 목소리도 높은 게 사실이다. 가족을 부양한다는 이유로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하고 좌절감에 가끔 술에 기대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과는 다르게 가족들과 단절의 벽만 높아지는 아버지라는 위치에 작가는 조그만 위로를 주고 싶었을까? 수탉과 암탉이라는 설정의 한계 때문에 힘이 세고 알을 많이 낳는 것으로 특징지었지만 그 안에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걸까? 그림책의 최우선 독자인 아이에게 해줄 말이 참 궁색해진다.
한국 최초로 ‘국제 어린이도서협의회’ 우수도서에 선정되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그림책이라는 요란한 광고가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었는데 사실 살짝 실망스런 부분도 없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더 집요하게 파고들게 된 책이었지만 수탉의 일생을 통해서 남자의 일생을, 우리네 아버지들의 일생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그림책이다. 이제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입장이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당연시했던 마음에 다시 아버지라는 존재가 따스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화창한 봄날 아주 튼튼해 보이는 수평아리가 태어난다. 달리기도 높이뛰기도 이 병아리를 따를 자가 없다. 곧 동네에서 제일 힘센 병아리가 된다. 하루가 다르게 늠름한 수탉으로 자라는 과정을 담은 그림은 정말 우리 아이가 자라는 순간들을 순간포착 해 놓은 것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 된 닭은 각종 힘자랑 대회에서 상대를 제압하고 동네 암탉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더 힘센 수탉의 등장으로 세상에서 제일 힘셌던 수탉은 술만 마셔대며 잔뜩 취해서 젊은 시절 얼마나 힘이 셌는지 무용담을 늘어놓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절망에 빠진 수탉 옆에는 조용하고 현명한 아내가 있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손자 손녀들과 힘자랑 대회에서 아빠만큼 힘을 자랑하는 아들들과 동네 암탉들 중에 제일 알을 많이 낳는 딸들을 보라고 조용히 조언한다. 감동적인 환갑잔치가 벌어지고 수탉은 행복하게 늙어간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은 거의 모든 인터넷 서점들의 분류에 의하면 4~6세 정도의 유아책으로 분류를 하고 있지만 사실 이야기의 깊은 맛과 숨은 뜻을 이해하려면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가 적당할 듯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 수록됐다고 하니 아이들의 생각과 시선이 무척 궁금해진다.
유학시절 토미 웅게러의 그림책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그림책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이호백 작가는 어린이 책 출판사 ‘재미마주’의 대표이기도 하다. 1년에 100여권의 책을 출판하는 여느 출판사들과는 달리 1년에 평균 3권의 책을 출판한다는 ‘재미마주’ 출판사의 장인정신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 정도로 책의 완성도를 꼼꼼하게 살피니 출간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스테디셀러로 이어지고 있다. 이 책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도 1997년에 출간된 그림책이다. 따지고 보면 벌써 10년도 넘은 그림책이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가치관의 변화도 제법 있을 만한 세월이니 리뷰 앞부분의 시비는 그냥 잊어도 좋으리라. 4,50년 전 그림책을 그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즐기는 외국의 그림책들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그림책이 몇 권쯤은 있었으면 한다. 아마도 ‘재미마주’의 책들도 그 선두에 서고 싶을 것이다. 그럴 자격도 충분하고 지금의 행보라면 아마 내 아이의 아이들도 이 책을 보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