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이야기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9
베벌리 나이두 지음, 이경상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아기자기한 캐릭터 책가방을 메고 아장아장 학교로 걸어서 통학하던 시절. 그 시절 나는 충격적인 사실 한 가지를 알았다. 국어교과서에서 어떤 포스터를 봤는데 그 내용이 그때 당시의 내게 다소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 포스터는 이렇게 생겼다. 세 가지 색깔의 크레파스가 나란히 놓여있고 ‘모두 살색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그런데 그때 당시의 내가 보기에 세 가지 크레파스는 각각 검은색, 살색, 흰색이었다. 그런데 왜 모두가 살색이라는 건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당시의 나는, ‘살’색이 검은색일 수도 있고 흰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감지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베벌리 나이두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야기>는 어릴 적 보았던 ‘모두 살색입니다.’ 문구와 상통한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현행되던 시절부터 폐지된 후의 상황까지 그 전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벌리 나이두는 유색인종이 겪어야했던 고통과 참혹한 현실, 그리고 그들의 관용정신까지 통틀어 보여주고 있다. 컬러드와 사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친구를 잃은 백인 소녀의 이야기와 백인들의 무자비한 정책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게 된 컬러드 가족의 이야기, 친구로부터 놀림감이 되는 흑인 아이의 이야기 등은 그들이 사회로부터 받아야했던 보이지 않는 핍박과 혹은 뻔히 보이는 핍박을 여실히 드러낸다. 베벌리 나이두의 이야기들은 사회를 고발하는 이야기가 아닌, 과거의 사회와 현재의 사회를 그려나감으로서 자연스런 통찰을 구하는 ‘세계의 이야기’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비열한 베일에 감싸인 불공정함이 눈에 선했다. 당연한 것처럼 유색인종을 향해 거침없는 압박과 구박을 일삼는 경찰청 사람들과 아무 대책 없이 그들의 법에 순순히 응하는 백인 시민들, 그리고 그 사이의 경계에 홀로 남아 갈피를 잡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컬러드인들……. 너무도 안타깝고 대책 없이 마음이 저려왔기에 책을 덮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덮어버리면, 그들을 나 몰라라 외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고 읽어나갔다. 지금은 그보다 나아졌다고 그들의 과거를 외면한다면 뼈저린 그들의 과거는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물론 그들에게 연민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연민은 가엾음을 불러일으키고 가엾음은 하찮음으로 뒤바뀌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난 그 당시의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했고, 그 당시 사회의 편협함을 속속들이 발견했다. 과연 그 누가 그들이 빠진 구렁텅이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거대한 그늘이 구렁텅이에 빠진 그들뿐만 아니라 나에게까지 칙칙한 어둠을 드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끝끝내 그들을 구원한 것은 그들 바로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도 아니었고 백인들의 개탄도 아니었다. 바로 그들 자신의 정신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현행 당시 백인들에 의해 억압당하던 그들은,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나서 그들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었다. 거의 모든 여론이 복수를 예감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관용의 자세를 지니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탄생하면서 그들의 위업은 조금이나마 달성된 듯하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능력에 맞게 대통령의 권한을 쥘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명백한 사실을 꿈이 아닌 현실에 입각하여 증명해보였으니 말이다.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책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야기>.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되고 가려져서도 안 되고 와전되어서도 안 되는 역사를 이야기의 재미의 틀에 맞추어 형상화한 이 책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선사한 교훈들은 내 마음속 한 자리에 영원히 간직되리라. 세상에는 이면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야한다는 것, 그리고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지은 이들을 증오해서는 안 된다는 관용정신까지 여러 차례 소중한 진리를 새겨들은 기분이다. 예부터 맘고생 많이 해오던 유색인종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힘을 주고 싶다. 결코 당신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들이 받은 상처가 아물고 흉터까지 싹 가실 때까지, 그들의 권리는 충족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은 존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꼭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막돼먹은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검둥이라고 외쳐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검둥이가 아니다. 그들의 피부는 검은색이기 이전에 살색이다. 세 가지 크레파스가 ‘모두 살색’이듯이 그들의 피부 역시 살색일 뿐이다. 백인과 황인과 다름없이 흑인들 또한 살색을 가진 한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거무스름한 피부를 그 누가 더럽다고 하는가. 그들의 피부는 더러움의 검정이 아니라 ‘조금 더 진한 살색’일 뿐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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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3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속에 존재하는 여전한 '비열한 베일'들. 암담하지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관용정신'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을 보게 됩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상상마루 2007-08-13 20:2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안녕하세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비열한 베일'들의 파렴치한 행각에 치가 떨렸어요. 그 쪽 사람들도 참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건 관용으로 불의를 품에 안은 남아공 사람들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