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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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이 쓴 희곡. 실제로 이 작품은 미국에서 연극으로 상연됐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왜곡에 항변하기 위해 저승의 관료들을 설득해 한 시간 동안 환생한다는 설정이다. 등장인물은 마르크스 혼자인 모노 드라마다.

우선 무척 웃기다. (스탈린주의가 신격화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인간적 면모를 많이 그렸기 때문이다. 만만찮은 술꾼이었던 마르크스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하고, 엉덩이에 난 뽀루지를 한탄하기도 한다. 아나키스트 바쿠닌과 논쟁하면서 "이봐, 미하일! 너는 내 이론에 침을 뱉을 수 있지만, 내 집 마루바닥에는 그럴 수 없어. 당장 닦지 못해!" 하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온다(물론 이 논쟁은 전적으로 허구다).

반면에 마르크스가 침울하게 자신과 가족이 겪은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는 무척 안타깝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자신이 한 정치 선동 때문에 추방당하고 가난에 시달려 자식을 잃기도 했다.

하워드 진은 칼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나와 1990년대로 돌아오면 무슨 말을 할지 묻는다. 마르크스는 현실의 모습에 무척 분노한다. 결국 자기가 옳지 않았냐고 던지는 질문은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 작품이 상연됐을 때의 얘기도 흥미롭다. 젊은 흑인 사회주의자인 브라이언 존스가 마르크스의 역을 맡았다고 한다. 브라이언 존스가 자신이 흑인인데 어떻게 마르크스역을 맡을 수 있느냐며 난색을 표하자, 하워드 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피부가 검어서 사람들이 '무어인'이라고 불렀지. 자네가 적임자야."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얇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잠깐 훑어보기만 하고 나중에 읽어야지' 했다가 너무 재밌어서 계속 읽게 됐는데, 40분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좀 어렵거나 지루하기라도 하면 오래라도 읽지. 세상에, 40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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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트남 전쟁 - 미국은 어떻게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
조너선 닐 지음, 정병선 옮김 / 책갈피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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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책. 책을 읽다 말고 눈물을 흘려 본 게 얼마 만인지...

미군의 기습으로 전멸당한 여성 베트남 전사들의 이야기, 캄보디아 대학살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조너선 닐의 치밀한 노력, 자신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을 깨닫고 장교의 명령에 불복하며 그들을 치료하려 애쓰는 미군 사병들의 이야기, 제대 후 불구가 된 몸으로 반전 시위에 참가하게 된 미군 사병 론 코빅(영화 <7월 4일생>의 실제 인물)의 이야기, 베트남에서는 거짓된 우월감으로 아이들에게 씨레이션 깡통을 던져 주다가 고향에 돌아와 자신들도 그 아이들과 같은 비참한 처지임을 깨닫고 절망하는 미군 사병들의 이야기, 정신병동에서 미군 사병들과 의사들 사이에 벌어진 심리적 투쟁들 ... 나에겐 왜 미군 사병들의 심리와 그들의 변화 과정을 묘사한 글들이 그토록 감동적이었을까...

가장 압권은 다음의 부분이다. 

베트남에서 복무하던 시절에 코빅은 히피 시위대들을 늘 증오했다. 이제 그는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치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휠체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는 시위 장소 한쪽 끝에 차를 세워두고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경적을 울리며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 재향군인들이 한 명씩 앞으로 걸어나가 담장 너머 의사당 쪽으로 훈장을 던져 버렸다. 각자 한 걸음씩 걸어나가 훈장을 던지면서 무언가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이름은 피터 브래너건이다. 나는 명예 전상장을 하나 받았다. 이제 저기 저 빌어먹을 자식들[경찰]과 싸우다가 하나 더 받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서 나와 내 동료들이 저지른 행위가 용서받기를 바란다." "2대대, 제1해병대 - 민중에게 권력을." "우리는 더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싸워야 한다면 그 싸움은 저 계단[국회의사당 계단]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 경찰은 485명을 체포했다. 485명 가운데 다수가 경찰에 이름과 군번, 그리고 생년월일만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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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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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몸으로 겪어낸 경험.  

조지 오웰은 이 책이 "공공연히 정치적인 책"이라고 썼다. 옮긴이의 말에서 인용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정치적'이란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 보려는 욕망.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다."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이 바로 이 책을 소재로 했다. 영화와 함께 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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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경제 - 빈민의 유리지갑에 비친 경제 이야기!
바바라 에렌라이히 지음, 홍윤주 옮김 / 청림출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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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다. 미국 인구는 세계 인구의 4퍼센트밖에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의 1인당 소비는 저소득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14배 많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이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저널리스트 바바라 에렌라이히는 ≪빈곤의 경제≫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형편없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복지 개혁으로 노동 시장에 내몰리게 된 약 4백만 명 가량의 여성들이 시간당 6∼7달러의 수입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가?”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저임금 노동자 생활에 뛰어든다.


미국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생활고는 주택 문제다. 아파트 한 채 구하기가 하늘에서 별따기다. 노동자들은 어마어마한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다.


“미국 전국노숙자연합의 1998년 자료에 따르면 방 한 개짜리 아파트를 유지하고 살려면 시간당 임금이 8.89달러는 돼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수십 군데 입사 지원을 통해 겨우 찾아낸 일자리는 시간당 임금이 고작 5∼6달러인 웨이트리스 자리였다. 에렌라이히가 들려주는 노동자들의 주거 상태는 끔찍하다.


“웨이트리스 마리안느는 애인과 함께 1인용 트레일러에서 주 1백70달러를 내고 산다.” “조앤은 밤에는 쇼핑 센터 뒤에 세워놓은 자동차에 살고 샤워는 티나의 모텔 방에서 한다.” 1997년 전국노숙자연합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숙자 중 5분의 1이 종일 또는 시간제 일자리를 갖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평범한 노동자들 중 일부는 이동 주택(트레일러)조차 구하지 못해 자신의 자동차, 벤치, 공원에서 생활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업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어느날 저녁 린과 얘기를 나누다가 이 일이 그녀에게는 하루 6시간짜리 부업일 뿐이며, 시간당 9달러를 주는 공장에서 하루 8시간씩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은 제3세계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시간 노동으로 지친 웨이트리스에게 손님들은 “오십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전쟁터에 흩어져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가서 그들을 먹여라! 이런 일을 내일 또 해야 한다는 건 잊어 버려라!” 대부분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으로 만성 질병에 시달린다. “단 1초도 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다리가 쑤시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러면 통증이 널 이기게 될 테니까.” 한국과 마찬가지로, 용역 회사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이중, 삼중의 착취를 당한다. 저자는 청소 용역 회사 ‘더 메이즈’에서 시간당 6.65달러를 받고 일한다. 에렌라이히는 회사가 고객에게서 청소부 1인당 1시간에 25달러를 받아 챙긴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분노한다.


반면, 부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백만 달러짜리 콘도 주인이 안방 욕실을 보여주면서 샤워 부스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걸 듣자니 내 자제심이 심하게 흔들린다. … 나는 그녀에게 피 흘리고 있는 것은 당신 욕실의 대리석이 아니라 세계 노동자 계급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저자가 월마트에서 일하고 있을 때 주변 사업장에서 대규모 연대 파업이 일어난다. 1천4백50여 명의 호텔 노동자들이 9개 호텔에서 파업을 일으켰다. 팀스터 지역에 있는 펩시 콜라 병 공장에서 노조원들이 파업했다. 세인트 폴의 정육 공장 노동자들은 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다.


저자는 직원 휴게실에서 TV로 파업 소식을 본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시위에 참가한 한 사람이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아들을 위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모두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 그 순간 방에 있던 유일한 동료가 벌떡 일어나 씩 웃더니 허공에 대고 주먹을 흔든다. 나는 그녀에게 ‘여기! 우리!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두 개의 집게손가락을 땅으로 향하는 제스처를 해보인다. … 갑자기 눈물이 난다.” 미국 노동 계급은 부활하고 있다. 4월 20일 워싱턴에서는 10만여 명의 노동자·학생들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반대”를 외치며 반전 집회에 참가했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해결책이다. 그들은 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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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5-1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회상 - 나의 중국혁명
왕범서 지음, 김승욱 옮김 / 새물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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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회상 : 나의 중국혁명≫(왕범서, 새물결)


이 책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 혁명가 왕범서의 자서전이다. 왕범서가 5.4운동과 5.30운동을 거쳐 혁명가가 되고, 1차 혁명의 교훈과 모스크바 유학 생활을 통해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향하는 과정, 그리고 논쟁과 탄압 속에 중국의 트로츠키 운동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5.4운동은 1차세계대전의 종전과 관계가 있었다. 1919년에 열린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은 중국이 전쟁 전에 제국주의가 무력 점거한 영토를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했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회담에서 일본이 그 지역의 지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것은 중국인들 사이에 깊은 배신감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5월 4일,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북경의 심장부인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것은 전국적 규모의 항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고향의 소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10대의 왕범서는 이 운동의 여파로 조금씩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벌어진 5.30운동에 참여한다.

5.30운동은 경제적 요구와 반제국주의적 요구가 뒤섞이며 등장한, 중국 1차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운동은 1925년에 시작돼 1927년까지 계속된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의 반란이 상해, 광주, 홍콩, 무한, 항주, 강서, 호북, 호남 등 화남과 화중 지역까지 휩쓸었다.

5.30운동의 초기 국면에 참여하며 공산당에 입당한 왕범서는 처음부터 몇 가지 혼란에 휩싸인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1차 국공합작을 위해 국민당에 입당 전술을 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국민당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북경에서 활동을 시작한 왕범서는 ‘대체 누구와 연합해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의문 그리고 반대파


왕범서를 포함한 북방의 공산당원들을 더 경악하게 한 것은 “남방으로부터 전해오는 ‘청당’[공산당과 좌파에 반대한 국민당의 동향]의 소식이었다.” 1927년 봄에 국민당 우파 지도자였던 장개석은 공산당이 조직한 환영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상해에 입성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노동조합 사무실을 습격하고 노동자들과 공산당원들을 학살했다.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거의 모든 무기를 땅에 파묻거나 장개석 군대에게 넘겨줘 버린 노동자들은 저항다운 저항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장개석은 이러한 테러 통치를 모든 읍과 도시들로 급속히 확대해, 몇 달간 수만 명의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왕범서와 젊은 동료들은 “한데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탄식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이런 경험과 의문들이 나중에 1차 혁명의 패배 후 모스크바로 도피한 왕범서를 트로츠키주의로 인도한다. 당시 트로츠키는 이 일을 이렇게 분석했다. “민족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장개석들과 왕정위들을 모스크바에 사절로 보냈고, 호한민(胡漢民)들을 통해 코민테른의 문을 두드렸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민족 부르주아지가 혁명적 대중에 직면해 무기력하게 허약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취약함을 깨달았고 자신들의 안전 보장을 모색했다. 만약 우리들[공산당] 자신이 노동자와 농민을 밧줄로 끌고가지 않았다면, 노동자도 농민도 민족 부르주아지를 추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레온 트로츠키, ≪On China≫)

왕범서와 젊은 혁명가들은 쓰라린 패배의 상처를 안고 모스크바 유학을 떠난다. 여기서 그들은 예기치 않게 소련 공산당 내의 거대한 논쟁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이 영화를 보러 간 한 극장에서 “화면에 스탈린 혹은 트로츠키가 나타날 때마다 군중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옹호와 반대의 두 태도가 공존했다.……비록 트로츠키파가 스탈린파를 압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세력이 거의 비등했다.”

왕범서는 삼엄한 감시 속에서 용케 좌파 반대파의 문건들을 구해 읽는다. 그는 그 경험을 이렇게 회고한다. “몇 권의 책들을 읽고서 내 마음은 밝게 트였다. 두서너 해 동안 가슴속에 쌓여 있던, 중국 공산당의 혁명 지도에서 드러난 이해할 수 없는 전술에 관한 의문들이 이때 모두 분명해졌다.……이때부터 나는 ‘볼셰비키―레닌파’(당시 반대파의 명칭)가 됐다.”

소련 내의 좌파 반대파의 규모와 영향력에 대한 왕범서의 평가는 사실보다 약간 부풀려져 있는 듯하다. 실제로 모스크바의 반대파는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었지만, 정작 (혁명의 열기가 가장 강력했으며 좌파 반대파가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다가 일찌감치 패배한) 수도 레닌그라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왕범서 자신의 회고했듯이 “레닌그라드의 친구들은 내가 모스크바에서 알고 지내던 러시아인들에 비해 소비에트의 새로운 젊은 세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스탈린이 왜 당내 투쟁에서 트로츠키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가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국제 혁명의 확산을 기대하며 10여 년을 버텨 온 러시아 노동계급은 독일 혁명이 최종 패배하면서 낙담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이러한 절망감의 산물이었다. “분명히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이들 젊은 남녀에게 선호되거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 1차 혁명의 패배로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권위가 크게 추락했으며, (처음부터 이런 문제점들을 경고해 온) 좌파 반대파의 주장이 어느 정도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는 왕범서의 주장은 사실이다. 그러자 스탈린은 모든 책임을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진독수 개인의 “우파 기회주의” 탓으로 돌려 버리고, ‘제3시기’를 선포한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제3시기 좌익 맹동주의” 정책은 공산당의 마지막 도시 기반마저 파괴해 버린다. 스탈린은 “다가오는 고조기”를 선포하고 중국 공산당에게 봉기를 명령한다. “이런 시위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유희 같았고, 혁명가가 자신을 용담거리로 삼는 못된 장난이었다.……‘시위’가 끝나면 ‘고조’는 한번 지나간 셈이 된다. 이런 시위는 이를 조직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곤혹감을 불러일으켰고, 동원돼 참가한 사람에게는 막대한 고통을 줬다.……이렇게 죽임을 당한 중국의 우수한 공산당원은 너무나 많았[다.]……우리가 이 노동자 계급의 중심지에서 고조를 조성하려면 할수록 진정한 고조의 도래는 점점 더 멀어지는 듯했다.” 공산당은 군대를 조직해 몇몇 남부 도시들을 공격했다가 거의 궤멸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번에도 자신의 잘못을 또다시 구추백이라는 희생양에게 떠넘겨 버린다.

사실 코민테른의 이 ‘제3시기’ 정책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범서가 책의 뒷부분에서 지적하듯이, 유럽에서도 이것은 큰 문제를 낳았다. 즉, 파시즘의 등장에 맞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두 노동계급 정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할 시기에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이 사회파시즘, 즉 파시즘과 별 다를 바 없으므로 연대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 ‘제3시기’ 정책은 오래 가지 않는다.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사회파시즘론’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또다시 우경화한 ‘인민전선[통일전선]’ 정책을 내놓는다. 이번에는 파시즘이라는 ‘최악’에 맞서, 사회민주당은 물론 ‘차악’인 부르주아 ‘개혁’파 정당들과도 연대하라는 것이었다. 이 정책이 중국에서 2차 국공합작,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낳았고, 국제적으로는 2차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군측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쨌든 왕범서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올바른 주장을 내놓고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이들을 괴롭힌다.

가장 큰 것은 경찰의 탄압이다. 특히 왕범서의 세 번째 감옥 생활 경험은 정말 끔찍할 정도다.

일찌감치 도시, 즉 노동자 계급 주도의 혁명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대장정을 떠난 공산당과 달리―물론, 중국 공산당이 무슨 전략 수정을 통해 이렇게 한 것은 아니다. 도시에서의 궤멸적 패배로 농촌으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사태가 그렇게 진행됐다―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도시에서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부활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고, 그 때문에 탄압도 가장 심하게 받았다.

두 번째는 역시 소련, 그리고 공식 공산당의 권위 문제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 그들의 공식 지도자인 스탈린, 그리고 스탈린이 지도하는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의 공인된 권위는 매우 강력했다.

세 번째는 트로츠키주의자들 자신의 분파주의다. 사실 국제적으로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는 분파주의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 점에서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초 4파의 분열과 통합 이후에도 수많은 분열과 통합을 거친다.

이 점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게는 참으로 불행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고립된 처지와 관계가 있었다.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공식 공산당의 운동, 그리고 대체로 공식 공산당의 지도 하에 있는 노동자 운동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배제당했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젊은 지식인들 중심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현실 운동으로부터의 고립이 악명 높은 분파주의를 낳았다.


“타락한 노동자 국가”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논쟁들, 특히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다양한 논쟁들―항일운동을 위해 계급운동을 포기할 것인가, 소련과 중국은 어쨌든 노동자 국가인가, 전 세계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여전히 혁명적 세력인가, 2차세계대전에서 (소련과 중국이 가담한) 연합군을 지지해야 하는가, 제4인터내셔널 창립은 필요했는가 등등―은 단순한 분파 싸움이 아니며, 필요한 논쟁이었다. 왕범서의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현실 운동이 제기하는 수준 높은 토론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왕범서의 생각에 몇몇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예컨대, 처음에는 구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보다가 나중에는 “관료집산주의체제”로, 다시 “타락한 노동자 국가”론으로 돌아가는 왕범서의 견해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왕범서 개인이나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트로츠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론을 고수했다. 즉,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국가 관료들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보지 않았다. 고작해야 노동자 계급에 기생하는 관료 집단일 뿐이므로 그들의 지배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곧 과거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들이 반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트로츠키 사후에 제4인터내셔널 경향의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이 책의 뒷부분은 바로 이러한 혼란과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트로츠키의 “타락한 노동자 국가”론은 틀렸다(나는 이 위대한 혁명가가 자신이 세운 국가가 이미 자본주의로 변질됐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트로츠키는 사유재산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소련을 여전히 ‘사회주의’로 봤지만, 국유화는 사회주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가 아니라, 국가 관료들이 생산 계획을 관료적으로 수립하고 통제한다는 점에서 구 소련은 ‘사회주의’는커녕 오히려 박정희 치하의 국가자본주의와 더 닮았다.

구 소련과 동유럽, 중국, 북한, 쿠바 등이 모두 국가자본주의라는 분석은 구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 과정에서 잘 입증됐다. ‘사회주의 노동자 국가’가 시장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어떠한 부르주아 반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구 사회의 지배자였던 국가 관료들이 다음 사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적 자본가로 변신했다.


이러한 잘못된 전제 때문에 이 밖에도 몇 가지―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대한 교조적 해석―약점들이 있지만, 책을 읽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왕범서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좌파적 관점을 유지했고 이론을 발전시켰다. 예컨대 2차세계대전에서 소련 정부와 중국의 항일세력들이 연합군측에 가담했는데,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혼란 속에서도 (미-영 제국주의 군대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연합군을 지지하기를 거부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조차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 봤던 시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태도다.

무엇보다 왕범서와 그의 동료들의 평생에 걸친 투쟁은 헛되지 않았다. “중국의 지식청년과 공-농대중의 반스탈린주의가 폭발하는 시기는 더 빠르게 다가올 것이며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폭발할 것”이라고 했던 왕범서의 예상은 옳았다. 1968년 서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의 여파로 (왜곡된 형태이지만) 중국에서도 문화혁명이 일어난다. 모택동은 아래로부터의 불만을 다스리고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문화혁명을 적당히 이용하려 했으나, 운동이 ‘사상의 자유’를 제기하는 등 갈수록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자 서둘러 사태를 수습했다.

무엇보다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항쟁은 왕범서의 기대가 “제멋대로의 희망”이 아님을 보여 줬다. 왕범서는 2002년까지 살았으므로 이 항쟁을 보고 기뻐했을 것이다.

비록 항쟁은 무참하게 짓밟혔으며, 중국 공산당은 이때부터 시장자본주의로 이동했지만, 최근 박노자 씨가 여러 차례 지적하듯이 중국에서 “불만은 부글부글 끓고 있으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다.

물론 새로운 투쟁이 “중국의 제4인터내셔널 분자들과 연합해서 모든 반스탈린주의운동을 이끌어 새로운 반관료주의적 혁명을 완성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왕범서와 그의 동료들을 포함한 국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지난한 투쟁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스탈린에 의해 “제국주의의 첩자”라고 터무니없이 공격당했던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구소련 몰락 후 기성 좌파들이 대부분 우파로 투항하거나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극좌파의 주도적 세력으로 떠올랐다. 예컨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극좌파 조직 세 군데―영국의 SWP, 프랑스의 LCR, 이탈리아의 리폰다찌오네―중 두 군데가 트로츠키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혁명과 세계 혁명운동사의 다양한 논쟁들을 다루고 있다 보니, 중국 현대사, 러시아 혁명과 반혁명,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등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책을 읽기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그런 점에서 ≪천안문으로 가는 길≫(찰리 호어, 책갈피)를 함께 읽으면 좋다). 그럼에도 이 늙은 혁명가의 회고는 매우 감동적이다. 글을 쓰면서 허세를 부리지 않고 시종일관 솔직한 태도를 유지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꼭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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