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 - 8인의 시인, 8인의 화가 : 천진하게 들끓는 시절을 추억하며
김연덕 외 지음 / 미술문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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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한쪽은 글로 쓴 예술이고, 다른 한쪽은 선과 색으로 그린 예술이라고”(본문 5쪽). 달리 말하면 화가는 선과 색이라는 비기(秘器)를 통해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작품이나 인물을 그렸고, 시인은 글이라는 문력(文力)을 통해 그(그녀)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창조해냈다. 화가와 시인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다르지만 그들이 창조해낸 결과물은 우리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글을 통해, 하나의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예술가들이 그 힘든 과정을 마다하면서 예술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는 글로 쓴 시인 8인이 그들의 기준으로 그들이 사랑하는 화가들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의 면면들이 낯익지 않은 것을 보면서 나를 자책하는 것도 잠시, 그들의 언어를 통해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최승자 시인을 무작정 사랑했고, 파울 클레를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이십 대를 떠올리는 안희연 시인, 그리고 최승자가 말하는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와 파울 클레의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우리는 연주한다’는 그들을 대표하는 문구들에서 안희연 시인의 처절했던 이십 대를 떠올리게 된다. 쓰다만 시구를 던져버리고, 그리다만 캔버스를 찢어버리고 말지만 결국엔 그 고통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낸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시와 그림들이 더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이라는 일을 하면서 방황했던 이십 대의 우울한 청춘인 서윤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가쓰시카 호쿠사이, 그리고 그들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성난 파도의 모습을 보여준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그림을 보면서 그들의 우정이 파도보다 높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보게 된다. 우스갯소리지만 2023년 다이어리를 구매하면서 성난 파도 위에서 그물질을 하는 다이어리 커버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무심코 구매를 했는데 그게 바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토미야 36경이었다. 책을 통해 만난 호쿠사이지만 그의 그림을 선택한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서윤후 시인 같은 심정으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그림을 선택한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이외에도 춤을 좋아해서 앙리 마티스의 춤추는 그림들 또한 좋아했던 오은 시인과 어린 시절 다른 어린이들과는 달라 보이기를 바랐던 김현덕 시인의 눈에 들어온 헤몽 페네의 그림들, 무작정 피아노가 좋았고, 성화(聖畵)가 좋아서 들락거린 교회를 통해 만난 밀레의 만종과 신미나, 간송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최북의 그림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 이현호, 피에르 보나르를 통해 어린 시절 그리운 기억을 반추해낸 최재원 , 우연히 그녀(이소화)를 만났지만 얼굴보다 그림을 통해 그녀를 더 애정 하게 된 박세미 시인 등 당신들의 그림들의 8인의 시인들 눈에 들어왔고, 당신들의 그림에 답해주고 있는 시인들을 보면서 그들의 시들이 읽고 싶어졌다.

 

열여덟, 내 인생은 용도를 알 수 없는, 피아노의 가운데 페달 같았다.(122쪽)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과 화가라는 예술가들의 조합도 신선했지만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시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접했고, 어떻게 느꼈으며, 무엇을 통해 감상하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시인들의 감성과 그 감성으로 무장한 어린 청춘들의 치기 어린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거 같다. 가면 갈수록 시인들의 설자리가 줄어들고 있지만, 시(詩)는 우리들의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는 창작물이기에 예전처럼 많은 분들에게 다시 사랑받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고, 여기에 나온 8인의 시인들이 그 중심에 서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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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고 고결한 밤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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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루이즈 글릭의 시집(야생 붓꽃, 아베르노, 신실하고 고결한 밤)들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집이《신실하고 고결한 밤》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묘했던 게 옛날 어렸을 때의 추억이 생각이 났다. 아주 어렸을 때 처음 집을 떠나 여행을 갔던 외삼촌댁의 허름한 마룻바닥에서 낮에 잠을 자다가 밤낮이 바뀐 줄도 모르고 밤을 아침으로 착각했던 기억, 혼자 집을 지키면서 부모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던 모습들, 가족들과 기차로 여행하면서 창밖으로 무수히 지나간 수채화 같은 장면들의 지나침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소중한 기억으로 다가왔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에 수록된 시는 24편인데 그 중에서 이 시집의 표제작인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이 시집에서 가장 긴 8쪽짜리 장시(長詩)이면서 서사가 가미된 한 편의 수필을 읽은 기분이다. 작가 자신의 행복했던 이야기를 단순하게 시작해서 묘한 여운을 주며 끝을 낸다. 한 소년의 아주 어렸을 때 사소한 관찰의 기억들을 통해 루이즈 글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살포시 집어넣는 것처럼 보인다. 집 밖의 곤충들이 알을 까고, 새들이 지저귀며, 개와 공놀이하며 놀았던 모습들, 그 기억 속에 큰 나무처럼 존재하던 부모님과 형과 이모가 이제는 옆에 없다는 공허함이, 그리고 이제는 그 위치가 돼버린 내 모습을 보면서 느꼈을 허전함이 이 시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어서 묘한 아련함이 밀려왔다. 상대를 떠나보낼 때 ‘완벽한 끝은 없고 무한한 끝만 있다’(본문 29쪽)는 이 시의 마지막 문구를 읽으면서는 어딘지 모를 종착역을 향해 나가가야 하는 우리들의 삶 또한 무한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나 생각하네, 너를 떠나야겠다고. 보자 하니

완벽한 끝은 없는 것만 같아.

사실, 무한한 끝들이 있지.

아니면 일단 누군가 시작하면,

다만 끝이 있을 뿐.

(본문 29쪽, ‘신실하고 고결한 밤’ 中)


​루이즈 글릭의 시집 3권을 읽으면서 시(詩) 문학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과 정말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이라는 여정을 통해 끝이 어딘지도 모를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들, 그 달리는 와중에 여러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신화가 되기도 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동화 같은 삶을 살기도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의 기준은 바로 나다. 나를 통해 너가 되고, 너를 통해 우리가 된다. 나를 넘어 우리가 되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루이즈 글릭이 말하는 삶을 대하는 명료함을 위한 노력들이 아닐까? 상처와 죽음, 헤어짐과 만남을 수없이 반복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무수한 끝을 대면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는지, 그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지 루이즈 글릭의 시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무수한 끝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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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르노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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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이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시라면 <아베르노>는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아베르노는 ‘아베르누스’라고도 부르는데 라틴어로 ‘지옥’이라는 의미이자 나폴리 서쪽에 있는 호수를 일컫는다. 근데 이 호수에는 유황이 분출해서 새들이 날아들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은 이 호수 아래에 지옥이 있다고 믿었고, 고대 로마인들에게 지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알려진 곳이 바로 이 시의 제목인 <아베르노>인 것이다. 고로 아베르노가 공포의 장소이자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시를 읽어보면 무섭다기보다는 약간 몽환적이면서 내가 지금 구름 위를 걷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애틋함으로 포장된 싯구들이 가득하다.


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티브는 ‘죽음’이다. 하지만 시를 읽다 보면 이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시월」에서의 죽음은 사랑하는 삶을 위해 사수해야 하는 생존본능으로 다가오고, 이 시집의 제목인「아베르노」는 떠남(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헤어짐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봄이 되면 여름이 오고, 가을, 겨울이 오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상실과 죽음을 통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벌판이 불에 타 없어져도 일 년 후에 다시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처럼 다시금 우리들 곁으로 돌아와 일 년 후 벌판의 모습처럼 활기 넘치는 생이 시작된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알고 보면 자연도 우리와 같지 않다.

자연은 기억의 저장고가 없다.

벌판은 성냥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고,

어린 소녀들을 두려워도 않는다.

벌판은 고랑들도 기억하지 않는다. 벌판은 몰살되고, 불에 타고, 그리하여 일 년 후에 다시 살아난다.

(본문 109쪽 ‘아베르노’ 中)


‘시(詩)’가 함축적 언어로 점철된 문학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미국 시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게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시에 흐르는 정서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도 시이다. 다른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하지가 않는다. 루이즈 글릭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이 시가 나에게 주는 영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몽환적이면서도 애틋하고, 애틋하면서도 부질없는 삶과 죽음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죽음의 기억들을 루이즈 글릭이 끌어내 올렸고, 그 끌어올린 사유의 단편들이 시집《아베르노》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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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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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란 감상하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도 하고,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상평이 갈리곤 한다. 기형도의 우울함이 좋아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가 하면 최승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나 사랑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시들을 보면서 마구 분출되는 도파민을 통해 흥분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짧은 문구에서 어쩜 저렇게 사람을 흥분시킬까 하겠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 시인이 지금까지 습작하면서 피를 토한 문구들이 하나둘 응축돼 나타나기에 짧은 문장을 통해서도 그(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미국 작가이자 시인인 루이즈 글릭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이 없어서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다가 이번에 시공사에서 출간돼 운 좋게 읽을 수 있었다. <아베르노>를 통해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번에 읽은 <야생 붓꽃>을 통해 퓰리처상을 받았으니 그녀의 시 세계가 미국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알만 하다. <야생 붓꽃>에서는 54편의 짤막한 시들이 담겨 있는데 미국인(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원의 세계, 그리고 그 정원의 세계를 가꾸는 정원사(시인)와 그 세계를 넌지시 바라보는 관조자(신)이 있다. 자연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 붓꽃’을 보면서 고통의 끝은 죽음이라고 외치는 한 인간이 있고, 그 고통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야생 붓꽃, 거기에 이런 상황을 무심한 듯 관조하는 신의 모습에서 야생 붓꽃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자연(정원)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늠해볼 수 있고, 꽃들의 변화무쌍한 모습들 속에서 인간들 또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루이즈 글릭이 <야생 붓꽃>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 속 54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녀의 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시 속에 감춰진 응축된 언어들은 기형도의 우울함을 넘어선 기쁨이었고, 최승자의 죽음에 대한 초월이었으며, 이상의 난해함 속의 감춰진 평범함과 같았다. 제일 마지막에 실린 ‘흰 백합’을 읽으면서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됐다. 실수를 해서는 안 되지만 실수를 하고야 마는, 하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간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축 처진 손을 꼭 잡아주는 그(그녀)가 있기에 흰 백합이 그렇게 고결하며 아름다운 지도 모르겠다.


쉿, 사랑하는 이여. 되돌아오려고 내가

몇 번의 여름을 사는지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 한 번의 여름에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찬란한 빛을 풀어 주려고 나를 파묻는

당신 두 손을 나 느꼈어요. (본문 95쪽, 흰 백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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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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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감상(鑑商) 하는데 있어서 육하원칙에 따라 감상평이 갈리곤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에 따라 그림을 감상(感想) 하는 느낌이 달라지기에 내가 굉장히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보는 것과 꿈길을 걷는 것처럼 행복할 때 ‘자화상’을 보는 건 다가오는 느낌이 천지차이다. 아름다움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구원하기 이전에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은 우리들 모두가 다르기에 언제 어느 순간에 그 아름다움을 느끼느냐가 그림이 나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하는지 아니면 크나큰 슬픔을 선물하는지 알게 될 거라고 본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들이 우리들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선물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행복함을, 때로는 쓸쓸함을 선물하기도 하면서 그 그림을 통해 내가 그 어떤 위로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림은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길에 동반자 같은 역할을 해주는 친구이기에.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청년 시절을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리고 한 남자에게 있어 한창일 나이인 30대를 허허벌판인 시베리아에서 형벌 아닌 형벌을 받으면서 보냈다. 어린 시절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지내다가 이제 자신의 적성을 찾아 꿈을 펼칠 나이에 자신의 우상이었던 푸시 킨과 자신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줬던 어머니의 죽음은 문학소년이었던 도스토옙스키의 목소리가 한동안 나오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을 안겨줬다. ‘페트라솁스키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형 직전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선고받은 이력을 포함해서 그의 유년시절부터 청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그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우면서 처절하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그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벗이었고, 무작정 글을 쓰면서 머리에 쌓인 상념을 그림을 감상하면서 그 고독의 끝을 즐겼을 도스토옙스키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의 비밀을 탐구한 작가다. 그의 소설에서 아름다움(美)은 진(眞)과 선(善)을 그 안에서 포괄하고 있다. 인간의 감각에서 아름다움은 유일하게 현시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진과 선의 육화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진과 선의 ‘보이지 않는 추상성’이 ‘보이는 이미지’로 현현된 것이다.(본문 138쪽 中)


책에서는 여러 그림들이 나오는데 무리요의 <성스러운 가족>을 보면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진 못했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 도스토옙스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이 고팠던 어린 시절의 도스토옙스키가 떠올랐다. 프리스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란 그림을 보면서는 총살 직전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지였던 시베리아로 떠나는 도스토옙스키의 공포스러운 마음을 대변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야코비의 <죄수들의 휴식>에서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 감옥생활을 한 그의 고통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면서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의 대문호란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힘든 생활을 버티면서 느낀 감정들을 오롯이 자신의 글 속에 투영시킨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유명 화가의 그림들을 보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통한 애환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유년시절부터 청년기, 결혼 후 삶,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소개된 그림을 보면서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내가 이심전심 느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게 아렸다. 평탄한 삶을 살았던 작가가 아니었기에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조주관 교수의 안목이 더해져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그림을 그렸고, 어떤 그림을 사랑했는지 그의 미술관(美術觀)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책을 읽는 내내 큰 행복이자 즐거움이었다. 마지막으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보면서 환하게 나를 안아줄 그 누군가를 위해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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