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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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란 감상하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도 하고,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상평이 갈리곤 한다. 기형도의 우울함이 좋아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가 하면 최승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나 사랑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시들을 보면서 마구 분출되는 도파민을 통해 흥분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짧은 문구에서 어쩜 저렇게 사람을 흥분시킬까 하겠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 시인이 지금까지 습작하면서 피를 토한 문구들이 하나둘 응축돼 나타나기에 짧은 문장을 통해서도 그(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미국 작가이자 시인인 루이즈 글릭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이 없어서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다가 이번에 시공사에서 출간돼 운 좋게 읽을 수 있었다. <아베르노>를 통해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번에 읽은 <야생 붓꽃>을 통해 퓰리처상을 받았으니 그녀의 시 세계가 미국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알만 하다. <야생 붓꽃>에서는 54편의 짤막한 시들이 담겨 있는데 미국인(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원의 세계, 그리고 그 정원의 세계를 가꾸는 정원사(시인)와 그 세계를 넌지시 바라보는 관조자(신)이 있다. 자연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 붓꽃’을 보면서 고통의 끝은 죽음이라고 외치는 한 인간이 있고, 그 고통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야생 붓꽃, 거기에 이런 상황을 무심한 듯 관조하는 신의 모습에서 야생 붓꽃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자연(정원)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늠해볼 수 있고, 꽃들의 변화무쌍한 모습들 속에서 인간들 또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루이즈 글릭이 <야생 붓꽃>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 속 54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녀의 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시 속에 감춰진 응축된 언어들은 기형도의 우울함을 넘어선 기쁨이었고, 최승자의 죽음에 대한 초월이었으며, 이상의 난해함 속의 감춰진 평범함과 같았다. 제일 마지막에 실린 ‘흰 백합’을 읽으면서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됐다. 실수를 해서는 안 되지만 실수를 하고야 마는, 하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간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축 처진 손을 꼭 잡아주는 그(그녀)가 있기에 흰 백합이 그렇게 고결하며 아름다운 지도 모르겠다.


쉿, 사랑하는 이여. 되돌아오려고 내가

몇 번의 여름을 사는지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 한 번의 여름에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찬란한 빛을 풀어 주려고 나를 파묻는

당신 두 손을 나 느꼈어요. (본문 95쪽, 흰 백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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