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고 고결한 밤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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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루이즈 글릭의 시집(야생 붓꽃, 아베르노, 신실하고 고결한 밤)들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집이《신실하고 고결한 밤》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묘했던 게 옛날 어렸을 때의 추억이 생각이 났다. 아주 어렸을 때 처음 집을 떠나 여행을 갔던 외삼촌댁의 허름한 마룻바닥에서 낮에 잠을 자다가 밤낮이 바뀐 줄도 모르고 밤을 아침으로 착각했던 기억, 혼자 집을 지키면서 부모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던 모습들, 가족들과 기차로 여행하면서 창밖으로 무수히 지나간 수채화 같은 장면들의 지나침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소중한 기억으로 다가왔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에 수록된 시는 24편인데 그 중에서 이 시집의 표제작인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이 시집에서 가장 긴 8쪽짜리 장시(長詩)이면서 서사가 가미된 한 편의 수필을 읽은 기분이다. 작가 자신의 행복했던 이야기를 단순하게 시작해서 묘한 여운을 주며 끝을 낸다. 한 소년의 아주 어렸을 때 사소한 관찰의 기억들을 통해 루이즈 글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살포시 집어넣는 것처럼 보인다. 집 밖의 곤충들이 알을 까고, 새들이 지저귀며, 개와 공놀이하며 놀았던 모습들, 그 기억 속에 큰 나무처럼 존재하던 부모님과 형과 이모가 이제는 옆에 없다는 공허함이, 그리고 이제는 그 위치가 돼버린 내 모습을 보면서 느꼈을 허전함이 이 시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어서 묘한 아련함이 밀려왔다. 상대를 떠나보낼 때 ‘완벽한 끝은 없고 무한한 끝만 있다’(본문 29쪽)는 이 시의 마지막 문구를 읽으면서는 어딘지 모를 종착역을 향해 나가가야 하는 우리들의 삶 또한 무한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나 생각하네, 너를 떠나야겠다고. 보자 하니

완벽한 끝은 없는 것만 같아.

사실, 무한한 끝들이 있지.

아니면 일단 누군가 시작하면,

다만 끝이 있을 뿐.

(본문 29쪽, ‘신실하고 고결한 밤’ 中)


​루이즈 글릭의 시집 3권을 읽으면서 시(詩) 문학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과 정말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이라는 여정을 통해 끝이 어딘지도 모를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들, 그 달리는 와중에 여러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신화가 되기도 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동화 같은 삶을 살기도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의 기준은 바로 나다. 나를 통해 너가 되고, 너를 통해 우리가 된다. 나를 넘어 우리가 되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루이즈 글릭이 말하는 삶을 대하는 명료함을 위한 노력들이 아닐까? 상처와 죽음, 헤어짐과 만남을 수없이 반복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무수한 끝을 대면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는지, 그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지 루이즈 글릭의 시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무수한 끝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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