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르노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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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이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시라면 <아베르노>는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아베르노는 ‘아베르누스’라고도 부르는데 라틴어로 ‘지옥’이라는 의미이자 나폴리 서쪽에 있는 호수를 일컫는다. 근데 이 호수에는 유황이 분출해서 새들이 날아들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은 이 호수 아래에 지옥이 있다고 믿었고, 고대 로마인들에게 지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알려진 곳이 바로 이 시의 제목인 <아베르노>인 것이다. 고로 아베르노가 공포의 장소이자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시를 읽어보면 무섭다기보다는 약간 몽환적이면서 내가 지금 구름 위를 걷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애틋함으로 포장된 싯구들이 가득하다.


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티브는 ‘죽음’이다. 하지만 시를 읽다 보면 이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시월」에서의 죽음은 사랑하는 삶을 위해 사수해야 하는 생존본능으로 다가오고, 이 시집의 제목인「아베르노」는 떠남(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헤어짐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봄이 되면 여름이 오고, 가을, 겨울이 오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상실과 죽음을 통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벌판이 불에 타 없어져도 일 년 후에 다시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처럼 다시금 우리들 곁으로 돌아와 일 년 후 벌판의 모습처럼 활기 넘치는 생이 시작된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알고 보면 자연도 우리와 같지 않다.

자연은 기억의 저장고가 없다.

벌판은 성냥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고,

어린 소녀들을 두려워도 않는다.

벌판은 고랑들도 기억하지 않는다. 벌판은 몰살되고, 불에 타고, 그리하여 일 년 후에 다시 살아난다.

(본문 109쪽 ‘아베르노’ 中)


‘시(詩)’가 함축적 언어로 점철된 문학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미국 시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게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시에 흐르는 정서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도 시이다. 다른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하지가 않는다. 루이즈 글릭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이 시가 나에게 주는 영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몽환적이면서도 애틋하고, 애틋하면서도 부질없는 삶과 죽음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죽음의 기억들을 루이즈 글릭이 끌어내 올렸고, 그 끌어올린 사유의 단편들이 시집《아베르노》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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