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도 있는 사람
전민식 지음 / 답(도서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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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식 작가의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난 소설이 은희경 작가의 <마이너리그>였다. 소재와 내용은 물론 달랐지만 유신시대와 현재의 팍팍한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너무나 비슷했으니까. 거기에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어도 마이너리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에서 ‘포기’라는 말보다 ‘체념’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17년 9월의 대한민국은 바로 메이저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지만 결국엔 마이너밖에 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빅리그에 진출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려운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누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마이너리거들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전민식 작가의 소설《알 수도 있는 사람》을 읽고 나면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리라.


드라마나 뉴스를 보면 새벽에 외제차들이 모여 레이싱하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다. 서로의 배기량을 뽐내며 새벽의 고요함을 부셔버리는 그들의 갑질이 레이싱에서도 그대로 묘사된다. 이 소설에서도 밤마다 의문의 거리 레이싱이 펼쳐진다. 전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배기량 2,000cc 이하의 국산 차만 참가 가능하고, 그 레이싱에 참가하는 선수들 또한 사회에서 갑질을 하는 사람이 아닌,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1위에게만 주어지는 상금을 통해 그들 현재의 삶을 연명해 나가려는 마이너리거들의 레이싱이라는 것이다. 그 레이싱을 통해 그 누군가는 하루를 연명하고, 다른 참가자들은 후일에 펼쳐질 레이싱을 위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비밀 말해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실은 비틀즈의「헤이 쥬드」야. 슬픈 노래일지라도 즐겁게 불러보세요. 내가 이 노래 좋아한다는 거 아무도 모를 거야. 고통을 느낄 때, 쥬드여, 무리하지 말아요. 세계를 짊어져서는 안 돼요. 슬픈 노래일지라도 즐겁게 불러보세요.’(27쪽 中)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SR(Street Racing)에 참여했는지를 쫓아가 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소소한 재미다. 객원기자로 생활하는 용주에게 기삿거리는 방세를 내기 위해서라면 표절도 서슴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카센터를 운영하는 기성의 삶은 신분의 격차 속에서 방황하는, 낡디 낡은 스페어 타이어의 삶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의류회사에서 영업을 하는 영미는 구조조정이라는 덫 속에서 실적에 따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하루살이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SR(Street Racing)을 만든 수인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 속에서 옛사랑의 추억에 빠져 사는 인물로 묘사됐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같이 내 주위에 고개만 돌리면 만날 수 있는 회사동료이자 친구들이었다. 사회나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갑질 당하는 아웃사이더의 삶 속에서 SR(Street Racing)은 그들에게 지금의 지리멸렬한 삶에서 탈출하는 해방구이자 도피처가 아니였을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수인, 기성, 용주, 영미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사하라 랠리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지금까지 참가했던 SR과는 다르게 사하라 랠리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경기이고, 자신이 지금까지 벌었던 전 재산을 투자해서 참가하는 경기이기에 그 위험부담이 상당함에도 그들은 사하라 랠리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1등을 한다는 보장도 없이 사하라 랠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출사표를 던진 그들의 의중이 궁금했다. 돈 때문에? 아니면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구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죽음을 담보로 달리는 레이싱이 그냥 좋아서였을까?


네 사람은 철저하게 모래사막에 고립되었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되지 않는 사막의 지평선이 네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꿈과 희망은 물론 절망마저도 집어 삼켜버린 뜨겁고 빨간 사막 위로 아지랑이 기둥이 커튼처럼 드리워지고 있었다.(310쪽 中)


사람들 누구에게나 가슴 절절한 사연 하나씩은 감추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 사연을 감추고 싶은 4명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았던 과거를 잊기 위해 죽음을 담보로 랠리에 참가를 한다. 그러면서 새 출발을 위해 대한민국을 떠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랠리에 참가한 주인공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창밖으로 그들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마음 한쪽이 한없이 아려왔다. 희망으로 들려야 할 환호가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절규이자 아우성으로 들렸다. 꼭 불구덩이에 죽으러 가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모습이 사막 한가운데서 점점 희미한 점들로 오버랩되면서 내 마음을 마구 흔들었다. 그들의 새출발을 힘차게 응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미웠고, 그 미움 속에서 대한민국은 새로운 수인, 기성, 용주, 영미들을 만들어낼 거라는걸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 메이저의 횡포에 고개 숙이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마이너들에게 이 소설이 주는 울림이 전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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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비처럼 - 시처럼, 만화처럼 세미콜론 툰
권혁주 지음 / 세미콜론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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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만화가 만나서 그려내는 세상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요? <옴비처럼>을 통해 그 상상의 세계를 안내해 드릴게요.
시와 만화의 컬라보가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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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 앤 구떼 스타일 - 스타일리시 카페 데코레이션 & 레시피
조정희.이진숙 지음, 문복애 사진 / 비타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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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시작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카페 테이블에서 몽실몽실하게 영근 꽃송이를 보게 된다면 기분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쁠 거 같아요. 거기다 꽃에서 매혹적인 향까지 난다면 그건 커피를 마시지 말고 꽃과 소개팅을 하라는 하늘의 계시겠지요. 하지만 그런 카페를 아직까지 들어가본 적이 없다는 게 슬프네요. 어쩌다 발견한 꽃들은 거의 대부분이 조화 뿐이고, 생화를 발견한다고 해도 이미 시들어버려서 제게 눈길 한번 안 줄게 뻔하니까요. 꽃과 커피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사이인데 자꾸 떼어놓으려고 하니 제 마음이 좋지 않아요. 카페 오너들은 테이블에 꾸민 꽃장식보다 커피 맛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맞는 일일 테지요. 하지만 향기가 나는 꽃 주위엔 벌들이 꼬이듯이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집엔 아름다운 꽃들이 커피향을 맡으며 피어날 거라 생각해요. “하나의 씨앗은 여러 개의 숲을 낳는다.”는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처럼 매일 예쁜 꽃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 행복은 점점 여러 사람들에게 퍼져 나중엔 행복을 파는 카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아름다운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독백 끝)



일본의 카페에서 테이블 플라워는 이미 카페 데코레이션으로 자리 잡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몇몇 카페 말고는 테이블 위의 플라워를 찾아보기 힘들다. 꽃값이 비싼 것도 있지만 테이블의 꽃이 카페를 찾는 손님들에게 얼마나 큰 매력을 갖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카페 테이블의 플라워는 그냥 플라워가 아니다. 한 카페의 시그니처가 될 수도 있고, 카페의 인테리어를 대신하는 멋진 장식품이 될 수도 있다. 또,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의 친구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불러주는 세레나데가 될 수 있는 게 테이블의 플라워라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에게 행복과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테이블 플라워가 우리네 카페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 가로수길에 자리한 ‘블룸 앤 구떼’는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와 빵이 있고, 내가 원하는 꽃들이 가득한 카페였다. 지금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일상이 아닌 시절이었던 2004년에 플라워 카페를 오픈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여성 2명이 동업의 형태로 가로수길 중간쯤에 차린 카페가 바로 ‘블룸 앤 구떼’다. 이진숙의 플라워 스튜디오 bloom과 조정희의 케이크 스튜디오인 goute‘를 콜라보해서 만든 카페라면 이해하기 쉬울 듯. 꽃과 빵이 만났으니 성공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겠지만 시작 후 1년 동안은 그리 손님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손을 놓을 수 없었기에 그들이 잘하는 베이킹클래스와 꽃 레슨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이를 통해 지금의블룸 앤 구떼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어떤 콘텐츠로든 ‘이것이 블룸앤구떼 스타일이야’라고 자신 있게 제안하고, 돈을 내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그런 내공으로 블룸앤구떼의 스타일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본문 11쪽 中)


두 여성이 ‘블룸 앤 구떼’ 란 카페를 하면서 호우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임차인이라는 이유로 2011년 10월엔 가게문을 닫아야 했고, 새롭게 생겨나는 카페들과 경쟁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했다. 거기에 갈수록 어려지는 고객들이 원하는 새로운 콘셉트에 맞추기 위한 결과물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기에 소통할 방법을 찾느라 애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블룸 앤 구떼’는 포기하지 않고 변화를 모색한 끝에 본인들의 노력이 담긴 새로운 건물을 올릴 수 있었고, 지금의 ‘블룸 앤 구떼’ 는 젊은 엄마들을 타깃 삼아 오전엔 브런치 손님을, 오후엔 아틀리에 카페로, 그 이후엔 모임이나 레슨 등에 활용되고 있다. 이런 ‘블룸 앤 구떼’를 보면서 가장 부럽게 다가온 건 그들의 재주를 한껏 끌어올린 카페라는 점이었다. 한 분은 케이크에 능통하고 다른 한 분은 꽃 장식에 일가견이 있었으니 케이크와 꽃의 조화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상적이었다고나 할까. 좋은 식재료를 통해 케이크와 빵을 만드는 건 기본이고, ‘블룸 앤 구떼’ 스타일만의 선물 포장을 통해 고객들을 만족시켰다. 계절별로 제철 과일이나 채소를 통해 기획상품을 만들고, 케이크 박스에 미니부케를 붙여서 케이크를 더욱 고급스럽게 만든 것도 ‘블룸 앤 구떼’가 내세우는 자랑이자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 테이블엔 갈색병에 꽃을 담아 손님들에게 신선한 아름다움을 전했고, 여러 식물들과 꽃들을 이용한 디스플레이 또한 ‘블룸 앤 구떼’ 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라 자부하고 싶다. 다양한 허브와 서양풍의 여름 식물들을 이용한 플라워 바스켓, 테라스 식물을 이용한 플라워 어레인지먼트, 빈티지풍을 이용한 꽃포장, 여기에 꽃을 이용해 만드는 플라워 케이크와 드라이플라워를 이용한 꽃장식까지, ‘블룸 앤 구떼’ 가 케이크와 꽃을 통해 내세울 만한 스타일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완벽하게 집중하는 시간은 명상과도 같다. 꽃수업을 할 때 가장 좋은 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그 순간은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본문 122쪽 中)


많은 카페가 생기고 사라지는 요즈음 ‘블룸 앤 구떼’의 13년 간의 기록들은 우리에게 많은 걸 알려준다. 우선은 본인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서로 협업하게 된다면 하나일 때보다 훨씬 큰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케이크와 꽃을 통해 만난 파티시에 조정희 대표와 플로리스트 이진숙 대표를 보면서 이 두 사람의 콜라보야말로 신사동의《블룸 앤 구떼 스타일》을 만들어 냈으며 앞으로도 신사동 가로수길은 ‘블룸 앤 구떼’가 이끌어갈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블룸 앤 구떼 스타일》을 통해 많은 분들이 그들만의 성공적인 카페스토리를 알았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 이 책을 통해 카페 창업을 계획하는 많은 분들이 ‘블룸 앤 구떼’보다 더 나은 카페 스타일을 만들기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블룸 앤 구떼’의 시즌4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방에서도 ‘블룸 앤 구떼’ 같은 카페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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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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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50페이지가 안 되는 이 소설의 1장만 읽는데 며칠을 소모했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의 주동인물인 미쓰사부로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이유도 없이 동네 초등학생들이 던진 돌멩이로 자신의 오른쪽 눈이 실명되고, 마조히즘적 형태로 자살을 선택한 친구, 머리에 난 혹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받지만 잘못된 수술로 인해 백치가 되어버린 그의 아들은 중증 정신장애로 인해 보호시설에 맡겨지고, 그의 아내는 싸디싼 위스키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알코올 중독자다. 그리고 이 소설의 또다른 주동인물인 미쓰사부로의 동생 다카시의 상처와 폭력성은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을 장식하며 1860년(만엔 원년), 일본 전후시대인 1945년,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투쟁의 연속이었던 1960년대를 묘사하고 있다.


《만엔 원년의 풋볼》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라는 일본인 소설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 이유는 폭력이나 고통, 인간의 상처와 치유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크게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민족성에 대해, 작게 보면 일본에서 일어난 메이지유신과 안보투쟁이라는 혁명적 요소 속에 접목시킨 결과라고 한다. 일견 이해가 되고 수긍이 간다. 천황의 칙허 없는 미국과의 통상 조약이 체결되고(1858년), 봉건 영주 다이묘들과 그 다이묘들의 최고 통수권을 가진 쇼군의 탄압(황제의 권력은 제한적)과 극렬한 저항이 시코쿠 산골마을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로 점철돼서《만엔 원년의 풋볼》속에 인간의 상처와 폭력, 고통이 살아 숨쉬고 있었으니까.


미쓰사부로, 다카시 형제의 행동의 변화나 성격적인 묘사 부분을 따라가면서 읽는 것도 이 소설이 주는 즐거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소설에서 형 미쓰사부로는 말 그대로 세상을 살아갈 만한 낙이 없는, 무기력하고 소심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얼굴은 못생겼고, 한쪽눈 실명에, 태어난 아이는 백치고,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 친한 친구는 엽기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에 반해 동생 다카시는 스스로 100년 전의 증조부를 영웅시하며 증조부의 동생인 S형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의 폭력성은 소설 여기 저기에서 광기어린 행동으로 묘사되고 있다. 미쓰사부로와 다카시가 자신들의 고향인 시코쿠의 시골마을로 내려가면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던 그들의 삶은 서로 다르게 곪았던 상처들로 인해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그 갈등은 일본의 갈등과 상처들이 극에 달했던 시대들(1860년, 1945년, 1960년)을 보여주면서 개인의 문제를 일본이라는 나라의 근본적인 문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서로 다른 성향의 형제가 같이 살아가는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하나의 국가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사상의 충돌이나 투쟁이 일어났을 때 푹력을 통해 제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서로에게 입힌 상처들을 서로가 치유해줄 수 있을 때 그것이 오에 겐자부로가 꿈꾸는 국가이자 민족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소설의 말미에 가면 동생인 다카시가 형인 미쓰사부로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성사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 본인이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다. 백치였던 여동생을 근친상간했던 사실과 그로 인한 여동생의 자살, 자신의 형수인 나쓰코와 간통했던 사실을 폭로하게 되면서 자신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형의 수치심을 극도로 자극하지만 형인 미쓰사부로에게서 돌아온 건 위로가 아닌 날선 비판이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큰형의 부재 속에서 둘째형의 처참한 죽음을 통해 다카시의 폭력성은 키워졌고, 그 폭력성을 100년 전 영웅시했던 증조부의 모습과 동일시하면서 정당화시켜버린 다카시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애잔함이 밀려왔고, 엽총으로 자살을 선택한 다카시의 마지막을 통해 그의 목을 옥죄었던 자기처벌의 욕구를 다카시 본인 스스로가 실천하는 모습에서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다카시를 그러한 ‘행동’으로 직접 이끄는 것은 다카시의 내부에서 ‘영웅화’되고 있는 조상과 형의 기억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영웅’ 탄생이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 혁명-내부적 투쟁과 세계를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이라는 외부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중층적 구조를《만엔 원년의 풋볼》은 100년 전(만엔 원년, 1860년)의 증조부 형제에 대한 기억과 그들 자신의 형에 대한 1945년의 상이한 ‘기억’을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다.(560쪽, 책 작품 해설 中)


많은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을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미쓰사부로와 다카시의 상반된 모습들에서 괜한 동질감이 들었고, 자살을 선택한 다카시나 미지의 세계에서 다카시의 아이를 잉태한 나쓰코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미쓰사부로 모두 그들 나름대로 자신이 지은 죄의식을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또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 거기에 어렸을 적 안 좋은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 충격을 평생 안고 살아가아만 하는 사람들에게 그 경험은 끔찍한 고통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그 누군가가 우리가 지은 죄나 트라우마를 구원해줄 수 있을는지는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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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G 나무 도감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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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산에 가려고 노력을 한다. 유산소 운동으로 내 몸이 등산과 맞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에 가면 꽃과 나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일지 모르겠다. 지천에 핀 꽃과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뇌 속의 도파민이 흘러넘쳐 나를 자극하고 흥분시킨다. 비난과 베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항상 나를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꽃나 나무들은 나의 절친이자 말동무이고, 나의 애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애인에게 죄를 짓는게 있다면 이름을 잘 모르는 나무들이 많다는 것이다. 봄에는 조팝나무와 이팝나무, 여름에는 편백과 측백나무, 가을에는 은행나무, 겨울엔 폭설에도 인내하고 견더내는 소나무, 주목 정도만 이름을 알 뿐, 그 이외의 이름 모를 나무들을 만나면 미안한 마음 뿐이다. 산에 오르면서 나무의 이름조차 모른다면 그건 산에 오르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기에 시간을 내서 산에 나무들을 전부 내 애인으로 만들고 싶다.


진선출판사에서 이번에 출간된《APG 나무 도감》은 나무의 이름들을 알고 싶어하는 나의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준 책이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 자라는 1,600여 종의 조경주와 나무들을 담았는데 다른 나무 도감 책들과 다른 것은 APGⅢ 분류 체계로 책을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APG 분류 체계는 속씨식물 계통분류 그룹(Angiosperm Phylogeny Group : 이하 APG라 칭함, 책 머리말 中)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1998년에 APG 분류 체계, 2003년에 APGⅡ 분류 체계, 2009년에 APGⅢ 분류 체계로 계승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과거에 식물을 분류할 땐 그 나무의 형태와 성질(속성)을 이용해 분류했다면, APG 분류 체계는 여기에 요즘 과학수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염기서열의 분석을 통한 유전자들을 비교해서 식물의 관계를 유전학적으로 밝혔다는 게 APG 분류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나무들의 유전자들을 분석까지 했으니 나무들의 학명과 속한 과가 기존의 방법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해졌다고 보면 된다.


이 책《APG 나무 도감》의 진가는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무와 관련된 어려운 용어해설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고, 나무들의 학명을 A부터 Z까지 알파벳순으로 정리했다. 여기에 나무의 이름들도 ㄱ~ㅎ까지 정리함은 물론이고 꽃 색깔(계절별로 찾을 찾을 수 있고, 꽃잎 수로도 나무를 찾을 수 있다.)별로 나무들을 찾을 수 있게 해서 어린 아이들도 쉽게《APG 나무 도감》을 읽을 수 있도록 했으니 이 책을 만든 진선출판사와 저자인 윤주복 선생님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 책을 읽은 나 또한 책 마지막 부분 나무에 대한 정리표가 참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책 크기도 휴대하기 간편한 사이즈라서 딱 좋은데(13x22), 올 컬러 양장판이라서 그런지 약간 무겁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난 이 책을 등산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대한민국 산에 있는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내 마음은 콩닥콩닥이다.


나무 박사 우종영 선생님이 쓴 <게으른 산행>의 첫 머리를 보면 나무에 대한 멋진 구절이 나온다. “아주 먼 옛날 혼돈의 상태였던 지구가 하늘과 땅으로 나뉘면서 조그만 단세포 생물들이 나타났는데 이 생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두 팀으로 나누어 진화를 시작했다고, 한 팀은 몸을 움직여 필요한 것들을 찾아 나섰고, 다른 한 팀은 한 자리에서 붙박이로 사는 방법을 택했다고, 훗날 인간들은 움직이는 생물들 중에서 맨 꼭대기 지위를 차지했고, 나무들은 지구를 푸르게 만들어 번성을 시켰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온갖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은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런 나무들의 신의를 저버리고 그들을 배신하기게 급급한 인간들을 보고 있으면 유구무언이다. 이런 나무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고 있는 나무들에게 우리들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APG 나무 도감》과 함께 오늘부터라도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보자. 우리가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살포시 다가와서 상처입은 우리들 마음의 ‘꽃’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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