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도 있는 사람
전민식 지음 / 답(도서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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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식 작가의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난 소설이 은희경 작가의 <마이너리그>였다. 소재와 내용은 물론 달랐지만 유신시대와 현재의 팍팍한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너무나 비슷했으니까. 거기에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어도 마이너리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에서 ‘포기’라는 말보다 ‘체념’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17년 9월의 대한민국은 바로 메이저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지만 결국엔 마이너밖에 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빅리그에 진출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려운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누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마이너리거들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전민식 작가의 소설《알 수도 있는 사람》을 읽고 나면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리라.


드라마나 뉴스를 보면 새벽에 외제차들이 모여 레이싱하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다. 서로의 배기량을 뽐내며 새벽의 고요함을 부셔버리는 그들의 갑질이 레이싱에서도 그대로 묘사된다. 이 소설에서도 밤마다 의문의 거리 레이싱이 펼쳐진다. 전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배기량 2,000cc 이하의 국산 차만 참가 가능하고, 그 레이싱에 참가하는 선수들 또한 사회에서 갑질을 하는 사람이 아닌,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1위에게만 주어지는 상금을 통해 그들 현재의 삶을 연명해 나가려는 마이너리거들의 레이싱이라는 것이다. 그 레이싱을 통해 그 누군가는 하루를 연명하고, 다른 참가자들은 후일에 펼쳐질 레이싱을 위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비밀 말해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실은 비틀즈의「헤이 쥬드」야. 슬픈 노래일지라도 즐겁게 불러보세요. 내가 이 노래 좋아한다는 거 아무도 모를 거야. 고통을 느낄 때, 쥬드여, 무리하지 말아요. 세계를 짊어져서는 안 돼요. 슬픈 노래일지라도 즐겁게 불러보세요.’(27쪽 中)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SR(Street Racing)에 참여했는지를 쫓아가 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소소한 재미다. 객원기자로 생활하는 용주에게 기삿거리는 방세를 내기 위해서라면 표절도 서슴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카센터를 운영하는 기성의 삶은 신분의 격차 속에서 방황하는, 낡디 낡은 스페어 타이어의 삶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의류회사에서 영업을 하는 영미는 구조조정이라는 덫 속에서 실적에 따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하루살이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SR(Street Racing)을 만든 수인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 속에서 옛사랑의 추억에 빠져 사는 인물로 묘사됐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같이 내 주위에 고개만 돌리면 만날 수 있는 회사동료이자 친구들이었다. 사회나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외면당하고, 갑질 당하는 아웃사이더의 삶 속에서 SR(Street Racing)은 그들에게 지금의 지리멸렬한 삶에서 탈출하는 해방구이자 도피처가 아니였을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수인, 기성, 용주, 영미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사하라 랠리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지금까지 참가했던 SR과는 다르게 사하라 랠리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경기이고, 자신이 지금까지 벌었던 전 재산을 투자해서 참가하는 경기이기에 그 위험부담이 상당함에도 그들은 사하라 랠리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1등을 한다는 보장도 없이 사하라 랠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출사표를 던진 그들의 의중이 궁금했다. 돈 때문에? 아니면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구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죽음을 담보로 달리는 레이싱이 그냥 좋아서였을까?


네 사람은 철저하게 모래사막에 고립되었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되지 않는 사막의 지평선이 네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꿈과 희망은 물론 절망마저도 집어 삼켜버린 뜨겁고 빨간 사막 위로 아지랑이 기둥이 커튼처럼 드리워지고 있었다.(310쪽 中)


사람들 누구에게나 가슴 절절한 사연 하나씩은 감추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 사연을 감추고 싶은 4명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았던 과거를 잊기 위해 죽음을 담보로 랠리에 참가를 한다. 그러면서 새 출발을 위해 대한민국을 떠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랠리에 참가한 주인공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창밖으로 그들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마음 한쪽이 한없이 아려왔다. 희망으로 들려야 할 환호가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절규이자 아우성으로 들렸다. 꼭 불구덩이에 죽으러 가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모습이 사막 한가운데서 점점 희미한 점들로 오버랩되면서 내 마음을 마구 흔들었다. 그들의 새출발을 힘차게 응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미웠고, 그 미움 속에서 대한민국은 새로운 수인, 기성, 용주, 영미들을 만들어낼 거라는걸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 메이저의 횡포에 고개 숙이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마이너들에게 이 소설이 주는 울림이 전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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