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1 지식을만드는지식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시리즈 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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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육백 페이지가 넘는(지만지 출판, 김정아 번역) 『악령』을 다 읽고 든 생각은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세계적인 대문호가 맞다였다. 책의 절반인 팔백 페이지를 넘어가기 전까진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힘들어도 되나를 무한 반복으로 되뇌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난해함도 없는데, 그렇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소한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지리멸렬한 도스토옙스키의 잡설에 지쳐버렸다. 그렇다고 분량이 적은 것도 아니고, 한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이렇게까지 온갖 장광설을 풀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소설을 다 읽기 전까지는.....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난 후 제일 먼저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쓰기까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였다. 젊은 나이에 받은 사형선고와 그 위기에서 벗어나 시베리아에서의 유형 생활과 강제 군 복무로 10년을 살고 나왔는데 그 10년이 도스토옙스키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혈기왕성한 이십 대에 몸 바쳐 충성했던 아나키스트가 이제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모국인 러시아만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완전한 슬라브주의자(극우주의자)로 변해버렸으니 지난날의 악몽 같은 10년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닥칠 세상을 살아가는 자양분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이런 그에게 도박과 알코올은 험난한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도파민이었고, 뇌전증은 지난 10년 동안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인식표였다.(뇌전증이 생긴 이유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사망을 목격한 후라는 이야기도 이 책 마지막에 있다.) 이렇게 방황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잡아준 건 그의 소설을 받아쓰던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닛키나였다. 그보다 26세나 어렸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쓰기에만 집중하도록 가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중심을 잡아줬기에 지금의 도스토옙스키가 이렇게 대문호란 칭호를 받았다고 본다.

도박빚 때문에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도피한 도스토옙스키가 그곳에서 쓴 소설 『악령』은 그렇게 탄생했다. <악령>의 1, 2부가 그렇게 장광설이 많은 것도 쪽(페이지) 수에 따라 받는 원고료 때문인 것도 있지만 타향에서 지켜보는 러시아의 모습이 그만큼 위태위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도스토옙스키는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불안을 남긴 역대의 수작 『악령』을 탄생시켰고, 본인이 바라고 본인이 원하는 세상을 『악령』에 고스란히 그려놓았다.

크게 보자면 『악령』은 실제로 벌어진 네차예프 사건(1869년)을 모티브로 농노해방을 통해 서구주의가 러시아에서 싹트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타향에서 고향인 러시아에 전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망국에 대한 경고장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 경고장을 통해 러시아가 변할 수만 있으면 세계 최고의 민족이 될 거라는 자부심과 함께. 하지만 도스토옙스키 눈에 러시아의 모습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러시아 정교를 바탕으로 농촌공동체를 부활하고, 러시아 국민이 똘똘 뭉쳐 이걸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세계 최고의 슬라브 민족이 될 것인데, 그의 눈에 러시아는 온갖 악령(사회주의, 허무주의적 서구주의)이 판을 치고 있는 돼지우리 같은 곳이었다. 그 더럽혀진 러시아를 심판하고 바로잡기 위해 도스토옙스키의 영혼이 투영된 인물들(스타브로긴, 샤토프, 키릴로프,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표트르 스테파노비치)을 전면에 내세워 러시아를 바꾸려 하지만 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 것이고, 그 결과는 소설 속에서 확인했으면 한다. 결론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종교적, 사상적, 내면적 흐름을 『악령』에 풀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수많은 사건과 논쟁을 다 겪은 도스토옙스키였기에 이렇게나 울림이 큰 소설이 탄생되지 않았나 싶다.

책을 읽고 난 후, 책 내용보다는 고뇌에 찬,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그렇지만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하려 애쓴 도스토옙스키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소설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악령』이란 소설은 교묘하게 내 감정선을 건드려 그의 영혼에 들어가게끔 만들었다. 막대한 분량과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난해함 때문에 책 읽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알코올과 도박, 뇌전증 등 정신적으로 힘든 나 자신을 위해 타지에서 소설을 써야만 하는 그의 정신적인 고뇌를 지켜보는 거였다. 책을 통해 힘듦이 카타르시스로 변화되기도 했다. <악령>에서 샤토프가 스타브로긴의 뺨을 후려칠 때는 얼마나 흥분이 되던지(-?-).

마지막으로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읽다가 너무 집중이 안 돼 지만지의 『악령1, 2』를 읽었는데 완전 대만족했다. 외국소설은 번역을 까다롭게 보는 편인데 김정아 번역가를 처음 들어보기도 했고, 이력이 색달라서 꺼려 했는데 도스토옙스키(슬라브 문학)를 연구한 박사님은 달랐다. 번역도 유려했고 문장을 읽는데 막힘이 없었다. 마지막에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해설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김정아 번역가가 『악령』을 다 읽은 독자들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거니와 작품 해설을 읽고 감동받은 건 비밀로 해두자. 책 말미에 『악령1, 2』 번역을 끝내며 이렇게까지 홀가분한 적은 없었다고, 섭섭함은 하나도 없다는 김정아 번역가의 말씀에 저 또한 공감하면서 『악령』을 안 읽은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꼭 읽어서 도스토옙스키가 전하는 악령의 세계에 빠져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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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들의 죽음 - 소크라테스에서 붓다까지 EBS CLASS ⓔ
고미숙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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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에게 있어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는데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 언젠가가 시기만 다를 뿐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된다. 이렇듯 모두에게 적용되는 ‘죽음’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 외면이 나에게 오지 말았으면 하는 거부일 수도 있고,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 아직 닥치지 않았기에 생소하면서 뜬금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생소함과 뜬금없음이 죽음이라는 현실이 됐을 때 우리는 상실감에 빠지면서 크나큰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에는 리허설이 없다지만 갑자기 죽음이 닥쳤다면 나조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사라지는 것이고, 이 사라짐이 무섭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현생에서의 마지막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탈출구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을 테니까.

고전학자 고미숙의 『현자들의 죽음』에는 죽음과 관련된 신선한 시각이 들어있다. 책에서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다면 죽음을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죽는 법을 연구하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에서부터 붓다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현자로 알려진 여덟 분의 죽음을 통해 그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한다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죽음이 지금보다는 훨씬 유연해질 거라고 본다.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죽음인데 더 이상 회피하면서 외면하지 말고, 현자들이 직접 경험한 죽음을 통해 공포와 외면이 아닌 평화와 안식이 될 수 있다면 누구나가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덟 분의 ‘죽음’에 관한 단상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 연암 박지원 편이었다. ‘죽음은 도처에 있다’는 명구와 함께 온갖 죽음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그에게 일어난 죽음을 의연하게 이겨나갔다. 열아홉 살에 처음 목격한 처숙 이양천의 죽음, 스물세 살에 어머니의 죽음, 그다음 해엔 집안의 기둥이셨던 할아버지가, 서른한 살 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12년 동안 믿고 따랐던 정신적 지주들의 죽음을 목격한 박지원의 심경은 어떠했을는지...... 박지원도 사람이었기에 가족들의 연달은 죽음에 깊은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그는 이 아픔을 뒤로하고 한창 전성기인 서른다섯 나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과거를 포기했다는 것은 권력을 포기한 것이고, 산속에 들어가 버린 것은 생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연암 박지원에게 찾아온 연이은 죽음은 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고, 그 결과물이 권력과 명예의 포기였다. 그 후에도 형수님과 아내, 맏며느리의 죽음이 연달아 찾아왔지만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면서 죽은 자에 대한 묘비명을 짓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예를 다한다. ‘죽음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누구나 죽는다’((187쪽)는 연암 박지원의 말속에 ‘죽음’에 대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누구나 죽기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상실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1805년 재동 자택에서 삶을 마칠 때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보더라도 회한과 미련, 두려움, 괴로움을 뒤로한 채 그가 얼마나 담백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본인도 책을 읽으면서 박지원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지만 그게 쉬울지는 모르겠다.

책에서는 연암 박지원 말고도 소크라테스, 장자, 간디, 아인슈타인, 다산, 사리뿟따, 붓다의 ‘죽음’에 관한 단상들이 들어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메시지를 통해, 장자의 생각을 바꾸는 통찰을 통해, 간디의 ‘영광스러운 해방이 죽음’이라는 명제를 통해, 이 한 번의 생으로 충분하다는 아인슈타인을 통해, 떳떳한 삶을 통하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다산을 통해, 사리뿟따와 붓다의 기나긴 고행과 정진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했던 ‘죽음’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들은 죽으면서도 유쾌했고, 남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선물하면서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우리들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죽었다고 무한 슬퍼할 게 아니라 삶을 충만하게 살았다면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 것이이지만 다른 생(生)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 아닐까? 우리 모두 새로운 시작을 위해 이번 생에서는 욕망과 욕심은 뒤로한 채 하루하루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그럼 죽음은 우리가 겪게 되는 가장 짜릿한 이벤트가 될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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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로드 - 커피는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료가 되었을까
라니 킹스턴 지음, 황호림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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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서 소개팅 때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기억이 있고, 그 후로 커피와는 데면데면 지내다가 서른 살이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신 거 같다. 달달한 스틱 커피를 시작으로 하루에도 몇 잔을 마시다가 몸에서 커피를 받지 않아 또 끊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커피와는 애증 아닌 애증의 관계였다. 안 마시면 허전하고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그런 관계. 그러다가 카페라테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다른 커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공기주입을 잘 때려부어 쫀득쫀득 부드러운 우유 폼과 막 뽑아낸 에스프레소에 샷 추가해서 내가 원하는 농도의 커피를 마시면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물을 한잔 마셔서 식도를 깨끗이 한 후 샷 추가된 라테를 한 모금 쭈욱 마시면 식도가 약간 타들어가면서 중추신경을 자극하게 되고, 뇌에서는 이것에 대한 보상으로 도파민을 마구마구 뿜어내게 해주는 그런 세상 다 가진 느낌(-?-). 세상 다 가진 느낌도 무조건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허락을 해야 느끼는 것이기에 오늘 하루도 우유 스팀을 기가 막히게 뽑아내는 파트너의 손길과 에스프레소에서 만들어지는 크레마가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어져야 비로소 라테의 달콤하면서 에스프레소의 소름 돋는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초보의 솜씨로 우유 품을 게거품으로 만들거나 에스프레소 샷이 너무 쓰면 그날 하루는 괜히 울적했다. “처음부터 라테를 잘 만드는 사람이 어딨어?”라며 스스로 자기 위안을 해보지만 커피 음료 중에서 사람의 손이 맛을 결정하는 몇 안 되는 커피 중에 하나가 카페라테이기에 내 돈 주고 마시면서 스트레스 받는 내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면서 커피는 점점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갔다.

본인처럼 커피 좋아하는 사람에게 『커피로드』는 꿈같은 책이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커피를 눈을 통해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커피로 유명한 18개 나라의 커피 레시피 40개도 덤으로 얻어 갈 수 있는 책이 바로 『커피로드』 다. 아까 서두에서 커피는 만드는 사람의 손길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커피 원두라는 사실도 알게 됐고, 『커피로드』를 통해 원두의 활용법 및 원두 사용법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계피나 생강, 레몬그라스 같은 향신료를 넣은 탄자니아의 카와와(Kahawa)라는 향신 커피도 신기했고, (돼지고기의 부속고기와 같은) 커피 열매 또는 커피체리 생산 과정에서 생성되는 부산물로 만든 허스크 커피 일종인 예멘의 키쉬르(커피 열매껍질)는 꼭 한 번 마셔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허스크는 보통 커피 열매 또는 커피체리 생산 과정에서 생성되는 부산물로 간주된다. 하지만 예멘에서는 커피콩과 비슷한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키쉬르(커피 열매껍질)는 진한 차와 유사한 음료로 제조되며, 일반적으로 생강의 매운맛과 단맛이 나고 때로는 시나몬과 카다멈을 함께 추가하기도 한다.(본문 68쪽 中)

커피는 생두를 볶아서 그 볶은 콩을 곱게 갈아 마시는 걸로만 생각했는데 매우 가볍게 로스팅 해서 꼭 우리나의 숭늉 색깔을 띠는 아라비아반도의 사우디 까와, 인도네시아에서 즐겨마시는 음료인데 색다르게 생강과 견과류가 들어간 코피 라로방(Kopi Rarobang), 한 잔의 커피에 쿠바의 음악과 럼주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크레마트(Cremat),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즐겨 마시던 카푸치노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트남 하노이의 에그 커피 등 『커피로드』에 소개된 커피들을 보면서 세상엔 가지각색의 커피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에스프레소 커피가 익숙한 나에게 향신료, 생강, 레몬그라스, 코코넛 밀크, 아보카도, 시나몬, 버터, 치즈 등 우리 주위에 있는 재료들이 원두와 결합해서 그 나라의 커피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나를 놀라게 했다.

『커피로드』를 다 읽고 이 책에 소개된 각 나라의 특색 있는 커피들을 다이어리에 적어 놓았다. 각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커피를 맛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버킷리스트라고 적고 노후계획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듯싶다. 과거에 커피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현재에도 진행 중이고, 미래는 모르겠지만 커피의 확실한 대체재가 나오지 않는 한 아마도 계속해서 사랑받지 않을까? 세계의 역사와 함께 한 커피가 지금 『커피로드』를 통해 우리들의 도파민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자극을 통해 여러분도 커피의 매력에 푹 빠졌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커피가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하는 음료이기에 커피를 통해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도 함께 공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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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
파스칼 보나푸 지음, 이세진 옮김 / 미술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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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자아실현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의 화가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줘서 그들 스스로 돈을 지불하고 그림을 사는 모습을 볼 때 화가들은 굉장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을 거 같다. 고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림을 그리느냐가 화가들에겐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지금에야 전시회를 통한 홍보나 SNS, 유튜브 등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소개할 방법이 많았겠지만 과거엔 자신의 그림을 홍보하는 게 녹록지만은 않았으리라.

여기 그림 속으로 들어가 화가들이 있다. 왜? 그림 속으로 들어갔는지 그림만 보면 알 수 없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본인의 그림에 자신의 자화상을 넣어 놓고 우리들에게 마음껏 감상하라 말한다. 일명 영화 속에 잠깐 등장하는 ‘카메오(cameo)’처럼 자신의 그림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교묘하게 그림 중간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동방박사의 행렬>에서 본인을 암시하는 머리띠(BENOTTI OPUS)를 두르고 그림에 나타난 베노초 고촐리, <저축>이라는 그림에서 초록색 옷 위에 본인의 이름을 서명하면서 나타난 아메데오 보키, <큐폴라>에서 성자의 모습으로 팔레트를 든 채 나타난 조르조 바사리 등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그림에 투영시켰다.

책에서는 자신의 후원가가 될 수도 있는 왕족과 고위 성직자들, 예술 애호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말을 하지만 결론은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그림 속에 자신을 간접적으로 그려 넣어 셀프 광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특이한 점은 화가들 자신이 그림의 주가 아닌 주변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본인의 모습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프란시스코 고야의 <카를루스 4세 가족>의 그림에서는 거의 투명 인간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와는 반대로 그림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그림을 어필하는 화가도 있는데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만토바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에서는 그림의 중심에 떡하니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어서 자신을 홍보하고 있는 듯하다. 충격적인 것은 루카스 크리나흐의 <헤로데 왕의 연희>나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목을 든 다잇>, 제임스 엔소르의 <위험한 요리사들>에서 화가 자신의 머리가 잘린 모습을 그림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잔인하게 잘린 자신의 머리를 그림 속에 그린 것은 그들이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닌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크리나흐의 그림에서는 루터파에 대한 압박의 저항으로, 엔소르의 그림에서는 그림을 악랄하게 비평한 평론가들을 향한 조롱의 의미로 잔인하게 잘린 자신의 머리를 그들에게 보란 듯이 내던진 게 아닐까?

오만하고 진실한 예술가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제임스 엔소르 역시 평론가들에 대한 증오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는 자기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에게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한 그림이 타인에게는 그 절대적 진실성에 힘입어 그렇게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235쪽 中)

<그림 속으로 들어간 화가들>을 읽으면서 그림 속에 어떤 모습으로 화가들이 그려져 있는지 찾는 것도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다. 그림에서 설마 했던 인물이 유명한 화가가 맞았고, 이건 아닐 거야 했던 인물이 역시 화가 자신이었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주저 없이 그림 속으로 들어갔고, 시대적 불법에 저항하기 위해 그림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그들 자신의 그림을 많은 후원자들에게 후원받기 위해 그림 속에 등장했다. 내 그림을 좀 보아 달라고, 내 그림을 후원해달라고, 그림 속에 꼭꼭 숨겨진 나(화가)를 보면서 역사적으로 위대했던 찰나의 순간을 기억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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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열림원 세계문학 2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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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다 읽고 몇 개의 단어(구절)가 떠올랐다. 첫사랑, 광상곡(狂想曲), 우울한 아름다움......

개츠비의 ‘첫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가도 자신의 어려웠던 상황과 맞물려 과연 개츠비가 데이지를 정말 사랑했던 것인지(데이지를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의 들었고, 개츠비의 죽음을 보면서는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개츠비)만의 방식으로 잘 연주하다가 누군가의 방해로 갑자기 바이올린 줄이 끊어져 버려서 연주회를 망쳐버린 하나의 ‘광상곡’이 떠올랐다. 거기에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화려함 뒤에 감춰진 공허함과 초라함을 보면서 우울한 분위기가 밀려왔고, 개츠비와 데이지의 풋풋한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 떨리는 사랑을 떠올리다가도 돈을 좇아 사랑을 선택한 데이지의 이중적인 모습과 그런 데이지를 광적으로 품으려 했던 개츠비의 모습에서 ‘우울한 아름다움’이란 구절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이제 그곳을 떠나고 없었지만, 그 도시 자체에 대한 그의 느낌은 우울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234쪽)

이번에 읽는 것까지 하면 『위대한 개츠비』는 세 번째 읽었다.(이제부터 하루키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처음엔 다른 사람이 읽으니깐 그들을 따라 멋모르면서 읽었고, 두 번째엔 등장인물들의 면면과 전체적인 줄거리를 조율하면서 읽었고, 이번엔 오롯이 ‘제이 개츠비’란 인물만 생각하면서 읽었다. 개츠비와 데이지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개츠비와 데이지는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대저택에서 매일 밤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개츠비의 죽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등등 자신과 신분 차이가 나는 데이지를 처음엔 본인의 지위 상승을 위해 접근했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시나브로 데이지의 신비한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해외로 파병을 떠나기 전날 밤 개츠비의 감정선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데이지를 사랑했는지 이심전심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눈 한 달 동안, 데이지의 말 없는 입술이 그의 윗옷 어깨를 스칠 때만큼, 또는 그녀가 잠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그녀의 손끝을 살며시 만질 때만큼 서로 가깝게 느낀 적도 없었고 서로의 마음이 더 깊이 통한 적도 없었다.(250쪽)

그가 떠난 후 데이지는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처럼 현실(돈)이 이끄는 대로 톰 뷰캐넌을 선택했고,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개츠비에게 남은 건 데이지가 아닌 돈(물질)으로 점철된 욕망의 늪지대뿐이었다.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빠져들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개츠비는 첫사랑인 데이지를 잡기 위해 돈을 선택했다. 여기에 돈을 벌기 위해 불법(밀주업자)도 자행했지만 결국 그에게 되돌아온 건 허망한 죽음이었고, 그 죽음을 통해 개츠비는 본인이 원했던 사랑도, 출세도, 욕망도, 명예도 모두 잃은 채 우울한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남기곤 홀연히 떠나버렸다.

피천득 선생의 ‘인연’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개츠비는 첫사랑이었던 데이지를 그리워했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밤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면서 매 순간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개츠비는 그녀를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면서 그녀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런 허무한 죽음도, 개츠비의 쓸쓸한 장례식도, 욕망에 찌든 허세의 삶도 살아가지 않았을 텐데. 반대로 데이지를 마음속으로만 품고 만나지 않았다면 개츠비의 삶은 행복했을까? 개인적인 생각인데 개츠비는 아마도 평생을 욕망과 물질에 찌든 삶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으리라.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난 후 계속해서 여운이 남는다. 한 여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개츠비의 입장에서, 때론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 캐러웨이의 입장에서, 닉 주변을 맴돌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조던 베이커와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의 행동들과 대사들이 머릿속에 계속 남는다. 책을 읽고 여운이 남는다는 건 뭔가 아쉽다는 뜻일 테고, 다음에 읽을 땐 다른 장면, 다른 인물들에게서 허전함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만약 네 번째 읽게 된다면 이 소설이 출판된 1920년대 미국 사회의 모습도 눈에 들어올 거라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명불허전 김석희 선생의 번역 또한 훌륭해서 막힘없이 술술 잘 읽을 수 있었고, 새롭게 시작하는 열림원의 세계문학 시리즈가 많은 분들께 사랑받길 바라본다.

개츠비는 그 초록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고 있는, 환희에 찬 미래의 존재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일은 우리가 좀 더 빨리 달리고, 좀 더 멀리 팔을 내뻗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맑게 갠 아침이......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302쪽, ‘위대한 개츠비’ 마지막 구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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