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
파스칼 보나푸 지음, 이세진 옮김 / 미술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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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자아실현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의 화가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줘서 그들 스스로 돈을 지불하고 그림을 사는 모습을 볼 때 화가들은 굉장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을 거 같다. 고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림을 그리느냐가 화가들에겐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지금에야 전시회를 통한 홍보나 SNS, 유튜브 등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소개할 방법이 많았겠지만 과거엔 자신의 그림을 홍보하는 게 녹록지만은 않았으리라.

여기 그림 속으로 들어가 화가들이 있다. 왜? 그림 속으로 들어갔는지 그림만 보면 알 수 없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본인의 그림에 자신의 자화상을 넣어 놓고 우리들에게 마음껏 감상하라 말한다. 일명 영화 속에 잠깐 등장하는 ‘카메오(cameo)’처럼 자신의 그림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교묘하게 그림 중간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동방박사의 행렬>에서 본인을 암시하는 머리띠(BENOTTI OPUS)를 두르고 그림에 나타난 베노초 고촐리, <저축>이라는 그림에서 초록색 옷 위에 본인의 이름을 서명하면서 나타난 아메데오 보키, <큐폴라>에서 성자의 모습으로 팔레트를 든 채 나타난 조르조 바사리 등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그림에 투영시켰다.

책에서는 자신의 후원가가 될 수도 있는 왕족과 고위 성직자들, 예술 애호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말을 하지만 결론은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그림 속에 자신을 간접적으로 그려 넣어 셀프 광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특이한 점은 화가들 자신이 그림의 주가 아닌 주변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본인의 모습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프란시스코 고야의 <카를루스 4세 가족>의 그림에서는 거의 투명 인간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와는 반대로 그림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그림을 어필하는 화가도 있는데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만토바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에서는 그림의 중심에 떡하니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어서 자신을 홍보하고 있는 듯하다. 충격적인 것은 루카스 크리나흐의 <헤로데 왕의 연희>나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목을 든 다잇>, 제임스 엔소르의 <위험한 요리사들>에서 화가 자신의 머리가 잘린 모습을 그림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잔인하게 잘린 자신의 머리를 그림 속에 그린 것은 그들이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닌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크리나흐의 그림에서는 루터파에 대한 압박의 저항으로, 엔소르의 그림에서는 그림을 악랄하게 비평한 평론가들을 향한 조롱의 의미로 잔인하게 잘린 자신의 머리를 그들에게 보란 듯이 내던진 게 아닐까?

오만하고 진실한 예술가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제임스 엔소르 역시 평론가들에 대한 증오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는 자기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에게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한 그림이 타인에게는 그 절대적 진실성에 힘입어 그렇게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235쪽 中)

<그림 속으로 들어간 화가들>을 읽으면서 그림 속에 어떤 모습으로 화가들이 그려져 있는지 찾는 것도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다. 그림에서 설마 했던 인물이 유명한 화가가 맞았고, 이건 아닐 거야 했던 인물이 역시 화가 자신이었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주저 없이 그림 속으로 들어갔고, 시대적 불법에 저항하기 위해 그림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그들 자신의 그림을 많은 후원자들에게 후원받기 위해 그림 속에 등장했다. 내 그림을 좀 보아 달라고, 내 그림을 후원해달라고, 그림 속에 꼭꼭 숨겨진 나(화가)를 보면서 역사적으로 위대했던 찰나의 순간을 기억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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