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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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일상의 권태에 빠져있는 25세의 여자. 현재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없고 좋아하는 작가라고는 한명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작가는 죽었다. 그가 남긴 책은 고작 서른한 권.

여자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잠시 아껴두고 다른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간다. 그리고 빌려 온 책에서 마치 그녀를 겨냥하고 있는 듯한 낙서를 하나 발견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밑줄 긋는 남자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쪽에는 다른 책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녀는 그가 권해준 다른 책을 찾아 읽으며 책에 밑줄 쳐진 문장을 통해 밑줄 긋는 남자와의 기이한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발상이 신선했다. 적절한 문장을 찾아낸 작가의 독서량과 센스도 감탄할만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심심하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너무 가볍다. 작가가 20대의 아름다운 여성이고 주인공 역시 25세의 여자라서 그런지 이 소설은 귀엽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어디 하나가 빠진 것처럼 삶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여자는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밑줄 긋는 남자와 만난다. 여자는 그가 책 속의 문장을 통해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십대의 남자친구 없는 여성 중에 멋진 남자와의 사랑을 꿈 꿔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직 진정한 자신의 상대를 찾지 못한 여자는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너무 매력적이고 멋있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 역시 실체가 없다. 그녀의 사랑은 공허하고 대답이 없는 사랑이 되고 만다.

여자는 밑줄 긋는 남자를 찾고 싶어한다. 만약 소설이 여자가 밑줄 긋는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 남자가 그녀의 상상대로 멋진 남자였다면 이 책은 정말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다행이 이 책은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밑줄 긋는 남자는 끝까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조금 허탈하면서도 현실성 있는 결말로 독자를 이끈다. 상상속의 차가운 멋진 남자가 아닌 현실의 따뜻한 남자를 등장시키면서.

"누군가  잠결에 나에게 안겨 오거나 내 몸에 부딪혀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그날 밤  밑줄 긋는 남자를 찾는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이 결말 역시 맥이 빠지긴 마찬가지다. 일상의 권태 속에 빠져있던 여자가 약간의 정신적 방황을 한 다음 그래도 역시 일상이 최고지 하며 돌아와 버린다. 그런데 그 정신적 방황이란 것이 너무 가벼워 치열함이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볍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매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밑줄 긋는 남자라는 소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누구든 책을 빌려 읽다가 누군가 밑줄을 그어 놓은 부분이 있으면 유심히 보게 마련이다. 궁금증. 사람의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아닌 사람 빼고)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밑줄을 많이 긋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면 전과는 다른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것이 내 사고의 변화, 내면의 변화, 현재의 감정 상태나 고민거리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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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세트 - 전3권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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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커다란 캔버스 가득 한가지 색만 칠해져 있는 그림 앞에서 당혹스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벽에 구멍을 하나 뚫어 놓고 똑같은 상자를 늘어 놓고 예술 작품이란다.  대개 제목은 무제다.

어떤 아름다움도 느껴지지 않는 그 불친절한 작품들을 보며 예술이란 무엇인지, 미 란 무엇인지 잠시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아직도 모나리자는 눈썹 없는 이상한 느낌의 여자로만 보이는 내게 그녀의 신비로운 미소는 여전히 먼 미지의 세계에 있는 그 무엇이다.

예술사나 미학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낯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욕구,  표면이 아니라 속을 알고 싶은 욕구,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

미학오디세이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 - 미학으로의 긴 여행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 는 나같은 사람이 겁 없이 미학의 세계로 뛰어 들게 만드는 책이다.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다.

쉽고 재미있는 데는 이 책의 독특한 문체를 들 수 있다. 마치 디지털세대를 겨냥한 듯한 재기 넘치고 톡톡 튀는 문체는 누군가의 불로그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미학책이 무슨 소설책처럼 읽힌다.  맘먹으면 하루에도 다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독특한 형식미도 빼놓을 수 없겠다. 3권을 각각 에셔, 마그리트, 피라네시라는 화가의 그림을 매개로 하여 미학을 설명해 나가는 3성 대위법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이 책이 - 3권은 최근에 발간되었지만 - 10년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데는 이 책의 문체와 형식에 힘입은바 크다고 작가 자신이 말할 정도다.

1권은 에셔의 그림을 통해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미학을, 2권은 마그리트의 그림을 통해 현대의 미학을, 3권은 피라네시의 그림을 통해 탈근대의 미학을 다루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칸트와 헤겔 푸코와 데리다등 수많은 사상가들의 미학이론을 만날 수 있다. 생생한 화보가 보너스로 따라 붙는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 뜸을 들여 읽었고 책리뷰도 미루다 쓰고 있다.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 - 내 머릿속에 무엇이 남아 있지? 하고.

3권의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미학의 미 자도 말하지 못하겠거니와  미란 무엇인지 설명해 내지도 못하겠다. 그렇다고 아무런 성과도 없냐?  하면 그건 아닌것 같다.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앞이 환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 여도 희미하게 앞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은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음 발을 내디딜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미의 절대적 가치란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인체는 완벽한 비례에 의해 조각되어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때론 그것이 인체를 조각한 것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에서 예술가 내면의 미를 실현하는 것으로, 예술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으로, 이성의 산물이기도 했다가 상상력의 유희이기도 했다가, 현대에 들어서는 아예 그 형식과 내용의 파괴와 해체에 이르기까지 미적 범주는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고 시대에 따라 조류에 따라 종교적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달라져 왔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에도 그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사람들의 인식에도 끊임없는 변화가 있어왔다.   그 모든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참된 예술이고 미의 속성일까? 그 모두일까? 아니면 그 모두 아닐까?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여전히 내게 어떤 예술작품은 아름답게 다가오지만 어떤것은 불쾌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이젠 추하고 혐오스럽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쇼킹한 것 모두가 미의 범주에 들어 와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은 고사하고 상대적이다 못해 예술가 각각의 개별적인 미적 기준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 같으니 참 난감하고 어렵다.

절대적인 미의 가치란 것이 있을까?  상대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일까?  다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언제나 드는 의문이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현대미술이 전혀 이해 못할 어떤 것으로 비쳐지지는 않게 되었다.   생각보다 큰 수확이다.  그런 면에서 탈근대미학을 소개한 3권이 가장 재미있었다.

아쉬운 점은 예술사나 미학사 책 모두 서양 중심적이란 것이다.  동양의 미학은 빠져있다.  따로 찾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깊지 않다.  그래서 처음 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에게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뭐든 깊게 들어가면 어려워진다.   아직은 그 단계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므로 이 책에서 얻을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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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6-01-2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이름을 애독자에게 새기게 된 계기가 [미학]이 아닐까 하는데.. 이제는 문화 권력에 대한 비판가로 나서고 있죠. 그의 예리한 시선은 좋은데.. 책에는 님의 말처럼 서양중심에서 벗아나지 못하니.. 아마 독일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일까요? 혹시 아프리카에서 공부를 했다면.. 음....

화살나무 2006-01-2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에서 만나는 진중권은 글쎄요...그는 분명 재기발랄하고 날카롭지만 깊이면에서 뭔가 부족하단 인상을 떨칠수가 없네요. ^^
 
생명의 느낌 -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
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김재희 옮김 / 양문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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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바라 메클린톡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이름의 바바라 메클린톡은 평생을 옥수수와 함께 하며 유전학을 연구한 유전학자이다.

40대에 옥수수의 세포유전학에서 유전자의 자리바꿈 (특정 기능을 발휘하는 유전자의 한 단위가 통째로 자리를 옮기는 것) 이라는 현상을 발견하지만 그때까지 유전자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늘 제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믿고 있었던 과학계에서 철저하게 무시되다가 40년이 흐른 뒤에야 정설로 인정받게 된다.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유전자의 자리바꿈 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40년간 멕클린톡의 주장은 과학계의 이단으로 취급받았고 말도 안 되는 이론으로 폄하되어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거기엔 멕클린톡의 사고방식과 연구방식이 기존의 과학계에서 통용되는 방식과 너무나 달라 인정을 받지 못한 부분과 특정 개념에 생각이 묶여 있어 새로운 이론이나 개념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과학계의 현실, 여성과학자라는 선입견등 여러 가지 요인인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작가

작가는  바바라 멕클린톡이 전혀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이 책을 기획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바로 그 점이 작가가 멕클린톡의 전기를 쓰게 만든 까닭이다. 작가는 훌륭한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의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는 멕클린톡의 삶에 주목했고 그녀가 과학을 이해한 방식에 주목했다. 그녀가 과학을 이해한 방식이야 말로 그녀를 과학의 이단아로 살아가게 한 이유이자 주류 집단과의 소통을 어렵게 한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평생 그녀의 방식을 고수했고 그녀의 방식이 옳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스스로 옳다고 믿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작가는 그러한 메클린톡의 일생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보여주고 있다. 인물을 채색하거나 여성과학자임을 특별히 부각시키지도 않으면서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방식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연구하는 대상과 감정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절대적인 객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이쉬타인을 비롯한 많은 위대한 과학자가 밝혔듯이 과학에서도 정말 핵심을 관통하는 지식은 대상과의 분리가 아니라 일체를 통해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관과 통찰에 의해 답이 얻어지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녀가 실험대상으로 삼은 옥수수는 실험대상이 아니라 친구이자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지극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나의 일부가 되지요. 그러면 나 자신은 잊어버려요. 그래요. 그게 중요해요. 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 말이에요. 거기에는 더 이상 내가 없어요."

그녀는 옥수수를 지극한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며 그녀가 연구하는 생명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교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상이 나에게 와서 스스로 얘기 하도록 마음을 열고 듣는 것.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느낌을 개발하고 생명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깨우치는 것, 생명과의 교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멕클린톡의 이러한 연구방식은 연구를 실험과 논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과 통찰,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까지 동원하는 것이었다. 현대적이고 실증적인 실험을 하면서도 전체를 한꺼번에 파악하는 통찰력에 의존하는 이러한 방식이 사실과 객관성을 중요시하는 과학에서 받아들여지기는 힘든 것이었다.

그녀와 기존의 과학계 사이에 소통 불능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러한 그녀의 방식 때문이었다.   멕클린톡은 자신의 방식을 버리지 않았고 주류 과학계의 남성과학자들은 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멕클린톡의 이야기를 들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녀가 발견한 유전자 자리바꿈이라는 현상은 그것이 분명 옳은 것이었고 실험을 통해 증명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돌아보기

어떤 분야든 새로운 시야를 개척해 가는 탐구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도전은 자기 스스로의 선입견이 가로막는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작업이다.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는 스스로의 선입견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눈앞에 벌어진 실제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 본문 p304 )

이런 일이 멕클린톡이 유전자 자리바꿈 현상을 세상에 발표할 때 일어났다. 그  당시 과학계는 스스로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선입견은 결국 그들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이론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깨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멕클린톡의 이론이 정설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녀의 이론은 받아들여졌지만 그녀의 과학 하는 방식은 여전히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나는 모든 과학자가 멕클린톡처럼 자신의 직감이나 통찰력에 근거해서  연구할 수도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통찰과 직감을 통해 대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려면 멕클린톡처럼 대상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경외감이 있어야 가능하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멕클린톡이 보여주는 삶은 학문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자연을 혹은 대상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연구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겠고 일반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는 일이나 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멕클린톡은 자신이 평생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지켜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자신의 일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생명체와의 교감을 통한 생명의 느낌이 방향키가 되 주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평생 나의 길을 인도해줄 방향키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에 대해서도, 이 세상 도처에 깔려있는 수많은 벽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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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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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에서 시간여행은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다. 시공간을 뛰어 넘어 과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일상을 뛰어넘는 재미를 가져다주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시간여행이 가까운 미래는 물론 먼 미래에도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음직한 시간여행에 대한 환상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탄생되고 있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다들 어느 시기로 가고 싶은지..

205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둠즈데이 북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2054년 크리스마스 시즌, 위험등급 10인 중세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에 반대하는 지도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역사학도 카브린은 중세로 시간여행을 떠나는데 기술자의 실수로 시간설정이 잘못되어 페스트가 창궐하는 시대 한 가운데로 떨어지고 만다.

카브린이 중세로 떠나자마자 2054년의 현재에서는 원인모를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카브린의 시간여행을 담당했던 기술자를 시작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병으로 쓰러진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현재의 뉴욕과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한 중세의 한 마을을 중심으로 병과 싸우는 사람들의 치열한 모습이 번갈아 그려진다. 그 와중에 카브린을 현재로 불러오려는 던위디 교수의 시도는 매번 소통불능으로 좌절을 겪는다.

이 책은 3분의 2까지는 지루하게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가서 숨가쁘게 진행된다.

절반 이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여행이 가능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연락은 여전히 전화로 하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소통의 답답함에 있는 것 같다.  핸드폰 하나면 간단하게 연락이 될 상황인데 전화로만 연락을 주고받는 상항이 되다보니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던위디는 끊임없이 카브린을 다시 현재로 데리고 올 기술자들을 찾아 헤매지만 누구 한명과도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책은 1992년에 쓰였다고 하는데 그 땐 핸드폰이 발명되기 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소통의 답답함과 고립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작가의 의도된 설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성공이다.  현재의 뉴욕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외부와 고립되어 있고 중세엔 카브린 혼자 고립되어 있다. 고립된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작가는 시간여행을 과거나 미래를 제한 없이 오 갈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이 아닌 엄격한 상황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시공간의 탄력성으로 시간여행자는 절대로 인과관계를 뒤집을 수 없으며 시간편차로 인해 원하는 시공간에 정확히 도착할 수도 없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중세엔 카브린 혼자다.

이 책의 재미는 SF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여행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군상의 다양성에 있다. 중세나 현재나 죽음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투쟁과 좌절, 죽음을 이겨내는 인간의 사랑과 희망엔 변함이 없다. 사람들의 삶은 시대가 바뀌어도 되풀이 된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사람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작가는 단지 과거와 현재를 병치시키기 위한 하나의 설정으로 시간여행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책의 마지막 3분의 1에서 질병과 죽음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무력하기만 한 인간이 어떻게 희망을 발견하고 어떻게 위대해 질 수 있는지 볼 수 있다면 앞부분의 지루함을 견뎌낸 보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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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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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담백하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간결하다. 마치 미련 없이 칼로 툭 쳐낸 느낌이다.

그런데 칼로 툭 쳐낸 자리에 슬픔이 배어 나온다. 그 슬픔은  가슴 밑바닥을 자극해 감정이 복받쳐 오르게 하는 슬픔이 아니라 꾸역꾸역 울음을 속으로 삼키게 하는 그런 슬픔이다. 헤프지 않으면서 더 아프다.

나는 김훈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칼의 노래에서도 현의 노래에서도 그랬고 이 책 개 에서도 그랬다. 칼의 노래에선 대나무 이파리에 베인 듯이 아프더니만 개를 읽을 때에는 가랑비에 젖은 몸이 오실오실 떨리 듯 아팠다. 나는 아랑곳 않고 개 한마리가 내 안을 펄펄 뛰어 다닌다.

책을 펴면 보리라는 수컷 진돗개 한마리가 펄쩍 펄쩍 뛰어다니고 컹컹거리며 짖어대기 시작한다.

주인공 보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온갖 구석구석을 몸뚱이로 부딪치고 뒹굴면서 성장해 나가는 보리의 삶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신기하고 낯설고 두렵지만 온 몸으로 부딪쳐오는 생의 기쁨이다.

그러나 삶이 언제까지나 빛나는 생의 기쁨으로만 충만할 수는 없다. 보리는 어미가 다리가 부러져 나온 맏형을 삼키는 모습에서 어미의 슬픔을 보고 마을이 수몰지역으로 정해져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이 가진 슬픔을 본다.

주인을 따라간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사나운 악돌이를 통해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하는 폭력을 보고 그 안으로 건너가고 싶은 암컷 흰순이가 악돌이의 새끼를 낳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며 힘과 죽음 앞에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바닷가에 나간 주인이 죽어 남은 가족들이 도시로 가게 되자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팔려갈 운명에 처한 보리. 그러나 보리는 개다. 보리가 어디로 가든 그 곳에는 보리가 온 몸으로 익히고 싸워야 할 세상이 있다. 그 곳엔 여전히 악돌이 같은 사나운 개도 있을 것이고 흰순이 같이 새끼를 낳는 암놈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보리는 여전히 온 몸으로 뒹굴고 엎어지고 세상의 온갖 냄새를 맡으며 뛰어다니고 컹컹대며 짖어댈 것이다.

왜 개를 주인공으로 했을까?  그건 아마도 개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물이기 때문일거다. 보리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은 훨씬 깊고 풍부하다.

주인공 보리가 주인 할머니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절여진 냄새에서 사람 몸속에 스며 있는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슬픔의 흔적을 알게 될 때, 몰래 올라 탄 배에서 주인아저씨가 나눠준 미역국에서 희미해서 슬픈 맛을 느낄 때, 선착장에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라면 냄새에서 아름다운 사람냄새를 맡을 때, 보리가 냄새로 맛으로 이해한 인간의 모습은 너무도 따뜻하고 서글픈 것이어서 난 보리의 코와 입을 통해 한걸음 더 깊게 인간에게 다가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바라보고 느끼는 세상과 인간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가깝고 친밀할 것인가. 결국 사람이 아니라 개를 주인공으로 하여 삶을 이야기하자는 데에는 인간보다 훨씬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진 개라는 존재를 통해서 삶의 밑바닥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책은 보리로 대표되는 세상의 모든 수컷들이 겪어야 하는 삶의 비애를 닮고 있다고 하나 어찌 그것이 수컷들만의 비애일 수 있으랴. 다만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뛰어다니며 세상을 향해 짖어대는 보리의 모습에서 작가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을 엿들을 뿐이다.

 김세현씨가 그린 그림은 하나같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워서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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