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의 글은 담백하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간결하다. 마치 미련 없이 칼로 툭 쳐낸 느낌이다.

그런데 칼로 툭 쳐낸 자리에 슬픔이 배어 나온다. 그 슬픔은  가슴 밑바닥을 자극해 감정이 복받쳐 오르게 하는 슬픔이 아니라 꾸역꾸역 울음을 속으로 삼키게 하는 그런 슬픔이다. 헤프지 않으면서 더 아프다.

나는 김훈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칼의 노래에서도 현의 노래에서도 그랬고 이 책 개 에서도 그랬다. 칼의 노래에선 대나무 이파리에 베인 듯이 아프더니만 개를 읽을 때에는 가랑비에 젖은 몸이 오실오실 떨리 듯 아팠다. 나는 아랑곳 않고 개 한마리가 내 안을 펄펄 뛰어 다닌다.

책을 펴면 보리라는 수컷 진돗개 한마리가 펄쩍 펄쩍 뛰어다니고 컹컹거리며 짖어대기 시작한다.

주인공 보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온갖 구석구석을 몸뚱이로 부딪치고 뒹굴면서 성장해 나가는 보리의 삶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신기하고 낯설고 두렵지만 온 몸으로 부딪쳐오는 생의 기쁨이다.

그러나 삶이 언제까지나 빛나는 생의 기쁨으로만 충만할 수는 없다. 보리는 어미가 다리가 부러져 나온 맏형을 삼키는 모습에서 어미의 슬픔을 보고 마을이 수몰지역으로 정해져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이 가진 슬픔을 본다.

주인을 따라간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사나운 악돌이를 통해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하는 폭력을 보고 그 안으로 건너가고 싶은 암컷 흰순이가 악돌이의 새끼를 낳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며 힘과 죽음 앞에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바닷가에 나간 주인이 죽어 남은 가족들이 도시로 가게 되자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팔려갈 운명에 처한 보리. 그러나 보리는 개다. 보리가 어디로 가든 그 곳에는 보리가 온 몸으로 익히고 싸워야 할 세상이 있다. 그 곳엔 여전히 악돌이 같은 사나운 개도 있을 것이고 흰순이 같이 새끼를 낳는 암놈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보리는 여전히 온 몸으로 뒹굴고 엎어지고 세상의 온갖 냄새를 맡으며 뛰어다니고 컹컹대며 짖어댈 것이다.

왜 개를 주인공으로 했을까?  그건 아마도 개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물이기 때문일거다. 보리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은 훨씬 깊고 풍부하다.

주인공 보리가 주인 할머니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절여진 냄새에서 사람 몸속에 스며 있는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슬픔의 흔적을 알게 될 때, 몰래 올라 탄 배에서 주인아저씨가 나눠준 미역국에서 희미해서 슬픈 맛을 느낄 때, 선착장에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라면 냄새에서 아름다운 사람냄새를 맡을 때, 보리가 냄새로 맛으로 이해한 인간의 모습은 너무도 따뜻하고 서글픈 것이어서 난 보리의 코와 입을 통해 한걸음 더 깊게 인간에게 다가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바라보고 느끼는 세상과 인간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가깝고 친밀할 것인가. 결국 사람이 아니라 개를 주인공으로 하여 삶을 이야기하자는 데에는 인간보다 훨씬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진 개라는 존재를 통해서 삶의 밑바닥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책은 보리로 대표되는 세상의 모든 수컷들이 겪어야 하는 삶의 비애를 닮고 있다고 하나 어찌 그것이 수컷들만의 비애일 수 있으랴. 다만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뛰어다니며 세상을 향해 짖어대는 보리의 모습에서 작가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을 엿들을 뿐이다.

 김세현씨가 그린 그림은 하나같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워서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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