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른한 일상의 권태에 빠져있는 25세의 여자. 현재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없고 좋아하는 작가라고는 한명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작가는 죽었다. 그가 남긴 책은 고작 서른한 권.

여자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잠시 아껴두고 다른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간다. 그리고 빌려 온 책에서 마치 그녀를 겨냥하고 있는 듯한 낙서를 하나 발견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밑줄 긋는 남자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쪽에는 다른 책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녀는 그가 권해준 다른 책을 찾아 읽으며 책에 밑줄 쳐진 문장을 통해 밑줄 긋는 남자와의 기이한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발상이 신선했다. 적절한 문장을 찾아낸 작가의 독서량과 센스도 감탄할만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심심하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너무 가볍다. 작가가 20대의 아름다운 여성이고 주인공 역시 25세의 여자라서 그런지 이 소설은 귀엽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어디 하나가 빠진 것처럼 삶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여자는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밑줄 긋는 남자와 만난다. 여자는 그가 책 속의 문장을 통해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십대의 남자친구 없는 여성 중에 멋진 남자와의 사랑을 꿈 꿔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직 진정한 자신의 상대를 찾지 못한 여자는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너무 매력적이고 멋있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 역시 실체가 없다. 그녀의 사랑은 공허하고 대답이 없는 사랑이 되고 만다.

여자는 밑줄 긋는 남자를 찾고 싶어한다. 만약 소설이 여자가 밑줄 긋는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 남자가 그녀의 상상대로 멋진 남자였다면 이 책은 정말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다행이 이 책은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밑줄 긋는 남자는 끝까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조금 허탈하면서도 현실성 있는 결말로 독자를 이끈다. 상상속의 차가운 멋진 남자가 아닌 현실의 따뜻한 남자를 등장시키면서.

"누군가  잠결에 나에게 안겨 오거나 내 몸에 부딪혀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그날 밤  밑줄 긋는 남자를 찾는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이 결말 역시 맥이 빠지긴 마찬가지다. 일상의 권태 속에 빠져있던 여자가 약간의 정신적 방황을 한 다음 그래도 역시 일상이 최고지 하며 돌아와 버린다. 그런데 그 정신적 방황이란 것이 너무 가벼워 치열함이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볍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매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밑줄 긋는 남자라는 소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누구든 책을 빌려 읽다가 누군가 밑줄을 그어 놓은 부분이 있으면 유심히 보게 마련이다. 궁금증. 사람의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아닌 사람 빼고)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밑줄을 많이 긋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면 전과는 다른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것이 내 사고의 변화, 내면의 변화, 현재의 감정 상태나 고민거리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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