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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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이 있어 내게 불멸의 삶을 주신다 하면 나는 거절하리.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해도 건강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라 해도 나는 마다 하리.
삶이란 그 궁극에 죽음이 있어 의미가 있는 법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삶이 무한히 늘어난다면 그 의미가 너무 엷어져 종국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인간의 삶, 아무도 그 끝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그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에 인생의 가치가 삶의 의미가 온갖 소중한 것들의 존재가 놓여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불멸을 꿈꾼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늘 불멸을 꿈꾸고 얘기해 왔다. 전설로 신화로 종교로 ...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식을 낳아 대를 잇고 싶어 하는 것이나 글이나 예술 작품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나, 뭔가 업적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나 명예나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나 형태는 다르지만 그 속엔 불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숨어 있다. 누구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불멸을 얻고 싶은 것이다. 나라고 예외일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두개골의 서는 불멸의 삶을 찾아 애리조나의 사막에 있는 사원을 향해 떠나는 네 명의 젊은 대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개골의 서란 오랜 고문서를 발견해서 의미를 해독하여 친구들을 여행으로 이끈 사람은 일라이, 그는 학자 타입의 유대인이다. 단순히 재미있는 추억이나 만들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티모시, 그는 전형적인 백인 상류층을 상징한다. 시인을 꿈꾸는 네드는 게이이자 네 명중에 가장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똑똑하고 모범생인 올리버는 시골출신의 성공한 인물을 대변한다.
성격도 자란 환경도 생각도 전혀 다른 이 네명이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단 이 여행에는 함정이 있다. 두개골의 서에 쓰여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네 명중 두 명만 불멸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 즉 네 명중 한명은 다른 이의 불멸을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하며 다른 한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 이것이 불멸의 삶을 얻기 위한 조건이다.

책의 주인공은 네 명. 네 사람은 번갈아 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 이 책의 매력이 있다.
네 명의 서로 다른 케릭터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보여준다.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들, 동행하는 다른 친구들에 대한 생각들, 영생에 대한 기대와 의심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들.
삶과 죽음에 대한 네 명의 각기 다른 태도는 공감을 일으키기도 하고 거부감을 일이키기도 하지만 각자 납득할만한 자기 이유를 가지고 있음으로서 모두 마음 쓰이게 만든다. 그러다보면 문득  이들 중에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과연 두개골의 서에 쓰여 있는 이야기는 진실일까?  아니 이 책은 과연 불멸을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허망한 꿈을 꾸는 젊흔이들의 이야기인가?  이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네 사람은 결국 두개골의 사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불멸의 삶을 얻기 위한 몇 가지 시험을 거치게 된다.
이 책의 클라이맥스는 이 시험 가운데 하나가 진행되면서 비롯된다. 마지막 시험은  생애에서 가장추악하고 수치스러웠던 사건 하나를 골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 바로 자기 정화의 시험이다.
추첨에 의해 티모시는 올리버에게 올리버는 일라이에게 일라이는 네드에게 네드는 티모시에게 고백하게 되고 들은 고백은 절대 다른 이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는다.
이 과정에서 네 사람은 고백 상대에게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가장 부끄럽고 추한 사건들을 고백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네 사람의 비밀이 드러난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론 대학 때 친구들과의 비슷한 경험을 생각나게 해서 적지 않은 내적 파장을 느껴야 했던 대목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네 명 중 두 명은 불멸의 삶을 얻었는가?  정말 두개골의 서에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고 누군가는 스스로 죽는가?  하는 것은 책을 읽어 보면 알 일이다.
때론 삶이 조금만 더 허락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목숨들이 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불멸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조금이라도 더 살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일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건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 단절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영원히 윤회를 거듭하며 살고 지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들의 방식인지 그것도 모른다. 어쩌면 죽음은 완벽한 끝일수도 새로운 시작일수도 있다.
그것을 어찌 알랴. 다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때 이 세상을 떠나면 좋겠다 생각할 뿐이다.

그리하여 두개골의 서를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불멸의 삶이 아니라 반대로 죽음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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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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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려는데 문득 슬픈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을 덮고 싶지 않다. 아직 루와 헤어지기 싫다.
난 좀 더 루의 얘기를 듣고 싶다.  루처럼 생각하고 루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내가 루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난 소위 말하는 정상인이고 그는 자폐인이니까.
그런데도 루가 바라보는 세상이 내가 바라보는 세상보다 더 따뜻하고 제대로 된 세상처럼 보인다.
일주일동안 나는 루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정말 루가 좋아졌다.
어둠과 빛, 빠름과 느림, 많음과 적음, 정상과 비정상, 정상인과 장애인, 이 세상을 나누고 있는 수많은 것들.
어둠과 빛은 어느 한가지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고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다.
그 둘은 존재의 양 측면이다. 단지 다른 한쪽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우리가 구분하는 것도 사실은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때로 그것은 양을 나타내기고 하고 통계를 나타내기도 하며 수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그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상인의 입장에서 비정상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뭔가 우리와 다른 결함이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장애를 혹은 비정상이란 어떤 범주를 또 다른 정체성으로 또 다른 존재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린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인들이 항상 정상인 것은 아니다.
내가 언제나 정상인 채로 살아갈지 난 장담하지 못한다.
우린 모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분명하지 않은 두 스펙트럼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들이다.

루는 지금보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 사회에 태어난 자폐인이다. 
루는 자폐인 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폐인 하고는 차이가 있다.
어떤 면에서 루는 정상에 가깝게 설정된 자폐인 이다. 그러므로 설정을 그렇게 했을 뿐 루를 보고
진짜 우리가 알고 있는자폐인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루는 많은 부분 자폐인의 심리와 내면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20년 가까이 자폐아들을 키워 온 작가의 경험이 루에게 현실적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폐인 루의 시각에 비친 정상인들의 삶은 루가 보기에 이해하기 힘들고 의문투성이다.
우리는 루의 시각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루의 의문에 답하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정상이라는 것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정상의 범주에 넣지 않은 것도 충분히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루의 생각과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다름은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차이로 인식된다.
다름이 차별이 아니라 차이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몰이해는 이해의 범주로 들어선다. 이제 차이는개성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끝까지 루가 자폐인 으로 남기를 바랐다.
난 루가 가진 정체성이 좋았고 그 자체의 루가 맘에 들었다. 그러나 루는 정상인이 되는 삶을 선택한다.
그건 루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무수한 의문을 던진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그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프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루의 선택이 가슴이 아프다.
루가 정상인이 됨으로써 자폐인 루와 이별하게 된 것이 슬프다.

책은 책이다. 가끔은 그렇게 생각한다.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며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 많은 것을 사색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에 담고 있는 메시지에 내 마음과 사고가 움직일 때 그렇다.
그런데 가끔 책속의 인물에 빠질 때가 있다. 책 속의 인물이 생명을 가지고 내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책속의 인물과 내 삶이 공명되어 나도 그와 더불어 한 세상을 산 것 같게도 여겨지고 내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척 건조하고 단순한 자폐인 루의 어투, 빠른 이야기 전개도 없고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루는 내 안에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오래도록 마음에 여운이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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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 양장본
마크 해던 지음, 유은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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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날  한 마리의 개가 삼지창에 배를 관통당한 채 죽는다.
올해로 15년 3개월을 산, 세계의 모든 나라와 그 나라의 수도를 알고 있고 7507까지의 모든 소수를 기억하고 있는 자폐아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누가 개를 죽였는지 알고 싶다. 그는 개를 죽인 범인을 찾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추리소설로 쓰기로 마음 먹는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따라서 이 책은 크리스토퍼의 이야기이자 그가 쓴 책 속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종의 액자소설인 셈이다.
책 제목이 참 근사하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라니. 게다가 그 사건을 파헤치려는 주인공은 자폐아다.
책을 다 읽기 전엔 당연이 이 책이 주인공 크리스토퍼가 자폐아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을 이용해서 범인을 찾아가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이려니 했다. 정상인이라면 놓치기 쉬운 어떤 단서들을 찾아 범인을  잡는 자폐인 소년의 이야기.
차라리 그런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뻔 했다. 그랬다면 재미있게 읽고 책을 덮었을 테니 말이다.
불행히도 책의 내용은 내가 예상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지만 책의 내용을 자세히 얘기하진 말기로 하자.

크리스토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만 얘기한다.
크리스토퍼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객관적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일어난 상황을 머리로 이해한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크리스터퍼에게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는 아빠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날 밤, 그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스크레블 게임을 한다. 크리스토퍼가 이겼다.
이게 문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크리스토퍼의 시선을 거치면 객관화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들이 감정을 이입시켜 바라볼 때보다 더 씁쓸하고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어른들의 세계이다.
아빠와 엄마, 이웃집 스미스부인과 그녀의 남편, 개의 죽음을 조사하러 나온 경찰들, 이웃집 할머니, 그 밖의 어른들.
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어른들의 세상은 복잡하고 의문투성이며 무엇보다 진실하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하지만 크리스토퍼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렵다. 여기에 또 다른 아픔이 있다.
나는 한편으론 어른들의 세상이 이해가 되고 다른 한편으론 크리스토퍼의 이해하지 못함 또한 이해가 된다.
그래서 자신을 속인 아버지를 믿지 못해 엄마를 찾아가는 크리스토퍼가 이해가 가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도망간 엄마의 입장 또한 이해가 간다.
내겐 모든 사람들의 입장이 이해가 되는데 크리스토퍼에겐 그렇지 못하다. 그가 자폐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어른들의 세상이 원래 그렇게 복잡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주인공을 자폐인으로 설정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느낌은 소통의 문제다.
마음의 이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받아들이고 그 사실의 뒤편에 숨겨진 의도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주인공, 그 주인공을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일종의 벽같은 것.
자폐아동을 데리고 있는 많은 부모들이 매 순간 겪어야 하는 소통의 문제. 주고받지 못해서 느끼게 되는 답답함과 불편함과 아픔과 슬픔의 문제들.
그러나 분명 세상의 소통의 방식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다른 방식, 다른 통로를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기는 것일게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 우리 역시 조금씩은 자폐인이다.
우리 중 살면서 소통의 불편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마음을 주고받는 방식이 여러 가지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어느 순간 자폐인이란 말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어린 크리스토퍼가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내면적으로 성장해가는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폐인의 심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은 <어둠의 속도>가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다면 이 책은 내게  나를 포함한 어른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새삼 소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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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전쟁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1
조 홀드먼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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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와 상대성이론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시간과 공간은 여전히 절대적인 시공간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 시간은 여전히 60분이고, 하루는 모두에게 똑같이 24시간이며 일년은 12개월이다. 끈이론이 나와 수십 차원으로 우주를 설명해도 우리가 느끼는 공간은 여전히 3차원에 머물러 있다. 지식으로서의 사실과 감각으로서의 사실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절대적인 시공간쯤 아무렇지 않게 뛰어 넘는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상상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장르가 SF소설이 아닌가 싶다.
SF소설에서라면 인간은 지구라는 별을 벗어나 그것이 달이 되었던 화성이 되었던 아니면 알파-375행성이 되었던 지구와는 다른 시간과 다른 중력이 지배하는 행성에서 살아갈 수도 있고 인간과 다르게 진화한 우주의 다른 생명체를 만날 수도 있고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얘기는 어느 정도 그럴싸한 과학의 근거가 뒷받침 되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SF는 판타지가 되어 버릴 테니까.
인간의 상상력과 과학의 만남, 사실 여기에 SF소설의 묘미가 있는 것이지만 SF소설의 범주가 판타지와 신화 문학의 장르까지 확장되고 있는 요즘 추세로 보면 그 묘미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인지 희석화되고 있는 것인지 조금 헷갈리기는 한다.

영원한 전쟁은 오랜만에 전통 SF소설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 책이다. 그 출발시점이 2000년대 초인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20세기 말, 블랙홀의 일종인 콜렙서를 이용해 행성간 초광속 항법을 발견한 인류는 다른 항성에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는 과정에서 토오란이라고 부르게 되는 외계 생명체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인류는 토오란을 물리치기 위해 IQ150이상의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남녀를 강제 징집해 전투병으로 훈련을 시킨 뒤 토오란의 기지로 보낸다.
주인공 만델라는 끔찍한 지옥훈련을 통과한 후 토오란의 기지로 보내진 다음 인위적으로 이식된 증오인자에 의해 미친듯이 토오란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지구로 귀환한다. 그러나 초광속 비행의 시간 팽창 효과 탓에 만델라가 우주에서 보낸 시간은 10개월이지만  지구시간으론 20년이 흐른 후의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 어머니는 잠깐 사이에 늙어 있고 20년간 지구는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해있다.
만델라는 그녀의 애인과 함께 변화된 지구에 적응을 못하고 다시 군으로 복귀하게 되고 두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전쟁과 시간 팽창으로 지구의 어느 시점에도 머무를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만 남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지는데...

베트남 참전 경험이 있는 작가 조 홀드만은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몇 편의 소설을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영원한 전쟁이다.
그래서 책 속에 등장하는 군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참전경험이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베트남 전쟁은 그 배경이 우주로, 그 대상이 외계종족 - 물론 여기서 외계종족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토오란에게는 지구인이 외계 종족이 되니까 - 으로 치환되고 베트남 참전했던 미군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겪게 되는 문화적인 충격과 이질감, 전쟁 후유증에 따른 사회부적응과 소외감은 시간팽창 효과에 따른 이질감과 소외감으로 이해된다고 했을 때 이 소설은 보기에 따라 베트남 전쟁얘기를 그대로 우주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 배경이 우주가 되고 지구라는 시공간을 뛰어 넘은 순간, 인간이 겪게 되는 경험은 그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치열한 전쟁묘사가 아닌 시간 팽창 효과로 인해 주인공들이 겪는 심적 정신적 가치의 변화였다.
주인공들이 우주에서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지구는 몇 백 년의 시간이 흘러간다.
주관적인 시간은 동일하지만 다른 공간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상대적인 시공간이 존재하는 우주로 인간이  삶의 터전을 확장하는 것은 실제로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달이나 화성과 같이 지구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별이라고 해도 지구와 그 환경이 첨예하게 다르다.
그런 곳으로 인간의 삶이 확장된다면 그 때의 시공간의 개념은 어떻게 정립되고 변화될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될 미래의 인간들은 어떻게 서로 다른 생각과 감각과 가치들을 통합하고 교류하고 소통할까?

그 답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SF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상상들을 하는 것은 참 재미있다. 그런 상상 속에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인간이 나타나기도 하고 지금 내가 진리라고 혹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이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 책에서 지구를 수백 년이 흐르면서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생명은 인간의 몸이 아닌 인위적인 자궁에 의해 태어나고 화폐는 통일되고 종족은 서로 섞이어 하나의 종족으로 되어 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상상력도 제멋대로  이런 저런 가지를 뻗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지난 수천 년의 인류사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인간이라서 변하지 않는 것, 아마 인간인 이상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믿을 만한 한두가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을까? 그런 절대 진리가 절대 가치가 있을까?   그냥 궁금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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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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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조상이 배부르게 먹고 무심히 하늘을 바라 본 순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 온 신화를 보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려고 했던 인류의 긴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저 드넓은 우주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있을까?  하는 등의 의문은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온 질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찾아오고 있다.

이제는 유치원생이라도 지구는 둥글고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런 생각이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은 극히 최근이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태양과 다른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어 왔다.
이 믿음은 너무나 확고하고 당연한 것이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이제 이러한 믿음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신의 이름으로 협박해도 이제 이런 믿음은 통하지 않는다.
우주에 대한 가장 큰 사고의 변화는 바로 이런 믿음이 깨진 순간부터가 아니었을까?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우주의 원리를 탐구해 온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우리는 과거 어떤 인류도 가지지 못한 우주에  대한 넓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기존의 것이 끊임없이 부정되고 더 큰 범주 안으로 통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우주에 대한 시각은 근 200년 사이에 그 전 인류의 전 시대를 뛰어 넘는 변화를 겪었다.
200년 전만 해도 우주는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공간과 항상 균일하게 흐르는 절대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들고 나오면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공간은 물질이 가지는 질량에 의해 왜곡되고(휘어지고)  시간 역시 왜곡된다.시간과 공간이 왜곡된다는 것은 우리의 지각과 감각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슬슬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원자 이하의 미시적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더 복잡하다.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미시적 세계에서는 하나의 물질이 동시에 여러 장소에 출현할 수도 있으며 여기에 있는 동시에  저기에 있을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이건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거기에 이젠 초끈이론까지 등장했다. 초끈이론은 가장 최근의 물리학의 이론으로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일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대두되고 있는 이론이다.
초끈이론에서는 물질의 궁극적 단위를 입자가 아닌 상상할 수도 없이 작은 끈의 고리로 보고 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끈이론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물질과 힘은 단 하나의 근원, 즉 끈의 진동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물질들이 실은 동일한 존재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론 초끈이론이 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초끈이론에는 4차원을 넘어서 11차원까지 등장하고 찢어지고 구멍난 공간까지 등장하지만 우리의 지각으론 전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철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신을 설명해 놓은 말 같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작아도 끈이란 길이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러자면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다. 즉 아무리 최첨단의 이론이라 하더라도 일단 무엇이 있고 난 다음의 이야기일 뿐 無에서부터의 출발은 아니란 말이다.
이건 기독교가 신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세워져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부터는 종교와 과학의 영역이 겹쳐진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단지 물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우주에 대한 관심은 결국 인간 존재의 출발과 근원에 대한 물음이자 나 잔신에 대한 물음이다.
인류의 기원을 알고 싶은 욕망, 그건 우주라고 하는 무한한 공간속에 지극히 작은 존재에 불과할 뿐인 인간이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과학과 종교는 동일한 질문에 대한 답을 다른 방식으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엘리건트 유니버스는 최근 물리학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초끈이론을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라고 하지만 일반인이 이 책의 내용을 10분의 1이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두 번째 읽었지만 나 역시 이 책의 내용을 극히 일부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어려운 책을 뭐하러 읽을까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사색의 영역은 넓다.
그것이 철학적인 사색이 될 수도 종교적인 사색이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사색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사색은 결국 나 자신의 내면을 풍요롭게 만들고 내 사고의 폭을 넓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만큼 내 삶이 넓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이 책을 읽은 까닭이다. 물론 재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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