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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려는데 문득 슬픈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을 덮고 싶지 않다. 아직 루와 헤어지기 싫다.
난 좀 더 루의 얘기를 듣고 싶다. 루처럼 생각하고 루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내가 루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난 소위 말하는 정상인이고 그는 자폐인이니까.
그런데도 루가 바라보는 세상이 내가 바라보는 세상보다 더 따뜻하고 제대로 된 세상처럼 보인다.
일주일동안 나는 루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정말 루가 좋아졌다.
어둠과 빛, 빠름과 느림, 많음과 적음, 정상과 비정상, 정상인과 장애인, 이 세상을 나누고 있는 수많은 것들.
어둠과 빛은 어느 한가지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고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다.
그 둘은 존재의 양 측면이다. 단지 다른 한쪽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우리가 구분하는 것도 사실은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때로 그것은 양을 나타내기고 하고 통계를 나타내기도 하며 수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그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상인의 입장에서 비정상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뭔가 우리와 다른 결함이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장애를 혹은 비정상이란 어떤 범주를 또 다른 정체성으로 또 다른 존재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린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인들이 항상 정상인 것은 아니다.
내가 언제나 정상인 채로 살아갈지 난 장담하지 못한다.
우린 모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분명하지 않은 두 스펙트럼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들이다.
루는 지금보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 사회에 태어난 자폐인이다.
루는 자폐인 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폐인 하고는 차이가 있다.
어떤 면에서 루는 정상에 가깝게 설정된 자폐인 이다. 그러므로 설정을 그렇게 했을 뿐 루를 보고
진짜 우리가 알고 있는자폐인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루는 많은 부분 자폐인의 심리와 내면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20년 가까이 자폐아들을 키워 온 작가의 경험이 루에게 현실적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폐인 루의 시각에 비친 정상인들의 삶은 루가 보기에 이해하기 힘들고 의문투성이다.
우리는 루의 시각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루의 의문에 답하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정상이라는 것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정상의 범주에 넣지 않은 것도 충분히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루의 생각과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다름은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차이로 인식된다.
다름이 차별이 아니라 차이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몰이해는 이해의 범주로 들어선다. 이제 차이는개성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끝까지 루가 자폐인 으로 남기를 바랐다.
난 루가 가진 정체성이 좋았고 그 자체의 루가 맘에 들었다. 그러나 루는 정상인이 되는 삶을 선택한다.
그건 루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무수한 의문을 던진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그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프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루의 선택이 가슴이 아프다.
루가 정상인이 됨으로써 자폐인 루와 이별하게 된 것이 슬프다.
책은 책이다. 가끔은 그렇게 생각한다.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며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 많은 것을 사색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에 담고 있는 메시지에 내 마음과 사고가 움직일 때 그렇다.
그런데 가끔 책속의 인물에 빠질 때가 있다. 책 속의 인물이 생명을 가지고 내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책속의 인물과 내 삶이 공명되어 나도 그와 더불어 한 세상을 산 것 같게도 여겨지고 내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척 건조하고 단순한 자폐인 루의 어투, 빠른 이야기 전개도 없고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루는 내 안에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오래도록 마음에 여운이 남겠다.